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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 속의 종교 혼합주의
안톤 베셀스(Anton
Wessels)
정희수(세계신학연구원 간사)譯
종교간의 대화나 종교 다원주의를 비판하고 심지어 이단시비까지 벌인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핵심적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언제나 성서였다. 그들의 논리는 성서 자체가 종교간의 대화나 다원주의를 절대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성서의 하느님만이 유일한 절대신이며, 특히 그는 질투하시는 신으로서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용서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나 종교다원주의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성서 자체의 가르침에서 볼 때 이단에 불과하다는 논리이다.
즉 타종교는 “타도”나 “배척”의 대상, 혹은 “개종”의 대상이지 결코 “대화”나 “연합전선”, 혹은 “상호변혁”의 파트너일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성서의 신앙인들은 오직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충성함으로써 “순수한 신앙”을 지켜왔기 때문에 우리들도 종교혼합주의의 위험으로부터 순수한 신앙을 지켜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서가 실제로 그런 배타주의와 종교 제국주의를 가르치는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그들은 실제로 가나안의 신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야훼 종교가 바알 종교는 극구 배척하면서 엘 신에 대하여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야훼 종교가 엘, 바알 종교를 극복하였다면, 과연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동시에 그들로부터는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종교적 혼합 없이 문화적 혼합이 가능하였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암스텔담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종교사와 선교학 교수인 안톤 베셀스(Anton Wessels)가 쓴 이 논문은 학문적 정직성을 가지고 접근하여 성서 자체가 보여 주는 종교간의 대화의 실상을 보여 준다. 이 논문의 제목은 “Biblical Presuppositions For and Against Syncretism”으로서, Dialogue and Syncretism: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ed. by Jerald Gort, Hendrik Vroom, Rein Fernhout, and Anton Wessels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9), 제 4장에 수록된 것이다. -편집자 주
이 논문은 상황신학에 대한 아시아 신학과 아프리카 신학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학들을 구약성서에 근거하여 혼합주의라는 명목으로 너무 가볍게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할 목적으로 쓰여졌다.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느님(야훼)과 엘과 바알의 관계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려고 구약성서를 검토하였다. 여기서 야훼를 믿는 신앙과 그 주변의 가나안 문화와 종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구약성서 어디에도 하느님을 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곳은 없다. 그러나 호세아와 엘리야 예언자의 행동에서 명백하게 보여진 것처럼 하느님을 바알이라 부를 때는 위의 경우와 달랐다. 그래도 양쪽의 경우에서 모두 수용의 태도를 찾아 볼 수 있다. ‘야훼 신앙’은 엘과 바알 양쪽 모두의 특정한 측면을 수용한다.
그럼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과연 누가 누구를 ‘극복’한 것인가? 필자는 여기서 문화적이거나 문학적인 의존관계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의존관계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해는 다른 경우의 혼합주의의 형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성서 속에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또 다른 태도가
들어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아시아와 다른 곳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회복시켜 축하할 필요가 있는 것임을 굳게 확신한다”(Ariarajah.
14).
1. 서론
기독교 신학에 대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공헌이 서구
신학자들에 의해 혼합주의적인 것으로 재빨리 인식되어 버린 것은 과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일부 신학자들이 그들의 아시아 또는 아프리카의
상황에서 기독교의 메시지를 해석할 때 본문(성서 또는 기독교의 메시지) 보다는 그들이 서있는 문화적 상황에 의해 좀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학자들이 성서 해석의 순수성을 상실했다는 논리이다.
