오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주는 어린이주일, 다음주는 어버이 주일, 그 다음은 스승의 주일 그렇게 정하고 있는데 그런 주일이 있습니까? 주일은 주의 날이라는 개념에서 주일이라면 그러한 날이 자리잡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하면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위한 예수님이나 되는 듯이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월만 가정의 달이 아니라, 일년 열두달 늘 가정의 달이지요? 왜냐구요?
자기 가정이 제일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하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교회나와서 기도하는 제일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자기 행복, 자기 가정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일년 열두달 늘 가정의 달인데 무얼그리 또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어제가 어린이 날이지요?
그런데 어린이 날이 아닌 날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사가 자기 자녀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또다시 어린이 날이라고 선물을 사주고 놀이를 나가고 맛있는 것을 사주는 것입니까?
늘 자기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서 사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평소에 자식에게 공부 잘 하라고 늘 그렇게 말하다 보니 조금 양심의 가책이 됩니까? 어린이날이 처음 제정될때는 어린이들이 워낙 대접을 못받아서 그랬지만 지금 어린이들이야 과잉보호입니다. 먹을 것이 넘쳐서 교회에서 간식을 주면 봉지채 버려두는 것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입을 것이 넘칩니다. 어린이가 우상이 되어 있는데 무슨 어린이 날입니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계실때에 예수님의 어머니과 그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모친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면 부모와 전토와 가족과 자기의 모든 소유까지 버리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따라 올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달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가지고 또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자는 믿지 않는자 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따른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를 알고 따르든지 말든지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같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것 처럼 살게 하도록 자기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게하신 것 처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예수님같은 모습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신 것은 하나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까지 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활동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일들은 모두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삶인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백성들이 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만 몇곳을 찾아 봅니다.
6: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예수님을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
15:9-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또한 그 계명을 지킴으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 같이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입니까?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사 죽기까지하신 그 사랑입니다.
17:1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17: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자기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의 삶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삶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린도 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러한 말씀만 보아도 이미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었고, 주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바 되었으니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 마땅히 주를 위하여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의 마땅한 목표요 방향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는냐 실패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나를 부르신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냐 아니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 같이 내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의 삶인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에 또 하나의 문제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 이야기를 합니다만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세가지의 경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몇번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사람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숙달된 조교이고 우리도 그를 배워서 그렇게 행할수 있다. 욕심도 버리고 마음도 비우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수 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에 스스로 이러한 도의 경지에 이를수 있다.
2)사람이 타락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기에 조금만 외부에서 자극을 주여서 깨어나게 하면 사람이 신처럼 될 수가 있다.
3)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이렇게 된다.
몇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번은 불교식입니다. 길상사입구에 프랭카드로 "우리도 부처님 같이" 그렇게 붙여 두었습디다.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는 먼저 해탈한 모델이니 그러한 길로 우리가 고행을 하고 욕심을 끊고 집착을 끊어서 스스로 해탈에 이를수 있다는 것입니다. 2)번은 카토릭 식입니다. 신인 협력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개혁교회가 카톨릭식으로 변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3)번은 우리가 받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설교를 통하여 성경공부를 통하여 3번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반드시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가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죄를 지어도 되겠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6:1-2절에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우리가 복음을 들으면 그 크신 주님의 용서과 긍휼을 알게 되면 될 수록 더욱 자신의 죄와 비참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서 그러한 것이 싫어지고 주님이 자꾸만 좋아져야 당연한 것인데 오히려 복음을 가지고 자신의 안일과 나태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말씀좋다고 하면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느 목사의 설교를 즐겨 볼까? 인터넷에 어느 교회를 찾아 가볼까? 아 그교회 목사 말씀 좋더라 그럽니다. 마치 인기 가수를 찾아 나서는 것처럼 재미 있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처럼 그렇게 하고 살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4:30-33절입니다. 30○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31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32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33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을 들으러 오기는 오는데 어떤 자세입니까? 그 말씀을 듣고 말씀 좋다고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는 것입니다. 말씀 좋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귀에 좋은 말만 골라서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스겔선지자를 보고 음악을 잘하고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하는 목사들이 이렇게 되어 버렸고 또 청중들이 이렇게 되기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말씀을 봅니다. 요한복음 20:21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다시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케 되셨듯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승천을 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성령을 받고서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됩니까?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사판 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받은 그러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 처럼 미움을 받았습니다. 배척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죽어 갔습니다. 물론 아주 소수는 그 복음을 듣고서 기뻐하는 무리들이 생겼습니다만 그러나 그들도 역시 주님의 모습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면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어떻게 사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자시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시고 그리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의 성령으로 인하여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님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서 이 세상에서 세상의 영광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앞장서신 예수님께서 황금마차를 타고 가셨다면 우리도 황금마차를 타고 가겠지요? 예수님 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을 지고 가신 것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를 따르는 무리도 무엇을 지고 가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 인생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피한다고 피하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망 간다고 될일이 아닙니다. 피하고 도망가면 피하고 도망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망갈 생각 마시고 피할 생각 마시고 나는 죽었다고 복창하시고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시기에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까? 죽으면서 죽이는 자를 축복하는 수준까지입니다. 스데반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목표임을 아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한마디 섭섭한 소리 들었다고 밤잠을 못자는 우리이지만 죽으면서도 죽이는 자를 축복하는 그러한 사람으로 주님께서 지금도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낮추셔서, 스스로 낮아 지셔서 오신 것과 같이 오늘날 성도는 이 세상에 낮아진 자로 섬기는 자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어디까지 죽으면서 까지 죽이는 자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사람이 할수 없는 일을 통하여 주님의 일하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주님께서 영접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과 같이 오늘 주의 백성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