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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를 찾아서 �___박경숙
칠궁을 아십니까·2
박경숙
1. 육상궁毓祥宮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곡우穀雨와 소만小滿 사이에 들어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 입하立夏이다. 초여름 날씨를 표현한 것이 ‘보리가 익을 무렵의 서늘한 날씨’이다. 맥량麥凉, 맥추麥秋, 맹하孟夏, 초하初夏, 괴하槐夏, 유하維夏가 모두 입하立夏를 지칭하고 있다.
모내기가 시작된다. “입하물에 써레 싣고 나온다”라는 표현이야 말로 이 때의 농경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는 표현이다.
국가적 제사를 제향祭享이라 하는데 칠궁의 제사도 왕실의 제사이므로 마땅히 제향이라 격을 높이는 것이 온당하다. 어떤 분을 모시느냐 그 대상에 따라서 전殿·궁宮·묘廟 순으로 위계에 차이를 두고 있다. 전殿은 즉위 또는 추승된 군주에게 제향하며, 사찰·향교·서원·문묘 등에 주로 쓰이는 것으로 굉장한 집 또는 큰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궁宮은 군주의 사친私親을 모시는 경우이며 이러한 궁의 칭호가 쓰여진 때에는 영조시기로 숙빈 최씨의 사당 육상궁이 최초이다. 후궁들이 왕을 낳은 공로로 궁宮이라는 칭호를 받고 지백地魄을 모시는 묘墓가 원園으로 승격되기 시작한 것도 영조 때부터이다. 묘廟는 왕의 자손, 특히 세자나 세손으로 책봉되었던 인물에게 사용되었다.
영조는 제위 52년 83세까지 사신 장수 임금이시다. 등극하여 무려 200차례나 육상궁을 전배하였다. 숙빈묘에서 육상궁으로 격상시키던 해인 영조 29년1753 한해만도 37회나 전배하였고 다음 해에도 32회나 전배하였다 한다. 이는 열흘이나 보름에 한번 다녀갔다는 기록인데 놀라운 기록이다. KTX가 있고, 한숨에 달려올 수 있는 자동차를 보유하고도 바쁘다는 이유를 들어 찾아뵙지 못 하는 요즘을 생각하면 영조의 정성은 대단한 것이다. 더군다나 사당이 아닌가! 1년에 한번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는 우리네 풍습에서도 형제간에 사소한 다툼이 왕왕 있지 않은가. 연세 지긋한 분들이 방문하시면 ‘자제분들은 자주 오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때마다 웃음으로 대신 답을 하신다. 세상은 많이 변했다.
영조 20년1744 3월 9일 영조실록에서 다음과 같이 전배를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육상묘에서 효장묘孝章廟로 임어하였다가 밤 2경에야 비로소 회가回駕하였다. 효장묘는 창의궁彰義宮 안에 있는데 그 궁은 곧 임금의 구저舊邸이다.
·영조 20년1744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종묘宗廟의 하향대제夏享大祭를 행한 다음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였다가 저녁에 환궁하였다.
칠궁의 모태가 되는 곳이 육상궁毓祥宮이다. 현대적으로 덧붙여 본다면, 칠궁에 등기를 가장 먼저 올린 분이라 할 수 있다. 육상궁은 영조 원년인 1725년에 생모인 숙빈 최씨 정1품를 위하여 지어진 사당이다. 영조실록은 숙빈 최씨의 사당 숙빈묘淑嬪廟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조 1년1725
숙빈淑嬪의 사당祠堂이 이루어졌다. 숙빈은 곧 임금의 사친私親이다. 즉위하던 처음에 땅을 골라 사당을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사당이 이루어졌으니, 경복궁의 북쪽에 있다. 20년 후에 묘호廟號를 고쳐 정하여 ‘육상궁毓祥宮’이라고 하였다.