필자는 여기서 이러한 입장의 저변에 깔려 있는 전제, 즉 순수한 성서 메시지의 엄밀한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전제에 관해서는 논의하지 않겠다. 이 논문의 관심은 전혀 다른 데에 있다. 즉 아시아 신학과 아프리카 신학의 신학적 공헌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흔히 성서적인 전제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특별히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갈멜산에서 바알 사제들과 엘리야 사이의 대결(왕상 18)처럼 바알 제사의 우상화에 대한 구약 예언자들의 항거이다. 즉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현재 등장하고 있는 신학도 구약에서 본 것과 같은 혼합주의적인 형식으로 간주하여 반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논문의 쟁점은 야훼신앙과 그를 둘러싼 문화와의 관계가
구약성서 속에서 정확하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구약에서는 위에 언급된 전제처럼 혼합주의에 대하여 실제로, 혹은 일차적으로,
격렬하게 반대하였는가? 구약의 예언자들은 혼합주의에 대하여 무조건 반대하기만 했는가?(Lanchowski, 227-43) 아니면 현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상황화와 같은 방식으로 구약성서의 시대에서도 야훼의 메시지가 가나안 문화 속에 들어 갔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가? 베두윈 배경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이 가나안의 토착 문화와 종교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되었는가? 갈멜산의 바알 브올에서 항거한
사건(엘리야)과 같은 반(反)바알주의(더 나아가 반(反)혼합주의) 이외에, 이러한 예언자들이 정죄하지 않은 것, 즉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적인
상황을 수용하거나 또는 그것에 동화된 형태도 있었는가? 야훼신앙과 가나안 토착민의 종교 사이에는 단지 불연속성 만이 있었는가? 아니면 연속성도
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으로 이주한 후 어떤 특정한 시기에 종교적 혼합주의는 없었다 하더라도 “문화적” 혼합주의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가? 또한 종교적 혼합주의가 등장하려 할 때마다 예언자들이 그것을 반대하였는가?(Colpe, 220) 가나안의 풍작(豊作) 신화가
구약성서에 단지 “문학적” 영향 만을 끼쳤을 뿐,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리”의 영역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Worden, 273-97)
하나의 논문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구약성서 전체를 살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야훼신앙과 가나안 상황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들을 살펴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야훼 신앙과 가나안의 일반적 상황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며(2장), 야훼와 엘(3장), 야훼와 바알(4장)에 대해 차례차례 논할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토착화 과정을 개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엘과 바알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야만 한다.
필자는 그러므로 바알에 대항하여 가장 치열하게 싸운 두 인물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즉 엘리야와 호세아가 그들이다. 결론에서 나는 한 신앙(야훼에 대한)이 다른 신앙(가나안 종교)을 극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아시아 신학과 아프리카 신학의 공헌을 혼합주의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때 좀 더 새로운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2. 야훼신앙과 가나안의 상황
이스라엘의 신앙은 모든 것이 단번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그 신앙은 자체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가나안 환경과의 상호 변화를 통해 수 세기에 걸쳐 천천히 구체화된 것이다. 여러 단계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왔고 거기에 정착했던 히브리 유목민들은 하나의 문화와 다양한 종교적인 개념들을 가진 주민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나타난 종교는 가나안의 상황에서 만났던 것들에 대한 거부와 수용, 즉 이들과 주고 받는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므로 유일신에 대한 신앙은 이러한 발전의 결과이다. 어떤 학자들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예배하는) 유일신교에 앞서서 (여러 신들 중에서 단지 하나의 신에게만 예배할 가치가 있다는) 단일신교가 먼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 즉 배타적인 의미의 야훼신앙은 천천히 등장했다. 처음에는 여러 신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시편 82편에는 “하느님께서 신들을 모으시고 그 가운데 서시어 재판하신다”(공동번역)고 표현되어 있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시기로부터 왕들의 시대까지 야훼숭배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민간신앙의 표현들과 혼합되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 하다. 풍요의 신인 바알의 배우자인 아세라는 바알과 함께 숭배되었다. 아세라 신상은 가나안의 ‘산당’에 우뚝 서 있었고--나무 또는 나무 막대의 형태로--그 옆에 바알의 제단이 있었다. 바알과 아세라에 대한 예배는 바벨론 포로기 때까지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한 혼합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는지는 열왕기하 21:7와 다른 곳에서도 보여지는데, 이 본문에 따르면 아세라의 신상이 예루살렘 성전 속에서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심판 받는 것으로서 말이다.
가나안화의 과정을 시사하는 것 중의 하나는 구약성서가 자주 가나안의 은유, 형식, 이데올로기를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야훼의 행동의 성격을 묘사함에 있어서 그러하다. 마이클 쿠간(Michael David Coogan)은 가나안 종교에 관한 연구의 결론에서 “가나안의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문학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예언자 에스겔이 예루살렘에게 한 선언은 아주 적절한 것이다. 즉 “...네 족보를 캐어보면 너는 가나안 출신이라...(겔 16:3).”
가나안 상황의 영향을 받은 문학적인 의존과 친근성을 잘 보여준 예는 성서 속에서 7이라는 숫자를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은 모세를 제 7일(출 24:16)에 부르며, 창조 작업도 7일 동안에 일어나고, 여리고 성의 함락도 제 7일에 일어난다. (7명의 제사장이 7 나팔을 불며 7번 성을 돌며 행진한다.) 이 7이라는 숫자를 선호하는 것은 가나안의 습관인 것이다.
또 다른 예로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초기에 아이가 없음을 강조한 것도 가나안에서는 상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Coogan, 52-53). 게다가 구약성서가 왕의 의무들에 관하여 말할 때, 공동체의 약한 자를 돌보는 일, 즉 가난한 자, 과부, 고아들을 돌보는 일(예컨대 시편 72편에 묘사된 이상적인 왕)은 가나안의 상황 속에서 왕의 의무에 대해 말한 것과 일치한다(Coogan, 56-57).
