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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강휴게소[東津江休憩所]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에 있는 휴게소.
동진강휴게소가 위치한 동진강(東津江)은 동진교 바로 남쪽에서 고부천과 합해져서 북진하여 흐르는데, 동진교 부근은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북쪽의 동진강 하구는 새만금 방조제의 내부가 되었다. 동진강휴게소는 20년 사용 후 김제시에 기부체납을 조건으로 1992년에 완공된 휴게 편의 시설이다. 동진강휴게소의 연면적은 1,321㎡이며 주차장과 상가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하원마을 북서쪽에 위치하는 동진강휴게소는 김제와 부안을 연결하는 국도 23호선의 동진교 동쪽에 위치한다. 국도 23호선이 2차선일 때는 양쪽 방향의 이용객이 모두 이용하였으나, 2000년대 이후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반대편에 동진석천휴게소가 개소하자, 동진강휴게소는 부안에서 김제 방면 이용객이 주로 이용하는 휴게소가 되었다. 접해 있는 동진교는 실뱀장어와 함께 망둑어 낚시터로 유명하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김제 벽골제 [한국 최고(最古)의 저수지]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정읍시 방향으로 29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면 김제시 입석동, 장화동을 지나 신덕동에 이르게 된다. 신덕동에서 원평천을 가로 질러 놓인 제2신덕교, 제1신덕교와 제2포교, 제1포교를 건넌 뒤 감곡역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여기에서 약 500m 정도 더 가면 신용리의 신용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동쪽으로 농경지로 되어 있는 벽골제의 현재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김제 벽골제는 한국 최고(最古)의 저수지와 그 제방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330년(백제 비류왕 27)에 쌓았고, 790년(원성왕 6)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벽골제는 고려·조선시대를 지나며 보수·중수되어 왔다.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벽골제 일대의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현재 벽골제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김제 벽골제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위치한 벽골제(사적)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둑이다. 벽골제가 한국 최초의 저수지라는 실증적인 자료는 1415년의 중수비에 기록된 5개의 도랑의 존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대규모의 저수지 축조가 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토목기술이 발달했다는 점은 한국과학기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벽골제는 A.D. 330년 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된 후, 파손과 중수가 반복되었다. 그후 벽골제는 1420년 둑이 터진 후, 모경과 저수답의 제방 구실을 하였다. 일제시대(1927년)에는 운암저수지 물을 유역 변경시켜 광활간척지로 보내는 간선수로의 제방으로 바뀌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벽골제의 길이는 60,843척이고 제내주회(堤內周回)가 77,406보이며 몽리면적이 약 9,840결이다. 그리고 저수지의 둘레는 7만 7천 4백 6보(약140㎞)이고, 여기에 물이 가득 찼을 때에는 그 면적이 5천 정보 정도이다. 또, 벽골제의 수문 중에서 수여거는 그 물줄기가 만경현의 남쪽에까지 뻗어 나갔고, 장생거는 만경현의 서쪽에, 중심거는 고부군의 북쪽과 부령현의 동쪽에, 경장거와 유통거는 인의현의 서쪽에까지 이르렀다. 권혁재(1975, 2005)는 벽골제 일대에서 해발고도 10m 이하 지대는 충적평야로, 최종빙기에는 큰 침식곡이었지만 후빙기에 들어 해수면이 상승하여 침식곡이 매적되어 오늘날의 충적평야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그 증거로 김제역 동쪽 두월천 연안 등의 사금광에서 발견된 갯벌 퇴적층과 게구멍를 제시하였다. 윤무병(1976)은 이와 같은 감조구간 연안의 하곡 충적평야에 삼국시대인 A. D. 330년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팠다고 주장했다. 벽골제 건축 당시 쌓은 제방은 높이 약 4.3m,
길이 약 3㎞로서 인공 축토 하부의 식물 탄화층의 탄소 동위원소 측정의 연대가 A.D. 350년 전후로서 과거 문헌기록과 잘 조화를 이룬다.
장호(2008)는 이 벽골제를 수치지도에서 고도를 추출하여 해발고도 6m 수준을 저수지의 수몰 범위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재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 일대의 최대조차는 약 7.6m, 평균조차는 약 6.2m이므로 이 두 하천 하류는 자연 상태에서는 해발고도 약 3-4m까지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오는 감조하천에 해당된다. 현재 벽골제는 2500m의 제방(둑)과 둑에 딸린 시설로는 북단 수문터였던 장생거와 둑의 남단 수문터였던 경장거 2개의 수문만이 남아있다. 이 두개의 수문에 대해서 두 차례의 발굴 조사가 행해졌으며, 1980년에 장생거에 대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각 수문지마다 높이 550㎝, 폭 750㎝ 두께 50~60㎝인 석주가 2개씩 있고, 석주의 안쪽 면 가운데에는 폭 20㎝, 길이 12㎝의 홈이 위에서 아래 까지 파여 있다. 이 홈에 목판을 끼워 놓고 그것을 상하로 움직여 방수량을 조절하였던 것이다. 석주 사이의 바닥에는 물이 흐를 때 바닥이 패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납작한 석재를 깔아 놓았다. 장생거와 경장거는 저수지의 물을 아래로 내보내는 통로이었기 때문에, 석재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시계열적으로 본 벽골제 일대의 지형 및 지리적 변천 장호(2008)는 문헌 기록과 발굴 자료를 관련 지도 등과 비교 검토하여 현재에서 과거로 지표 경관(景觀)을 복원하는 방법(古島敏雄, 1967)으로 벽골제와 그 주변의 지형 및 지리적 변천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1) 조선시대까지 벽골제 일대의 경관