초기에는 숙빈묘淑嬪廟로 불리웠다가 1744년(영조 20) 육상묘毓祥廟로 개칭 하였다. 또다시 1753년(영조 29)에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하였다. 육상의 뜻은 기를 육毓, 상서러울 상祥을 사용하여 ‘상서러움을 기른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육毓은 오늘날 대표적으로 큰 쓰임을 가지고 있는 육과 달리 잘 사용하지 않고 있는 글자이다. 영조는 세 차례에 걸쳐 시호를 내린다. 영조 29년1753에 화경和敬을, 영조 31년1755에 휘덕徽德을, 영조 48년1772에 안순安純으로 내린다. 신위의 내용도 화경휘덕안순수복숙빈신주和敬徽德安純綏福淑嬪神主로 가장 길다. 그녀의 묘원은 파주의 소령원에 모셔져 있다. 여기서 화경和敬 시호를 추시하는 과정에서 영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영조 29년1753
(…중략…)
숙빈淑嬪 최씨崔氏에게 화경和敬이라고 추시追諡하고, 묘廟는 궁宮, 묘墓는 원園이라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儆戒하는 것을 경敬이라 하니, 경자가 좋겠습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화和자도 또한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화경和敬이라는 글자가 진실로 나의 뜻에 맞는다. 오늘 이후로는 한이 이후로것이 없겠다. 내일 마땅히 내가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친히 신주神主를 쓰겠으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하략…)
묘호廟號는 위계에 따라서 전, 궁, 묘 순으로 낮아진다. 전殿은 즉위나 추승 군주의 제향 공간에 이름 지어진다. 사찰의 부처를 모신 대웅전의 경우에도 전을 사용한다. 궁宮은 군주의 사친을 향사하는 경우이며, 묘廟는 군주의 자손으로 세자나 세손으로 책봉되었던 인물에게 묘우로 사용하였다. 전 다음의 궁호宮號를 어머니 숙빈 최씨에게 최초로 사용함으로써 미천한 어머니의 위상을 높여 드리고 영조 자신도 신분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어떤 시대보다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시대적 배경을 염두하여 본다면 미천한 신분의 벽을 넘어보고 싶은 한계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 또한 자격지심을 극복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선택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1882년고종 19 8월 1일의 화재로 신주가 소실되었다. 이때 제대로 살피지 못한 담당 내시 이유정李裕鼎을 파직하고 수직관守直官 박윤진朴潤珍을 태거汰去시켰다. 이듬해 6월 24일에 상을 주었다는 기사로 보아 6월에 중건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재가 났을 때 냉천정의 어진을 임시로 송죽정松竹亭으로 옮겨 갔으니 도로 모셔 오는 절차는 예조禮曹로 하여금 날을 받아 거행토록 하였다. 정궁이 소실되고 다시 지어진 것이다.
겸제 정선이 그린 <육상묘도毓祥廟圖>1739와 <장안연우長安煙雨>1741 속의 건물은 북악산을 배경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박한 초가지붕을 하고 있다.
경복궁 뒷산인 백악산白岳山을 배경으로 초가집 건물이 숙빈 최씨의 사당이다. 초옥草屋의 모습은 남종화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앞에는 홍살문이 있어 비록 초가이지만 이 건물이 사당임을 알려준다. 이 그림의 위에는 부묘도감이 있는데, 부묘란 상례기간을 마친 뒤 신위를 종묘 또는 사당에 옮겨 봉안하는 것이다. 좌목座目 즉, 이 사당을 세우는 데 참여한 관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관원은 총 책임자인 좌의정 조문명趙文命 이하 18명이다.
북악산 서쪽에서 멀리 관악산 사이의 서울 장안을 그린 그림이다. 육상궁은 지금의 남향과 달리 서향 또는 서남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육상궁으로 승격되기 이전이니 초기 숙빈묘를 지을 당시의 상세한 기록들을 남길 수 있는 의궤儀軌가 없어 공간 구성에 대하여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더구나 1968년 도로 개설에 의한 변형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모습과 2001년 칠궁을 개방하기 위하여 실측에만 머물고 당시 원형과 변형된 부분에 대하여 문헌으로 남기지 못한 것은 칠궁 연구에 있어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소만小滿과 영조의 어머니
소만은 여덟 번째 절기이다. 햇볕이 풍부하고 만물이 생장하여 가득 찬다[滿]는 의미를 담고 있다. 냉이, 보리와 대나무가 누렇게 변하게 된다. 지는 것이 있으면 뜨는 것이 있게 마련, 자신은 누렇게 변하는 대신 그 영양분으로 죽순을 키워낸다. 우리들은 죽순과 씀바귀를 맛있게 먹게 된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하듯, 큰 인물 뒤에는 반드시 그를 위해 희생한 인물이 있다.
