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風)씨 성의 시조인 복희와 여와씨에 대해
풍(風)씨 성을 황웅씨(黃熊氏)라 부른 기록이 또한 「제왕세기」에 나온다
천수시 복희묘 정문 바로 안 전경. 희황고리(복희 황제의 옛고향)라는 대리석 비문 앞에서 한 컷. 현수막에 위대한 화샤(화하)족의 시조로 걸려있는 바와 같이 동양 문명의 비조 동이 겨레의 조상(환단 고기에 5대 태우의 환웅 계자(12째 막내아드님)로 나온다) 태호복희 성인은 응수조종태호복(應須祖宗太昊伏 : 인류문화의 조상 뿌리는 동이족 태호 복희)의 주인공으로 주인이 떠난 대륙에서 진한시대에 그 종족의 정체성을 갖는 화샤(지나)족의 위대한 조상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으나 우리는 정작 그 뿌리조차 모르고 있다.
풍(風)씨 성의 시조인 복희와 여와씨에 대해 밝히면, 「제왕세기」에 ‘여와(女媧)씨는 풍성(風姓)이다. 포희(庖犧)제도를 계승했다’ 하고, 또 「풍속통(風俗通)」에 ‘여와(女媧)는 복희(伏希: 羲, 希는 고대에 통용됐음 여희의 희도 복희의 희와 서로 통용되어 쓰였음을 알 수 있다)의 누이(妹)다’ 했고, 또 위(僞) 「3분(三墳)」에 여와(女媧)는 복희의 후(后)가 되었다 하니 한결 같이 복희와 여와는 형매(兄妹)지간임을 증명한다.
당시 복희 수도는 양자강에 둥지를 틀고 있었던 동이 묘요족 바로 좌상의 쓰촨(사천성) 유역에 있었는데 이곳은 복희 도등인 뱀과 유사한 도깨비 도등을 상징한 파촉(巴蜀) 땅이었으며 수도는 지금의 회양현(淮陽縣)인 진(陳)이니 하남(河南) 진주(陳州)였다.(「상서(尙書」<목서(牧誓)>에 촉(蜀)과 모(髦: 운남성에 사천성에서 넘어간 것으로 보이는 모족이 있음)가 나오는데 그 주석에 모두 파촉의 나라이름이라 했다) 더욱 위(僞) 「3분(三墳)」은 두 사람이 형매(兄妹)혼인을 한 것을 인정하니, 이는 양자강 유역의 동이족 묘요(苗猺) 신화와 더불어 절합(切合:잘려진 채 합한 것)된 것이며, 혹 작자는 곧 이들의 신화 영향을 받았거나 또한 서정(徐整)이 지은 「삼오역기(三五歷記)」조차 반호(槃瓠)가 반고(盤古)가 되었다 하니 곧 요인(猺人)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와 미예 만대에 전하다Click here!)
위(僞) 「3분(三墳)」에 , ‘복희씨는 수인(燧人:부싯돌 만듬)의 자손이다. 이로 인해 풍(風)이 태어나 풍씨 성이 되었다’ 했다.(그러나 이 대목은 「환단고기」의 태우의 환웅 막내아들이라 한 기록과 다소 다른 기록인 것 같지만 수인을 우리 피붙이 역사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국어」, 「제왕세기」가 다루고 있는 왕통 또한 주로 풍성(風姓)이다.
