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이경진(李景震) 묘갈명(墓碣銘) - 명곡 최석정(崔錫鼎)
율곡(栗谷)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선생에게 이경진(李景震)이란 조카가 있는데 어려서 기도(器度)가 준엄하여 어진 자제로 일컬어졌다. 성장하자 문성공이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에게 수업하라고 명하니, 힘껏 배우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문성공이 세상을 뜨고 군소배(群小輩)들의 모함이 끊이지 않자 을유년(乙酉年, 1585, 선조 18)에 공이 상소하여 진변(陳辨)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587, 선조 20)에 문성공의 문인(門人)인 찬성(贊成) 이귀(李貴)공이 포의(布衣)로 상소하여 변론하려고 하다가 올리지 않자 공이 올리지 못한 상소문에다가 제공(諸公)의 상소문을 부록하여 올리기를 권하니, 사론(士論)이 상쾌하게 여겼다.
공의 자(字)는 성보(誠甫)이며 덕수(德水) 사람인데, 그 세덕(世德)은 ≪율곡집(栗谷集)≫에 자세히 실려 있다. 아버지 휘 선(璿)은 남부 참봉(南部參奉)이요, 어머니 선산 곽씨(善山郭氏)는 종사랑(從事郞) 곽연성(郭連城)의 딸인데 가정(嘉靖) 을미년(乙未年, 1535, 중종 30)에 공을 출생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570, 선조 3)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고, 임오년(壬午年, 1582, 선조 15)에는 모부인(母夫人)이 세상을 버렸는데, 복상(服喪)을 마치기 전에 문성공이 졸(卒)하자 공은 부모님 상을 당한 것처럼 매우 슬퍼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591, 선조 24)에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을 제배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선조 25)에 공은 숙모인 문성공의 부인 노씨(盧氏)를 모시고 피난하기 위해 경성에서 향리로 내려가다가 노 부인이 왜적을 만나 화(禍)를 당하였다.
공은 마침내 서종제(庶從弟) 이경림(李景臨) 등과 가속(家屬)들을 데리고 양덕현(陽德縣)으로 피난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 선조 26) 겨울에 양덕에서 해주(海州) 석담(石潭)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우계 선생이 평양(平壤)을 떠나 은병정사(隱屛精舍)에 와 있어 공은 날마다 궤장(几杖)을 받들어 모시며 강학(講學)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 선조 27) 정월에 제릉 참봉(齊陵參奉)을 제배하였는데, 여름 4월에 공과 부인 안씨(安氏)가 함께 염병에 걸려 잇따라 죽어 석담 남쪽 몇 리 되는 대사동(大寺洞) 계좌(癸坐) 언덕에 함께 묻었다. 안씨는 순흥(順興)의 큰 성씨로 병절 교위(秉節校尉) 안수기(安守基)의 딸이며 좌의정 시호(諡號) 정민공(貞愍公) 휘 당(瑭)의 현손(玄孫)이요 우참찬(右參贊)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의 외손녀이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일찍 죽고, 다음 이욱(李稢)은 참봉이요, 장녀는 첨지 윤계(尹桂)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출가하기 전에 죽었다. 이욱은 아들 여섯을 두었으니, 이후근(李厚根)ㆍ이후재(李厚栽)ㆍ이후지(李厚址)ㆍ이후양(李厚養)ㆍ이후상(李厚相)이요, 이후방(李厚芳)은 생원으로 벼슬하여 연풍 현감(延豐縣監)이 되었으며, 딸 하나는 사인(士人) 신식(申)에게 시집갔다.
이후근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현(李絢)과 이회(李繪)이며, 사위는 김일장(金日章)이다. 이후재는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강(李綱)ㆍ이신(李紳)ㆍ이작(李綽)인데, 이신은 생원이요, 사위는 최세연(崔世延)과 무과에 급제한 조두장(趙斗章)이다.
이후지는 아들이 없어서 동생의 아들 이완(李綄)을 후사로 삼았다. 이후양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 이겸(李縑)은 생원이요, 사위는 최세구(崔世逑)와 성기(成榰)이며, 측실(側室)에서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전(李絟)이요 사위는 유진(柳蓁)이다.
이후상은 측실에서 아들 이함(李緘)을 두었고, 이후방은 2남 1녀이니, 아들은 이관(李綰)과 이완(李綄)이며, 사위 김천여(金天與)는 지금 감찰(監察)로 있다. 신식은 3남 2녀인데 아들은 신석하(申錫夏)ㆍ신상하(申相夏)ㆍ신명하(申命夏)이며, 사위는 남궁발(南宮鈸)과 윤모(尹模)이다. 내외 손자가 수십 명이다.
