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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서울 기념물 29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전경. 전방에 택지 개발로 얼마 뒤에는 아파트나 주택이 들어 설 듯... |
이후원(李厚源, 1598~1660)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남항거사(南港居士)이다. 세종의 다섯 번째 왕자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7세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한(李漢)이고, 할아버지는 이인건(李仁健)이며, 아버지는 군수 이욱(李郁)이다.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로 문정공(文貞公) 황정욱(黃廷彧)의 딸이다. 부인은 참판 신희도(辛喜道)의 딸이다. 아들로 이선(李選)을 두었다. |
▲ 주택가에 차를 세우고 뒷편으로 오르면 이 곳도 택지 개발 중입니다. 전방 소나무군 좌측에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이후원은 김장생(金長生)에게서 배웠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태인현감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1627년(인조 5) 왜구를 잡은 공으로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며, 1628년 포로를 잡은 공로로 녹훈되었으나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후 단양군수와 안산군수를 거쳐 한성부서윤을 지냈다. |
▲ 언덕에 올라서 돌아 본 진입 부분 모습과 전방의 완남부원군 묘역 원경. 맨 좌측이 완남부원군 묘역입니다. |
1635년(인조 13) 익산군수로 있다가 같은 해 10월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홍서봉(洪瑞鳳)·김상헌(金尙憲) 등의 천거로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세자시강원문학을 거쳐 1636년 12월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여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 무렵 이후원은 대장 신경진(申景禛)의 비겁한 죄를 탄핵하고, 남한산성에서는 독전어사(督戰御使)를 겸임하였다. |
▲ 봉분이 4기가 있습니다. |
▲ 진입 부분 첫 번째 묘역. 묘비가 없어서 누구의 묘인지는... |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되어 김류(金瑬) 등이 왕을 강화도로 모시려 하자, 왕이 남한산성을 몰래 떠나 강화도로 옮기는 것은 위태로운 계책임을 주장하였고, 남한산성을 적극 고수할 것을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때 최명길(崔鳴吉) 등이 주화론(主和論)을 펴자, 죽기를 각오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화의(和議) 후 세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는 문제에 반대하였다. 1637년(인조 15) 품계가 통정대부에 오르고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호조참의가 된 후 외직을 자청하여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
▲ 2번째 묘역 |
▲ 3번째 묘역은 완남부원군 우측 묘역입니다. |
1639년(인조 17) 다시 승정원의 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수원부사에 천거되었으나 왕이 이후원을 곁에 두고자 하여 병조참지로 임명되었다. 그 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서는 민력을 무리하게 쓰지 않고 사풍(士風)을 변경시켰으며, 군정(軍政)을 닦는 데 힘썼다. 1642년(인조 20) 사간원대사간, 이듬해 가선대부로 한성부우윤에 올랐다. 이후 강화부유수를 거쳐 사간원대사간에 재임되었다. |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좌측에서 바라 본 우측 묘역군 모습 |
1644년(인조 22) 심기원(沈器遠)이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임하면서 심복의 장사들을 호위대(扈衛隊)에 두고 전 지사(知事) 이일원(李一元) 등과 모의하고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수장이 되어 이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호조참판에 오른 뒤 사헌부대사헌을 지내고 1646년 형조참판이 되어 회맹연에 참여하였으며 가의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
▲ 묘역 하단에 완남부원군 신도비가 있습니다. |
▲ 신도비 지점에서 바라 본 묘역 전경 |
1647년(인조 25) 다시 사간원대사간이 되었고, 승정원도승지와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목민에 힘쓰고 『소학(小學)』을 간행하여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1649년(인조 27) 인조가 별세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형조참판에 이어 승정원도승지와 사헌부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우측 전방에서 바라 본 모습 |
