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이성계가 세운 첫수도 한양은 텐진고성이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山)을 봉하여 진(鎭)이라 하고, 물[水]을 표(表)하여 기(紀)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名山)
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12월 3일(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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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은 태조 이성계가 처음 수도를
세운 곳의 산이다. 그런데 목멱산이 등장한다. 김부식이 말하길 고려 서경 동쪽 목멱산에 고구려의 평양성 동쪽 동황성이 있다라고 했다. 고려는
지금의 북경 남쪽 향하현을 고구려의 마지막 평양성으로 알고 그곳을 서경으로 삼았다. 그래서 김부식이 말한 고구려의 동황성과 목멱산은 당연히
향하현에서 동쪽에 있어야 한다.
이조에 명하여 백악(白岳)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南山)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
태조 8권, 4년(1395 을해 / 명 홍무(洪武) 28년) 12월 29일(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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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다른 기록이 나온다. 고려의 해주에 있던 남산이
다른말로 목멱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첫수도는 태조실록을 참고하면 백악이라는 고려 수도 개경의 동쪽에 있던 산의 동쪽에서 서쪽에
걸치며 북쪽에는 서희가 삼각산이라 불렀던 산이 있고 남쪽에는 남산혹은 목멱산이 있어야 한다.

http://blog.daum.net/sabul358/13937663지도제공 향고도님 청나라
말기 북경과 천진의 고지도
고려의 서경이었던 현재의 향하현에는 아직도 거대한 성유적이 남아있고 최근에 복원했다고 한다