757년 통일신라(경덕왕16년) 때는 당시 행정구역 단위였던 군현의 지명을 한자로 바꾸었다. 이 때, 벽골현을 둑이 있다하여 김제로 지명을 바꾸었으므로, 8세기 중엽 이전에 벽골제는 실제로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90년(원성왕 6년)에 벽골제를 증축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현종 때인 1010년 내지 1031년에 보수하였다. 1143년(인종 21년)에 다시 고친 후 3년 만인 1146년(인종 24년) 무당의 말을 듣고 벽골제 둑을 트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1415년(태종 15년)에 벽골제를 다시 고치고 그 중수 과정을 비석에 기록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중수비 항목에는 벽골제의 물을 끌어들여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다섯 개의 도랑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에 대해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장호(2007)는 다섯 도랑 관련의 지명들을 대동여지도(1861)에서 고찰한 결과, 「동국여지승람」의 도랑 기사는 대동여지도(1861)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전술한 다섯 개의 도랑의 기능에 근거하면, 일부 학자가 벽골제가 방조제 또는 방조제 둑이며 그 내부는 저수답으로 벼베기가 끝나면 이듬해 모내기에 쓰려고 빗물을 가두어 두는 논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벽골제 저수지의 물을 현재의 만경, 성덕, 신태인 서쪽의 화호, 신태인의 동진강 연안으로 도랑을 통해 흘려보내 관개용수로 끌어들일 수 있으려면 벽골제의 수몰 수위가 이들 지대보다 높아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1/5,000 및 1/25,000 수치지도를 이용하여 해발고도 3, 4, 5, 6m 등고선을 그려서 검토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남쪽의 명금산 북쪽 기슭에서 북쪽의 김제시 신덕동 수월까지 약 4.3㎞ 거리의 둑 안의 해발고도 6m의 수몰 범위에는 수여거와 유통거가 벗어나 있고, 벽골제 발굴보고(尹武炳, 1976)의 둑 높이 해발고도 8m 와도 조화된다는 점이 밝혀졌고, 또 해발고도 6m 등고선은 성덕, 화호, 신태인 동진강 연안으로 연장되어 이들보다 낮은 지대로 도랑이 연장되면 물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수리시설중에서 물을 가두는[저수(貯水)하는]제(堤)에는 크게 산골짜기에 둑을 쌓는 산곡형(山谷型)과 구릉 사이의 낮은 충적지나 개석(開析) 곡지의 앞에 둑을 쌓는 평지형으로 구분된다(金賢熙·崔基燁, 1990). 장호(2008)는 벽골제의 수리시설은 구릉 사이의 낮은 충적지에 물을 가두는 평지형의 제에 해당되며, 5개 도랑은 가둔 물을 다른 논으로 끌어들이는 도수로로 간주했다. 한편, 1415년 조선시대 태종 때의 중수 때, 장생거(長生渠)·중심거(中心渠)·경장거는 수문으로 개수되고 수여거와 유통거의 두 여수로가 추가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5년 후 1420년(세종 2년)에 둑이 터졌으며, 그 이듬해인 1421년(세종 3년)에 다시 수축하라고 명하였다(金賢熙·崔基燁, 1990). 1421년 이후 조선시대의 벽골제 관련 기사는 1680년(숙종 6년)에 세운 전교비, 1684년(숙종 10년)에 다시 세운 1415년의 중수비 기록이 있다. 일부 학자는 세종 때 둑이 터진 1420년 이후 조선왕조 500년 내내 벽골제는 허물어진 상태였다고 주장했지만, 장호(2008)는 벽골제는 1420년 이후인 1481년(성종 12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1530년(중종 25년)에 보충된 「신증 동국여지승람」, 1861년에 편집된 「대동여지도」등,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되고 그려져 있기 때문에, 적어도 벽골제 내부는 농경지로 모경(冒耕)이 지속되었으며, 이 경우에도 최대조차인 음력 7월 보름 전후의 백중사리 밀물 때, 해발고도 약 3-4m까지 바닷물이 거슬러 오르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 장생거와 경장거는 제수문으로 유지되었다고 주장했다(장호, 2008).
(2) 일제 강점기 이후 벽골제 일대의 경관
전라북도 전연안도(朝鮮總督府 農商工部, 1910)에 따르면 만경강 하구에서 동진강 하구에 이르는 해안 일대는 만경군에 속하며 그 사이의 갯벌을 동진포내, 만조 때 항행 가능한 포구로 남포를 표기하였다.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1921년에 발행한 1/50,000 지형도 김제 도폭를 보면, 벽골제가 간선수로로 바뀌기 이전의 경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① 벽골제가 둑으로 남쪽의 초승 마을에서 북쪽의 포교리까지 2㎞ 남아 있으며, 그 중간인 용골 마을, 포교리에 소류지가 있었다. ② 하천의 개수(용수와 배수로 설치, 하천 둑 쌓기 등)는 신용리에서 신산에 이르는 구간을 제외하면 이루어지지 않았다. ③ 일본인 지주들이 동척(東拓)농장(월촌 신월리 일대), 구마모토(熊本)농장(부량 대평리 일대), 하시모토(橋本)농장(죽산 서포리 일대)을 경영하고 있다. ④ 대창방조제, 서포방조제(그 안의 간척답이 하시모토농장)의 일부가 축조되어 있다. ⑤ 구마모토농장과 하시모토농장의 농장주는 1925년 동진수리조합 창립 때, 7인의 상설 위원회의 회원이 되며 하시모토농장의 농장주 하시모토 나카바(橋本央)의 저택이 죽산면 죽산리에 문화재 가옥으로 남아 있다(장호, 2008).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1934년에 발행한 1/50,000 지형도 김제 도폭를 보면, 벽골제가 간선수로로 바뀐 후의 경관을 잘 보여주며 주요 변화는 다음과 같다. ① 벽골제는 1927년부터 관개용수를 보내는 간선수로로 바뀌었으며, 벽골제 내부는 동진 수리조합 관개지가 되어 초승리 남쪽의 제주방죽 등의 소류지가 논으로 바뀌었다. ② 하천은 배수개량 사업으로 1928년에 연포천과 포교 배수로 신설되고 원평천 하류에 배수문이 확장 개수되었다. ③ 광활방조제, 대창방조제, 서포방조제가 완공되어 남포 서쪽의 갯벌이 동진농장(현 광활면)으로 간척된다(장호2008)
이와 같은 큰 경관 변화는 일본 내에서 식량문제가 심각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행된 산미증산계획의 일환으로 운암저수지를 만들고 이 물을 동진강 유역의 운암발전소로 보낸 후, 이 물을 광활간척지로 보내는 유역변경식 개발방식으로 김제 간선수로가 만들어졌다. 그 와중에 벽골제는 태인 낙양리 동진강가의 낙양취수구에서 성덕면 성덕리까지 26㎞ 거리의 김제 간선수로의 일부로 바뀐 것이다.
