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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언니] 01
S#1. 인서트
치이익- 소리와 함께 압력밥솥의 빨간 꼭지가 고개를 내밀며 올라온다.
긴 머리를 꼬아올려 머리 사이에 젓가락을 꼽는 은조의 뒷모습.
그 위에 도마질하는 소리, 서걱서걱 김치 씹는 소리, 그리고 또 그 위에.
강숙(E) : 이거 안 놔?
S#2. 털보장씨네 집 부엌
은조, 표정없는 얼굴로 김치를 썰고 있다.
장씨(E) : 강숙아, 강숙씨, 강숙이-
전기압력밥솥 꼭지에서 김이 오르고 있다.
강숙(E) : 안 치워?
가스렌지 위의 냄비에서 찌개든 국이든 보글보글 끓고 있다.
장씨(E) : 내가 잘몬했다 안하나? 한 번만 용서해도!
정우(뚱뚱하고 키 작은 중학생, 땟국이 질질 흐르는 야구유니폼은 벗지도 않은 채),
은조 옆에 서서 은조가 썰어내는 김치를 손으로 낼름낼름 집어먹고,
은조, 그런 정우의 손등을 찰싹 쳐낸다.
강숙(E) : 비켜!! 손대지 말란 말야 이 인간아!
S#3. 장씨네 안방
강숙, 캐리어 펼쳐놓고 짐 싸는 액션(액션이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할 마음은 없는).
그 등 뒤에 무릎 꿇고 앉은 털보 장씨가 손이 발이 되게 빌고 있다, 거의 울 것 같다.
장씨 : 내가 우예 하모 대겠노, 으이? 니가 하라는 대로 다 하께, 말만 해 도고!
강숙 : (휙 돌아보며 블라우스 단추 세 개쯤 착착착 풀고 어깨를 잡아내려 맨살을 보여준다, 시퍼런 멍자국)
하라는 대로 해서 이렇게 만들었냐?
장씨 : 그기 내가 그란 기 아이고 술이,
강숙 : 듣기 싫어 이 인간아! 얼굴 절루 안치워?
장씨 : 그라이까네 내 술 묵었을 때는 내 옆에 오지 말라 안카드나...우짜꼬, 이 이쁜 몸땡이를...(손 내미는데)
강숙 : (깨지는 소리로) 절루 가아아아아아--앗!
장씨 : (소리에 밀려 털썩 주저앉는다)
S#4. 주방
안방의 소란과는 상관없이 차려진 밥상(밥과 숟가락만 없다) 앞에 정우가 군침을 흘리며 앉아있다.
안방에서는 누가 뭘 던졌는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나고,
은조, 딱 자기 몫의 밥과 수저를 가져오더니 정우 앞에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한다.
정우 : ??
강숙(E) : 던졌어? 지금 그거 던졌어?
정우 : 누야.
은조 : (밥만)
장씨(E) : (화나서 딴 사람 된 목소리) 입 다무리---! 한 소리만 더 앙알대모 내 손에 칵 디지뿐다 니!!
정우 : 누야. 내는 밥 안주나? 와 니만 먹는데?
은조 : 저 소리 안 들려?
장씨가 뭘 마구 집어던지는지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에 강숙의 악다구니 소리가 본격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한다.
은조 : 언제 또 밥상이라는 걸 차려서 밥이란 걸 먹게 될지 몰라 마지막으루 먹어둬야 하는 거그등? 말 시키지 마. (먹는)
정우 : 니 집 나갈 기가?
은조 : (안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강도에 따라 먹는 속도가 빨라진다)
정우 : (후다닥 일어나 밥솥으로. 넓은 국그릇에 밥 푸면서) 누야 니가 집 나가뿌모, 내도 이기 마지막 밥이다. 밥해줄 사람 없으가.
(푼 밥과 수저 챙겨 은조 앞에 와 앉아 경쟁적으로 먹기 시작하며) 안있나, 니, 내 말 똑띠기 들어래이.
누야 니가 으데서 우예 살고 있든동 내가 꼭 니를 만나가 니 인생 책임지께. 내만 믿으라.
강숙(E) : 으아아아악---- 은조야-----
은조 : (벌떡 일어나 총알같이 안방으로)
정우 : (은조 한번 흘긋 보고 밥을 계속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다 한 숟가락 가득 입에 더 넣고 따라 일어선다)
S#5. 안방
안방문 벌컥 열리며 은조가 날듯이 들이닥쳐, 야구방망이 들고 강숙을 공격하려던 장씨를 덮쳐 넘어뜨린다.
강숙은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고, 장씨의 손에서 몽둥이 떨어지고,
뒤이어 들어온 정우가 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장씨 손에서 떨어진 방망이를 창문 밖으로 휘익 던져버린다.
S#6. 인서트
공중돌기를 하며 왈츠를 추는 야구방망이를 따라 장씨네 창문밖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 고깃배가 다니는 남해의 섬들과,
‘벼랑 위의 포뇨’처럼 언덕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장씨의 집 너머 어느 풀밭에 방망이가 안착한다.
방망이 끝에 정우가 삐뚤빼뚤 새겨넣은 글씨, “송은조는 뽀레버 한정우에 여자다”.
‘에’ 위에 엑스표, 그 아래 ‘의’로 고쳐놓은 것도 보인다.
S#7. 언덕길
한 손으로 강숙의 손목을 틀어쥐고, 다른 한 손에 짐가방을 들고,
아래로 아래로 내달리는 은조, 아직도 머리에 젓가락이 꽂혀 있다.
강숙, 갑자기 은조의 손을 뿌리치더니, 미처 잠그지 못한 블라우스의 단추 하나를 마저 잠근다.
강숙 : (잠그며) 아우 나 이 옷 진짜 촌스러서 싫은데! 도망을 칠래두 뭐 입을 만한 게 있어야 칠 거 아냐?
은조 : 그러구 싶어 지금? (하다가 헉 놀라는)
쫓아나오는 장씨. 은조, 다시 강숙의 손목을 틀어잡고 뛴다. 그들을 뒤쫓아 뛰는 장씨.
그 뒤로 양 볼이 미어터지도록 밥을 씹으며 뒤뚱뒤뚱 쫓아오고 있는 정우.
장씨 : (애절한) 강숙아--- 가지 마라---- 강숙이------
정우 : 누야--- 잽히지 말고 잘 가그라--!
장씨 : 강숙아---- 내가 잘몬했다---- 강숙아------ 니 내 손에 잡히기 만 하모 디진대이!
정우 : 누야--- 밥 잘 묵고 건강해라----
정우, 그렇게 소리를 지르더니 재게 뛰어내려와 언덕의 높은 위치를 이용하여 장씨의 뒤에서 헤드락을 건다.
멀어져가는 은조와 강숙.
장씨, 정우에게 잡혀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몸만 버둥대는데.
정우 : 아제요, 내 직일랍니까?
장씨 : (켁컥)
정우 : 직이도 내 묵던 밥만 다 묵고 직이몬 안대겠능교?
장씨 : (버둥버둥)
S#8. 달리는 택시 안
뒷좌석에서 다투고 있는 강숙과 은조.
강숙 : 대책이 없잖아 대책이! 한푼 손에 쥔 것도 없이 뭘 어쩌자구?
은조 : 언젠 손에 뭐 쥔 적 있어? 맨손 아닌 적 한 번두 없었어.
강숙 : 갈 데나 있냐구 우리가! 기차만 타면 뭐해? 내릴 데가 없는데!
은조 : 아무 데나 여기만 아니면 돼.
강숙 : 넌 애가 도무지가 말이 안 돼 말이. 아저씨, 아까 탔던 데루 도루 가요.
은조 : 기차역으루 그냥 가요 아저씨.
강숙 : 아저씨, 택시비 받구 싶으면 도루 가요.
은조 : (아저씨 쪽으로 몸을 내밀며) 네시 삼십 분 기차 놓치면 안 돼요, 빨리 가주세요.
강숙 : (그런 은조의 몸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이게 진짜!!
은조 : (버럭) 그렇게 얻어맞으면서 도루 가구 싶어? 엄마 말대루 뜯어먹을 것도 없는 남자라며! 뜯어먹을 거 없는 사람한테
등짝이 보라색이 될 때까지 얻어맞으면서 거길 왜 가아!
강숙 : (은조보다 더 크게 버럭) 잘 알지두 못하면서 뭘 잘났다구 악을 쓰구 지랄이야 이년아!!
은조 : (고래고래) 나한테 욕하지 마아아-앗!!
아저씨, 끽 하고 차를 거칠게 세운다. 은조와 강숙이 동시에 몸을 휘청-한다.