공은 어려서 문성공에게 배워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 별좌(別坐) 한관(韓瓘) 및 족숙(族叔) 이통(李通)과 서로 친하게 지냈다. 우계(牛溪)의 문하에서 공부하기에 미쳐서 우계가 말하기를, “성보(誠甫)는 독실하여 학문이 진보될 것이다.” 하였는데,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애석해 하며 석담(石潭)의 여러 문인에게 편지하기를, “이 성보가 불행히 단명(短命)하여 죽어 이제 석담의 일을 부탁할 자가 없게 되었다.” 하였으니, 이처럼 중함을 받았던 것이다.
나 최석정은 비록 노선생(老先生)의 문하에 가서 배우지 못했으나 의리가 사숙(私淑)한 것과 같고, 연풍공(延豐公, 이후방) 및 증손자 이신(李紳)과 좋게 지내고 있으며, 이신의 아들 이태익(李泰翼)이 나에게 글을 배우고 있으니, 묘갈명의 부탁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이공(李公)은 문성공의 조카로서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문하에 유학했으니,
하늘이 아름다운 자질 부여하였고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이삭을 패게 하고서 열매는 맺지 못하도록 하였는가?
그 들은 바를 끝까지 시행토록 않게 함이 애석하도다.
내가 그 무덤에 묘갈명을 지었으니,
오히려 후인들에게 징고(徵攷)함이 있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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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宣務郞行齊陵參奉李公墓碣銘[崔錫鼎]
栗谷李文成公先生有從子曰景震, 少時器度峻整, 稱爲賢子弟。 旣長, 以文成公命, 受業于牛溪成先生, 力學不怠。 文成公歿, 而群小搆誣未已。 乙酉, 公抗章陳辨。 丁亥, 文成之門人贊成李公貴, 以布衣欲疏辨而未徹, 公勸以未上之疏, 附諸公疏以聞, 士論快之。
公字誠甫, 德水人。 世德詳在《栗谷集》。 考諱璿, 南部參奉。 妣善山郭氏, 從仕郞連城之女。 公以嘉靖己未生。 庚午, 丁外艱。 壬午, 母夫人棄世, 喪未畢, 文成公卒, 公若喪所生, 哀慽甚。 辛卯, 除典獄參奉, 不就。 壬辰倭變, 公奉叔母文成公夫人盧氏, 爲避亂計, 自京下鄕, 盧夫人遇賊被禍。 公遂與庶從弟景臨等率家屬, 奔陽德縣。 癸巳冬, 自陽德歸海州石潭。 時牛溪先生自箕城來到隱屛精舍, 公日侍几杖講學。 甲午正月, 拜齊陵參奉。 夏四月, 公與室安氏遘癘, 相繼不淑, 同窆於石潭南數里許大寺洞癸坐原。
安氏, 順興大姓, 秉節校尉守基之女, 左議政、諡貞愍公諱瑭之玄孫, 四宰休菴白公仁傑之外孫。 生二男二女: 男長, 早夭: 次稢, 參奉。 女長適尹桂, 僉知: 次未笄而歿。 稢有六男: 厚根: 厚栽: 厚址: 厚養: 厚相: 厚芳, 生員, 仕爲延豐縣監。 一女適士人申㵓。 厚根二男一女: 男絢、繪, 壻金日章。 厚栽三男二女: 男綱、紳、綽。 紳, 生員。 壻崔世延: 趙斗章, 武科。 厚址無子, 以弟子綄爲後。 厚養一男二女: 男縑, 生員。 壻崔世球、成榰。 側室一男一女: 男絟, 壻柳蓁。 厚相側室一男緘。 厚芳二男一女: 男綰、綄。 壻金天與, 今爲監察。 申㵓三男二女: 男錫夏、相夏、命夏, 壻南宮鈸、尹模。 內外諸孫數十人。
公幼學於文成公, 與李延平貴、成滄浪文濬、韓別坐瓘及族叔李通相友善。 及游牛溪之門, 牛溪謂誠甫篤實學可進。 逮公歿, 聞而惜之, 貽書石潭諸門人曰: “李誠甫不幸短命死矣。 石潭之事, 無可託者。” 其見重如此。 錫鼎雖不及老先生之門, 義同私淑, 與延豐公及公曾孫紳有契好。 紳之胤泰翼問業于余, 墓銘之託, 其何可辭? 銘曰:
猗𨲠李公! 以文成之姪, 游文簡之門。 天予美質, 學有淵源。 何遽秀而不實? 惜乎未足其所聞。 我銘其室, 尙有徵於後人。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