(3) 건국 이후 벽골제 일대의 경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섬진강 다목적댐을 축조하여 옥정호를 만들고 이 물을 칠보발전소로 내려뜨린 후, 동진강으로 유역 변경시켰다. 이 옥정호의 물은 기존의 간선 수로 외에 계화도 간척지의 관개용수로도 이용되었다. 벽골제 주변에서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호남야산개발 사업으로 김제 간선수로의 물을 백산면, 죽산면 구릉지로 양수하여 논으로 개간하였다(장호, 2008). 국토지리정보원에서 2006년에 발행된 1/50,000 지형도 익산, 정읍 도폭을 보면, 큰 경관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원평천 하류의 배수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원평천 하구를 죽산-연포에서 죽산-해창으로 바꾸어 수로를 신설하고 명랑산 남쪽에 해창 갑문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하천 개수 사업으로 인하여 벽골제 일대의 하천은 인공하천이 되었으며, 모든 논이 경지 정리되었다.
참고문헌
권혁재, 1975년, 호남평야의 충적지형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 지리학 제12권.
권혁재, 2005년, 우리 자연 우리의 삶 - 남기고 싶은 지리 이야기, 법문사.
김현희·최기엽, 1990년, 한국 전통관개시설의 유형과 입지조건, 응용지리 제13호.
윤무병, 1976년, 김제 벽골제 발굴보고, 백제사연구 제7집.
장호, 1995년, 호남평야와 논산평야내의 충적평야 주변에 분포한 저구릉의
토양지형학적 연구, 한국지형학회지, 제2권 2호.
장호, 2008년, 벽골제와 그 주변의 지형 및 지리적 변천에 관한 고찰, 제20권 1호.
출처:(위성에서 본 한국의 하천지형)
농어촌공사 부안지사와 고마 저수지[-貯水池]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에 있는 농업 관개용 저수지. 고마 저수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의 주 수원공이며, 고마 지구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저수지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1955년 1월에 착공하여 1958년 12월 30일에 준공하였다. 사업 시행자는 부안토지개량조합이었고, 주 설치 재원은 국고 보조금이었다. 본래는 구릉지를 집수역(集水域)으로 하는 산간 저수지 방식의 재래지(在來池)였으나, 1958년에 확장되어 양수 저수지가 되었다. 고마 저수지는 유역 면적 180㏊, 만수 면적 80㏊, 홍수 면적 82㏊, 수혜 면적 1,210.8㏊, 시설 부지 면적 15만 5848㎡이다. 제방 형식은 필 댐(fill dam)[존형]이며, 제방 체적은 6만 5281㎥, 제방 연장은 746m, 제방 높이는 8.5m, 제방 표고는 7.74El.m이다. 제정폭은 4m이며, 사면 보호공은 상류는 사석, 하류는 떼로 구성되어 있다. 총 저수량은 333만 8200㎥이며, 1종 시설로 구분된다. 단위 저수량은 278㎜이다. 취수 시설의 형식은 시통형이며, 한발 빈도는 10년, 홍수 빈도 10년이다. 취수 능력은 2.41㎥/sec, 사통 연장은 5m이다. 복통의 형식은 박스형이며, 연장 50m, 최대 통수량은 2.41㎥/sec이다.고마 저수지는 2020년 6월 현재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 부안지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고마제, 고마지, 동고지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주로 농업 관개용으로 사용되고 있고, 홍수 조절 기능은 갖고 있지 않다. 동진강(東津江) 도수로의 용수를 저장했다가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와 동전리의 관개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수계는 국가 하천인 동진강이며, 수심이 얕아 겨울 철새 등이 찾고 있다. 저수지 주변에 농촌 관광농원, 녹지 공원, 수변 테마 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전북 부안지사가 세워지면서 농어촌 수자원의 효율적인 이용·관리와 가치 증진을 통해 농어업의 경쟁력 강화와 농어촌의 경제·사회·환경 발전에 기여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공기업이다.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 부안지사는 한국농어촌공사의 임무에 맞게 농업인의 경쟁력 강화와 소득 향상을 통해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경제·사회·환경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 부안지사는 친환경적인 농어촌 정비 및 농업 기반 시설 종합 관리 등에 관한 사업과 업무를 통해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농업 생산성 증대 및 농어촌의 경제·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53년 2월 1일 부안수리조합이 설립되었다가, 1962년 1월 21일에 부안토지개량조합으로, 1970년 2월 26일에는 부안농지개량조합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81년 2월 13일 전라북도 김제시의 동진농지개량조합으로 흡수·합병되면서 부안지소가 되었다. 2000년 1월 1일 농지개량조합, 농지개량조합연합회, 농어촌진흥공사 등 3개 기관의 통합으로 농업기반공사가 출범하게 되었고, 이어 2003년 11월 3일 농업기반공사 부안지사가 설립되었다. 2005년 12월 28일 한국농촌공사 부안지사로 개칭되었고, 2008년 12월 29일 한국농어촌공사 부안지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부안지사의 생산 기반, 용수 관리, 농지 은행, 지역 개발 등에 관한 사업과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1만 2248㏊의 수혜 면적과 21개 저수지, 78개 양·배수장 등을 관리하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 부안지사는 2020년 현재 농지 은행부, 지역 개발부, 수자원 관리부, 고객 지원부, 주산면지소, 계화면지소, 백산면지소 등으로 조직을 편성·운영하고 있다. 농지 은행부는 농지 규모화, 과원 규모화, 농지 임대차, 농지 연금, 경영 이양 직불 관련 사무를 담당 하고 있다. 지역 개발부는 농촌 용수, 배수 개선, 경지 정리, 기계화 경작로의 생산 기반 정비, 테마 공원, 권역 단위, 농촌 중심시의 지역 개발 관련 사무를 담당하고 있다. 수자원 관리부는 농업 기반 시설의 유지 관리와 수리 시설 개보수 관련 사무를, 고객 지원부는 경영 관리와 지역 사회 공헌 관련 사무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농어촌공사 전북지역본부 부안지사는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농업 소득 증대 및 농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부안군지』(부안문화원, 2015)
「주요 업무 추진 계획」(한국농어촌공사 부안지사, 2020)
한국농어촌공사(https://www.ekr.or.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석정 문학관[夕汀文學館]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 있는 시인 신석정 기념 문학관.