영조에게는 두 분의 어머니가 계셨다. 한 분은 영조를 낳아주신 숙빈 최씨이다. 숙빈 최씨가 영조에게 왕족의 피를 물려주신 정신적인 지주였다면, 또 한 분은 바로 정치적인 신뢰와 지지를 주었던 인원왕후 김씨였다. 두 분의 희생과 사랑은 영조에게 값진 것이었다.
숙종에게는 인현왕후 민씨와 후궁이었던 장희빈을 포함하여 네 분의 정비를 두었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부인으로 떠올릴 수 있는 분은 인현왕후 민씨이다. 후궁을 꼽으라면 희빈 장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는 우리들에게 역사의 라이벌로 각인된 것이다.
숙종에게는 원비인 영돈령부사 김만기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가 있다. 숙종과 함께 1671년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6년 후인 1680년 1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유일한 혈손이었던 두 딸마저 일찍 죽어 자손이 없는 상태였다.
인경왕후 김씨 사후 숙종의 제2 계비가 되신 분이 인현왕후 민씨이다. 1681년 14세의 나이에 숙종의 계비가 되어 8년 동안 왕후의 자리에 있다 기사환국1689 때 폐비가 되어 서인으로 내쳐지게 된다. 이때 장희빈이 왕후의 자리에 있다가 5년 후인 갑술환국1694으로 서인의 집권과 함께 다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물론 인현왕후는 왕후로 복위했다. 그러나 끝내 자손을 낳지 못한 채 복위 7년 후 34세에 병환으로 죽었다.
『인현왕후전』은 국문학사에서 『한중록』, 『계축일기』와 함께 3대 궁중문학으로 꼽히고 있다. 작자미상으로 인현왕후 민씨를 주인공으로 하여 쓰여진 궁중수필이 바로 『인현왕후전』이다.
생모 숙빈 최씨는 숙종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으나, 첫째와 셋째는 일찍 죽어 둘째만 살아남았는데, 그가 바로 연잉군 영조이다. 숙종 27년1701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죽자 이듬해 1702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가 간택되어 왕비에 책봉되었다. 숙종이 맞이한 세 번째 계비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49살의 생애동안 실질적으로 숙종의 곁에 있었던 분은 영조의 어머니 최씨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숙종과 숙빈 최씨의 만남은 인현왕후가 기사환국1689으로 폐비가 되어 사가에 있게 된 후였다. 인현왕후의 탄신일 4월 23일을 맞이하여 정성스럽게 음식을 마련하여 그의 복위를 빌고 있었던 것이 숙종과 숙빈 최씨의 첫 만남이었다. 숙빈 최씨가 폐비 신분의 중전을 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행위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숙빈 최씨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기게 된다. 그것이 오히려 부부의 연이 되어 인생 역전이 되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인원왕후는 영조보다 일곱 살이 많은 계모이며 영조가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마다 도와주고 지지해준 정치적 후원자였다. 경종이 연잉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도록 노론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왕실 어른은 인원왕후였다. 노론 영의정 김창집이 경종의 허락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대비전 인원왕후의 교지를 받도록 요구한 것도 이미 연잉군과 인원왕후 사이에 교감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잉군이 세자 책봉을 받을 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경종과 연잉군(영조)이 우애가 깊은 형제지간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소론과 노론이라는 정치적 색이 있었다. 이때 인원왕후는 다음과 같은 봉서를 내려 연잉군을 지지하여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게 된다.
‘연잉군’ 이어 그의 언문교지는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으로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게소? 나의 뜻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하교 하심이 옳을 것이요”
효장세자가 영조 4년1728에 죽고 7년 뒤 영조 11년1735 42살에 어렵사리 얻은 사도세자를 얻고 기뻐하며 제일 먼저 달려가 기쁨을 같이 나누었던 분도 계비 인원왕후 김씨였다. 그런 인원왕후 김씨가 영조 33년1757에 별세하자 영조가 친히 지은 인원왕후 행록을 올린다.