성전 건축 역시 야훼 종교의 가나안화를 보여준다. 비록 여러 성소들이 결국에는 하나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통합된 것이 사실이지만,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함에 있어서 기존의 여부스 신당이 있던 장소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삼하 24장), 아마도 페니키아 모델을 따라 지었을 것이다(왕상 5; 7:13-51; Schoneveld, 8-88).
3. 야훼와 엘
엘은 가나안 만신전의 최고의 신을 이르는 이름이다.
엘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고대 가나안의 항구도시 우가릿에서 발견된 문서 덕분이었다. 우가릿 문서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B.C. 1천 년대의 가나안 종교의 모습을 좀더 잘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엘은 명백하게 ‘높은 신(High God)' 중의 하나이고 그래서 만신전의 수위에 있었다. 그는 신들의 회의 가운데에서 수석의 위치였다. 그는 하늘과 땅을 창조했고 다른 신들과 시간을 창조한 자, 신들과 인류의 아버지, 왕과 현자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는 신성한 존재였으며 친근하고 자비로운 신으로서 찬양되었다. 그래서 그의 심판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익숙해 있었다(Blommendaal, 162-63).
이러한 엘의 우가릿적이고 가나안적인 특성들 가운데 일부는 족장들의 이야기 속에서, 즉 족장들이 엘의 이름을 가진 여러 장소에서 어떻게 신을 숭배했는가를 설명해 주는 이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야훼신앙은 이와 같은 성소들을 받아들였다(Seebasz, 80).
족장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지역 신들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진 한 창조주의 여러 모습으로서의 엘 신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첫번째로 “엘 엘리욘”(El Elyôn), 즉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살렘(예루살렘)에서 만났다. 또한 아브라함이 다섯 왕들과의 충돌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를 환영한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며 하늘과 땅의 창조자인 “엘 엘리욘”의 사제였다(창 14:18 -22). 아브라함의 99세의 생일에 그는 “엘 샤다이”(El Shaddai), 즉 “전능한 신”의 현현을 목격했다(창 17:1).
엘의 또 다른 이름이 브엘세바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엘 올람(El Olam), 즉 “영원하신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그 곳에서 영원하신 하느님 야훼의 이름(엘 올람)을 불러 예배하였다(창 21:33).
한편 “엘 로이”(El-Roi), 즉 “돌보시는 하느님”(한글개역에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하갈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나타난다.
하갈은 자기에게 말씀해 주시는 야훼를 “나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하갈이 “이런데서 나를 돌보시는 하느님을 뵙다니”라고 한데서 그런 이름이 생긴 것이다(창 16:13).
야곱의 이야기는 또 다른 명칭을 제공한다.
야곱은 자기에게 딸린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 루즈에 이르렀다.
이 르즈가 곧 베델이다. 야곱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곳 이름을 엘 베델(El-Bethel)이라 하였다. 야곱이 형을 피해 갈 때 하느님께서
그 곳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창 35:6,7; 창 28:16,17, 엘 샤다이와 비교하라. 헤브론의 전능자, 또는 성스러운 산에 나타난
엘. 출 6:2; Cross 122).
우리는 또한 엘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몇몇 사람들의
이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에서 엘이 어떻게 숭배되었는지를 추리할 수 있다.
‘엘가나’(Elkanah)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창조하셨다’(삼상 1:1; 2:11,20)라는 뜻이며, ‘아사헬’ (Asahel)은 ‘하느님이 만드셨다’(삼하 2:18 -3:27,30)는 뜻인데, 이는 엘의 창조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아비엘’(Abiel)은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삼상 9:1; 14:51)라는 뜻으로 엘의 부성을 지적하고, ‘엘 하난’(Elhanan)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표현한다(삼하 21:19; Blommendaal, 163).
족장들과 이러한 이름들의 이야기들로부터 엘신이 그 땅의 토착민들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우리는 이제 의심할 여지 없이 족장들의 종교와 그들 주변의 종교 사이에 일종의 연속성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족장들에게 그 자신을 계시한 신 안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예배해 온 신, 즉 모든 신들과 피조물들의 왕이며,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서 예배해 왔던 신의 새로운 모습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 신은 가나안 땅에서 ‘엘’이라 불리워진 존재였다(Cross, 120).