개설
석정 문학관은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 크게 기여한 전라북도 부안 출신의 거장 신석정(辛夕汀)[1907~1974] 시인의 유품과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문학관이다. 시인의 문학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5권의 대표 시집, 유고 시집, 친필 원고 등을 전시하고 있다.
건립 경위
석정 문학관은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설립하고, 석정문학회가 위탁 받아 운영하고 있다. 석정문학회는 신석정 시인의 추천을 통해 등단한 5명의 문인이 주축이 되어 1984년 발족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신석정 시인이 작고한 지 30년이 되던 2004년부터 전국의 문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석정 추모 문학제를 치르고, 신석정 시인의 대표 시에 대한 평설과 논문 등이 들어 있는 추모 문집을 만들기도 했다.
변천
전라북도 부안군이 2006년에 건립 사업을 시작하여 2011년 10월 29일에 개관하였다. 허소라 초대 관장이 2013년 12월 31일까지 재임하며 신석정 시인의 고매한 시 정신과 살아온 발자취를 널리 알려 작가들이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었다. 2014년 4월 1일~2016년 12월 31일, 제2대 소재호 관장이 재임하며 신석정 시인을 기리는 데 있어 개인의 영예가 아닌 전라북도 문학 나아가 한국 문학을 곧추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2014년에는 석정 문학제도 개최하여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2017년 3월 1일 제3대 정군수 관장이 취임하여 신석정 시인의 문학사적 위상 제고에 매진하며, 2층의 도서·도자기 기증 전시실의 설치와 함께 문학 강연, 시 낭송 대회 등의 프로그램이나 행사의 진행·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구성
석정 문학관은 신석정 시인의 고향인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동에 있으며, 부지 면적 1만 6870㎡에 연면적 1,573㎡ 규모의 2층으로 된 문학관 건물, 시비 공원, 주차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시인의 원고, 작품집, 총 5,000여 점의 유품을 전시해 놓은 상설 전시장과 시인의 저항 정신을 엿볼 수 있도록 평소 지인들과 주고받은 친필 편지, 액자에 담아 걸어둔 사진 등이 나열된 기획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상설 전시장은 ‘저 의연한 산과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의 마음을 배우자’는 시인의 친필 좌우명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가 걸려 있다. 자연 속에서 지조의 삶을 발견한 시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대목이다. 시인에게 영향을 준 이들과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소개하고 있다. 박한영, 이익상(李益相), 이병기(李秉岐), 박목월(朴木月), 박두진(朴斗鎭), 조지훈(趙芝薰),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박용철(朴龍喆)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교류했던 사진이나 문집도 만나볼 수 있다. 시인의 대표 시집인 「촛불」, 「슬픈 목가」, 「빙하」, 「산의 서곡」, 「대바람 소리」에 이어,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과 유고 수필집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 등의 친필 원고와 시집들도 전시되어 있어 둘러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기획 전시실은 미발표 작품들이 나열되어 있다. 시인의 현실 인식과 참여 의식을 엿볼 수 있어 또 다른 느낌이 다가온다. 자연에서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작품으로 표현한 시인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의 군사 독재로 이어지는 시기에도 자신의 뜻을 이야기한 신석정 시인의 저항 시들을 둘러보는 것도 흥미롭다. 스승이나 선후배, 동료들의 친필 서한 등이 전시되어 시인의 생전 발자취도 들여다볼 수 있다. 관람자 보관용 시 탁본대가 설치되어 있어 시인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2층은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북 카페가 있고, 전망대가 있어 시인이 살았던 곳의 자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인의 생전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이 반갑게 다가든다. 도자기와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하정일 교수의 책 3,000여 권이 기탁된 기증 전시실도 마련되어 있다. 학예실과 수장고, 영상 세미나실도 갖추고 있다. 영상 세미나실에서는 학창 시절 에피소드, 시인으로 입문하게 된 계기 등 신석정 시인의 일대기를 천혜의 자연 경관을 지닌 전라북도 부안의 모습과 함께 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석정 문학관 앞에는 신석정 시인이 26세에 낙향하여 지어 살았던 고택 청구원(靑丘圓)이 자리하고 있다. 시인이 살던 당시에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을 심어 무성한 수목원을 연상하게 했다고 한다. 한국관광공사가 주최한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2년 9월에 가볼만 한 곳’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현황
석정 문학관은 개관 이후 3명의 관장을 거치며 소장 자료 희귀 도서전과 석정 시화전을 개최하기도 하고, 해마다 시 창작 교실, 시 낭송 교실, 청소년 시 낭송 아카데미를 여는 등 신석정 시인의 정신을 이어 전라북도 부안 지역의 문학을 알리고 발전시켜 왔다. 그밖에도 다문화 가정 주부 편지 쓰기, 석정 시인 학교, 찾아가는 문학관 등의 기획 행사와 석정 문학제를 주최하고 있다. 석정 문학제는 석정 문학관이 신석정기념사업회 및 석정문학회와 공동으로 주최하며, 신석정 문학상과 촛불 문학상 시상식 및 문학 강연 등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는 신석정 전국 시 낭송 대회는 물론 지역 청소년 대상 백일장과 시 낭송 대회 및 문학 강연 등을 진행하는 석정 촛불 청소년 문학제도 개최되고 있다.
참고문헌
「신석정 시인 고향에 ‘석정 문학관’ 개관」(『연합 뉴스』, 2011. 10. 29.)
「석정 문학관 개관」(『부안 독립 신문』, 2011. 11. 22.)
「석정 문학관 개관 2주년...신석정 다시 보기」(『전북 일보』, 2013. 10. 25.)
네이버지식백과(https://terms.naver.com)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부안군청[Buan County Office , 扶安郡廳]
요약 :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의 행정 및 민원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기관.
