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유신론(維新論)
현재 한국불교는 세계를 향해 발돋움하고자 애쓰고 있다.
내실은 어떠하든 간에 일부 외국인의 눈에는 적어도
대승 불교권에서 한국의 승단이 가장 순수함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비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우리가 잘 알다시피 불교계에서는
이제 시작이라 하면서 중흥과 개혁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으며,
신도의 수도 기독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발전을 위해서는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인식을 불교인이라면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답변으로서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것은,
불교 본연의 역사성과 과거의 유산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정리하며 오늘의 시대성과 사회상에 있어서
현재 우리 불교의 위치를 똑바로 관찰하고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한국불교의 당면과제를 생각할 때면 우리는 부끄럽게도
근 75년 전에 지적된 사실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1913년에 만해 한용운(韓龍雲)은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한국불교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서
다음과 같은 12항을 지적했다.
승려에게 현대교육을 시킬 것.
참선을 올바르게 지도할 것.
염불당을 폐지할 것.
포교를 현대화할 것.
사원을 도시로 옮길 것.
무속적인 산신, 칠성들을 제거하고 석가모니불만을 봉안할 것.
의식(儀式)을 간소화할 것.
승가의 경제적 자립을 이룰 것.
승려의 결혼을 허용할 것.
주지의 결정은 선거에 의할 것.
승가의 화합을 꾀할 것.
사원을 통할(統轄)할 것.
한용운 이외에도 몇몇 뜻있는 불교인에 의한 불교개혁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1950년대 이후 불교정화라는 홍역을 치르고 나서
조계종 내부에서는 불교의 현대화를 부르짖으며 수차에 걸쳐
근래에까지 많은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과제들이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라.'는
제의만을 제외하고『불교유신론』의 제의를 거의 답습해 왔던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첨가한다면 신도의 조직화, 활성화와 사찰재정의 합리화이다.
사실은 승려의 결혼문제도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보다 효율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대민(對民)활동을 전담하는 승려에게 결혼을 허용하는 문제가
조심스럽게 검토된 적도 있었다. 이상 제기된 과제들은
대개 불교의 외실에 관한 문제였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외양이 현실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워낙 사회의 변화가 무쌍했기 때문에
그것이 급선무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와 아울러 내실을 기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는 사상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점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불교교리의 다양함과 포용성, 심오함에
안주한 탓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장점들이 불교인들에게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역효과를 초래하였음도 주시하여야 한다.
이런 사상적 뒷받침이라는 문제에 대해,
불교학자 고익진 박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만해와 더불어 그는 대중불교를 위한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의 선(禪)과 교학이 다 같이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禪이고,
禪이 불교의 진정한 뜻을 발휘하는 데에 탁월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의 파격적인 독창성이
일반 대중을 위해 실질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선에 대한 속단이나 오해가
오늘날 불교계에 얼마나 많은 해독을 끼쳤는가를 반문하면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표방 아래 경전은 배척하면서도
조사어록은 탐독하고, 무애행(無碍行)을 한다면서 파계를 합리화하며,
일종의 기교에 불과한 화두(話頭)에 집착하여
교묘한 희론을 일삼았던 잘못도 있었음을 지적한다.
다음으로 교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길,
화엄학을 대표로 들 수 있듯이 전문적인 불교학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교학에 치중한다면 어떻게 일반 대중을 위한 불교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교학은 계속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대중을 위한 길도 아울러 모색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대중을 위한 오늘날의 불교를 위해서는
지나치게 종파적인 교학은 부적당하며,
경전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말씀을 각자의 마음속에
직접 들려주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론으로서
불교의 근본성전을 새로이 편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근본성전의 기반은 아함경이 되어야 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사실 우리나라의 불교계에서는 아함경을 소승경전이라는 인식하에
무시해 온 경향이 있다. 제25문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아함은 불교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아함을 비롯한 초기성전에서는 당장의 현실을 직시하고 지적하는
부처님의 선명한 눈과 생생한 음성을 접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이론도 결국은 아함에 기초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승의 공사상(空思想)도 불교의 근본인식인 연기(緣起)의 해석이고,
그 연기를 설하는 것은 아함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아함경부터 읽어 가야 한다는 주장은 일반 대중을 위해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한국불교의 과제를 점검할 때는,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사상의 측면에서는 위와 같은
고익진 박사의 견해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대승불교의 교의적 탁월함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空사상의 심오함을 예로 든다. 과연 그 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서구인들은 이를 오해하여 불교를 염세적 종교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 무한한 공관의 실천은 깨달음이라는
종교적 체험을 통해 궁극에 가서는 중생에게 회향(廻向)된다.
그러기에 부처님을 '그렇게 온 자', 즉 여래(如來)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돌아옴으로써 부처의 깨달음과 중생에 대한 사랑은
더없이 원만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불교인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은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하는 성전의 편찬이다.
그런 성전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한국불교의 이념이 정립되고,
이념이 정립될 때 승려교육이나 포교 및 종단의 혁신이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만해 한용운이 불교유신론을 발표하고 나서
『불교대전』이라는 성전을 편찬했던 것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고익진 박사는 교훈으로 지적했다.
이상의 지적은 불교학에 전념하는 승려나 학자에 대한
요구로서 이해된다. 그것은 또 대중불교로의 전향이라 할 수 있다.
불교유신론에 이미 지적된 한국불교의 과제는
종단의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불교인 모두가 심혈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김영태,『韓國佛敎史槪說』(→ 문 45), p. 262.
고익진,『현대한국불교의 방향』(→ 문 8), pp. 17
2009. 4. 8.
출처 : 불자모임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