강숙,은조 : (동시에) 아저씨잇!!
아저씨 : 내리라. 시끄러바서 운전 몬하겠다. 퍼뜩 안 내리나!
강숙 : 아저씨, 선 김에 돌아요. 얼른 탔던 데루 가자구요.
아저씨 : 이 아지매가 차말로!
은조 : 엄마, 혹시 이거 때문이야?
강숙 : (휙 하고 은조를 보는)
은조 : (가방 뒤져 조그만 복주머니 같은 것 꺼내보인다)
강숙 : (놀라서 후다닥 복주머니 낚아채 안을 들여다보는) .....
은조 : 뜯어먹을 게 그거였으면 내가 챙겼으니까 그만 가자구.
강숙 : (침을 꿀꺽 삼키며 복주머니의 줄을 당겨 단단히 묶으며) 아저씨, 얼른 기차역으루 안가구 뭐해요?
우리 기차 놓치면 아저씨가 책임 질 거예요?
S#9. 장씨 안방
장씨, 장롱 파헤쳐놓고, 장롱 속 텅 빈 서랍을 보고 있다. 털썩 주저앉는 장씨.
장씨에게 한 대 맞아서 눈가가 퍼렇게 된 정우가 문가에 서서 그런 장씨를 보고.
정우 : 아제 팔자가 그래 생기묵었다 생각하이소.
장씨 : (휙 하고 정우를 본다)
정우 : (움찔, 한발 뒤로 물러나며) 어차피 강숙아지매한테 사다바칬든 거 아잉교. 가꼬 토끼뿌까봐 숨카났든기제.
장씨 : 대봉이 데꼬온나.
정우 : 대보이 그 깡패는 와예?
장씨 : 셰끼 한 대 더 맞고 싶나 니!
정우 : 아니예. (휙 사라진다)
장씨 : (뿌드득....)
S#10. 기차역 앞
승용차 한 대가 급히 와서 서고,
‘대봉’으로 보이는 깡패같은 자와 수하 똘마니들 서너 명이 함께 내려서 급히 기차역 안으로 들어간다.
S#11. 기차역 안
대봉 일행이 들이닥치는 순간, 개찰구 폐쇄된다. 4시 30분 출발하는 기차가 이미 서서히 출발하고 있는 중이다.
대봉 : (역무원에게) 저 기차, 이 다음 역에는 멫 시에 스능교?
역무원 : 다섯 시에 습니다.
대봉 : (똘마니들에게) 한 이백 밟으모 먼저 도착할 수 있제? (하고 먼저 뛰어나간다)
똘마니들 : (따라나간다)
S#12. 인서트
어두운 주머니 안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 그 위에
정우(F) : 누야, 내가 아제한테 맞아디지까봐 대보이는 불러다 줬그등. 잽히지 말고 잘 가그라, 글마한테 잽히모 뻬도 몬추리!
S#13. 달리는 기차 안 객실
그 반지를 누가 볼새라, 은조쪽으로 등을 돌려 살그머니 꺼내 제 손가락에 끼워본다.
은조,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다.
정우(F) : 누야, 내 말 듣나?
은조 : 안 잡혀. 끊어. (저쪽에서 정우의 누야, 소리가 들려오는데 툭 끊어 버린다)
강숙 : (반지 낀 손가락을 이리저리 보며, 낮은 소리로) 누가 이런 짓 하라 그랬어? 나쁜 년(좋아서).
은조 : 욕하지 마. 무식해.
강숙 : 도둑년.
강숙, 다시 반지를 빼서 소중하게 주머니에 집어넣고,
은조가 그 주머니 가져와 줄을 찍 잡아당겨 단단히 묶어서 강숙의 가방 안에 다시 집어넣고 하는 위에
은조(N) : 기분이 좋으면 욕을 하는 사람이다. 기분이 나빠도 욕을 한다. 엄마라는 사람이 이러고 있다.
이해들 하시라. 이보다 더 어이없는 짓을 밥먹듯 하는 사람이다. 난들 이런 엄마가 좋겠나.
S#14. 다음 역 플랫폼
기차가 와서 멎는다. 대봉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
S#15. 객실
은조, 창밖으로 저쪽에서 대봉 일행이 우르르 기차에 오르는 모습을 본다.
은조, 시선을 객차 안 출입문으로. 그 출입문 열리고, 막 기차에 탄 승객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 모습이 보인다.
대봉 일행이 그 뒤에 보이고, 한 무리는 저쪽 반대편으로, 또 한 무리는 이쪽으로 붙었다.
은조, 강숙을 본다. 강숙, 잠들어있다.
은조, 본능적으로 가방 챙기며 강숙을 흔들어 깨우려다, 멈칫.... 은조 얼굴에 만 가지쯤 되는 복잡함이 끼어든다.
은조, 다시 대봉 일행을 본다. 통로를 가로막고 선반에 짐을 올리는 두 승객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대봉 일행.
은조, 강숙을 본다. 강숙의 어깨에 닿아있던 손을 천천히 떼는 은조.
은조, 강숙의 가방을 내려놓고, 자기의 손가방만 챙겨 잠든 강숙을 건너 통로로 나선다.
대봉이 오고 있는 반대편 문쪽으로 혼자 가는 은조 위에
은조(N) : 지금껏 엄마의 남자는 백만 번도 더 바뀌었다. 나에게 백만 한 번째 아버지를 붙여주기 전에....
S#16. 객차 사이
은조, 손가방 움켜쥐고, 아직 멈춰있는 기차에서 내리려고 출구 쪽으로 가까이 간다.
은조(N) : 나는 엄마를 버리기로 한다.
출구 계단으로 한 걸음 내리는 은조. 문득 뒤돌아 자기가 빠져나온 객차쪽을 보면,
앞의 승객을 치우고 대봉 일행이 강숙 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열차가 곧 출발하겠다는 안내 방송.
은조, 두 번째 계단을 밟을 것인지 극심한 갈등으로 멈칫하는데, 기차가 조금씩 움직인다.
은조, 발끝도 움직인다! - 마치 뛰어내리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S#17. 객실 안
은조, 객실 안으로 뛰어들어와 “엄마!” 하며 강숙을 흔든다. 강숙, 화들짝하며 눈을 뜨는 동시에 저 앞의 대봉 일행을 발견한다.
너무나도 익숙한 호흡으로, 가방을 드는 강숙과 그런 강숙의 다른 손을 붙들고 뛰는 은조.
대봉 일행, ‘저기!’ 하며 쫓아온다. 기차도 달리기 시작한다.
S#18. 그 앞 객실
조용한 객실 문이 벌컥 열리고 은조와 강숙이 들어와 앞을 향해 달린다. 뒤쪽으로, 쫓아오는 대봉 일행 보인다.
은조(N) :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됐다. 빌어먹을.
S#19. 다른 객차
문이 벌컥 열리고 강숙과 은조가 다급하게 들어선다.
그와 동시에 엄청나게 시끄러운, 여학생들의 소음. 교복 입은 여고생들의 수학여행 귀경객차였다.
장난치는 여학생들을 헤치고 계속 객차 앞으로 나가는 강숙과 은조.
강숙 : (가방을 머리에 이다시피 하고) 얘들아 비켜라, (아이스크림을 친구 얼굴에 비비려고 쫓고 쫓기는 여자애 둘이
강숙 앞을 가로막자) 치워 이 기지배야!
은조 : 조용히 그냥 앞으루 가면 되잖아!
강숙 : 묻으면 어떡해? 이거 실큰데!
은조 : (가방 뺏어서 자기가 들고 강숙의 손목을 비틀어잡고 앞으로 나아간며) 지금 그러구 싶어? (하는데)
은조와 강숙이 방금 열고 나온 그 문이 벌컥 열린다. 대봉일행이다.
대봉 : 저깄네!
강숙 쪽도, 대봉 쪽도, 까부는 여학생들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만만찮다.
갑자기 기차가 터널을 지나며 기차 안이 깜깜해진다. 꺄아악! 여학생들의 즐거운 비명.
여학생들의 카메라 플래쉬가 터진다, 물풍선이 터진다, 밀가루 포대가 뜯긴다, 한바탕 난리가 난다.
S#20. 객차와 객차 사이
기차가 터널을 지나자 다시 환해지고, 그와 동시에 여학생들칸 객차문이 열리고 강숙과 은조가 빠져나온다.
당황하는 강숙과 은조. 이게 맨 앞이다. 더 이상 못 간다.
강숙과 은조, 뒤를 돌아본다. 밀가루를 뒤집어쓴 대봉 일행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일촉즉발. 강숙은 남자 화장실로, 은조는 여자 화장실로 쑥 들어간다.
