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손을 얹고 꽃이여
이마에
여윈 손 얹고 꽃이여
어둡게
흘러가는 강가로 가자
어린
자갈들은 추위에 입술 파랗고
늙은
여뀌떼 거친 종아리
강으로
가서 우리는
강으로
가서
다만
강물을 보자
하늘엔
찬 별도 총총하리
시든
풀의 굽은 등엔 서리가 희리
취한
듯 슬픔인 듯 강으로 가서
다만
묵묵히 강물을 보자
이마에
손 얹고 꽃이여
-
강으로 가서 꽃이여 / 김사인
작년
12월 20일 아침에 깼을 때만 해도 시간이 영영 이대로 멈춰버린 건 아닐까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시계가 작동을 멈춘 것일 뿐 시간은 계속 흘러 새로운 봄도 찾아왔고 꽃들도 피었다.
그때
당신과 나는 소호에 있었다.
당신과
처음으로 향한 먼 곳이었다.
어떤
도망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혼자 소호에 있다.
그때
당신과 내가 머물던 호텔의 건너편이다.
새벽녘
저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머리를 내고 담배를 피우던 기억.
담배를
피우는데 어디선가 커피향이 몰려와서
주방에
전화를 걸어 아침을
시켜 먹던 기억.
그때는
바깥으로 이 거리가 있는 줄 몰랐다.
그때는
그 작은 방 안에 당신과 나의 모든 것이 엉켜 있었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눈물이
저 길로 간다
슬픔
하나 저 길로 굴러간다
물
아래 물 아래 울음이 간다
찔레꽃
한 잎 물 위에 흘러간다
오늘
못 가고 내일
내일
못 가고 모레 글피
글피도
아니고 아득한 훗날
그
훗날 고요한 그대 낮잠의 머리맡
수줍은
채송화꽃 한 무더리로
저
길로 저 길로 돌아
내
눈물 하나 그대 보러 가리
그대
긴 머리칼 만나러 가리
서늘한
눈매 만나러 가리
오늘
아니고 어제
어제도
훨씬 아닌 전생의 어느 날
눈물은
별이 되어 멀리로 지고
손발
없는 내 설움 흰 눈 위로
피울움
울며 굴러서 간다
-
눈물이 저 길로 간다 / 김사인
한
여자를 알았다.
나는
그녀가 빨간색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녀는 파란색이었다.
정반대의
색을 가지고 있어서 한순간 주춤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럴
경우, 내가 그쪽으로 옮겨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얼마를 더 만났더니 그녀는 차라리 흰색이었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들리지
않는 목소리. 보이지 않는 길. 잡히지 않는 손.
우주는
한없이 넓다고 했으니 어딘가에는 그런 것들로만 이뤄진 세계도 분명히 존재하리라.
그런
곳에서는 보이는 길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지 못하리니,
그런
곳에서는 모두들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소망하는 곳에 이르리라.
심지어
우리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만약
우리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잡히지
않는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
깊은 밤, 기린의 말 中 / 김연수
불에
달군 쇠처럼 번쩍이는 바다 위에 녹아 흐르는 배들이
민들레
홀씨들을 싣고 사라진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먼
섬 자락에 잘려진 길로 한 남자가 사라지고
남자를
따라간 길은 돌아오지 않았다
길
옆 무덤가에는 가을 한 조각이 몸을 말리며
체온을
잃기 전의 언덕을 추억한다
우리
집 문틀은 너무 낮고 약해 대들보가 있었으면 좋겠어
누이는
사이다 한 병을 바가지에 부어 소년을 씻긴다
그래도
소년의 마음에선 고름이 흘러나오고
불빛은
오색 유리가시가 되어 방 안에 어지럽다
누이는
밤이
와도 모든 것들은 그 자리에서 네가 오길 기다릴 거라고
언제나
너와 함께 가는 풍경들, 함께 기다리고 함께 넘어지고
너의
눈물도 함께 흘릴 거라고
그것들의
울음을 함께 울어준다면
-
함께 우는 섬 / 김일영
왜
헤어짐의 상태에서는 사랑하지 않았던 거라고 믿게 하는지를,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게 되는지를,
왜
헤어진 이후로는 정확하지 않은 것만 생각하게 되는지를 모르고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를,
어쩌면
그토록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버둥거립니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가는
비여 가는 비여
가는
저 사내 뒤에 비여
미루나무
무심한 둥치에도
가는
비여
스물도
전에 나는 이미 늙었고
바다는
아직 먼 곳에 있다
여윈
등 지고 가는 비
가는
가을비
잡지도
못한다 시들어가는 비
-
비 / 김사인
그
아이가 너무 좋았다
그
아이를 개로 만들고 싶어서 나는 쓰기 시작했다
쓰다
보니 그것은 소설이었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그
아이는 개였다
하얗고
털이 많고 항상 혀를 내밀고 있다
그
아이는 운전을 잘하는 개여서
우리는
차를 타고 어디든 갔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개였다
나의
품에 안겨서 자주 낑낑거렸다
석양이
질 때면 우수에 찬 개였고
머리를
기대어 앉으면 두 심장이 뛰는 밤이었다
어느