·『영조실록』영조 33년1757 3월 26일
임금이 친히 대행 대왕대비의 행록行錄을 지었다. 시호諡號를 의정議定할 때가 닥쳤으므로, 밤에 승지를 불러 눈물을 삼키며 글을 불러주고 적도록 하였는데, 기운이 피로하여 이튿날에야 비로소 마치고 하교 하기를,
“정신이 더 쇠모衰耗해지기 전에 자성慈聖의 덕행德行을 만에 하나라도 유양揄揚 하려고 한다.”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우리 대행 자성은 바로 우리 성고聖考 숙종 대왕의 계비繼妃로서, 성은 김씨金氏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인데,
(…중략…)
좌찬성으로 추증하였다. 정묘년(숙종 13), 1687년 9월 29일 축시丑時에 우리 자성께서 순화방順化坊 사제私第의 양정재養正齋에서 탄강誕降하셨으니, 바로 조희일의 구제舊第이다. 임오년任午年(숙종 28), 1702년에 왕비로 책봉되고, 이어서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생략…)
영조가 친행록을 직접 지어 올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영조는 인원왕후 살아 생전에는 물론이거니와 돌아가신 뒤에도 추모의 정을 표하여 효도를 다하고자 하였다.
위의 행록을 통하여 두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인원왕후의 친가와 외가에 대한 계보와 인원왕후의 탄생지가 조희일이 살았던 집안 양정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인원왕후의 외할아버지는 조경창趙景昌 : 1634∼1694이다. 조경창의 조부가 조희일趙希逸이다. 쌍정문雙旌門1)을 받아 오늘날의 종로구 효자동의 이름을 만든 효자 조희정趙希正과 조희철趙希哲의 동생이 조희일이다. 영조는 인원왕후의 탄생지인 양정재의 양정재기御製養正齋記를 친필로 써서 판을 걸기도 하였다.
『영조실록』영조 461770 9월 25일의 기록에는,
임금이 양정재養正齋에 나아갔다. 양정재는 바로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외가인데, 왕후가 이 집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성모聖母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육상궁을 전배하는 길에 들른 것이다. 양정재는 육상궁 동편 담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술회문述懷文을 지어서 세손에게 명하여 벽에 걸고, 집주인 조학천趙學天의 부자父子를 모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육상궁에 나아가 하룻밤을 유숙하였다.
조학천은 조희일의 종손이다. 조학천 부자를 모두 관원을 골라서 등용함을 일컫는 ‘조용調用’하라 명하신 것으로 보아 영조가 인원왕후 외가를 각별하게 대하고 있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순조 30년1830 경에 지어진 『한경지략』에는 “김주신제 순화방 대은암동에 있으며 연호궁의 곁이다. 이곳 양정재는 인원왕후께서 탄강하신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실록』 511775년 8월 4일의 기록에서 “양정재 주인 윤광심에게는 구마2)를 특별히 내려 광명전 앞에서 친히 받아 가도록 하고…….”를 보면 『한경지략』의 양정재가 인원왕후의 탄생지로 기록된 것은 『영조실록』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조실록』의 육상궁의 동편 담장이라는 기록과 연호궁 곁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육상궁과 연호궁의 인근, 즉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중 현재의 청와대 영빈관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현재 양정재는 훼철되고 없다. 훼철시기는 양정재란 이름이 경농재의 한 전각 이름과 동일한 것에서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건설과 맞물려 훼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영조에게 있어서 숙빈 최씨와 인원왕후 김씨는 가장 은혜로운 어머니였다. 숙빈 최씨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는 미천한 신분의 소유자로서 영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 못한 약점을 명문가의 인원왕후 김씨가 그 역할을 대신하였으니, 영조가 어찌 인원왕후 김씨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인원왕후 김씨의 능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명릉明陵에 묻혀 있다. 숙종은 원비 인경왕후 김씨, 계비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후궁 희빈 장씨 대빈묘大賓墓를 모두 곁에 두고 있다. 탈 많던 지난 세월을 뒤로 하고 말없는 세월이 그들과 함께 흐르고 있다.
박경숙 / 국민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 조선후기사를 전공했으며 칠궁 문화유산해설사(2009년 12월~ 2011년 9월), 7대 서울시문화관광해설사 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