S#21. 여자화장실
은조, 화장실로 들어와서 문을 잠그는데, 안에 있던 효선(아까의 그 여학생들과 똑같은 교복)이 꺅 비명 지른다.
은조,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린 후 효선의 입을 틀어막는다. 입이 틀어막혀진 채로, 눈이 똥그래져서 은조를 보는 효선.
거친 숨을 삼키며 효선을 보는 은조. 효선 교복에 붙은 효선의 이름표.
밖에서 문 쾅쾅 두들기는 소리.
은조 : ....
효선 : ....
S#22. 인서트
기차 밖으로 지나치는 들판 풍경 + 달리는 기차 + 기차 바퀴 + 레일.
S#23. 청보리밭길
멀리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 아래로, 기훈이 운전하는 트럭이 청보리밭길을 따라 지나간다.
몸체에 <대성도가>라는 이름이 박혀있는 탑차다.
운전하는 기훈의 얼굴 위에 어디선가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 덮인다.
S#24. 읍내 술도매상 앞
트럭에서 내려 짐칸의 문을 여는 기훈. <대성도가>의 막걸리가 가득 적재돼 있다.
기훈, 술박스를 두세 개씩 한꺼번에 내리는데
효선(E) : 전화 왜 안 받아!
기훈 : (놀라서 보면)
효선 : (곧 울 것 같은 모양으로 서 있다) 나 당장 전학가야 한다구!
기훈 : (술박스 번쩍 들어올려 도매상 안으로 가면서)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너 이 시간에 여기 있다는 건 수업 중간에
담치기를 했단 소린데, 이유를 들어봐서 별 거 아니면 혼난다 이늠시키?
효선 : (졸졸 쫓아가며) 그 여자애가 곧 학교루 찾아올 텐데, 반지가 없어 졌다구 반지가!
S#25. 도매상 안 통로(복도)
기훈 : (박스 어깨에 지고 지나가면서) 안녕하세요 대성탁줍니다--
도매상 직원들 몇몇이 왔냐고 아는 체도 하고, 창고문을 열어주러 열쇠 들고 따라나서는 직원도 있고.
효선 : (졸졸) 국어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이 낀 반지를 보니까 갑자기 나두 그 반지 생각이 나는 거야.
수학여행 갔다온 날 분명히 내가 끼구 놀았었는데, 그 담부턴 본 적이 없는 거 있지.
S#26. 도매상 안 창고
기훈, 술박스 부려놓고 다시 나간다. 직원들이 트럭에서 내린 술박스를 함께 옮겨오고 있다.
효선, 그런 기훈을 졸졸 따라붙으며 하소연이 늘어졌다.
효선 : 집에두 갔다왔어. 아무리 찾아봐두 없다구. 나 어떡해 오빠.
기훈 : (상대해줄 시간이 없다, 들어오는 직원들에게) 안녕하세요 대성탁줍니다- (하며 밖으로)
S#27. 도매상 앞
적재돼 있던 술박스들이 1/3쯤 없어져 있고, 기훈, 트럭 위에서 박스들을 내려 도매상 직원들 손으로 넘겨주고 있다.
직원들 박스 받아 도매상 안으로 옮겨가고 있다.
효선은 트럭 내부 벽에 기대 입을 댓발 내밀고 혼자서 주절주절..
효선 : 아 진짜 큰일났네, 걔가 곧 찾으러 온댔는데. 반지 잃어버렸다 그러면
완전 내 얼굴 다 할퀴구 긁어놀 거 같이 생긴 애였는데 나 어떡 하냐고요--
기훈 : (트럭 밖으로 내려가서 물건장부 직원에게 주고, 싸인받고 하는데)
효선 : (벽에서 등 떼고 기훈쪽으로) 오빠 나 전학가야겠지? 어디루 가? 아예 멀리 서울 같은 데루 전학가 버릴까?
기훈 : (직원들에게 인사) 저희 사장님이 모레쯤 들리신답니다. 여기 사장님께두 안부 전해주십쇼- 고맙습니다- 들어가십쇼-
직원들 : (대충 인사 챙기고 들어가면)
기훈 : (트럭 위로 풀쩍 뛰어 올라와서 효선에게로) 접때 엠피쓰리 잃어버린 거, 일주일만에 사장님 서재에서 찾았지?
효선 : ...응. 그게 뭐.
기훈 : H.O.T 마지막 컨서트에서 사온 기념티셔츠, 거의 반 년만에 부엌할머니가 걸레루 쓰구 계시는 거 찾아냈다며?
효선 : 할머니 진짜 나빴어! 어떻게 우리 강타 오빠를 걸레루 쓰시냐고요!
기훈 : 사장님이 너 고등학교 입학선물루 사주신 뿌까 시계두 잃어버렸지?
효선 : 헉. 어떻게 알아?
기훈 : 내 방에 놓구 갔으니까 알지.
효선 : 아우 내가 그거 얼마나 찾았는데에!
기훈 : 영원히 없어진 거 있어?
효선 : 응?
기훈 : 집에서 잃어버린 거 중에서 영영 못찾은 게 있었냐구.
효선 : ..... 없었어.
기훈 : (효선의 코를 쥐고 비틀었다 놓으며) 그럼 됐잖아.
효선 : (아파서 찡그리지만 편해진 얼굴로) 아퍼!
S#28. 교문 앞
효선을 옆에 태우고 온 기훈, 교문 앞에 트럭을 세운다.
기훈 : 얼른 들어가. 너땜에 시간 버려 큰일났어 임마. 아직두 두 군데나 더 돌아야 하는데.
효선 : (벨트 풀어내며) 오빠는 내 꺼야.
기훈 : 뭐?
효선 : 오빠가 달이 네모라 그러면 네모가 맞는 거 같아. 소금이 달구 설탕이 짜다 그럼 난, 소금물은 삼키구 설탕물은 뱉을 거야.
오빠가 반지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깐, 잃어버린 적두 없는 거 같아. 나 반지 잃어버렸어 오빠?
기훈 : 어휴, 넌 진짜 왜 이렇게 말이 많니 꼬맹아? 오빠 바쁘다구. 할 일 다 못 해서 니네 집에서 짤리면, 니가 책임질 거야?
효선 : (문 열고 내리면서) 오빤 내 꺼니까 아무한테나 장가가면 안 된다? 오빠 색시는 내가 골라줄 거다? 알았지?
기훈 : 고소영 전도연 이하는 절대 싫다-
효선 : 오빠 빠이-!
효선, 차에서 내려 차문 닫고 교문 안으로 팔랑팔랑 들어간다.
기훈, 그런 효선을 기분 좋게 보다가, 차 움직여서 출발한다. 그런 기훈 위로 어디선가 또 찰칵.
S#29. 학교 복도
효선이네 교실 앞에서, 까치발로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효선. 선생님, 칠판에 필기하고 있다.
효선, 살금살금 교실 뒷문으로.
S#30. 교실
뒷문 살짝 열리고, 효선이 몸을 굽히고 몰래 들어오는데.
선생님 : 뭐야!
효선 : (흠칫,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는)
S#31. 복도
효선 손 들고 벌 선다. 입 댓발 나오고, 복도 저편에서부터 또각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 가까워오는데.
효선 : 아우... 쉬는 시간에 들어갈 걸.....
하이힐 소리가 효선 근처에서 뚝 멈춘다. 강숙, 효선 앞에 서 있다.
효선 : ?
강숙 : (1-4 교실 명패 올려다보고, 교실 창문 쓱 들여다보고, 효선을 보고, 효선의 이름표를 보더니) 너구나?
효선 : (맹하게 강숙을 올려다본다)
S#32. 장씨네 마당
평상에 대짜로 뻗은 채 고래고래 노래하고 있는 장씨. 술병과 술상 함부로 뒹굴고 있다.
빨랫줄에는 정우의 야구복이 깨끗하게 빨아져 널려 있다.
S#33. 은조 방
장씨 노랫소리 들려오고 있고, 은조, 책상에 앉은 채로 강숙과 통화 중.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 그러나 잔뜩 화가 나 있다.
은조 : 빨리 와. 끔찍해 죽겠다구. 어떻게 나만 여기다 놔두고 자기 혼자 가? 응?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강숙(F) : 너랑 같이 나서면 또 도망치는 줄 알구 그 인간이 따라나서잖아!
반지 찾아서 처리하구 곧장 데리러 갈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은조 : 처리해? 뭘 어떻게 처리한다는 거야?
강숙(F) : 넌 몰라두 돼.