바알과는 달리 엘은 구약성서 어디에서도 비난받지 않으며, 그의 이름이 사람들의 이름 속에 계속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기할 만한 점이다. 엘은 결코 바알처럼 야훼의 라이벌로서 소개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야훼를 가나안에 소개할 때에도 엘의 높은 위치는 계속해서 인정받았으며, 단지 점진적으로 엘 대신에 야훼가 가장 높고, 유일한 하느님으로 대치되었다. 신명기 32:8,9(“모세의 노래”)의 본문에서도, 성서기자는 엘을 가장 높은 하느님으로 찬양한다.
지존하신 이께서 만방에 땅을 나누어 주시고, 인류를 갈라 흩으실
때, 신들의 수효만큼 경계를 그으시고 민족들을 내셨지만, 야곱이 야훼의 몫이 되고 이스라엘이 그가 차지한 유산이 되었다(신32:8,9).
엘은 어쨌든 야훼와 융합되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 야훼 제의는 비록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엘 제의와 싸우지
않았지만 두 집단 모두를 동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엘 집단은 신앙의 좀 더 오래된 양식으로 여겨졌고, 비록 엘이 야훼가 나타남으로 인해
좀 더 높은 위치로 격상되었다고 해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신앙의 형태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느님은 그
이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본질상 야훼와 동일시 되었다 (Eissfeldt, 35).
엘은 그러므로 야훼에게 많은 부분을 양도한 셈이었다.
즉, 창조자 하느님, 왕, 그리고 아버지와 같은 면모들이 야훼에게 양도되었으며 야훼는 엘의 여러 특성들, 예를 들어 희생제사 풍습, 제의 노래들과 같은 특성들을 수용하였다. “엘은 세상에 선사한 가나안의 특별한 공헌이다.
그는 엄격한 하느님 야훼와 혼합되었다. 그래서 부드러움과 엄격함을 동시에 지닌 아버지의 모습으로 모든 부성의 표상이 되었다”(Eissfeldt, 37). 이러한 엘의 공헌이 함축하는 것은 블로멘달(Blommendaal)의 결론에 잘 나타나 있다.
야훼와 모든 민족들의 궁극적 만남을 증거하며 또한 모든 민족들이
야훼의 구원을 받게 된다는 세계적인 비전(사 2:2-4; 25:6; 45:22)은 구약성서 안의 보편주의의 발전의 가장 중요한 결실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엘의 전통은 대단히 중요하다. 경계선이 무너지고 예상할 수 없었던 전망에 대한 관점이 열려졌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 즉 모든 종족과 서로 다른 언어들을 사용하는 모든 인류가 창조자, 왕, 심판자, 아버지의 보좌 둘레에서 서로서로 만나게 되며, 정의와
공도가 지배하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느님께 영광(Kabod)을 돌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열려진 것이다[pp.
171-72].
블로멘달은 엘이 구약성서에 나타난 보편주의의 기초를 세웠으며, 이를
대표하는 존재로 보았다. 말하자면 가나안 종교 속에서 엘에 관한 보편주의적인 특정 표현들이 구약성서 보편성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주의적 특성들은 야훼에게 옮겨졌다.
야훼는 그러므로 세상의 창조주, 신들과 인류의 왕이 된 것이며 그래서 전 피조물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었다(pp. 14-15). 블로멘달은 또한 엘에 관한 가장 독특한 양상의 하나로서 사회-윤리적인 요소를 언급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야훼는 올바르고 정직한 자들의 편에 서 있고, 불행하고 억압된 자,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소리를 들으며, 압제자와 하느님 없는 자들에 대항하는 공평과 정의의 하느님으로서 그려졌다(p.170).
4. 야훼와 바알
바알(문자적 의미는 ‘주’ 또는 소유자: 복수는
Baalim)은 서셈족(West-Semitic)의 신명(神名)이다. 바알 신은 기후와 연관이 있다. 그는 식물의 신이며 풍작의 신이다. 바알은
종종 아세라 또는 아스다롯과 함께 언급된다. 바알은 흔히 세겜의 도시 신, 바알 브릿(삿 8:33; 9:4), 또는 에크론의 신 바알 세붑(왕하
1:2,3,6)과 같이 지역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는 또한 바알 샤멤(Baal shamem), 즉 ‘하늘의 신’으로서 숭배되었다. 바알 브올의
신당은 분명 모압과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다(민 23-25).
엘과 함께 바알은 초기에 아마도 야훼와 동등한 신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바알이라는 이름이 사울과 다윗왕 자손의 이름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사울의 아들 중에 에스바알(Ish Baal)이 있는데(대상 8:33; 9:39; 삼하 2:8), 후에 이스보셋(Ish Boseth, “부끄러움의 아들”)으로 바뀌었다. 이는 아마 바알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목생활에서 가나안의 정착 농경생활로 바뀌면서 가나안의 풍작 신 바알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로운 농촌 상황 속에서 비와 퓽요를 내려 준다는 땅의 신 바알에게 돌아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분명히 땅에서 일하는 것과 연관된 많은 풍습과 의식이 특히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바알에게 의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훼가 바알의 면모 중의 많은 부분을 채용하였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며, 다음의 예가 이것을 분명하게 할 것이다.