▲부안군 청사
구분설립일주요활동/업무소재지
1914년 3월 1일 설치되었으며, 2012년 현재 부안읍과 12개면을 관할한다. 기구는 군수와 부군수가 있고, 기획감사실 등 2실과 9과로 이루어져 있다. 보건소와 농업기술센터 등 2개의 직속기관과 상하수도사업소·부안문화원 등의 사업소를 두고 있다. 중앙 정부와 광역자치단체로부터 위임받은 업무와 부안군 고유의 행정 및 민원업무를 수행한다. 주요 업무로 행정구역을 관리하고 조례와 규칙을 제정하며, 지방세 부과와 징수, 예산의 편성 집행, 국가 재산의 관리, 호적과 주민등록 관리, 복지사업과 위생사업, 각종 산업 진흥, 지역개발과 생활환경 개선, 체육과 문화예술 진흥 등이 있다. '살기 좋은 부안 건설'을 군정목표로 삼고, 열린 행정으로 군민화합과 환경친화적인 자연개발, 관광진흥으로 소득증대, 골고루 잘사는 복지행정을 군정방침으로 삼고 있다. 산과 들·바다를 형상화시킨 심벌마크가 있으며, 군을 대표하는 동식물은 철쭉(꽃)과 은행나무(나무)·비둘기(새)이다. 청사는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부안읍 당산로 91(동중리 222-1)번지에 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부안군[扶安郡]
정의
전라북도 서부에 있는 군.
형성 과정
부안군은 삼한 시대에 마한(馬韓) 54국의 하나인 지반국(支半國) 지역이었다. 삼국 시대에 백제의 개화현(皆火縣)으로,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부령현(扶寜縣)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시대인 1416년(태종 16)에는 북쪽의 부령현과 남쪽의 보안현을 합하여 부안현(扶安縣)이라 하였다. 별호는 낭주(浪州) 또는 부풍(扶風)이다. 1895년에 전주부 부안군, 1896년에 전라북도 부안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상서면·하서면·건선면은 그대로 두고, 동도면·하동면을 부령면으로, 남하면·소산면을 주산면으로, 상동면·이도면·일도면을 동진면으로, 남상면·서도면을 행안면으로, 입상면·입하면을 보안면으로, 좌산내면·우산내면을 산내면으로 통합하고, 고부군 지역이던 거마면·덕림면·백산면을 백산면으로 통합하여 부안군에 편입하였다[10면]. 이후 1931년에 줄포항의 이름을 따서 건선면을 줄포면으로 개칭하였다. 1943년에 부령면이 부안읍으로 승격되었고, 1963년에 위도면이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부안군으로 이관되었다[1읍 10면]. 1963년부터 시작된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간척 사업인 계화도 간척 공사가 15년 만에 완공되고, 1978년에 쌀 추수가 시작되고 주민들의 이주가 이루어짐에 따라, 1983년에 행안면 계화출장소가 계화면으로 승격되었다[1읍 11면]. 그리고 1983년 산내면 진서출장소도 진서면으로 승격되었다[1읍 12면]. 1987년에 산내면이 변산면으로 개칭되었다. 부안군의 1읍[부안읍] 12면[주산면, 동진면, 행안면, 계화면, 보안면, 변산면, 진서면, 백산면, 상서면, 하서면, 줄포면, 위도면] 중에서 변산반도 국립 공원에 해당하는 지역은 5개 면[변산면, 상서면, 진서면, 하서면, 보안면] 지역이다. 변산(邊山)이라는 지명은 삼한 시대[변한]와 삼국 시대부터 등장하는데, 행정 구역명으로 등장한 것은 1983년 부안군 산내면이 진서면과 분리되고, 1987년 산내면을 변산면으로 개칭한 때부터이다.
위치와 면적
부안군의 위치는 경위도상으로 동경 126° 50' 20"[백산면 대수리 월평마을]에서 동경 126° 05' 59"[위도면 상왕등도] 사이에 있다. 서쪽의 육지 끝 지점은 적벽강으로 동경 126° 27' 27" 지점이다. 동서 거리는 백산면 대수리에서 위도면 상왕등도까지는 약 67㎞이며, 육지 끝 지점인 적벽강까지 육지에서의 거리는 약 35㎞이다. 남북으로 가장 북쪽은 계화면 계화리로 북위 35° 47' 35"이고 남쪽 끝인 줄포면 우포리는 북위 35° 33' 58" 지점이다. 남북의 거리는 26.2㎞이다. 이와 같이 부안군은 남북이 짧고 동서가 긴 형태를 이루고 있다. 부안군에서 위도면은 전체가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5개의 도서가 있는데, 이 중 유인도는 7개[위도면 위도·식도·정금도·거륜도·상왕등도·하왕등도, 변산면 하섬]이며, 무인도는 28개이다. 가장 서쪽에 위치하는 상왕등도는 육지와의 거리가 32.3㎞이며, 위도는 14.6㎞이다. 부안군의 면적은 1960년 433.14㎢였으나 계화도 간척지로 인하여 면적이 증가하여 2019년 현재 493.35㎢로 늘어났다. 부안군은 전라북도 전체 면적[8,055㎢]의 6.1%를 차지하고 있어 면적 규모로는 전라북도 14개 시군 중 12위인 데 비하여, 인구 규모는 2.95%를 차지하여 9위이다. 이것은 면적이 가장 작은 전주시[206.04㎢]가 전라북도 인구의 35.28%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부안읍 13개 읍면의 면적을 비교해 보면, 면적이 가장 넓은 면은 변산면[86.03㎢]으로 17.4%를 차지하며, 다음으로는 상서면[51.50㎢]이 10.4%, 계화면[49.12㎢]이 10.0%를 차지한다. 이어서 하서면[8.8%], 보안면[8.4%], 동진면[8.0%], 진서면[7.9%], 백산면[7.4%], 부안읍[5.0%], 주산면[5.0%], 줄포면[4.7%], 행안면[4.1%] 순이다. 가장 면적이 작은 면은 위도면[14.32㎢]으로 2.9%를 차지한다. 부안군의 토지 지목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임야로 40.2%이다. 그 다음으로 논은 28.7%이고, 밭은 10.8%이다[대지 2.8%. 기타 20.3%]. 부안군의 읍면 중에서 6개 면이 해안선을 이루는데, 해안선 총 길이는 173.3㎞이다. 이 중 위도면 96.5㎞로 55.7%를 차지해 가장 길고, 다음으로는 변산면이 49.6㎞로 28.6%를 차지한다. 진서면은 13.0㎞, 보안면은 4.0㎞, 줄포면은 4.0㎞, 북쪽의 하서면은 6.2㎞이다. 계화면은 새만금 방조제로 인하여 해안선이 없어졌다.