이 풍씨 성을 황웅씨(黃熊氏)라 부른 기록이 또한 「제왕세기」에 나온다.(황제헌원의 유웅씨와 단군이 즉위하는 신목과 웅상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황제 헌원은 웅(熊) 도등(圖騰:깃발상징 토템)을 숭배하여 유웅(有熊)씨가 되고 그가 거주한 곳을 웅산(熊山)이라 불렀다 하며 높은 수레(高車)를 발명한 것으로 인해 헌원(軒轅)씨가 되었다 하니 황제 헌원의 유웅씨 역시 황웅씨(黃熊氏)의 태호복희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황웅족 곰족의 후예는 양자강 유역의 동이족 묘요(苗猺) 신화와 더불어 그 이동 경로를 짐작할 수 있지만 우리는 뒤의 담론부분에서 이들이 대륙의 다사다난한 동이 제 족간의 쟁패과정과 이합집산과정에 의해 양자강 유역의 회이족(淮夷族)-초민족(楚民族)인 웅영족(熊盈族)으로 변신해 나아갔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는 황제헌원의 유웅(有熊)씨가 그 한갈래였던 것 처럼 동이 제 족은 웅족으로 이미 그 날을 세우고 있었음을 뜻하며 단군신화중의 곰족과 호족의 쟁패신화 역시 환웅 배달국의 웅(雄)과 웅(熊)은 고대에 서로 통했기때문에 정통 웅족(배달환웅족)과 정체불명의 이족(異族)과의 한반도 간방위 유입시기의 쟁패과정을 가히 추정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곰과 호랑이 신화가 배달국 웅족의 정통후예가 대륙으로부터 북만주로부터 백두산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유입되는 쟁패과정이 기록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게다가 하부 구석기시대 말의 마사특리(摩斯特里) 안기(安期)를 또 “혈웅기(穴熊期)”라 명명했으니 또한 이와 합치한다.
「제왕세기」에 일월의 밝음을 본 따 호칭한 것이 대호(大皥)라 했고, 「예기」<월령소>에 대호(大皥) 복희(宓犧)씨는 써 동방에 입덕(立德)하여 대호(大皥)라 불렀으니 그 뜻이 한결같다. 복희(宓犧) 시절에는 천하에 짐승이 많아 사냥으로 백성을 교화시켰다 하고, 「초주(譙周)」<고사고(古史考)>에 ‘복희가 어망을 만들었다’ 하고, 「한서(漢書)」<율력지(律曆志)>에 ‘대호(大皥)씨가 망고(罔罟:망과 고는 그물)를 만들어 사냥과 고기잡이(田漁)를 하여 희생제물을 취한 고로 천하 사람이 부르기를 포희(炮犧)씨라 했다’고 나온다. 또 「제왕세기」에 ‘희생제물을 취해 써 포주(庖廚:부엌)에 바치니 천하사람을 먹였다. 그러므로 불러 가로대 포희(庖犧)씨라 했다’ 또 「습유기(拾遺記)」에 이르기를 ‘포(庖)라는 것은 포(包)이니 만상을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희생(犧牲)으로 제수(祭需)를 갖추어 백신(百神)에게 흠향하게 하니 백성들이 그 성인(聖)에게 복종하므로 왈 포희(庖犧)라 했다’, 「예기(禮記)」<월령소(月令疏)>에 ‘덕이 능히 희생제물을 잡고 엎드리니 이를 복희(伏犧)라 이르니 곧, 복희(宓犧)이다’라 했다.
필자가 감숙성 천수시에 있는 복희묘(伏羲廟)에서 채취한 자료에 의하면 복희는 팔괘를 그어 문명을 시작하고, 서계(書契)를 긋고 결승(結繩)문자로 정사(政事)를 하고 점서(占筮),역도(曆度)를 창시해 절기(節氣)를 정하고 ,백초를 맛보아 9침(針)을 제정했으며, 용(龍)으로 관(官)의 벼리를 삼아 부(部)를 나누어 치리(治理)했는가 하면, 나무에 구멍을 내 불을 얻고(鑽木取火), 철을 야련해 그릇을 만들었는가 하면(冶金成器),금슬(琴瑟)을 제작해 악곡(樂曲)을 만들고, 양잠으로 직물을 짜 의복의 개선하고, 물길을 내 밭을 개간하고 초목의 식수조림에 힘썼으며, 주방기구를 제작하고 주거시설을 개선시키고, 시집 장가가는 예를 정해 한 쌍의 가죽으로 예를 삼았으며, 어망을 만들어 고기잡이를 가르치고, 돼지 및 가축을 길러 주방을 채웠다고 전한다.
