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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재는 내친구 원문보기 글쓴이: 장진호
원효의 파계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원효와 의상은 같은 시대(7세기)를 살았던 신라의 승려들로서 우리 불교사를 빛낸 우뚝 선 두 봉우리다. 원효는 속성이 설씨로,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수많은 저술을 남겨 불교 사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의상(義湘)은 한신(韓信)의 아들로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이자 화엄십찰의 건립자이다.
원효와 의상은 다 같이 화엄종의 학승으로서 당시의 일인자들이지만, 두 사람은 상당히 대조적인 삶의 위상을 지니고 있어서, 당시 사회에서도 이는 일반인들 사이에 비교․대조적인 인물로 관념되고 있었던 듯하다. 대덕 고승의 구법, 수도, 이적을 담고 있는 삼국유사 권 4에도 ‘원효는 얽매이지 않다’와 ‘의상이 가르침을 전하다’란 항목을 앞뒤로 나란히 싣고 있어서,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그러면 두 사람의 상이한 궤적을 따라가 보자.
원효와 의상은 함께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배우려는 유학길에 올랐으나(650년), 요동에서 고구려의 순찰대에 간첩이란 혐의를 받고 붙들려 실패한 후 2차 유학을 중도에서 포기하였는데, 의상은 문무왕 원년(661년)에 바닷길을 통하여 다시 당나라에 가서 지엄삼장(智儼三藏)의 문하에서 화엄경을 배운 후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의상은 화엄경의 원융무애(圓融無碍)의 교리를 체득한 국사(國師)가 되었다.
반면 원효는 의상과 함께 유학의 길을 떠나던 중, 어느 동굴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밤에 목이 말라 어둠속을 더듬다 손에 닿은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갈증을 채워 흡족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동굴은 사람이 죽은 무덤이었고 바가지는 해골이었으며, 물은 뇌가 썩은 물이었던 것이었다. 그걸 보고 구역질이 올라온 원효는, 어제까지만 해도 달디단 물이었다는 느낌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이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는 진의를 알게 되고, 진리를 당나라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유학을 그만 둔다.
그 후 요석 공주와 파계하고,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의 비속비승(非僧非俗) 즉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행동을 하면서 대중 속에 뛰어들었다.
저서면에 있어서도 원효는 경에 관한 것 34종, 논(論)에 관한 것 32종을 비롯하여 모두 91종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반면, 의상은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등 모두 4권만을 남기고 있어 양자는 사뭇 대조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 사이의 두드러진 행적상의 차이점은 여인에 대한 태도라 하겠다. 이들의 여인과 관련된 설화는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羈)조와 찬녕이 쓴 송고승전(宋高僧傳), 그 외 몇 편의 구전설화에 보이는데, 이들 설화를 살펴보자.
먼저 의상의 행적을 보자.
의상이 현장의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기 위해 두 차례에 걸친 시도 끝에 당으로 건너가 등주에 있는 한 신도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 신도네 집의 딸 선묘(善妙)는 37세의 준수하고도 유현한 덕을 지닌 의상을 보고 마음으로 지극히 사모하여 따랐으나, 세속적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도심(道心)을 일으켜, 세세생생 의상을 스승으로 삼아 귀명할 것을 맹세하였고, 그가 당에 머문 10년 동안 단월(檀越 시주자)로서 공양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의상은 법을 전하는 일을 시작할 때가 왔음을 알고 귀국길에 오르고자, 상선의 편이 있기를 기다리다가 어느 날 드디어 출범하게 되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드릴 법복과 일용품 등을 마련하여 함 속에 가득 채워 해안가로 가지고 나갔으나, 의상이 탄 배는 이미 항구를 멀리 떠나 있었다. 선묘는 지성으로 기도를 올린 뒤, 간절한 마음을 담아 거센 파도 위로 물품이 든 함을 던져 의상이 탄 배에 이르게 하였고, 곧 이어 자신도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험난한 뱃길을 지켜 의상이 안전하게 본국의 해안에 도착하게 하였다.