기후 조건
30년간[1981~2010년]의 기상 자료를 평균한 평년값을 보면, 부안 지역의 연평균 기온은 12.6℃[최고 기온 18.0℃, 최저 기온 8.0℃], 평균 습도는 76.0%, 연평균 강수량은 1,250.4㎜, 평균 풍속은 1.6m/s이다. 동쪽의 내륙 쪽은 대륙성 기후의 특성이 나타나고, 내변산 지역은 산악 기후의 특성이 나타나며, 서해와 접해 있는 서쪽의 외변산 지역은 해양성 기후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강수량은 6~9월에 연 강수량[1,250.4㎜]의 66%[약 823㎜] 이상이 집중적으로 내리며, 겨울철 강수량은 110.4㎜로 여름철에 비해 큰 차이를 보인다. 겨울철에 내리는 강설은 북서쪽의 차가운 대륙성 고기압이 확장할 때 집중적인 폭설이 연 1~2회 정도 발생하기도 하며, 위치상 서해안 적설 관측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연평균 풍속은 1.6m/s로 다른 해안 지역보다는 낮지만, 부안의 서남단에 위치한 격포항 부근에는 지형적인 요인에 의해 앞바다의 해상보다도 강한 바람이 부는 경우가 간혹 있다.
지형 조건
지형 조건에 의해 부안군의 지형을 분류하면, 동북부의 평야 지역[계화면, 행안면, 동진면, 백산면], 동부의 구릉 지역[부안읍, 주산면, 상서면, 하서면, 보안면, 줄포면], 서부 변산반도의 산지 지역[변산면, 진서면], 위도 등 도서 지역[위도면]의 4개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부안군 북부는 계화도 간척지에 의한 평지가 있고, 동북부의 동진면과 백산면은 고부천 및 동진강 하구를 중심으로 호남평야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산악 지대를 이루는 서남부의 변산반도는 내륙의 내변산과 해안 쪽의 외변산으로 구분된다. 서해안 지역에는 위도와 함께 상왕등도, 하왕등도 등 35개의 섬이 분포하며[유인도 7개, 무인도 28개], 해안선의 길이는 173.3㎞이다. 변산반도는 행정 구역으로는 변산면, 진서면, 보안면, 상서면, 하서면에 해당한다. 변산반도 가운데 산지 지역인 내변산은 변산면의 중계리와 상서면의 청림리에 해당하고, 해안 지역 외변산은 주로 변산면의 서부 해안 지역을 의미한다.
하천
부안군의 하천은 동부 고창군 성내면 동림 저수지에서 시작된 고부천이 북쪽 방향으로 흘러 부안군 백산면에서 동진강으로 유입되고 있으며, 상서면 분수계에서 시작된 백천은 서쪽과 북쪽으로 흘러 회양 계곡과 봉래 계곡의 물과 합류하여 부안 댐[1996년]을 거쳐 해창에서 새만금 지역으로 유입된다. 그리고 부안군 상서면 사산 저수지에서 시작된 주상천은 청호 저수지를 거쳐 서쪽의 새만금 지역으로 유입된다. 내변산 지역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백천 수계에 해당하며, 하류에는 부안 댐이 건설되어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백천은 우슬재[120m] 서쪽에 있는 가는골 저수지에서 시작되어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에서 남쪽에서 흘러오는 거석천[거석제, 청림제]과 합류하고, 더 서쪽으로 흘러 중계교 부근에서 역시 남쪽에서 흘러오는 가마소천[회양 계곡]과 합류하고, 중계교 서쪽에서는 역시 남쪽 봉래 구곡에서 흘러오는 직소천과 합류한다. 그리고 북쪽에서는 의상봉[508.6m]과 쇠뿔 바위 사이의 계곡인 구시골의 물이 합류한다. 지류들을 합류한 백천은 서쪽으로 흘러 부안 댐에서 멈추다가, 해창만의 변산교에서 서해안의 새만금 방조제로 유입된다. 백천으로 흐르는 하천들은 주로 백천의 남쪽에서 흘러오는데 직소천에서는 봉래 계곡, 가마소천에서는 회양 계곡, 백천 본류에서는 중계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백천 수계는 북쪽과 남쪽에 400m급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은 우슬재, 서쪽은 부안 댐을 거쳐 북쪽의 해창만으로 흘러간다[새만금 방조제 내부]. 백천 계곡과 외부를 연결하는 고개로는 동쪽에 우슬재, 남쪽에 바드재[180m]와 재백이 고개[160m], 서쪽에 남여치[100m] 등이 있다.
내변산 내부는 백천의 단일 수계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변산 외부의 수계는 내변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4개 방향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북쪽은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문수제, 금광제], 하서면 석상리, 상서면 통정리 등 분수계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흐르는 지류들이 있다. 동쪽은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 감교리[개암제, 사산 저수지], 보안면 남포리 신창천[영전 저수지]으로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호벌치를 분수계로 하여 상서면의 물은 북쪽으로, 보안면의 물은 남쪽으로 흐른다. 남쪽은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우동제], 진서면 진서리[연동제], 진서면 석포리[석포천, 석포제], 진서면 운호리[운호 저수지, 말재] 지역으로 남쪽으로 흐른다. 서쪽은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격포리의 종암 방죽, 마포리의 유유제, 운산리의 운산제 등이 있다. 변산반도에서 가장 물이 풍부하고 하천 지형이 다양하게 발달한 곳은 내변산 지역의 백천 유역이다. 백천은 변산반도의 동북쪽 우슬재에서 시작하여 서북쪽 변산교 방향으로 흘러 새만금 지구를 거쳐 서해로 흘러간다[본류 약 18㎞]. 백천 유역은 내변산에 해당하며, 중계 계곡, 봉래 계곡, 회양 계곡 등이 형성되어 있다.