-- 야훼가 “구름을 타고 다닌다”(시 68:34; 104:3)고 하는 것은 바알로부터 빌려온 은유이다.
-- 야훼와 바다의 전쟁에 대한 언급에는 바알과 바다의 전쟁신화로부터 그 표현의 기법이 채용된 것이다(욥 26:12,13; 시 89:10; 사27:1).
비록 성서가 이를 전형적으로 역사적인 사건, 즉 홍해 또는 요단을 건너 간 여행으로 묘사했지만 말이다
(시 77:15-20; 사 51:9,10; 시 114:1-3).
-- 예레미야 9:21에서처럼 “죽음이 우리의 창문을 넘어서 들어 왔고”라는 표현은 바알의 건축 신화,
즉 바알이 자기 집을 만들면서 창문 만드는 것을 주저했다는 이야기를 배경으로 해서만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
민간신앙은 ‘죽음’의 신이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 야훼가 어떻게 풍요를 내려 주는가에 관해 묘사할 때, 그에 대한 표현들 또한 바알에게 먼저 사용된 것이 채용되었다.
가나안의 풍작신화가 이스라엘의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이러한 풍작신화가 매우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던 상황이었다는 사실에 관하여 호세아만큼 자세하게 언급한 사람은 없다. 비록
호세아가 바알 숭배를 맹렬하게 비난했어도, 그의 표현 방식 역시 바알숭배에 대한 문학적 의존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 날이 오면, 나는 들어 주리라. --야훼의 말씀이시다. 내가
하늘의 청을 들어 주면 하늘은 땅의 청을 들어 주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청을 들어 주고 이 모든 것은 이즈르엘의 청을 들어 주리라(호
2:21-22).
일련의 모든 신들은 이러한 곡식의 성장 과정에 참여한다.
그러나 호세아에 의하면 이러한 풍작이 야훼 혼자만의 업적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비신앙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나안적인 습관들”을 비난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가 진정한 교리의 표현을 위해 가나안 문학에 많이 의존하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Worden 289-97).
이는 결국 야훼와 바알의 대결로 결론짓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
반바알적인 태도는 예언자들의 경우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이스라엘 예언자들에 의해 바알은 하나의 우상으로 취급되었다. 가나안의 풍작제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너무 자주 무릎 꿇게 만드는 악이요, 하나의 유혹으로서 간주되었다. 이는 야훼에 대한 간음으로 생각되었다(비교, 렘 13:26-7; 사 57:3; 겔 16:36-40; 호 2:2; 7:4).
5. 엘리야
예언자 엘리야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합 왕과 그의 바알 숭배를
거역했던 예언자로서 알려졌다. 엘리야는 야훼와 그의 계약을 버린 아합을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내가 이스라엘을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사람은 바로 왕 자신과 왕의 가문입니다. 왕께서는 야훼의 계명을 버리고 바알을 받들어 섬겼습니다(왕상 18:18).
엘리야는 비와 매 계절의 풍요를 내려준다고 생각된 신은 바알이 아니라,
비를 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야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랜 가뭄의 기회를 포착한다. 그리하여 엘리야는 치유나 고통과 마찬가지로 비와
풍요는 오로지 야훼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납득시켰다(Jacob, 250-51).
엘리야와 바알 사제들 사이의 그 유명한 대결은 주전 9세기에
아합에 의해 이스라엘에 합병된 페니키아(한글 개역에는 ‘베니게’)와 이스라엘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갈멜산에서 일어났다(왕상 18).
엘리야라는 이름이 (바알이 아니라) ‘야훼가 하느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바알과의 대결에 엘리야가 등장하는 것은 마치 미리 짜여진 것처럼 생각될 정도이다. 그 산에는 매우 오래 전부터 바알 신전이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갈멜산에서의 신의 판결은 바알이 예배되어지는 지역 신전을 야훼에게 예배드리는 장소로 바꾸려는 재정복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왕상 18: 30). 엘리야는 백성들로 하여금 야훼와 바알 사이에서 근본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나오는 바알은 하늘을 다스리는 페니키아의 바알이든가 아니면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고향인 두로의 신 멜카르트였다. Mulder 1979).