의상이 귀국한 뒤에도 선묘는 일심으로 그의 전법을 도왔다. 의상이 부석사 터에 이르렀을 때에 신령스런 기운을 느끼고, 그곳이야말로 참된 법륜을 돌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소승 잡배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상의 마음을 읽은 선묘가 이들을 쫒아내고 의상을 수호하기 위해, 대반석으로 변하여 공중으로 붕 뜨자 그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났다. 그리하여 의상은 이곳을 전법처로 삼아,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고 운집하는 대중들에게 화엄경을 강설하여 우리나라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다.
다음으로 원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어느 날 원효가 미친 듯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 하늘 받칠 기둥감을 내 찍으련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대사께서 귀부인을 만나 어진 자식을 낳고 싶어 하신다. 나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궁리(宮吏)를 보내어 원효를 데려오게 하였다. 궁리가 원효를 찾으니 때마침 문천교(蚊川橋)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가 일부러 물 가운데 떨어져 옷을 적시니 요석궁(瑤石宮)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였다.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공주가 거처하고 있었다. 원효가 요석궁에 머무르게 된 뒤, 공주는 잉태하여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경서와 역사책을 널리 통달하였다. 그는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위의 두 설화를 다시 새겨 보자.
의상은 그를 간절히 사랑하는 선묘의 청을 끝까지 거절한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 의상의 귀국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부석사의 창건에도 이바지한다.
원효의 자세는 의상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자기가 먼저 나서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랴?”며 공주에게 접근하여 끝내는 파계하고 만다.
이어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의상과 원효의 대비되는 또 다른 설화를 보자. 의상과 원효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하여 성스러운 동굴로 들어가는 이야기다.
먼저 의상의 행적을 보자.
옛날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낙산(洛山)이라 이름 붙였으니, 서역(西域)에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소백화(小白華)라고도 했는데, 백의보살(白衣菩薩, 당송 이후 민간에서 신앙되던 33종류의 관세음보살 중 하나. 항상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아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붙인 것이다.
이곳에서 의상이 재계(齋戒)한 지 이레 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바닷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의 시종들이 굴속으로 그를 이끌고 갔다. 그래서 공중을 향해 참례(參禮)하니 수정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었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물러나오는데, 동해의 용도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쳤다. 의상이 받들고 나와 다시 이레 동안 재계하고서야 겨우 관음의 모습을 보았다. 관음보살이 말하였다.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날 터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좋겠다.’
의상이 이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났다. 그곳에 금당(金堂)을 짓고 관음상을 모시니,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저절로 생긴 것처럼 보였다. 대나무가 없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관음의 진신이 살고 있는 곳인 줄 알았다. 이 때문에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 하고, 의상법사는 자기가 받은 구슬 두개를 성전에 봉안한 뒤 떠났다.
이어서 원효의 경우를 보자.
그 후 원효가 뒤이어 와서 예(禮)를 올리려고 하였다. 처음 올 때 남쪽 교외(郊外)에 이르렀는데, 논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희롱삼아 벼를 달라고 부탁하자, 여인은 벼가 아직 여물지 않았다고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 계속 갔더니 다리 밑에서 웬 여인이 개짐(생리대)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부탁했는데 여인은 개짐을 빨던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물을 엎질러 버리고 냇물을 떠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부르더니 말하였다.
‘제호[醍醐 우유죽, 여기서는 불성(佛性)을 비유] 스님은 멈추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는데, 소나무 밑을 살피니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닿아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을 살피니 전에 보던 신발 한 짝이 거기 벗겨져 있었다. 그제야 좀전에 만난 여인이 관음의 진신인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효가 성굴(聖窟)로 들어가서 관음의 진용(眞容)을 뵈려 했지만,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그냥 떠났다.
이들 설화에서도 의상과 원효는 대조적이다. 의상은 낙산 바닷가의 굴속에 들어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게다가 동해용이 주는 여의보주와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받아 오지만, 원효는 성굴에 들어가 관음보살의 진용을 보려했지만 풍랑이 세어 결국 실패하고 만다. 원효는 가는 도중에 벼 베는 여인을 희롱하기도 하고, 생리대를 빠는 여인이 떠 주는 물을 더럽다고 버린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한말로 의상에 비해 원효는 아직 도가 익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에서 본 설화를 통하여 우리는 파계한 원효에 대해 세인들이 얼마나 비난을 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이는 또 역으로 일반 사람들이 원효에 대해 얼마나 기대를 가졌고, 그 기대가 무너진 데 대해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를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런데 원효는 파계 이후에 더욱 불도에 정진한 것 같다. 그에 대하여 삼국유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원효는 파계하여 설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자신을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이름하였다. 광대가 춤추며 노는 큰 표주박을 우연히 얻어서 도구로 삼고 이름하여 ‘무애(無㝵)’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무데도 걸림이 없다는 뜻으로 화엄경의 게구(偈句)에서 따온 이름이다.”