향하현 고성 모형도
중국기록에는 명나라때 초기 연왕주체(후에 영락제가 됨)가 송나라와 요나라때 성을 새로 증축했는데 연왕성즉 자신의 수도로 삼으려고 했다고
한다. 베이징성을 본떠서 만들어서 소베이징성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다른말로 천하제일성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성의 특징인 치와 옹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밖에 해자가 있고 내성와 외성 중성으로 둘러싸여서 그 크기는 비록 평양시와 서울시의 옛 성에 비할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방어하기 쉽고
삼중성으로 분명히 고대의 수도에 버금가는 도시임은 확실하다. 나는 이 향하현 고성이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평양성이자 고려의 서경으로 본다.
이곳은 조선과 명의 경계였기 때문에 누구의 땅이었는지 나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조선과 명양쪽이 모두 원나라 동녕부의 땅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인데 확실한 것은 이곳은 발해의 중경이다. 왜냐면 명사에 이곳이 광녕이라고 나오는데 발해의 중경이 광녕이 되기 떄문이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864 명나라 금주는 향하현이고 그 곳은
조선과 명의 경계
http://blog.daum.net/manjumongol/737 명나라 광녕은 향하현 일대
http://blog.daum.net/manjumongol/873 고려의 대동강(대통강)은 통주의
강
조선말기의 연행기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광녕이라는 지명유래에 대해 고구려의 평양성이고 발해의 중경이다.라고했다.고려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서경이라고 했다라고 써있으니 아마도 고구려 마지막 평양성은 발해의 중경이 되고 고려의 서경이 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조선황실에서도
고구려의 평양성을 북경으로 알고 있었으니 우연이 아닐 것이다.
광주(廣州)의 새로 주조(鑄造)한 종(鐘)이 이루어졌으므로 백악(白岳)과 목멱(木覓)에 제사를 베풀었다
태조 13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3월 19일(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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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白岳)·목멱(木覓)·한강(漢江)의 신(神)에게
비[雨]를 빌고, 각전(各殿)의 공상(供上)하는 약주(藥酒)를 정지하였다
태종 15권,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5월 22일(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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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조선초에는 백악과 목멱 남산이라는 지명이 조선초의 수도에 계속 등장한다. 이는 고려말의 지명이 계속 남아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도평의사사에서 경기도 각 고을의 쇠하고 성한 것과 넓고 좁은 것에 따라
좌우도(左右道)로 고치자고 청하니, 장단(長湍)·파평(坡平)·현주(見州)·사천(沙川)·포주(抱州)·풍양(豊壤)·서원(瑞原)·행주(幸州)·심악(深岳)·한양(漢陽)·부원(富原)·과주(果州)·철원(鐵原)·영평(永平)·승령(僧嶺)·삭녕(朔寧)·적성(赤城)·임강(臨江)·마전(麻田)·송림(松林)·연주(漣州)·고봉(高峯)·교하(交河)·금주(衿州)·양천(陽川)·남양(南陽)·안산(安山)·인주(仁州)·토산(兔山)·안협(安峽)을
좌도에, 개성(開城)·강음(江陰)·해풍(海豊)·배주(白州)·연안부(延安府)·평주(平州)·재령(載寧)·강화(江華)·진강(鎭江)·하음(河陰)·교동(喬桐)·서흥(瑞興)·우봉(牛峯)·신은(新恩)·협계(俠溪)·수안(遂安)·곡주(谷州)·부평(富平)·동성(童城)·통진(通津)·수안(守安)·김포(金浦)·덕수(德水)를 우도에 소속시키고서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6월 23일(신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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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고, 양광도·강릉 교주도·서해도를 개칭하다
결정적인 증거가 위에 있다. 우리가 고대에 좌도와 우도라고 부르는것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서 부르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지금 경기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면 좌도(동쪽경기도)는 해군이 없어야한다.
그런데 실록에는 경기좌도에도 수군이 있다. 내가 고려말 조선초 개경의 동쪽에 마치 한양이 있는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실록을 읽으면서 생각했는데
마침 개경은 우도(서쪽 경기도)에 속하고 한양은 좌도(동쪽 경기도)에 속한다. 그런데 익숙한 지명이 눈에 띈다. 바로 포주이다.
풍양(豐壤) 동남쪽으로 45리에 있는데 본래 백제
골의노(骨衣奴)이다. 노(奴)는 내(內)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으로 하여 현(縣)을
관할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풍양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9년에 내속(來屬)해서 후에 포주(抱州)로 하였다가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풍양에 속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경기(京畿) 양주목(楊州牧)
포주는 고려때 요나라와 고려의 경계에 있던 곳인데 금나라가 생겨날때 고려가 이곳을 차지했다. 원래는 고려땅인데 사실은 요나라가 차지했다가
다시 고려가 회복한 것이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294 요나라의 한수는 영정하
백제의 한수는 원래 산서성과 하북성경계일대였지만 고려때는 지명이동으로 요나라와 고려는 한수를 지금의 영정하하류로 보았다 그래서 지금도
漢이라는 지명이 천진일대에 남아있다. 물론 산서성에도 남아있다. 송사와 금사는 전부 백제를 영정하하류로 보고 기록했는데 그 이유가 고려가
漢水라는 지명을 영정하하류로 보았기 때문에 요나라도 그리했고 송나라와 금나라도 고려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기때문에 일종의 오해가 생긴 것이다.
한양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한수의 북쪽이다. 한양에 속한 포주라고 하면 당연히 지금 영정하의 북쪽 어딘가가 포주였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고려의
압록이었던 백하의 동쪽인 것이다.
1.포주가 2개였다면 내말이 틀린 것이 된다. 고려의주를 포주라고 하기도 하고 고려 양주를 포주라고 한다는 2개의 포주가설이다.
2.포주가 1개였다면 내말이 옳다. 고려의 의주즉 압록이었던 백하 동쪽과 한수였던 영정하북쪽은 동일한 지역이니 포주의 남쪽은 한양즉
한수(영정하)의 북쪽에 속하고 포주의 북쪽은 의주에 속한다라고 설명하면 간단하다.
해답은 바로 고려의 한수를 찾는 것이다.
한강(漢江) -옛날에는 열수(列水)라고 하였으며, 혹 여강(驪江)이라고도 한다. ○ 습수(濕水)와 산수(汕水)를
덧붙인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맥국(貊國)은 한수(漢水)의 동북쪽에 있다. ○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다. ○
주(注)에 이르기를, “열(列)은 물 이름으로, 지금 대방(帶方)에 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열수는 예로부터 혹 한수라고 하였음이 명백하다.
해동역사
조선후기의 지리지를 고려해 보면 습수와 산수가 합쳐져서 한수가 된다고 하고 그 한수를 지금 서울시의 한강으로 보았다.그래서 지금 춘천시를
맥국이라고 우기고 한수의 동북쪽이니 옳다라고 한다. 또한 한강북쪽을 대방군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전부 습수와 산수 열수가 한강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적도라는 송나라때 고지도인데 저기에 습수가 나온다. 저 습수는 고려와 송 요 금나라떄 습수라는 것이지 고조선과 고구려의 습수가 아니다.
고조선때는 훨씬 남쪽인 지금 태행산근처에 있었다. 그러나 저 지도를 통해 알수 있는 것은 바로 요나라가 한수라고 기록한 영정하가 고려 역시
한수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면 습수는 결국 한수에 합쳐지기 때문이다. 우적도가 송나라때 제작되었다고 짱개들이 말하지만 나는 등주와
래주의 위치라든지 요수의 위치라든지 송나라 시대의 고지도인 기주협우갈석도(요수가 영정하로 그려져 있다)와 다르기 때문에 명혹은 청때에 누군가
수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면 이제 모든 의문이 풀린다. 송나라와 금나라가 백제를 영정하하류로 기록한 이유가 바로 당시에 한수를 영정하하류로 보았기 때문이다.
백제의 중심은 한수가 아닌가 결국 태조 이성계가 고려 한수근처에 처음으로 세운 수도 한양의 근처에 있던 포주는 바로 요나라와 고려가 싸우던
의주근처의 포주가 맞던 것이다.

http://blog.daum.net/sabul358/13937663 지도제공 향고도님 청나라말기
고지도
태조 이성계의 첫수도 한양은 바로 고려개경인 하북성 청현의 동쪽 지금의 천진일대이다. 이곳은 명나라의 기록대로라면 임진왜란때도 엄연히
조선의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