<회남자 남명훈>에 동이족 천자 치우에게 패한 황제를 침소봉대해 기술했어도 동이족 복희 시절만큼은 되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음을 본다. “옛날에 황제(黃帝)가 천하를 다스릴 때 스승인 역목(力牧)과 태산계(太山稽)의 도움으로 봉황 청룡 기린이 와서 놀 정도로 세상을 이상적으로 통치했으나 복희씨의 도(道)에는 미치지 못했다”
필자가 산동성 치박시 제국(齊國) 박물관에서 구입한 산동성 임치구(臨淄區) 문화 여유국(旅遊局) 소속 유빈(劉斌)이 발행한 향토사료 「제(齊)문화 100제(題) 지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제나라는 산동성 북쪽에 있었다)
-제지(齊地:산동성)의 동쪽에 대해가 있고 서쪽 경계에는 황하, 치수(淄水), 유수(濰水:산동성 발원 동북으로 흘러 황해로 유입), 제수(濟水), 술수(沭水:산동성에서 강소성으로 흐름),기수(沂水), 사수(泗水)가 그 가운데를 관통해 흘러간다. 수초는 풍미(豐美)하고 토지는 비옥해 완포(莞蒲:왕골) 어염(魚鹽)의 이로움이 부요(富饒)하니, 이는 인류 경제문화 개발을 솔선하고 발상한 지방이다.
(감숙성 천수시 부근 뇌택에서 태어난) 태호 복희씨가 가장 일찍이 이 지방에 머물러 살았다. 천상을 관하고 지리를 살피며 8괘를 긋고 문자를 새기고 새끼줄을 꼬아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고 수렵을 했으니, 인류사회의 어렵시대는 이곳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복희씨의 성은 풍(風)이다. 동족녀 여와씨가 복희의 뒤를 계승해 동이(東夷) 제지(齊地:산동성)에서 흥기했다.
복희의 후예는 임(任), 수구(須句), 숙(宿), 전유(顓臾) 등 4 개국인데, 춘추시기에 다시 존재해, 모두 해대(海垈)의 사이에 있어 부용(附庸:대국에 의존해 사는 나라)국이 되었다.(필자가 보기에 본래의 임, 숙, 수구, 전유국은 복희의 마당인 호북성, 호남성 사천성, 감숙성, 섬서성 등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춘추 시대 때에는 산동성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호복희는 용으로 도등(부족깃발무늬)을 삼아, 해빈(海濱) 선주민의 특색 휘지(徽志)를 수립했으니, 용 문화 곧 복희 문화의 창시인이다. 염제(炎帝) 신농씨는 복희족을 계승해 동이 제지(齊地:산동성)에서 흥기했다. 신농씨는 복희씨 문화를 계승해 발전했다. 나무를 베어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휘어 쟁기를 만들어, 백성을 가르쳐 쟁기와 보습의 이로움을 구해 농업이 이로부터 흥기했다.
신농씨는 또 저자(시장)를 열어 사방의 백성을 불러 모으고 천하의 재화를 거두어 모아 사람들로 하여금 교역하게 하여 각기 구하고 싶은 것을 구하게 하여 상업무역이 이로부터 흥기했다. 이와 동시에 신농씨는 다시 백초를 맛보아 의약을 베풀고 사람을 가르쳐 병을 고치니 의약이 이로부터 흥기했다. 염제 신농씨는 강(姜)씨 성이다. 공공(共工),치우(蚩尤),백이(伯夷), 봉백릉(逢伯陵)과 강태공은 모두 염제(炎帝)의 후예다. 그 중에서 공공은 가장 일찍 홍수와 더불어 항쟁한 사람이니, 그는 배(舟船)의 발명자이다. 치우(蚩尤)는 고대 역사상 병주(兵主) 혹 무조(武祖)로 전해져 칭해졌으니 무용(武勇)으로 천하에 위엄을 떨쳤다. 백이(伯夷)는 요, 순 시기의 사악(四岳)으로, 곧 사방 제후를 통괄하는 우두머리였으니, 그는 아국의 고대 형법과 “삼례(三禮)”의 창립자였다.