원효는 그와 같이 거사복으로 갈아입고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당시의 귀족 중심의 불교를 민중 불교로의 일대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어려운 교리를 떠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우면 극락 간다’는 쉬운 말로 민중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점차 민중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대표적인 설화가 소요산 자재암 연기설화다. 그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보자.
원효 스님이 요석공주와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설총을 낳았다. 환속을 했으니 다시 부처님 앞에 앉으려면 더 지독한 수행을 해야 했다. 소요산으로 들어와 초막을 짓고 용맹정진하고 있었다. 어느 폭풍우 치는 깊은 밤 선정에 들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스님, 문 좀 열어주세요.’
문을 여니 어둠 속에서 여인이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스님, 죄송합니다. 하룻밤만 재워주십시오.’
원효는 여인의 애원을 외면할 수 없었다. 방안에 들어온 여인의 자태는 매혹적이었다. 비에 젖어 속살까지 들여다보였다. 여인이 속삭였다.
‘스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 몸을 녹여주십시오.’
원효는 여인을 눕히고 언 몸을 주물러 녹여 주었다. 여인의 몸이 이내 따뜻해졌다. 기운을 차린 여인이 이번에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순간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간밤 폭우로 불어난 옥류천에 뛰어들었다. 폭포소리는 우렁찼고 계곡물은 차가웠다. 원효는 세찬 물속에서 간밤의 일들을 씻어냈다. 벌써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여인이 어느새 옷을 벗고 물에 들어왔다. 햇살이 여인의 몸에서 부서졌다. 눈이 부셨다. 끝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스님, 저는 유혹한 적 없습니다. 스님이 저를 색안(色眼)으로 볼 뿐이지요.’
순간 원효는 온 몸에 벼락을 맞은 듯했다.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 귓전을 때렸다. 원효가 문득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비로소 폭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사물도 제대로 보였다. ‘맞다, 바로 그것이다.’ 원효는 물을 박차고 일어나 발가벗은 몸으로 여인 앞에 섰다. 그리고 거침없이 설했다. ‘마음이 생겨 가지가지 법이 생겨나는 것이니, 마음을 멸하면 또 가지가지 법이 없어진다. 나 원효는 자재무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참된 수행의 힘이 있노라.’
원효의 말에 여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같은 웃음이지만 예전 웃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색기는 간 데 없고 오로지 맑을 뿐이었다. 아니 같은 웃음이지만 원효의 눈에 다르게 보인 것이었다. 여인은 어느새 금빛 후광이 서린 보살로 변해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이내 사라졌다. 원효는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임을 알았다. 원효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무애(自在無碍) 경지를 증득했기에 그곳에 암자를 세우고 자재암(自在庵)이라고 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이 사라진 봉우리를 관음봉이라 불렀다.
이 설화에 등장하는 원효는 파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비에 젖어 속살까지 드러나 보이는 여인 앞에서 무애의 경지로 다가가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그야말로 도가 통한 수행자로 나와 있다.
이러한 용맹정진의 과정을 거치어 마침내 그는 일반인은 물론 당시의 명성 높은 승려들에게까지 추앙을 받는 인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사정을 송고승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효가 금강삼매경을 받은 것이 그의 고향 상주(湘州)에서다. 그는 경을 가져온 관리에게 말했다. ‘이 경은 본각(本覺 무명으로 인한 세계 왜곡 이전의 인간이 지닌 본래적 완전성)과 시각(始覺 존재에 대한 왜곡의 길에서 나와 존재의 온전한 관점의 세계로 돌아가는 깨달음의 과정)으로써 근본을 삼습니다. 나를 위해 소가 끄는 수레를 준비하고, 책상을 두 뿔 사이에 두고 필연(筆硯)도 준비하시오.’ 그리고는 소가 끄는 수레에서 시종 소(疏)를 지어 5권을 이루었다. 왕이 날짜를 택하여 황룡사에서 강연토록 했다. 그때 박덕한 무리가 새로 지은 ‘소(疏)’를 훔쳐갔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3일을 연기하고, 다시 3권을 이룩하니, 이를 약소(略疏)라고 한다. 강연 날이 되어 왕과 신하, 도속(道俗 도인과 속인) 등 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법당을 가득 에워 싼 속에서 원효의 강론이 시작되었다. 그의 강론에는 위풍이 있었고, 논쟁이 모두 해결될 수 있었으니, 그를 찬양하는 박수 소리가 법당을 가득 메웠다.