엘리야는 한편 혼합주의로 소멸되어가는 야훼 신앙을 구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엘리야는 바알 사제들에게 격렬하게 반대했고 바알 숭배에 반대했던 예후 왕의 폭력적인 행동의 실제 선동자로서, 호렙산에서 번개와 폭풍 속에서가 아니라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거리는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페니키아의 사르밧의 과부로부터 보호를 받은 엘리야는(왕상 17:9) 하느님의 계시가 폭풍에 의해 소진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왕상 19)
6. 호세아
예언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왕국에 살면서(주전 750-722년
경), 이스라엘의 번영과 쇠퇴 모두를 경험했다. 그의 책의 주제는 ‘간음’이라는 언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의 백성에 대한 야훼의 사랑에 반해 백성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신실하지 않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결혼이라는 유대관계는 야훼께 드리는 예배에 풍작신 제의가 결합됨으로써 깨어졌다. 만약 풍작신 제의와 상징이 야훼 예배와 결합되었다면, 야훼와 그의 백성의 결혼은 깨진 것이고, 사실상 이스라엘은 창녀로 타락된 것이다.
호세아는 포도주의 기름을 제공하여 준 것은 바알이 아니라 야훼였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첫 ‘남편’이 ‘창녀’ 이스라엘에 관해 불평하는 소리를 듣는다(호 2:7).
...모두 음탕한 바람에 휩쓸려 제 하느님의 품을 벗어나 바람을
피우게 되었다(호 4:12).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봉하는 종교는 스스로 만든 것(호
8:5)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을 신이라 단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심지어 금과 은으로 우상을 만들었다(호 8:4).
아직도 못할 짓만 하고 있다. 거푸집에 은을 부어 만든 신상에
지나지 않건만, 한갓 장인들이 만든 작품에 지나지 않건만 어찌하여 “여기 제물을 바쳐라. 모두 이 송아지에게 입을 맞추어라”고 하는가!(호
13:2)
...우리 손으로 만든 것 보고 우리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호 14:4).
바알 숭배의 결과는 불순과 죽음(호 6:10;13:1)이다. 야훼는 특별히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야훼와 신상은) 양립될 수 없다. 신들의 실재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만, 그러나 야훼의 실재는
자유 안에서 드러난다. “나는 그들을 자유롭게 사랑하겠다”(호 14:5; Wolff, 402-3).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종교 속에서 혼합주의에 대한 반대를 요약한 선지자가 되었다.
그는 그가 주로 등장한 북 이스라엘의 농경 문명의 한가운데에서 야훼만을 섬기는 추종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가나안의 상황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었던, 그리고 가나안의 언어로 그의 메시지를 표현한 사람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부적절한 혼합주의에 그렇게 반대했던 그 자신이 어떤 의미로는 가나안화에 참여한 것이다.
호세아는 엘리아처럼 ‘폭력적인’ 방법들을 채용하지 않았고, 또한 (가나안의 농경문화와 철기문명으로부터) ‘손을 떼었던’(렘 35:1-19) 레갑 사람들의 방식도 선택하지 않았다. 레갑 사람들은 요나답의 보호아래, 가나안에서 유목민의 존재 방식을 정신적으로나마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반바알주의를 왕국의 정책으로 삼았던(왕상 10:15 왕하 10) 예후 왕의 편에 섰지만(왕상 10:15), 이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호세아는 바알과의 투쟁에서 ‘동종(同種)요법’(homeopathic)을 사용하는데, 이것에 관하여는 구약학자 에드몽 쟈꼽(Edmond Jacob)이 정확하게 지적했다.
즉 호세아는 결과적으로 악을 치유하기 위해 악을 택한다.
그는 스스로 바알 숭배의 무대 속에 뛰어 들어감으로써 그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 그의 저항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의 메시지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은 그의 이러한 개인적 체험이었다(Jacob, 251).
즉 호세아는 부도덕한 여성과 결혼해야만 했다. 그러한 ‘신성한 결혼’(히에로스 가모스)의 의도는 땅의 풍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신전의 창녀들의 가장 높은 계급은 어머니 여신들의 대표자로서 땅의 풍요를 보장하기 위해 아마도 젊은 신과의 ‘신성한 결혼’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 풍습은 이스라엘에서도 나타났으며(창 38:21f, 민 25:1; 왕상 14:24; 예 3:2; 호 4:12ff), 희생제사와 성적인 의식 사이에도 연관성이 있었다(사 57:5,7; 겔 22:9; 호 4:12ff). 이러한 풍습들은 아사(왕상 15:12), 여호사밧(왕상 22:46), 요시아(왕하 23:7) 같은 왕들 뿐 아니라, 호세아 같은 선지자들로부터도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율법은 이러한 매춘을 정죄했다(레 19:29; 신 23:17; Kittel, VI, 579-95).