은조 : 엄마.
효선(F) : 아줌마!
은조 : ?
강숙(F) : 응, 다 끝났니? 니 집은 어디니? (하며 전화 뚝 끊긴다)
은조 : ......
장씨(E) : (고래고래 노랫소리 들려오면)
은조 : (귀를 틀어막는다)
S#34. 효선이네 집에 가는 길
강숙, 효선을 따라 걷고 있다.
효선 : 근데 왜 아줌마가 왔어요? 나는 송은조라는 애가 올 줄 알았는데.
강숙 : (효선의 계속되는 수다에 짜증이 나 있다) 내 딸이야. 근데 한참 가야 하니?
효선 : 다 왔어요. 근데 나쁜놈들은 어떻게 됐어요? 화장실루 잡으러 왔던 아저씨들요. 경찰에 넘겼어요? 콩밥 먹였어요?
강숙 : (수다에 지쳤다) 멀면 택시 타자.
효선 : 조기에요. 다 왔어요.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치졸하구 못난 인간이래요.
강숙 : 택시비 내가 내께, 택시 타자, 응?
효선 : 바루 조긴데요?
강숙 : (조금 신경질) 바루 요기 바루 조기 하면서 계속 가잖니. (하는데)
“아가- 효선아---” 하며 다급하게 손짓하며 오고 있는 효선이네 60대 후반쯤 되는 부엌할매, 꽃님과 순분.
효선 : 어?
S#35. 대성도가 앞길
효선, 꽃님과 순분을 따라 종종걸음치며 가고 있고, 그 뒤를 어쩔 수 없이 따라가고 있는 강숙.
꽃님 : 아주 막 난리두 아녀, 회장님 노발대발허시구 일하는 애들 싹 다 무릎 꿇리셨어어-
순분 : 아까 점심 때침버터 지금까지 밥두 안 멕이구,
효선 : 점심 때부터 지금까지? 어뜩해...
강숙 : 얘, 얘.. 지금 집에 안 가는 거니?
효선 : 못 가요, 어떻게 가요 지금, 아휴 큰일났네.....
효선, 양조장 출입문 안으로 쑥 들어가버린다. 할매 두 분도 따라들어간다.
강숙, 어이없다. 세 사람이 들어간 곳을 자세히 살펴보는 강숙. <대성도가>라는 간판 보인다.
S#36. 대성도가 마당
서른 명쯤 되는 일꾼들이 마당에 꿇어앉아 있다.
대성, 술발효실 앞에 끌어내져있는 술항아리들을 있는 술항아리들을 도끼로 퍽 퍽 때려부수고 있다.
독이 한 개 깨질 때마다 일꾼들 어깨가 움찔움찔한다. 해진이 대성 뒤에서 감히 말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한다.
기훈, 묵묵히 독을 한 개씩 번쩍 들어서 먼 쪽으로 옮기고 있다.
대성 : (깨면서) 나는 이따위 술은 못 팔아! 어디서 이따위 걸 술이라구!
해진 : 형님, 이러지 마시구 제발 (하며 붙들면)
대성 : (그런 해진의 정강이를 걷어찬다)
해진 : (푹 꺾인다)
대성 : 술밥! 누룩! 물! 넣고 섞으면 그냥 다 술이야? 눈 두 개 코 하나 달리면 다 사람이냐구!
성났는지, 풀 죽었는지, 시시때때로 온도 습도 체크하구 만져주구 달래주랬지?
왜 함부로 막 굴려서 이런 정신빠진 걸 만들어놔? 이거 술 아냐! 다 똥물이야 똥물!
S#37. 도가 뒤편
기훈, 이미 피신시켜놓은 항아리들 옆으로 또 한 개의 항아리 옮겨놓는다. 그런 기훈의 이마 위로 찰칵, 하고 플래쉬가 터진다.
기훈, 의아하여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돌아가려는데, 다시 찰칵.
기훈 : (문득 서서) ....... ?
효선(E) : 아빠----
기훈 : (그 소리에 간다)...(다시 찰칵, 하는 소리......선다.......갸웃 하고는 다시 효선의 소리가 들렸던 쪽으로 간다)
S#38. 도가 안마당
효선, 아빠- 부르며 대성의 허리를 뒤에서 죽자고 껴안고 있다.
효선 : 아빠, 아빠아!
대성 : 얜 누가 데려왔어!!
기훈 : (와서 대성의 손에서 도끼 뺏어서 해진에게 넘겨준다)
해진 : (도끼 받아들고 멀리 아웃)
효선 : 아빠, 그만, 응? 그만, 응? 응? 응?
대성 : 얘 누가 데려왔어! 할멈들이 데려왔어?
할매들 : (숨는다)
효선 : 아빠, 아저씨들 무릎 아프겠어어.
대성 : 너는 집에 가 이놈아!
효선 : (눈물 그렁그렁) 아빠, 저기 무릎 꿇고 있는 아저씨들 중에서 반은 내 친구들 아빠들이야.....
대성 : ......
효선 : 응? 아빠아. 아빠아아. 응? 응? 응? 응? 응?
대문간에서 지켜보고 있던 강숙, 효선의 응 응 응 응에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다.
효선 : 응? 응? 응?
대성 : (효선의 응 한 번에 한 풀씩 푹푹 꺾이다 마침내 일꾼들에게) 꼴두 보기 싫어, 썩들 꺼져!
하고 사무실 쪽으로 사라지는 대성. 기훈, 얼른 일꾼들 일으키려는데,
효선 : (아빠한테 가보라는 눈짓)
기훈 : (효선의 등 두들기고 대성의 사무실로)
효선도 후다닥 일꾼들에게로 가 일으켜준다. 모두 다리에 피가 몰려 일어날 때마다 신음소리.
효선 : 아저씨, 많이 아프세요? 어뜩해, 어뜩해, 어뜩해....
꽃님 : 어이구 우리 회장님, 사모님 살아기실 때는 이렇게까지 고약하지 않으셨넌디,
강숙 : ......
순분 : 배들 고퍼서 워쪄, 후딱 식당으루들 와아, 후딱.
강숙 : 할머니, 여기 사모님 돌아가셨어요?
꽃님 : 효선이 저거 여섯 살 때 암으루다.... 근데 댁은 뉘실까?
효선 : (그제서야 강숙을 보고) 어머 아줌마! 깜빡 했어요.
강숙 : (조금 다정해진) 응, 괜찮아, 알구 보니 중요한 일이었구나.
효선 : (강숙을 이끌고 나가며) 얼른 집에 가요.
강숙 : 응, 그 그래, 집이 여기서 머니? 멀어두 돼. 천천히 해.
S#39. 도가 앞
효선 : (나오면서) 멀긴요. 진짜 조기에요 조기. (하며 손가락 뻗어서 가리킨다)
강숙 : (따라나오면서 효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서 점점 눈과 입이 벌어진다) 저...정말 크....아니, 가깝구나......
강숙의 눈 앞에 궁궐같은 한옥이 황홀하게 펼쳐져 있다. ‘운학루’라는 현판도 보인다.
S#40. 운학루 마당
기다리고 있는 강숙. 부엌할매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생선 비늘을 벗겨내고 있다.
강숙 : (괜히) 일이 많으신가봐요- 좀 도와드릴까요?
꽃님 : ?
순분 : 그란디, 댁이 뉘시라구?
효선 : (방에서 마루로 나오면서) 아줌마 죄송해요, 어따 뒀는지 까먹어서 막 찾구 있는 중이거든요?
강숙 : (턱없이 다정해진) 오, 그래, 천천히 해, 천천히, 응?
효선 : 예, 금방 찾아갖구 올게요. (다시 방으로)
순분 : 효선이 손님이구만.
꽃님 : 우리 애기는, 어른 애 헐 것 없이 찾아오는 사람두 많구. 볼 일두 많구.
S#41. 효선의 방
효선, 책상 서랍 하나하나 열어서 찾는 중이다.
효선 : 난 잃어버린 적두 없어. 영영 못 찾은 건 아무것두 없어.
책상 서랍 하나마다 이쁜 학용품들이 가득가득,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널부러져 있다.
침대 아래에서 박스를 쓱 꺼내는 효선. 박스 뚜껑 연다. 효선엄마의 액자 사진(28세)이 있다.
효선, 액자 들어서 뽀뽀 쪽, 한 후에 그 아래쪽을 찾아본다.
효선 : 엄마껀 오랜만에 열어보는 거라서 여기 뒀을 거 같지두 않은데...
박스에 있는 효선엄마의 물건 하나하나 꺼낸다. 홈웨어 한 벌. 묵주 한 개. 미사포 한 장. 그러다 문득
효선 : 아, 수학여행 가방!