날 나는 나의 영혼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너무 좋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개에게 고백했다
사,
랑, 해
너무
떨려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내며
한
음절씩 끊어 말했다
그
아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꾸
짖었다
그것을
다 썼을 때, 어디선가 불이 났다
그것은 소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나는
나의 아름다운 소설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그 아이는 개가 아니다
-
오수 / 황인찬
당신의
눈동자 내 생의 첫 거울
그속에
맑았던 내 모습 다시 닮아주고파
거대한
은하수조차 무색하게 만들던 당신의 쌍둥이 별
내
슬픔조차 대신 흘려줬던 여울
그속에
많았던 그 눈물 다시 담아주고파
그
두 눈 속에 숨고자했어 당신이 세상이던 작은 시절
당신의
두 손 내 생의 첫 저울
세상이
준 거짓과 진실의 무게를 재주곤했던 내 삶의 지구본
그
가르침은 뼈더미 날개에 다는 깃털
기억해
두손과 시간도 얼었던 겨울 당신과 만든 눈사람
찬
바람속에 그 종소리가 난 다시 듣고파
따뜻하게
당신의 두손을 잡은 시절
-
당신의 조각들 中 / 에픽하이
시멘트
뚫는 포크레인 드릴 소리
오래된
대들보를 흔들고
운현궁
사랑채 마당에 떨어진 복숭아들,
가지는
놓친 무게만큼 더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문간방 마루에 앉아
김밥
한 줄을 나눠 먹는다
연한
바람에도 소스라치게 흔들리며
땡볕을
쓸어내는 그늘 아래서
우리는
복숭아를 줍는다
소음과
땡볕이 바글거리는 마당을 견디며
내뿜는
향기가 애리다
카메라
든 사람들 두리번거리며
마당
가로질러 사라지듯
우리도
이 마당의 한때를 벗어날 수 있을까
손바닥에서
뒤척이는 복숭아들
나무
그늘에 묻으며
우리는
어디쯤 걸어나고 있는 것일까
가난한
그녀의 손을 꽉 쥐어 고이는 땀에
해머
드릴이 열을 식히고, 녹슬어가고
허공을
밟듯 잊혀진 여름 같은 운현궁을 빠져나오며
-
가지는 놓친 무게만큼 더 흔들리고 / 김일영
누군가
나를 잡고 흔들면
나는
호두알처럼 후두둑 떨어진다
절반은
남겨두고 절반만 떨어진다
오뉴월
땡볕으로 나를 조리면
나는
익는다
절반이
시뻘겋게 익는다
푸르딩딩하고
떫은 절반의 맛은 남겨두고
아무리
나를 털어내려 해도
그냥
거기 묻어 있다. 나의 절반은
재가
되지 않는 절반의 습성 때문에
불구로
살아왔다
저녁나절
해가 떨어지면
남겨둔
절반이 와르르 쏟아진다
반이
뚝 부러진 절반이
지팡이
짚고 절뚝거리며 걸어나온다
반쯤
이별한 사랑이, 반만 시같은 시들이
반만
성한 장기들이, 반만 남은 적들이
반쯤은
웃고 반쯤 울던 입술이, 반은 죽은 목숨이
반이,
반의 반이 또 그 반의 절반이
어쩌나,
이 절반의 악몽을
이
미지근한 습성을 단칼에 잘라 낼
칼날을
잃은 지 오래다
아니,
칼 대봤자 소용이 뭐람
절반은
칼날에 남아 피 흘리고 있을 텐데
-
절반의 습성 / 최문자
밥을
먹어도
얼른
밥 먹고 너를 만나러 가야지
그러고
잠을
자도
얼른
날이 새어 너를 만나러 가야지
그런다
네가
곁에 있을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나 안타깝고
네가
없을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더딘가 다시 안타깝다
멀리
길을 떠나도 너를 생각하며 떠나고
돌아올
때도 너를 생각하며 돌아온다
오늘도
나의 하루 해는 너때문에 떴다가
너때문에
지는 해이다
너도
나처럼 그러냐
-
너도 그러냐 / 나태주
당신의
자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봅니다
가만히
손도 잡아 봅니다 사랑이
따스하군요
당신도
내 손을 잡는군요
처음
만나던 날의 떨림이군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떠나는
인사임을
어깨에서
앞가슴으로 흐르는 흐느낌
자신의
탓이라고 혼절하는 장면 눈에 보이는군요
어린놈도
함께 우는군요 용서해
주세요
변명과
이유는 구차스러워 접습니다
이제
고별입니다
그동안
함께 살아온 인사치레로 조금만 우세요
아직도
사랑이 남아 있는 세상 떠나갑니다
-
고별 / 황도제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 수 없어서 고유하고 외롭다
까마귀가
반짝이는 거울을 모아가듯
시간의
기류를 타고
나는
두 발의 컴퍼스로 지도를 그려갔다
태양의
위도와 바람의 경도가 만나는 점이 내가 서 있는 곳이었지
그늘을
받아먹던 흰 벽에 누런 응달 자국이 앉을 무렵 지도는 그려질 줄 알았어
자오선은
길게 펼쳐졌는데
당신이
여기 있어도 같은 시간을 살 수 없는 우리 사이에 희멀건 강이 눈부시게 흘렀다
강은
언제나 저만큼 웅크려 있다가 나의 다가섬만큼 모양이 변했다
경계를
나누기 힘든 햇살처럼
강은
측량하기 곤란한 빈칸
우연
같은 위도와 필연 같은 경도가 내게서 만나는데
당신은
당신의
자오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
침착해서
서글픈 물결을 이기고
돋보기로
모은 태양점처럼 희멀건 강을 분홍코끼리 한 마리가 건너가길 바랐다
당신과
내가 여기 있어서 그릴 수 없는 길고 깊은 강과 마주섰다
당신은
잠깐 고개를 들었고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지
비극의
첫 페이지가 무난하게 시작하듯
무심한
강은 눈부시게 흘렀다
탐
다오 탐 다오 코끼리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
불한당들의 모험 46 / 곽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