봉백릉(逢伯陵)은 상(商)나라 시대 제(齊) 나라 땅의 제후였다. 그들은 모두 강태공의 선조로 동이 제지(齊地)의 토착민으로 동이(東夷)문화 혹 제(齊)문화의 창조자였다. 곧바로 춘추시기로 넘어가 강(姜)씨 성 제국을 제외한 이외에도 래국(萊國), 순우국(淳于國), 향국(向國), 기국(己+其國), 기국(紀國) 등 강(姜) 씨 성 나라는 모두는 염제의 후예이니, 이는 거듭 동이 제지(齊地)의 주용 거주민이다.
태호복희씨와 염제 신농씨는 동이 제지(齊地)를 서로 계승해 일어났는데, 그들은 세세 대대 문화를 창조 발전했다. 고사(古史)에 “희농문화(羲農文化)” 혹 “희염문화(羲炎文化)”라 글을 써 칭하니 이는 제문화(齊文化) 혹 동이문화를 칭해 적은 것으로 이를 다시 “사령문화(四靈文化)”라고 적어 칭했다. 「한서」에 “희농(羲農)에서 융성한 기초가 닦이고, 황제와 당요(唐堯) 에서 규모가 광대해졌다”는 뜻은 복희와 신농이 화하문화의 넓은 기틀을 정했으며, 황제와 당요(唐堯)가 복희 신농의 기업(基業)을 계승발전한 것을 의미한다.
<온국(溫國)문정공집(文正公集) 직하부(稷河賦)>에 “아래로는 공자 묵자를 논하고 위로는 희염(羲炎)을 술(述)한다(下論孔墨 上述羲炎)”는 의미는, 아래로는 공자와 묵자의 학설을 토론하고, 위로는 복희, 염제가 개기창업(開基創業)한 본원을 추구해 글로 짓는다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모두 한가지로 희염(羲炎)의 문화와 공묵의 학이 그 원류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실히 하고 있으며, 제(齊) 나라 문화와 화하(華夏) 문화의 원류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확실히 한다.-
환단고기는 복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밀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처 마침내 진에 옮겨 수인,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에 살았으니 역시 풍을 성씨로 가졌다. 뒤엔 마침내 갈라져 패관임기포이사팽의 여덟가지 성이 되었다. 지금 산서성의 계수에 희족의 옛 거처가 있다. 임 숙 수 구 수유의 여러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로부터 나와 우사가 되었다. 신용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을 바꾸어 갑자를 처음으로 하였다. 여와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 받다. 주양은 옛 문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육서를 전했다.복희의 능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의 남쪽에 있다. 신농은 열산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다. 소전은 소호와 함께 모두 고시씨의 방계이다. 대저 당시의 백성들은 정착해서 생업을 이어갔으며, 차츰 크게 되자 곡마약석의 기술도 또한 점점 갖춰져서 낮에는 저자를 이루어 교역하고 되돌아갔다. 유망이 정치를 하면서 급하게 모든 읍의 백성들이 제휴하도록 했으나 떠나는 백성들이 많아져서 세상의 도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우리의 전통악기 생황은 중국에 없는 악기다. 그런데 여와가 바로 생황을 처음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그 그림이 천수시 복희묘에 그려져 있다. 물론 악기형태는 우리의 생황과 다르지만 동일한 이름이 그대로 우리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냥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여와씨가 생황을 만들어 들고 있는 그림이다.*동이족의 특성인 양잠을 장려해 천을 짜 의복을 개선한 복희씨
참고로 현재 경북 대구(慶北大邱)와 경기도 장단(畏湍) 및 파주(坡州)에 살고 있는 동방씨(東方氏)의 유래와 본관을 알아보면 이들이 복희씨에 연원을 대고 있음을 본다. 복희의 후예 패관임기포이사팽의 8대성이 있지만 그외의 성씨인 동방씨가 현재 우리 한반도에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동방씨는 고대 복회씨(伏羲氏)가 동방의 진(震)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동방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다.동방씨는 중국 제남(濟南:산동성)에 연원을 두고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정조(正祖) 때 문과(文料)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낸 동방숙(東方淑)이란 사람이 우리나라 동방씨의 인뭍로 문헌에 전할 뿐이다.오늘날 동방씨는 경북 대구(慶北大邱)와 경기도 장단(畏湍) 및 파주(坡州)에 소수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41가구에 1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