인구 변화
2019년 12월 31일 기준 부안군의 인구는 5만 4150명이다. 전라북도 14개 시군 중에서 9위이며, 6개 시를 제외한 8개 군 중에서는 완주군 9만 5881명, 고창군 5만 6467명에 이어 3위 규모로 전라북도 전체 인구 185만 1991명의 2.92%를 차지한다. 부안군의 인구 변화를 5년 단위로 살펴보면 1960년 14만 9707명, 1965년 17만 2866명, 1970년 16만 1273명, 1975년 15만 5887명, 1980년 13만 894명, 1985년 11만 4306명, 1990년 10만 2787명, 1995년 8만 4383명, 2000년 7만 4877명, 2005년 6만 5267명, 2010년 6만 597명, 2015년 5만 7492명이다. 부안군의 인구수가 가장 많던 때는 1966년으로 17만 5044명이었으며, 이후 계속 감소하여 1992년[9만 2812명]부터 10만 명 아래로 떨어졌다. 부안군에는 1개 읍과 12개 면이 있는데, 2019년 12월 31일 기준 부안읍의 인구수는 2만 1038명으로 부안군 전체 인구 5만 4150명의 38.85%를 차지한다. 그 외에 면별 인구수는 변산면[4,785명], 계화면[3,738명], 동진면[3,095명], 하서면[2,884명], 줄포면[2,794명], 백산면[2,671명], 보안면[2,582명], 진서면[2,477명], 행안면[2,461명], 상서면[2,340명], 주산면[2,071명], 위도면[1,214명]의 순이다. 이 중 위도면은 섬으로만 이루어진 면이다.
2018년 부안군의 출생자 수는 215명, 사망자 수는 710명으로 인구의 자연 감소 현상[-495명]이 일어나고 있다. 인구의 사회적 측면에서도 전입 인구[5,305명]보다 전출 인구[6,485명]가 많아서 인구 감소가 발생하고 있다[-1,180명]. 전출 인구[6.485명]를 살펴보면, 부안군에서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인구 중 전라북도 내로 이동하는 인구수는 4,056명으로 62.54%를 차지하며, 타 시도는 경기도[697명], 서울특별시[556명], 인천광역시[169명]으로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인구 비율이 21.93%를 차지한다. 그리고 주변 지역인 광주광역시[223명], 충청남도[169명], 전라남도[135명] 등은 8.13%를 차지한다. 기타 지역[362명]은 5.58%를 차지한다. 이와 같이 부안군에서 유출되는 인구는 전라북도로 유출되는 비율이 가장 높고[62.54%], 두 번째는 수도권[21.93%], 그 다음은 주변 시도 지역[8.13%]의 순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부안군으로 유입되는 인구[5,305명]의 분포를 살펴보면, 전라북도 내[3,430명]가 64.66%를 차지한다. 경기도[538명], 서울특별시[459명], 인천광역시[135명] 등 수도권의 비율이 21.34%를 차지하고, 주변 지역인 전라남도[131명], 광주광역시[129명], 충청남도[117명]가 7.11%를 차지한다. 기타 지역[366명]은 6.90%를 차지한다. 이와 같이 전입과 전출 인구의 패턴이 전라북도 내부, 수도권, 주변 지역으로 유사한 비율로 나타난다.
역사적 측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백제 땅에 원래 변산(卞山)이 있으므로 변한(卞韓)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산이 겹겹이 쌓여 높고 깎아지른 듯하며 바위와 골이 그윽하다.”라고 하였고,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도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이 변산(邊山)이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정감록(鄭鑑錄)』 등의 비결(秘訣)에서는 전라북도의 운봉, 무풍과 함께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고 있다. 변산 십승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호암(壺岩) 아래 변산의 동쪽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굴바위와 우동 저수지 부근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변산은 능가산(楞伽山)·영주산(瀛洲山)·봉래산(蓬萊山) 등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 왔으나, 변산반도의 산 중에서 변산으로 불리는 산봉우리는 없으며, 변산반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의상봉[또는 기상봉, 508.6m]이다. 부안군의 역사 유적으로는 변산면에 대항리 패총(大項里貝塚), 계화면 계화리와 주산면 소산리에 신석기 유적, 하서면 석상리 일대에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인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扶安龜岩里支石墓群), 제사 유적인 수성당(水城堂)[용굴], 보안면 유천리 일대에 고려자기를 구워 낸 도요지인 부안 유천리 요지(扶安柳川里窯址) 등이 있다.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의 우금산성(禹金山城)[울금산성]은 663년 백제 부흥 운동 당시의 주류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개암사(開巖寺)의 뒷산에 해당하는 우금 바위[울금 바위]에는 남쪽과 동쪽으로 3㎞ 남짓한 우금산성이 있는데, 우금산성은 660년(의자왕 20) 백제 사비성의 함락 이후, 백제 부흥군인 도침과 복신의 지휘 아래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이 결집한 장소이다. 주류성은 663년 9월 7일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호벌치 전투가 있었으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 백산면의 백산성은 동학군이 집결하여 ‘서면 백산[흰옷], 앉으면 죽산[죽창]’이라고 할 정도로 동학 농민 운동의 중요 활동 지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적벽강 부근에는 칠산 어장의 안녕을 빌던 제사 유적이 발견된 죽막동 수성당이 있으며, 격포의 봉화봉과 계화도의 계화산에는 봉화대가 보존되어 있다. 변산반도에 위치하는 역사가 깊은 사찰로는 백제 시대인 633년(무왕 34)에 건립된 내소사(來蘇寺)[진서면], 634년(무왕 35)에 건립된 개암사[상서면], 통일 신라 시대인 691년(신문왕 11)에 건립된 월명암(月明庵)[변산면] 등이 있다. 또한 변산반도에 삼림이 울창하고 송림이 유명하여 고려 시대 때부터 궁실과 배의 재목으로 사용하였는데 이곳의 목재를 변재(邊材)라고 하였다. 몽고가 고려를 침입한 뒤 일본 정벌을 꾀하였을 때 이곳의 변재로 전함을 만들었다.
