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할까?
빌립보서 1:20-21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최근에 아이들이 휴가차 내려와서 함께 지내다보니, 문득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제가 대여섯살 때즘에 아버지께서는 종종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삶의 교훈들을 주셨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이제 오래되어 이야기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야기를 하시며 삶의 교훈을 말씀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중 하나는 ‘손님이 많은 것이 복이다.’라는 것과 어디서든 ‘밥값 하고 살아라’라는 말씀입니다. 돌아보면, 아버지의 가르침이 저의 삶에 여러모로 영향을 주신 것 같습니다. 손님이 많아야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제가 벤츄라교회에 온 이후에 다녀가신 목사님들과 가족들의 방문이 7차례는 됩니다. 또한 성도님들을 초대해서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들을 따져보면, 제법 많은 손님들이 저희 가정에 다녀가셨습니다. 또한 어디 가든지 밥값하고 살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받는 것보다는 더하며 살려고 나름 애썼던 것 같습니다. 이민교회를 그리고 개척교회를 하면서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보면 제가 제일 가난했을 터인데, 교회에서 언제나 헌금을 제일 많이 드렸고, 받은 것보다 드린 것이 더 많았던 해도 제법 있었습니다. 헌금이 목회를 평가받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교회를 앞세우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가장이 되어 아버지처럼 아이들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가 ‘본인이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라’입니다. 또한 아이들이 대학을 가며 집을 떠날 때에는 ‘주일은 꼭 지켜라 그리고 십일조 생활해라’였습니다.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밴쿠버 한인교회의 성도로서 찬양단을 섬기고, 청년부의 중심이 된 것으로도 봐서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가르침이 아이들에게 삶의 방향성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고 응원할뿐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드렸는데, 여러분도 저마도 삶의 방향성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한해를 마치고, 2025년을 시작을 기다리는 이 때에 바울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방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빌립보서의 저자는 바울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위키백과에서 바울에 대한 설명입니다.
바울은 초기 기독교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의를 전하려는 열정으로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 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가운데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교회사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 여행 중에 여러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번 매를 맞고,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배가 파선했다. 그렇게 그는 유대교와 구분된 기독교를 확립했고, 그 교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바울의 열정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에 대해 구약성서를 근거로 변증하는 지성적인 신앙에 뿌리를 두었다. 바울의 신학 및 서신은 기독교 교리와 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서 혹자는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도 없었겠지만 바울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도 없었겠지만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다.‘는 평가는 바울이 얼마나 대단했던 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살았기에, 이와같은 평가를 받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 바울이 바울되게 한 그의 몇 가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삶의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본문에 세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 부끄러움 없는 삶 둘째, 담대하게 사는 삶, 셋째, 오직 주님만을 위한 삶입니다.
이와같은 삶의 목표가 그를 위대한 사도로 세움받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삶의 목표를 살펴보면서, 한 해의 마지막 중에 새로운 한해를 준비하는 마음을 찾아 보고자 합니다.
첫째, 부끄러움 없는 삶입니다.
세상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표현을 합니다. ‘인간같지 않다’ 이런 표현을 보면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사람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수오지심(羞惡之心)을 군자의 덕 중에 하나로 꼽았습니다.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즉 잘못된 것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부끄러움에 대한 말씀들이 있는데, 빌3:19을 보면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즉 너무다도 세상적이어서 부끄러운 일을 자랑거리로 안다는 탄식입니다. 에베소서 5:12을 보면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라고 하십니다. 삶의 있어서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사느냐‘라는 것입니다.