호세아는 그 자신의 결혼으로 이 ‘신성한 결혼’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한편으로 그는 이러한 제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진정으로 야훼만을 섬기는 풍토 속에서 그 제의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보존하고 재평가(‘극복’)하였다. 즉 ‘신성한 결혼’ 제의는 하느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결혼에 대한 역사를 표현한 것이 되었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나안 종교로부터 수많은 이미지들을 차용하였다.
하느님의 사랑은 첫째로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것이었다(호 11:1,3,4,8).
야훼가 그의 신실한 자들로부터 유일하게 또한 전적으로 찬양 받게
하기 위해서는, 모세의 하느님의 특징인 질투하는 하느님과 전투하는 하느님에 대한 모습이 사랑의 하나님, 즉 부드럽고 자애스러운 모습으로 보완되는
것이 불가피하였다. 마치 사막의 종교가 농경지의 종교로 보완되듯이, 그리고 농업이 야훼의 독립성 아래에 위치하도록 만드는 것이
불가피하였다(Jacob 258).
7. 결론
야훼 신앙과 가나안의 상황 사이의 연관성에 관해 말할 때,
사람들은 (하나의 종교가 다른 종교를) “극복”(overcome)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 용어는 기독교 신앙이 외국의 특정한 종교 문화적인
상황에 전해질 때 사용된 용어이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여기서 ‘극복’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제거’를 의미할 수 있고, 그리고 좀더 ‘높은 단계로의 상승’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이 생겨난다. 정확히 무엇이 무엇을 ‘극복’한 것인가? 일반적으로 가나안의 상황에서 야훼 신앙이 엘이나 바알 신앙을 극복했으며, ‘그 자신’이 극복 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빙크(J.H. Bavinck)는 기독교 신앙과 다른 종교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점유”(possessio)라는 단어를 쓴다. 즉 “기독교인의 생활은 그 자신을 이교도의 삶의 형식들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점유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새롭게 한다”(Bavinck, 181). 다른 종교에서 받은 요소들은 기독교의 신앙에 의해 ‘점유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야훼가 엘을 점유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러나 여기서 나타난 문제는 도대체 진짜 누가 누구를 점유했는가?
엘과 야훼 신앙의 관계에서 엘이 야훼를 ‘점유했다’고, 또는 야훼를 극복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가?
결론적으로 구약성서 자체에 대한 이러한 연구는 야훼 신앙과
가나안의 상황(문화 및 종교)과의 관계가 단지 정(正)과 반(反)의 관계, 즉 반(反)바알주의 노선만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정확한
주장이라는 결론을 뒷받침한다.
-- 첫째로, 그러한 반테제는 야훼와 엘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알에 대한 저항 같은 것이 엘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야훼가 엘의 다양한 특성을 수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점에서는 엘이 주는 입장이었으며 야훼는 받는 입장이었다고 확실하게 단정할 수 있다(Blommendaal).
-- 우리는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의존에 관해 말했고 이를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구약학자 워든(Worden)은 구약성서 가운데 우가릿 문학의 영향을 받은 부분들을 상당히 많이 지적한다. 그는 종종 “문학적” 의존이 뚜렷한 부분들을 가려낼 뿐 아니라 구약성서가 많은 것을 (가나안의 문화 및 종교로부터 -역자주) 차용했다고 말한다(Worden, 276).
그러나 여기서 (문학적 의존만을 인정하고 -역자주) “종교적” 의존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형식”(예컨대 성전 건축, 찬양)과 “내용”이 그렇게 쉽게 따로 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야훼가 엘을 ‘극복’했다고 말하는 것에 덧붙여 그 반대의 측면, 즉 엘이 야훼를 극복한 것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엘의 중요한 특성들, 특히 아버지와 왕과 같은 우주적인 특성들은 야훼에게 통합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또한 바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반테제로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즉 바알에 대한 야훼의 관계는 우리가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처럼 단지 부정적인 것 만은 아니다. 바알 숭배가 구약성서에 문학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단지 문학적인 영향(예를 들어 풍작 신화들)만을 인정하고 종교적인 영향, 즉 ‘교리’의 영역에서의 상호영향을 부인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Worden 273-97). 이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이주 이후에 이스라엘의 “문화적” 혼합주의에 대해서만 말할 뿐, “종교적” 혼합주의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Colpe, 220). (문학적인) 형식과 (종교적인) 내용은 그렇게 쉽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유목민들의, 시나이 (반도의) 야훼주의는 가나안주의와 서로 융합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가나안주의가 삼켜지게 되었다(bewältige)는 것은 사실일 것이지만, 여기서 양자 모두가 수정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Maag 134-53).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록 그들의 유목민적 또는 반(半) 유목민적 유래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정착사회에서 번성한 종교적 형식들에 그 자신들을 동화시켰다. 유목민의 종교는 제의 규정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즉, 그들의 경건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복종과 신뢰에 있다.