효선, 일어서서 수학여행가방을 찾는다. 없다.
효선 : ? 어딨지? (하는데)
밖에서 와장창 쨍그랑 소리.
효선 : ?
S#42. 마당
강숙, 수돗가에서 구정물을 뒤집어쓴 채로 서 있다.
꽃님, 양동이를 든 채로, 순분, 칼과 생선꼬랑지를 든 채로,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다.
꽃님 : 워.....워치케 허나아....
순분 : 아줌니 차암 이상두 허시다아, 왜 물 버리는 쪽으루 뛰어들어 뛰어 들기일?
강숙 : 아, 제가 도와드리려구 하다가.....괜찮아요...말리면 되죠...비린내가 좀 나긴 하지만, 뭐, 비린내가....많이 나네요....
효선, 방에서 나와서 보더니, 어? 하면서 댓돌 아래로 내려서서 신발 신는다.
효선 : 왜 그래요 아줌마?
S#43. 효선의 방
효선, 그렁한 눈으로 강숙을 보고 있다. 효선엄마의 홈웨어를 입은 강숙. 거울 앞에 서 있다가 효선을 돌아보는.
강숙 : 돌아가신 엄마 옷이라면서, 내가 입구 있어두 되는 건지 모르겠다...
효선 : (꽂힌 듯이 강숙을 보고 있는)
강숙 : 옷 마를 때까지만 입구 있을게.
효선 : .......
강숙 : 왜 그러니?
효선 : 정말.... 예쁘시네요.
강숙 : 그래?
효선 : 아줌마, 황신혜 닮았어요.
강숙 : 그럴 리가 있니? 난 정윤희 닮았어 얘.
효선 : 우리 엄마두.... 황신혜 닮았는데.
강숙 : 그..래, 나두, 황신혜 닮았단 소리두 많이 들어...
효선 : (보는)....(그렁)....
강숙 : 왜 그러니?
효선 : (그렁그렁) 뭐가요?
강숙 : (다가온다) 내가 뭐 잘못했니?
효선 : 옷이 정말, 잘 어울려요.
강숙 : 그래 고맙다.
효선 : 정말 잘 어울려요. (눈물 주르륵 흐른다)
강숙 : 어머, 얘, 너 왜,
효선 : 왠지는 나두 모르겠어요. 그냥 눈물이 막 나잖아요.
강숙 : 저런. 왜 그럴까....이리 온. (손으로 효선의 눈물 닦아주고, 효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효선 : (놀라서) ......
강숙 : (안아준다) .....
효선 : ....... 또 해주세요.
강숙 : (떼고 보며) 응?
효선 : (강숙의 손 잡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강숙의 허리 끌어안는다) 해주세요.....
강숙 : ...... (머리 쓰다듬는다)
효선 : (눈감고, 강숙의 젖무덤에 코를 박고, 숨 깊게 들이마신다).....
강숙 : ...... (쓰다듬으며 알 듯 모를 듯한 자기만의 미소) ......
S#44. 도가 마당
효선 들어서고, 뒤 이어서 강숙(효선 엄마의 홈웨어)이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선다.
마당 쪽으로 나 있는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효선 : (강숙에게) 잠깐 있어보세요.
강숙 : 응, 그래애? 고맙다아? (얼마나 다정한지!)
효선 :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강숙 : (기다리는데)
해진 : (사무실 안에서 나온다)
강숙 : (조금 자리 비켜주는데)
해진 : (가다가 멈칫 서서 휙 하고 강숙을 본다) ....
강숙 : (교양교본상의 미소로 해진을 본다)
효선 : (나온다) 들어가세요 아줌마.
강숙 : 응, 고맙다아? (들어간다)
해진 : (효선에게로) 누구야?
효선 : 삼촌, 내 수학여행가방 못봤어?
해진 : 뭐?
효선 : 수학여행가방. 기훈오빠가 사준 거, 초록색 체크무늬 있구. 못봤어?
해진 : 아 그거, 니가 다락방에 갖구 올라갔잖아. 찾아다 줘?
효선 : 아니, 감춰 줘.
해진 : 응?
효선 : 감춰 줘. 꽁꽁 숨겨 줘 삼촌.
해진 : ?
효선 : ...... (강숙이 들어간 쪽을 본다) .....
S#45. 사무실 안
문 안에 들어서서 대성이 돌아볼 때까지 얌전하게 서 있는 강숙.
대성, 등 돌린 채로 어딘가로 통화하고 있다.
대성 : 그럼 출시가 가을까지 미뤄질 수도 있단 건가? 이봐 이봐! 여름엔 무슨 일이 있어두 시장에 내놔야 해!
니들 월급이 얼만 줄 알아? 남의 돈 공으루 먹자구 들면 어떻게 되는지 내가 뵈 줘? ...... 이거 안 되겠군.
퇴근할 생각 말구 기다려. 연구소루 곧장 갈 테니까. 끊어!
대성, 성질 사납게 수화기 탁 내려놓고 강숙쪽을 돌아보다 헉 놀란다. 사진 속 효선엄마가 서 있는 것 같다.
강숙 : (이대 나온 여자처럼 교양있게) 죄송합니다, 통화 끝내실 때까지 기다리구 있었습니다.
대성 : (당황해서) ....누....누구....
강숙 : 효선이가,
대성 : 아, 효선이가. 예. 그런데 무슨 일루....
강숙 : 모르는 사람한테, 어찌된 영문인지두 모르는 물건 같은 걸 맡아왔다구 몹시 야단하셨었다구 들었습니다.
대성 : 그, 그건 효선이가, 효선이 또래의 어떤 소녀한테서,
강숙 : 예, 제가 그 아이 엄맙니다.
대성 : .....
강숙 : 사정이 있긴 했지만 나쁜 물건은 아닙니다, 안 믿으셔두 할 수 없지만요. 아무튼 죄송합니다.
(스튜어디스처럼 얌전하게 꾸벅, 고개 숙인다)
대성 : (깜짝 놀라서 자기도 꾸벅 절한다)
강숙 : (대범하게 대성 앞쪽으로 걸어온다)
대성 : (얼음처럼 굳어버린다)
강숙 : 그리구, 초면에 이런 말씀, 당황스러우실 줄로 압니다만....
대성 : .....
강숙 : 따루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물론, 거절하셔두, 어쩔 수 없지만요....
대성 : .....
강숙 : 따님께서 제 물건을 넣어둔 가방을, 어디 먼데 가는 친구한테 빌려 줬답니다. 찾아올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는데,
제가 어디 달리 갈데가 없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일자리를 주시면, 안될까요? 부엌일두 좋구, 다른 일이라두요....
제 말씀이 얼마나 어이없게 들릴지두, 알구 있습니다....
대성 : ......
강숙 : (이런 말을 너무나 힘들게 했다는 듯, 이제 처분만 기다린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대성 : (낮게 심장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점점 커진다)......
S#46. 장씨네 마당 (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 마당 끝에 선 채 바다쪽을 향해 오줌을 누고 있는 정우. 그 위로
은조(E) : 아니라니까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내가 여기 있는데 울엄마가 안 올리가 없잖아요. 볼 일이 좀 늦어진다잖아요!!
S#47. 은조 방 (밤)
장씨, 방문을 열고 마루와 방에 몸을 반씩 걸쳐놓은 채, 술에 취해 게슴츠레한 눈으로 은조를 보고 있다.
은조, 방문에서 가장 멀리, 방 모서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목소리만 또록또록.
장씨 : 니는, 니 엄마를, 믿나?
은조 : 뭐라구요?
장씨 : 니는, 니 엄마가, 니가 여 있으이까, 니 따문에, 여 꼭 온다꼬, 믿나?
은조 : 당연하죠!
장씨 : 니 엄마가, 니 버린 적, 없나?
은조 : 없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장씨 : .....그라모, 댔다.
장씨, 나가려고 몸을 일으킨다는게, 오히려 은조 방쪽으로 푹 고꾸라진다.
은조, 모서리에 더 찰싹 달라붙는다.
은조 : 뭐하는 거예요 지금!
장씨 : (엎어진 채) ......
은조 : 안 가요?
장씨 : ....... (드르렁----)
은조 : ....... 정우야-! 정우야아!!
S#48. 장씨네 마루 (밤)
정우, 곯아떨어진 장씨의 다리 한 짝을 질질 끌고 안방으로 힘겹게 옮겨가고 있다.
정우 : (한숨처럼) 아제요, 살 쫌...빼소....