원효는 다시 말했다. ‘지난날 100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내 비록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오늘 아침 대들보를 가로지름에 당해서는 오직 나만이 가능하구나.’ 이때 모든 명망 높은 승려들이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가슴 깊이 참회했다.
금강삼매경을 알기 쉽게 풀이한 금강삼매경소를 지을 때의 이야기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금강삼매경 풀이를 3일 만에 지어냈다는 경이로운 내용이다. 그전에는 파계승이라 하여 얕보고 욕하던 대중들이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금강삼매경을 원효만이 풀이해 내자, 원효를 서까래 아닌 대들보로 여기면서 모두가 감복했다는 이야기다. 이 금강삼매경소는 불교 선진국인 중국에 들어가 그곳 승려들을 놀라게 하였고, 그들은 이를 가리켜 예사로운 ‘소(疏)’라는 명칭을 붙일 수가 없으니 대장경의 반열에 오르는 ‘론(論)’이라 해야 마땅하다 하여, 금강삼매경소를 금강삼매경론이라 이름 붙였다.
이전에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 신라․고려 시대에 국가적 행사로 개최되었던 호국 법회의식. 100명의 학덕이 고명한 법사를 초청하여 인왕반야경을 외움)가 열렸을 때는 다른 승려들이 반대하여 초청을 받고도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마침내 원효는 이렇게 우뚝 선 봉우리에 올라앉게 되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원효는 파계라는 행적 때문에 평생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만나 설총을 낳았다는 것은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특히 골품제와 17관등급제라는 엄격한 신라의 계급 사회에서, 진골 여성과 육두품 출신의 남성이 맺어졌다는 것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다. 세속 초월을 지향하는 구도자로서 혼인은 치명적 장애물이다.
그러면 요석공주와의 인연이 원효의 삶에서 지니는 의미망을 찾아가 보자, 이를 추적하는 중요한 하나의 길목은 원효의 깨달음과 요석공주와의 인연이 시기적으로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나섰다가 중도에 무덤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은 그의 나이 45세 때인 661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원효가 인연을 맺은 요석공주는 태종무열왕의 과공주(寡公主)다. 태종무열왕의 재위기간은 654년부터 660년이다. 이 시기는 원효의 나이 38세에서 44세 때이다. 그러니 원효의 파계와 깨달음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이다. 결국 원효가 공주를 만나 파계하여 거사가 된 것과 깨달음은 매우 근접한 때이다. 그러나 그 선후를 꼭 집어 확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원효를 깊이 연구한 박태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요석공주와의 파계 사건은 의상과 함께 유학길에 나서면서 중도의 토굴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원효가 토굴 무덤에서 얻은 깨달음은 궁극적이고 완전한 깨달음이 아닐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 과정에서는 해탈에 이르기 까지 많은 수준의 깨달음이 있다. 선종에서도 깨달음을 설하는 동시에, 그 이후에 깨달음을 부단히 간수하여 온전하게 가꾸어가는 보임(保任)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궁극적 깨달음의 기반이 되는 선행하는 깨달음이 다양한 수준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원효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거기서 얻은 깨달음에서 체험에 의거한 확신과 자신감을 얻어,좀 더 완전하고 깊이 있는 깨달음으로 향해 질주하는 전환점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 깨달음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으로,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일탈의 행위의 하나로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가던 길에서 잠시 비틀거리는 일탈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이 일탈은 단순한 퇴행이 아니라, 더 튼튼한 향상의 기반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성장통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원효는 요석과의 인연을 계기로, 깨달음의 수준과 힘을 더욱 향상시켜가는 획기적 계기로 삼았다.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계기로 하여 원효는 더욱 강한 열정으로 구도의 길에 매진하여, 마침내는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무애(無碍)의 경지, 대자유의 경지를 획득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석공주와의 파계가 원효로 하여금 속인으로 떨어지게 하는 사건으로 매듭지어진 게 아니라, 더욱 불법에 정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석과의 파계가 더 큰 원효와 얽어지는 참 의미다.