물질과 부를 생각해 보면 부자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 부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것이 될 때 부끄러운 것입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게으른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학벌의 부족함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유식한 자의 거짓과 부도덕한 양심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은 벌거벗은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그의 자랑과 부끄러움이 무엇이냐에 따라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부끄러웠던 삶의 시점은 자신과 주님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세번씩 부인하던 때요, 주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도망한 순간이었으며, 그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삶의 순간은 거꾸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주후 300년경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왕으로 즉위할 당시, 왕궁 안에는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공직자로 있었습니다. 왕은 기독교인 공직자들에게 신앙을 버리든지 공직을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엄명을 내렸고 많은 기독교인 공직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공직을 버리고 떠났으나 몇몇 사람은 그대로 공직에 남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자기의 신앙에 진실되지 못한 사람은 결코 나라에도 충성하지 못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공직을 택한 자들을 모두 쫓아내고 신앙을 택한 사람들을 다시 불러 정치를 맡겼다고 합니다.
진리를 떠나는 사람은 부끄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목회 여정 중에 굉장히 힘든 순간이 있었습니다. 선택의 순간이었습니다. 한쪽을 선택하면, 주는 월급을 받으며, 먹는 사는 것에 문제가 없었겠지만, 목사로서 양심을 속여야했고, 불의에 눈 감아야 했고, 악을 행한 자들의 노예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다른 한쪽을 선택하면 당장 한 달 살 돈도 없었고, 아이들 먹일 돈이 걱정되었지만, 목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제 앞에 두 개의 길이 있고, 피할 수 없고 선택해야 했습니다. 저는 결국 목사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저도 힘들었고, 저보다 처가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나고 보니, 그때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확신이 들었습니다. 당시 아이들이 어려다 생각해서 일일이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이미 중고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아빠이며 목사였던 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때의 상황들을 다 알고 있더라구요. 그리고 어려움이 지나고 나서는 그때 목사로서의 품위를 지켰던 것이 적어도 자식들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 않은 선택은 훗날 저와 가정에 축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여러분 앞에서 설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몸을 던져 봤더니,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셨던 체험이, 확신이 있기에 제가 감히 전하며 권면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도 저보다 더큰 체험들이 있고 확신이 있고 믿음이 있기에 이 시간 전하며 아멘으로 화답하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고 계신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기억하시고, 축복해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시간입니다. 오늘 찬양했습니다. “주님 말씀 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모든 찬양의 가사와 우리의 기도와 말씀이, 주시는 은혜와 깨달음은 주님과의 약속이며 결단입니다. 약속은 지키려고 하는 것이고, 결단은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새해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결단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실 것입니다.
둘째, 담대하게
바울은 투옥된 상태에서도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게 살겠다고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말합니다. 담대함과 부끄러움은 맞물려 있어 담대한 자는 부끄럽지 않게 살며, 부끄러움 당하지 아니하는 삶은 담대한 삶의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여호수아 1장을 보면 미지의 세계인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고 세 번이라 반복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나약한 마음은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바울을 바울되게 하고 여호수아를 여호수아되게 한 것은 오직 담대한 신앙, 그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섬1기면 죽을 줄 알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에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을 바라보고 기도했으나 사자굴 속에서 건짐 받았습니다.(단 6장)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어떠했습니까?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죽음의 시간이 촉박해 오면 올수록 더욱더 강하고 담대한 신앙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풀무불 속에서 털끄하나 상하지 아니하고 살아날 수 있는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언제인가는 생명을 위하여 강하고 담대하게 진리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 되시길 기도합니다.
셋째 , 주님만을 위하여
바울은 본문에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게 하려하며,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합니다. 만약 그가 옥중에서 죽는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하므로 그리스도는 존귀케 될 것이요 그는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며 만약 산다면 그리스도를 전하고 증거하는 특권이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다는 고백을 합니다. 바울 그는 오로지 주님만을 위한 길을 선택하여 나아가는 자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이 사는 길임을 깨달았고 고백하던 그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나 죽음은 오히려 삶의 힘이 되었습니다.
화가 미켈란젤로는 4년7개월이나 걸려 대작품인 ‘천지창조’를 완성한 후 관절염을 얻고 시력이 감퇴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희생이 없는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내 삶의 의의와 목적을 오직 그리스도께만 두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