S#49. 은조 방 (밤)
은조, 방문 꼭꼭 걸어잠그고 책상 위의 휴대폰 집어든다. 강숙으로 통하는 단축키 누르는 은조.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음성안내.
은조, 휴대폰 탁 접어서 책상에 던져버린다.
은조 : ......
(F.O)
S#50. 학교 교정
수업종료 벨소리와 함께 교사에서 빠져나와 바람같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효선. 팔 엉거주춤하고, 가운데 손가락 세우고.
S#51. 운학루 마당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는 기훈. 대문 벌컥 열리고,
효선 : (가운데 손가락 든 채로 박차고 들어오며) 효선이 왔다-!
기훈 : (돌아본다) 응-.
효선 : (기훈에게 책가방 휙 던져주고 부엌으로 달려간다)
기훈 : (책가방 든 채)......?
효선 : (다시 나온다) 어디 계셔?
S#52. 뒷마당
뒷마당에 널려있는 빨래들. 강숙, 빨래 널고 있다.
강숙 : (빨래 널어서 한쪽으로 쭉 미는데)
효선 : (손가락 들고 그 앞에 서 있다)
강숙 : 왔니?
효선 : (세차게 끄덕끄덕)
강숙 : (웃어주고, 빨래통에서 빨래를 하나 집어 올리는데)
효선 : (계속 강숙을 보고 있다)
강숙 : ..... 응?
효선 : 나 아파요.
강숙 : ??
효선 : 다쳤는데....
S#53. 안채 마루
강숙, 핀셋으로 효선의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빼낸다. 효선, 아파서 살짝 찌푸리며 강숙을 본다.
강숙 : (버리려 하는데)
효선 : 볼래요!
강숙 : 응?
효선 : (강숙이 들고 있는 핀셋 끝의 가시를 본다)
강숙 : (그런 효선을 본다)
효선 : 가질래요. (손수건을 핀셋 끝에 댄다)
강숙 : (핀셋 털어서 손수건에 가시 묻혀준다)
효선 : (만족스럽게 웃으며 강숙을 본다)
강숙 : (같이 어정쩡 따라 웃는다, 어이없기도 하고)
마당 저쪽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기훈과 해진.
효선이 강숙의 손을 잡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 모습이, 강숙이 그 손으로 효선의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이 보인다.
해진, 휙 돌아서 가버리고, 기훈, 그런 해진을 일별하고는 마루 위의 두 사람을 본다.
기훈, 행복해 보이는 효선의 모습을 짠하게 보다가 돌아서는데
저쪽에서 대성이 딱 자기와 같은 표정으로 강숙과 효선을 바라보고 있다....
S#54. 몽타주
- 강숙, 마당 뒤편 커다란 가마솥에서 절절 삶아지고 있는 빨래를 길다란 꼬챙이로 뒤집고 있다.
그 옆에서 효선, 과자를 먹으면서 강숙에게 뭐라고 끝없이 조잘대는 모습,
간혹 과자봉지에서 과자를 꺼내 강숙의 입 속에 넣어주기도 하고.
지나가던 대성이 그 모습을 본다.
- 대성,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방바닥을 걸레질하고 있던 강숙이 대성을 올려다본다.
강숙, 대성을 빤히 쳐다본다. 대성,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르겠는데, 강숙, 일어나서 대성에게 가까이 온다.
손가락으로 대성의 셔츠 앞섶을 가리키는 강숙. 대성 셔츠의 단추가 달랑달랑.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대성의 얼굴이 붉어진다.
- 서재 앞 마루, 강숙, 단추를 다 달고 이빨로 실을 끊는다. 서재 문 조금 열고, 예쁘개 갠 셔츠를 서재 안으로 밀어넣는 강숙.
열린 문 사이로 대성의 모습이 보인다.
S#55. 대성도가 앞 (새벽)
강숙, <대성도가> 명패를 뚫어져라 보고 서 있다.
S#56. 사무실 (새벽)
책상 앞에 앉아, 들어서는 강숙을 보고 있는 대성. 강숙, 대성 앞으로 온다.
강숙 : 불이 켜있길래요..
대성 : 무슨....
강숙 : 오늘 효선이 사생대회라, 도시락, 싸주기루 약속했는데, 장을 미리 못봐뒀어요. 길 좀 알려주세요.
대성 : ..... 멀어요.
강숙 : 괜찮아요. 천천히 걸어갔다 오면 돼요.
대성 : ......
S#57. 도가 앞 (밤)
자전거에 강숙을 태우는 대성.
강숙 : 혼자 가두 되는데....
대성 : (말없이 페달 밟아 간다)
도가로 오던 해진, 두 사람을 본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머리가 비이잉-- 돌아가는 해진 .....
S#58. 숲길 (새벽)
달리는 대성의 자전거 뒤에 강숙이 타고 있다.
강숙, ‘이제 다 된 거야’ 하는 미소로, 다리 한 짝 살짝 들어올린다. 그 다리로 자전거 몸체를 퉁, 치는 강숙.
자전거 휘청- 강숙, 몸을 휘청- 하면서 대성의 허리를 덤썩 껴안는다.
강숙의 가슴이 대성의 등에 닿아있다. 당황하는 대성. 강숙, 몸을 뗀다.
잠시 후, 다리로 또 퉁 친다. 아까보다 세게. 자전거 휘청- 강숙이 대성의 등에 또 탁 붙고,
대성, 중심 잡느라 갈짓자가 되는데, 강숙, 어머나, 하며 몸을 비틀어버린다.
두 사람과 자전거가 덤불숲으로 쓰러져버리며 프레임 아웃.
S#59. 인서트 새벽
덤불숲에 벗겨진 두 사람의 신발, 그리고 자전거만 쓰러져 있다.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S#60. 기훈의 방 / 사랑채 마당 (밤)
기훈, 자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효선의 울음소리. 기훈, 일어나 불 켜고, 문 열어본다.
사랑채 마당으로 들어서며 엉엉 우는 효선.
기훈 : 왜 그래?
효선 : 삼촌이 아줌마한테 반지를 줘버렸어 오빠---
S#61. 서재 (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딱 한 줄짜리 강숙의 편지를 보고 있는 대성.
대성, 어이없고, 기막히고, 허전하고, 화나고, 서재를 왔다갔다 한다.
S#62. 사랑채 마당 (밤)
서럽게 울고 있는 효선. 보고 있는 기훈, 속상하다, 효선에게 다가가서, 손바닥으로 효선의 눈물을 닦아준다.
S#63. 대성의 서재 (밤)
대성과 마주하고 있는 기훈. 효선 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고 있다.
기훈 : 기차는 삼십 분 후에, 버스는 한 시간 후에 막차예요. 저는 기차역으루, 사장님은 버스정류장으로 가시면 돼요.
대성 : 듣기 싫으니까 나가봐.
기훈 : 효선이가 지금 상황을 감당을 못하구 있어요.
대성 : 그놈은 원래 손님이 갈 때마다 그래.
기훈 : 일단 제가 모시러 갑니다 사장님. (나가려는데)
대성 : 너 뭐야 임마!
기훈 : (돌아보며) 효선이가 요즘 일곱 살짜리가 된 것처럼 행복해했어요. 지금 효선이 엄마 떨어지는 일곱 살이에요.
대성 : 입 좀 다물구 가만히 좀 있어 자식아! 어떻게 간단 말두 없이 가? 사람이 어떻게 그래? 그런 괘씸한 인간을 왜 찾으러 가래!!
기훈 : 사장님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기차역으로 가요. (나간다)
대성 : ......
S#64. 달리는 자전거 (밤)
기훈, 효선을 자전거에 태우고 달린다.
효선 : 아줌마 다시 올 거라구 말 해.
기훈 : .....
효선 : 오빠가 말하는 대루 될 거란 말야. 얼른 해줘. 온다구.
기훈 : .....
효선 : 온다구 해 달라구!! (통곡)
S#65. 버스 정류장 (밤)
강숙, 정류장 의자에 걸터앉아서 주머니 속 반지를 보고 있다. 흥, 코웃음 치는 듯한 강숙의 얼굴 위로
해진(E) : 그 뭐냐, 애가 이거 일부러 숨기구 장난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모른척 하구 있대요? 무슨 목적으루다?
이거 땜에 여적 여기 있었던 거니까, 돌려받았으면 갈 길루 가시면 되겠네.
강숙 : 갈 길 가구 싶은데, 그럴 수가 없겠네 효선이 삼촌?
정적을 뚫고, 삐걱삐걱삐걱....자전거 페달 소리 들려온다.
강숙, 여유있게 우아한 동작으로 반지를 가방에 넣고, 자전거 쪽이 아닌 버스 오는 쪽을 보고 있다.