유목민의 종교는 약속의 종교이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목자(牧者)이지, 가나안 사람들에게처럼 왕이 아니다.
호세아가 야훼의 사랑을 말할 때 그의 묘사는 바알적인 상황에 의해 강하게 채색되어 있다. 호세아는 백성들에 대한 야훼의 사랑에 관한 그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바알적 상황의 언어를 채택하였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 자신이 그 상황 속에 완전히 빠져 들어감으로써 (그의 결혼을 상기하라) 그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 상황을 변혁시키고 ‘극복’하였다.
“극복”이라는 말 속에는 거부와 폐지라는 (소극적) 의미가 있지만, 이와 동시에 적극적인 의미도 있다. 즉 “조상들의 종교를 정화하고 심화시킨 가장 성공적인 시도 중의 하나”로 볼 때 말이다(Jacob, 251).
한편 라부샤느(Labuschagne)는 야훼문서 기자가 야훼에 대한 신앙의 맥락 속에서 조상들의 전통을 설명한 신학자라고 본다. 야훼문서 기자는 신에 관한 이미지들이 다양한 명칭들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명칭들은 우상들로서가 아니라 야훼문서 기자 이전 시대에 하느님이 현시한 모습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야훼가 족장들의 시대 이전에 이미 나타났지만 사람들이 그를 깨닫지 못했다고 보았다.
즉 야훼는 아비멜렉 왕에게 나타났고(창 20:3), 발람에게 여러 번 말했으며(민 22-24),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인도해 낸 것뿐 아니라 갑돌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인도해 내기도 하였으며(암 9:7), 고레스와 마찬가지로(사 44:28; 45:1) 아시리아를 (훈육의) 막대기로 사용하였다(사 10:15).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야훼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야훼의 행위와 역사 속에 관련되었다.
이스라엘 역사 이전이나, 또한 그 역사 밖에서는 야훼가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이다.
라브샤느는 이미 존재하였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개혁된 것을 야훼 신앙의 특성으로 간주한다(Labuschagne, 11-12,14). 이스라엘의 특권은 역사 속에서 하느님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고 또한 예언자들의 활동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무한히 심화시켰다는 점이다(Labuschagne, 16).
이것은 반테제가 사실상 남아 있고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멜산에서의 엘리야의 대결은 이것의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창세기 족장들의 이야기 속에서 보이는 ‘친(親) 가나안적 경향’에 대항해서, 출애굽기에는 “너희는 그들이나 그들의 신과 계약을 맺지 말아라.”(출 23:32)는 선언이 나타난다. 이것에 대한 반대는 두 분야에서 초점이 맞추어진다.
첫째는 (신전) 매춘의 장소에 초점이 맞추어지는데, 이것은 때로 그 당시의 통상적 매춘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서 풍작신 제의와 연관이 있다(바알 브올에서처럼).
두번째는 구약성서가 인신제사(人身祭祀)를 정죄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몰록에게 바치는 어린이 희생제사로서, 몰록은 흔히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는 것과 함께 언급된다. 모세의 법에서는 이러한 인신제사에 반대하여 그 벌로서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레 18:21; 20:2-5; 왕하 23:10; 렘 32:35; 행 7:42과 비교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신제사의 풍습은 이스라엘 내에서도 분명히 있었다(신 12:31; 시 106:37,38- “귀신들에게 아들 딸을 잡아 바치며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바치느라고 억울한 피, 아들 딸의 피를 흘리고 그 피로 땅을 더럽혔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예는 그의 아들을 희생시킨 아하스 왕이다(왕하 16:3; 대하 28:3). 이는 므낫세 왕에 대해서도 이 같은 것이 언급된다(왕하 21:6; 대하 33:6).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자. 우리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학이 (세계) 신학에 끼친 공헌을 평가할 때 우리는 훨씬 더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엘리야의 예에 근거해서 혼합주의를 거부하면 안 된다.
구약성서 속에서는 야훼주의가 가나안의 문화에 대하여 정죄하는 경우뿐 아니라 분명히 “긍정”하는 자리도 있기 때문에, 진정한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신학자들로 하여금 신학의 상황화에 대하여 평가할 때, “극복”의 두 측면에 대하여, 또한 그 과정의 (일방성이 아니라) 상호성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구약성서에는 (상황화를) 거부하는 노선(바알에 반대하는)이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혼합주의에 대항한 싸움에서 지속적인 경고의 예로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가나안에서의 상황화”의 경우에서 이제까지 확인된 것처럼, 그 반대의 노선을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면 상황화의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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