1650년(효종 1) 소를 올려 “김자점(金自點)은 귀양 보내고, 유계(兪棨) 등은 처벌하지 말며, 성균관 유생의 동맹 휴학인 권당(捲堂)은 관용하지 않을 수 없고, 어진 정승이 정계를 떠날 때는 예우가 있어야 하며, 이이·성혼 등 두 신하의 학문과 도덕의 실상을 임금이 알아주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
▲ 대부분 봉분 앞에는 동자석이 있는데, 이 묘역에는 동자석 대신에 특이하게 해치석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
또한 효종의 북벌 모의에 참모가 되어 전함 200척을 준비하는 등 북벌 계획에 앞장섰으며, 그 뒤 1653년 승정원도승지로서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55년(효종 6)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는 추쇄도감(推刷都監)의 제조가 되어 전국의 노비를 추쇄하여 강화(江華)를 방비케 하였으며, 또한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되어 있는 『악학궤범(樂學軌範)』을 개간하여 사고(史庫)에 분장하게 하였다. 이어 한성부판윤, 형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사간원대사간이 되었으며 곧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
▲ 완남부원군 이후원과 초배인 광주김씨 합장묘이고, 우측 봉분이 계배인 영월신씨 묘역인 듯 합니다. |
1657년(효종 8) 9월 우의정에 올라 효종을 도와 북벌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준길을 병조판서, 송시열을 이조판서에 추천하여 임명케 하는 등 인재 등용에도 힘썼다. 이듬해 정월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왕의 병이 심하여 조정에 나아가 세자의 일을 도왔고, 1659년(효종 10)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논의에 대하여 송시열과 함께 기년제(朞年制)를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
▲ 완남부원군 묘역 정면과 측면 모습이며, 봉분 우측에 묘비가 측면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
만년에는 세자좌부빈객·지경연사·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청개하고 인화를 중히 여겼다. 선을 좋아하여 능변으로 악을 질시하였으며, 바쁜 관직 생활 중에도 경사(經史)를 공부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노년에 광주(廣州) 선영에 집을 짓고 '우재(迂齋)'라는 현판을 달고 살았다. 1660(현종 1) 노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73세였다. 1685년(숙종 11)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며, 정사공신으로 봉호는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이다. |
▲ 향로석 앞면에 완남이충정공묘라고 새겨져 있으며, 향로석 좌우측에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
이후원의 묘역은 1660년 조성된 초장지(初葬地) 금천(衿川) 삼석산(三石山)에서 광주(廣州) 세곡(細谷)을 거쳐 1704년 현 위치에 조성된 묘역으로서 다른 사대부 묘역들과 비교할 때 봉분 주변으로 호석(護石)을 두르고 해치상이 배치된 것이 특징적이다. 또한 묘역의 동남쪽 발치에 세워진 묘표는 조선 후기 대표적 성리학자인 송준길과 송시열이 각각 비문과 추기(追記)를 짓고, 당대의 명필인 이정영(李正英 : 1616~1686)이 비문의 글씨를 썼다. |
▲ 묘비 전면 모습 |
▲ 특이하게 묘비 측면에 '증정경부인광주김씨부좌'로 쓰여... |
전서(篆書)를 잘 쓰기로 이름났던 당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이 ‘우재상국이충정공묘표(迂齋相國李忠貞公墓表)’라고 쓰여 있는 두전(頭篆 : 전서로 쓴 묘표의 이름)을 쓰는 등 당대 명유학자들과 명필들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 정사(正史)인 실록 등을 보완하는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
▲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우측에 완남부원군과 광주김씨 합장묘이며, 옆에 봉분이 계배인 영원신씨 묘역이거나 우측부터 완남부원군, 광주김씨, 영원신씨 단분일 수도 있습니다. 정확히 아시는 분은 꼬리글로 알려주세요... |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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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우측의 시작 부분에 차를 세우고, 빨간선을 따라가면 이후원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서울 강남구 자곡동 476-29 |
지도 상단의 화살표 부분에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이 있습니다. 헌릉IC나 세곡동 주민센터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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