페달 소리 가까워온다. 이제야 알았다는 듯 강숙, 그쪽을 보더니, 일어선다.
대성이 강숙 앞에 와서 선다. 자전거에서 내리는.
대성 : 갑니까? 어떻게 이렇게 갑니까? 애한테 정 들여놓구 어떻게,
강숙 : 폐가 많았습니다. 효선 엄마 옷은, 잘 수선해놨어요.
대성 : 애가 운단 말요!
강숙 : 제 딸두 울구 있을 거예요.
대성 : 아이를 이쪽으로 데려오면 되잖아요!!
강숙 : 살던 남자가 아일 붙들구 있어요. 데려오기 쉽지 않아요.
대성 : (버럭) 내가 데려온다잖아요 내가!!
강숙 : 순전히... 효선이 때문이기만 하세요?
대성 : ......
강숙 : 효선이 때문에만, 있어달란 건가요?
대성 : ..... (와락 강숙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는다)
강숙 : .....
S#66. 인서트
장씨네 동네.
S#67. 장씨 방
털보 얼굴이 완전히 털복숭이가 되어 폐인의 몰골로 쪼그리고 자고 있는 장씨.
S#68. 장씨네 부엌
은조,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고 김치를 담그고 있다. 배춧잎 하나하나 들춰가며 꼼꼼하게 속을 버무리고,
정우, 은조 옆에 서서 김치 쪼가리를 주워먹으며
은조가 움직일 때마다 뒤뚱뒤뚱 은조의 뒤를 쫓으며 영감 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정우 : 밥 도. 김치만 묵었드이 속이 씨끄러바.
은조 : (손 쉬지 않고) 비켜.
정우 : 그래도 니는 하낫-또 걱정할 거 엄따. 누야 니는 내가 책임지께.
은조 : 꺼져.
정우 : 과부 사정 홀아비가 안다 안카드나.
은조 : (손 멈추고 정우를 싸늘하게 노려본다)
정우 : 와? 우리 옴마야도 털보 저거한테 내를 버리고 도망가뿌꼬,
누야 느 그 옴마야도 니를 털보 저거한테 니를 버리고 도망가뿌따 아이가.
은조 :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도망갔단 거야?
정우 : 하모.
은조 : 날 버리구?
정우 : 하모.
은조 : 확실해?
정우 : (또 김치 집어 씹어먹는다) 똑같은 말 자꾸 시킬래 니?
은조, 얼음처럼 굳어있다. 분노인지 충격인지 잘 알 수 없다. 굳은 얼굴이 점점 펴진다.
점차 격정적인 벅차오름으로 숨이 깔딱 넘어갈 것만 같더니,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환희에 찬 얼굴이 되어서
은조(N) : 만세!!
정우, 맹한 얼굴로 은조를 지켜보고 있고,
은조, 갑자기 넘치는 에너지로 스피디하게, 김치통 몇 개에 김치 담아 착착 포개 한곳에 두고,
프라이팬에 밑반찬 만들어놓은 것 작은 통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고,
불려놓은 쌀을 밥솥에 안쳐 전원버튼 탁 누르고 부엌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정우 : 누야!
S#69. 은조의 방
은조, 가방에다 책이며 옷가지며를 되는 대로 집어넣고 있다. 정우, 맹하게 그런 은조를 바라보고 있다.
정우 : 느그 엄마도 없는데 어데를 갈라꼬?
은조 : 도망.
정우 : ..... 니 혼자서?
은조 : 혼자니까. 혼자라서 도망치는 거야. 난 울엄마만 없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
정우 : (보다가, 짐싸는 은조의 손을 탁 잡으며) 그그는 아이지!
은조 : 뭐 하는 거야? (손을 탁 쳐내려는데)
정우 : (더 굳세게 휘어잡고, 마치 어른남자 같다) 혼자는 몬보낸다.
은조 : ? 뭐?
정우 : 짐 풀으라.
은조 : (팔 빼내려는데, 안빼내진다, 어이없다)
정우 : 니 혼자는 몬 보낸다 안하나? 퍼뜩 짐 풀으라!
은조 : (낮고 싸늘하게) 이거 안 놔?
정우 : ........ (슬며시 놓는다)...... 놓기는 놓는데.....
은조 : (가방 지퍼 탁 닫고 일어선다)
S#70. 장씨네 마루
은조, 가방 갖고 자기 방에서 나와 안방쪽으로. 따라나오는 정우. 안방문 확 열어젖히는 은조.
은조 : (자고 있는 장씨에게, 듣거나 말거나) 이봐요. 나 할 만큼 했어요. 밥두 잔뜩 해놨구, 김치두 둘이서 몇 달은 먹을 수 있게
해놨구, 청 소두 했구, 빨래두 다 했구, 석 달 열흘 술독에 빠질 수 있게 냉장 고 가득 술두 채워놨어요. 됐죠?
나 댁한테 빚 없죠? 혹시 반지 같 은 거 빚이라구 생각하면, 울엄마 찾아서 받아내요. 난 아니에요. 알 았죠?
은조, 마당으로. 신발 신고 대문으로 간다. 정우, ‘누야’ 하면서 따라나온다.
은조 : (휙 돌아보면서) 쫓아나오면 너 죽는다!
정우 : (움찔) 누, 누야...
은조 : (대문 힘차게 열어젖히는데)
해진 : (대문 앞에 주소 들고 서 있다)
은조 : ?
해진 : 송은조 학생?
은조 : .......?
해진 뒤에서 나타나는 기훈의 얼굴. 은조, 기훈을 본다, 이거 뭐야? 하는 표정으로.
기훈, 마치 알던 사람처럼,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어보인다.
은조, 기훈의 그 얼굴을 오래도록 뚫어져라 본다.
S#71. 달리는 자동차
기훈이 운전하고, 해진이 그 옆자리에 있다.
은조, 뒷자리에서 가방을 꽉 움켜쥐고, 등을 등받이에 기대지도 못한 채로 불안하게 앉아있다.
은조의 불안은 안중에도 없는 해진, 계속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다.
해진 : 내가 누구냐, 그 집 돌아가신 마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라말야, 그런데 이 일을 굳--이 나한테 시켜야겠냐말야,
사람을 도당췌 뭘루 보는 거냐말야, 대가리가 치킨이냐말야, 가슴이 무말랭이냐말야...
해진이 중얼거리는 동안 기훈, 계속 뒤가 신경쓰인다. 해진이 중얼거리도록 내버려둔 채로, 룸미러로 보면서
기훈 : 등받이에 등 기대구 편히 가. 불편해보인다. 응?
은조 : .....
기훈 : 가방두 옆에 내려놓구, 졸리면 편하게 졸아두 되구, 응?
은조 : ..... 화장실 갈래.
기훈 : 응?
은조 : 화장실.
S#72. 국도변 휴게소
여자화장실 앞에서 고개를 빼내밀고 그 안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해진. 여자들 드나들며 그런 해진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해진 : 아 나 뱃속에 든 걸 다 뽑아내구 나오나, 들어간 지가 언젠데.....
S#73. 휴게소 뒤편
은조, 가방도 없이 도망치고 있다. 도망치는 은조 위에
은조(N) : 멈추지 않을 거다. 앞으로 많은 나날을 쓰레기통만 뒤지면서 살아야 한대도 내 엄마 송강숙과, 그 여자에게 발목잡힌
어떤 모자란 남자가 사는 집으로는 절대 가지 않을 거다.
숨이 턱끝까지 차 있는 은조, 헉헉대며 자기가 달려온 곳을 돌아본다.
은조 머리에서 볼펜이 반쯤 삐져나와있고, 저만큼 뒤로 멀리 국도휴게소 보인다.
은조, 앉을 만한 곳(너럭바위나 벤치 같은 곳) 발견한다.
은조, 무너지듯이 그곳에 털썩 주저앉는다. 헉헉대며...뭔가 이상하다. 옆을 본다. 기훈이 앉아있다.
기훈 : 니 어머니가, 너 쉽게 안 따라올 거라구, 도망칠지 모르니까 잘 데려와달라구 신신당부하시더니, 그 말씀이 맞구나.
은조 : (숨 고르며...보며...)
기훈 : 나 동체시력은 야구선수보다 더 좋구, 단거리는 국가대표루 선발될 뻔했을 정도다?
너 이쪽으루 뛰는 거 보구 난 저기 지름길루 해서 먼저 와 있었지.
은조 : .....
기훈 : 난 널 꼭 데려가야 하구, 달리기두 빠르구, 아마 힘두 너보다 더 셀 거구, 그러니까 힘 빼지 말자. 응?