원효는 여기서 힘을 얻어, 그 사상의 밑동이 되는 일심(一心)사상, 화쟁(和諍)사상, 무애(無碍)사상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불교의 세 가지 큰 진리 곧 삼법인(三法印)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다. 제행무상은 인연으로 인하여 생겨난 모든 현상은 변하므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영구히 변하지 않는 불변의 고정된 실체는 없다. 이것이 제법무아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인데도 중생은 그것이 영원한 것이라 착각한다. 또 나에게는 ‘나’라고 하는 불변의 그 무엇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나’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는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착각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무엇에 집착하고 분별한다. 좋고 나쁨, 사랑과 미움, 생겨남과 멸함과 같이 이분법적으로 분별하고 그 중 하나를 취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명에서 비롯된 망념이요 환각이다. 이러한 집착과 분별의 무명에서 벗어나면 누구나 깨달은 자 곧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의 근원 그것을 가리켜 원효는 오직 ‘하나가 된 마음’곧 일심(一心)이라 하였다. 이 일심의 경지에서는 허구였던 실체의 벽이 무너져 모든 존재가 서로를 향해 열려 ‘한 몸’과도 같은 전일적 통섭의 면모로 드러난다. 이것이 원효의 일심사상이다.
원효는 이 일심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화쟁(和諍)의 보편원리를 수립하였다. 화쟁사상이란 어떤 문제에 두 가지 이상의 다른 견해가 있을 때, 서로 다른 견해를 융섭의 이념에 의하여 화해시키고 회통시켜 큰 법의 바다로 융합시키고자 하는 사상이다.
당시 신라에는 다양한 불교 이론이 있었으며, 각 이론가들이 다른 이론들을 배척하며 자신의 이론만이 옳다는 주장을 펴는 등 논쟁이 극심했다. 그러한 정황 속에서 원효는 비판하고 긍정하는 두 가지 논리를 융합하여,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고자 하였다. 모순과 대립을 한 체계 속에 하나로 묶어 담은 이 기본구조를 가리켜 그는 ‘화쟁’이라 한 것이다. 통일․화합․총화․평화는 바로 이와 같은 정리와 종합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원효는 당시의 여러 이설(異說)을 열 개의 글로 모아 정리한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저술하였다. 화쟁은 이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외에 그의 모든 저서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기본적인 논리다. 마치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그 파도와 바닷물이 따로 둘이 아닌 것처럼, 중생의 일심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그렇지 못한 무명(無明)이 둘로 분열되고는 있으나, 그 진여와 무명이 따로 둘이 아니라 하여,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도 화쟁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러니 화쟁 역시 일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하나의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화쟁사상은 그 후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적인 사상으로 자리잡았으며, 고려시대 대표적인 사상가 의천(義天)과 지눌(知訥)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무애사상은 어떤 것에도 걸리거나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의 경지다. 어쩌면 요석공주와의 인연도 이러한 그의 무애사상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일찍이 화엄(華嚴) 사상을 쉽게 풀이한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뭇 사람의 관심을 끄는 가운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큰 표주박을 두드리고 노래하면서, 이 거리 저 마을에 나타남으로써 불교를 생활화하는 데 힘을 기울인 것도, 바로 그의 무애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원효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바다와 같으므로, 모든 것이 평등하여 차별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효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심을 주장하는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갔던 것이다.
원효는 요석과의 파계 이후 거기에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이를 계기로 하여 더욱 불법에 정진하여 귀족 중심의 신라 불교를 민중 불교로 뻗치는 데 힘을 쏟았고, 나아가 일심(一心)사상, 화쟁(和諍)사상, 무애(無碍)사상을 펼쳐 나갔다. 이것이 원효의 파계가 갖는 커다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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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재는 내친구 원문보기 글쓴이: 장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