은조 : .....
기훈 : 갈 데나 있어? 돈은 있구? 어디 가서 막일이라두 하면 내 한 몸 못 먹구 살겠냐, 그런 생각 하지 지금?
은조 : .....
기훈 : 그거 쉽지 않아. 지금은 어디 가봤자 미성년자라구 받아주지두 않을 거구, 죽어라 일해두 푼돈이나 벌까 말까...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냐.
은조 : ..... (머리에서 볼펜이 스르르 빠지고 있다)
기훈 : 스무 살만 넘으면 좀 달라지니까, 조금만 참아보다 스무 살 되자마자 가출하는 게 어때? 응?
은조 : .....
기훈 : 땀 좀 봐라. (손수건 주면서) 자.
은조 : .....
기훈 : 닦아. 닦아줘?.... 그래 난 뭐 어차피 마당쇠니깐. (닦아주려고 손수건을 은조의 이마에 대는 순간)
은조 : (머리가 풀려 긴 머리채가 어깨 아래로 툭 떨어진다)
기훈 : (흠칫) ....
머리가 풀려 귀신 같은 은조가, 흠칫 놀라 한 뼘쯤 물러앉은 기훈을 뚫어져라 보는 위에
은조(N) : 이상해.... 정말 이상해. 달이 네모라고 해도 믿고 싶게 말한다... 귀신에 홀린게 분명하다....
은조(E) : 그 때 확 기차에서 뛰어내려버렸어야 돼!
S#74. 운학루 뒤편
담장 아래서, 은조와 강숙이 마주하고 있다. 강숙, 몰라보게 귀족적인 모습으로 변모해있고,
강숙 : (은조 앞이니 본래 말투로, 누가 들을새라 낮게) 조용해 이것아!
은조 : (OL) 이번엔 얼마나 갈 건데? 쫓겨나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잖아. 얼마나? 석 달? 넉 달?
강숙 : 이번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은조 : 그런 게 아냐? 뭐가 그런 게 아닌데? 이 남자 등짝에서 저 남자 등짝으루 옮겨간 거 말구 뭐가 달라진 건데?
이제 제발, 엄마 진짜 제발, 사람같잖은 남자들한테 붙어서 밥 먹지 말자, 응?
그냥 엄마랑 나, 둘이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잖아!
강숙 : 목소리 안낮춰?
은조 : 난 싫어. 난 안 해! 엄마 혼자 해!
강숙 : 이게 다 누굴 위해선데!
은조 : 으으으으으으윽! 거짓말! 나 위해서라는 거짓말, 진짜 딱 엄마만 아니라면 입을 꿰매놓구 말겠어.
강숙 : 뭐? (은조의 등짝을 철썩철썩 치며) 이년이 근데, 너 따라와! (끌고 간다)
은조 : (안끌려가려고 버티며) 놔!
강숙 : (끌고간다, 악에 받혀서 잇사이로 새어나오는 소리로) 이 나쁜년, 니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은조 : (끌려가며 가방 놓친다) 놔!
강숙 : (한 손으로 가방 줍는다) 닥쳐!
S#75. 야산, 혹은 숲속
강숙, 은조를 가방으로 마구 친다. 은조, 맞지 않으려고 가방 뺏으려 한다.
강숙, 거칠게 은조 밀쳐내고, 가방 멀리 던져버린다. 은조, 밀쳐져서 씨근대며 강숙을 노려본다.
강숙 : (이제 운학루와 멀어졌으니 맘껏 소리지른다) 그래 이년아! 이 에미는 어떻게든 살아보려구 갖은 용을 쓰는데,
딸이란 년이 뭐? 에미 입을 꿰매? 내가 누구 때문에 아둥바둥하는데!
은조 : 나 때문이라구 하지 마! 나 때문에 살아? 엄마가? 나 위해서 살아? 엄마가? 하! 그래서 날 버렸어?
강숙 : 뭐? 버려? 내가 언제 너를 버려 이것아! 애비두 없이 너란 년을 낳았을 때부터 버릴 생각은 단 한 번두 안했어!
내 팔자 너 때문에 드럽게 꼬일 줄 다 알면서두 버릴 생각 안했다구!
은조 : 날 그 집에 혼자 놔뒀잖아! 그 징글징글한 털보장씨한테 날! 인질루 잡혀뒀었잖아!! 내가 얼마나 끔찍끔찍했었는지 알아?
강숙 : (잠시 얼어서).....
은조 : (부들부들 떨며)...
강숙 : (잔뜩 긴장하는) 그 인간이 혹시 너한테....
은조 : .....
강숙 : ..... 이상한 짓.... 했어?
은조 : (터진다. 발 동동 구르며) 그럴까봐 얼마나 무서웠는데에에에!
강숙 : ..... (안도하고) 그래애, 장씨가 아무리 개망나니라도 대천 살 때 그 개자식처럼 그런 인간은 아냐, 내가 그건 알아,
아니까 거기다 널 혼자 놔뒀지이.
은조 : 거짓말, 상관 없잖아, 내가 어떻게 돼든. 굶는지 먹는지 자는지 깨는 지, 절대 일 초두 안 궁금한 사람이면서
날, 왜 불렀어? 왜 불렀는데? 나 갈 거야. 잘 먹구 잘 살아! (가는)
강숙 : 내가 내 입으루 마지막 소리 하는 거 들어봤어?
은조 : ......
강숙 : 이제 그지같은 남자들한테 밥 빌어먹지 않아두 되구, 그 작자들한테 도망쳐 여관잠 안 자두 되구,
너 학교두 제대루 다닐 수 있구. 마지막이야. 더 이상 다른 덴 없어.
은조 : ..... 정말 더 이상 다른 덴 없어?
강숙 : 없어.
은조 : 만약, 여기서두 쫓겨나거나 도망치게 되면, 그 땐 나 놔 줘 엄마.
강숙 : (은조의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가만-히 보다가) 따 따 따.... 니가 나 없이 살 수 있을 거 같냐 이년아?
은조 : 놔 줘. 놔준다 그래. 그럼 지금 엄마 따라갈게.
강숙 : 그래, 놔준다구! 그렇게 하겠다구!
은조 : ...... 이번엔, 또 어떤 거지 같은 남자야?
S#76. 운학루 대청마루 (밤)
은조의 ‘또 어떤 거지 같은 남자야?’에 대답하듯이 대성의 얼굴이 팍 나타난다.
쑥스러운 듯한 얼굴의 대성. 그런 대성을 은조가 똑바로, 쏘듯이 보고 있다.
대성과 은조 사이에 찻상 하나, 적당한 거리. 강숙이 은조와 대성의 정확히 가운데각쯤에 앉아있다. 은조 옆에 가방 놓여있고.
대성의 뒤쪽으로 보이는,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는 살림살이.
은조, 조금씩 쏘는 시선을 거두고, 낯선 방안 풍경을 눈치채지 못하게 살피고 있다.
강숙 : 뭐라구, 좋은 말씀을 좀, 해주시지요.. (이대 나온 여자 됐음)
대성 : (어색해서)....
은조 : .....
강숙 : 어른이세요.
은조 : .....
대성 : 내가, 늬 엄마랑, 큼....
은조 : ......
대성 : 그래서, 딸이 하나였다가 둘이 돼...
은조 : ......
대성 : 모쪼록 잘....
은조 : ......
대성 : 내가 뭐부터 해주면 좋을까. 뭘, 뭐든지, 어떻게든 잘, 해주고 싶어요... 뭘 바라는지 말하면 내가, 가능한 해주겠다구 약속,
은조 : (말 끊어버린다) 약속 같은 거 필요없어요.
대성 : (당황)
강숙 : (너 죽을래의 뜻을 담고, 눈빛으로 은조를 죽일 듯 팬다)
은조 : (아랑곳없이) 그런 거 안 믿어요. 약속 같은 거 해줄 생각 말구 그냥 학교만 다니게 해줘요.
강숙 : 학교를 다니다 말다 했단 얘길 크게 안타까워하셨어. 내일부터 곧장 다닐 수 있게, 다 준비해노셨어.
은조 : ..... (의외다, 대성을 본다)
대성 : (안쓰러운 듯 은조를 보는데)
효선(E) : (대문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효선이 왔다아아!!
은조 : ?
효선 : (대청마루문 요란하게 밀어젖히며) 꺅!
은조 : (본다)
효선 : (은조를 본다)....(그럴 수 없이 환하게 웃으며) 안녕!
은조 : .....
웃고 있는 효선과, 쏘듯이 효선을 보는 은조에서...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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