문화재
부안군 내의 문화재 지정 현황을 보면 총 68종 391점으로, 국가 지정 문화재가 27종 336점이며, 전라북도 문화재가 41종 55점이다. 국가 지정 문화재 중 국보는 1종으로 국보 부안 내소사 동종(扶安來蘇寺銅鍾)이 있다. 보물은 7종으로 보물 제291호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扶安來蘇寺大雄寶殿), 보물 제292호 부안 개암사 대웅전(扶安開岩寺大雄殿), 보물 제739호 고희 초상 및 문중 유물, 보물 제900호 부안 김씨 종중 고문서 일괄(扶安金氏宗中古文書一括), 보물 제1268호 「내소사 영산회괘불탱」, 보물 제1269호 「개암사 영산회괘불탱」 및 초본, 보물 제2062호 「최광지 홍패(崔匡之紅牌)」가 있다. 사적은 6곳으로 사적 제69호 부안 유천리 요지, 사적 제70호 부안 진서리 요지(扶安鎭西里窯址), 사적 제103호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 사적 제409호 부안 백산성(扶安白山城), 사적 제541호 부안 죽막동 유적(扶安竹幕洞遺蹟), 제5로 직봉-부안 점방산 봉수 유적이 있다. 명승은 3곳으로 명승 제13호 부안 채석강·적벽강 일원(扶安彩石江赤壁江一圓), 명승 제116호 부안 직소 폭포 일원(扶安直沼瀑布一圓), 부안 우금바위 일원 (扶安 禹金- 一圓)이 있다. 부안군 내의 천연기념물은 천연기념물 제122호 부안 도청리 호랑가시나무 군락, 천연기념물 제123호 부안 격포리 후박나무 군락, 천연기념물 제124호 부안 중계리 꽝꽝나무 군락, 천연기념물 제370호 부안 미선나무 자생지, 부안 위도 진리 대월습곡 등이 있다. 국가 민속 문화재는 국가 민속 문화재 제18호 부안 서문안 당산, 국가 민속 문화재 제19호 부안 동문안 당산, 국가 민속 문화재 제150호 부안 김상만 고택(扶安金相萬古宅)이 있다. 근대 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등록 문화재 제177호 구 부안금융조합(舊扶安金融組合)이 있으며, 국가 무형 문화재 제82-3호 위도 띠뱃놀이가 있다.
전라북도 지정 문화재 중 유형 문화재는 14종으로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58호 수성당,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59호 서외리 당간지주(西外里幢竿支柱),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01호 위도 관아(蝟島官衙),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23호 청림리 석불좌상(靑林里石佛坐像),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24호 내소사 삼층석탑(來蘇寺三層石塔),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25호 내소사 설선당과 요사,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26호 개암사 동종(開岩寺銅鐘),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40호 「부설전(浮雪傳)」,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71호 용화사 미륵불입상(龍華寺彌勒佛立像),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79호 개암사 응진전 16나한상,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55호 내소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來蘇寺木造阿彌陀三尊佛座像), 청자상감정사색명유로문매병 (靑瓷象嵌淨事色銘柳蘆紋梅甁), 간재 전우 초상화 (艮齋 田愚 肖像畵), 부안 개암사 석가여래삼존불좌상 (扶安 開巖寺 釋迦如來三尊佛坐像)이 있다.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는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7-1호 부안 농악,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3호 죽염 제조장(竹鹽製造匠)[죽염 제조][허재근],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9호 사기장(砂器匠)[청자][이은규],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30호 대목장(大木匠)[대목][김정락],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34호 가사(歌詞)[가사][김봉기],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가야금 병창(伽倻琴倂唱)[박선옥][박선옥]이 있다. 전라북도 민속 문화재는 전라북도 민속 문화재 제6호 보안 입석(保安立石), 전라북도 민속 문화재 제17호 쌍조 석간(雙鳥石竿), 전라북도 민속 문화재 제18호 남문안 당산, 전라북도 민속 문화재 제19호 돌모산 당산, 전라북도 민속 문화재 제20호 죽림리 석장승, 전라북도 민속 문화재 제30호 월천리 석장승이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은 13곳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우금산성,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반계 선생 유적지(磻溪先生遺蹟地),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 간재 선생 유지(艮齋先生遺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지(丁酉再亂胡伐峙戰蹟地), 전라북도 기념물 제40호 사산리 와요지(士山里瓦窯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50호 대항리 패총,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이매창 묘(李梅窓墓), 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 부안 실상사지(扶安實相寺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 내소사 일원(來蘇寺一圓), 전라북도 기념물 제84호 신석정 고택(辛錫正故宅), 전라북도 기념물 제127호 지포 김구 선생 묘역 일원(止浦金坵先生墓域一圓), 전라북도 기념물 제140호 부안 점방산 봉수(扶安占方山烽燧), 전라북도 기념물 부안 도청리 솔섬 (扶安 道淸里 松島)이 있다. 또한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93호 부안향교 대성전(扶安鄕校大成殿),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11호 고홍건 신도비(高弘建神道碑)가 있다.
현황
부안군의 교육 기관은 초등학교 22개, 중학교 13개[공립 9개, 사립 4개], 고등학교 7개[일반계 5개, 특성화 2개/공립 5개, 사립 2개]이다. 그리고 공공 도서관은 3개[부안군립 도서관, 계화 도서관, 부안 교육 문화 회관]가 있다.
교통은 서해안 고속 도로[고속 국도 제15호선]와 연결되는데 북쪽에서부터 부안 나들목, 줄포 나들목을 통해 접근이 가능하다. 그리고 국도는 부안읍과 줄포면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국도 제23호선, 부안읍에서 줄포면까지 변산반도의 해안을 연결하는 국도 제30호선, 새만금 방조제로 군산과 연결되는 국도 제77호선이 있다. 지방도는 변산반도 내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지방도 제736호선, 부안군 부안읍과 줄포면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지방도 제707호선, 계화도와 상서면을 연결하는 지방도 제705호선 등이 있다. 어항으로는 국가 어항인 격포항과 위도항, 국가 관리 연안 어항인 상왕등도항, 지방 어항인 곰소항, 궁항항, 성천항, 송포항, 식도항이 있으며, 어촌 정주 어항으로 도청항, 왕포항, 모항항, 대리항, 벌금항이 있다. 부안에서 태어나거나 활동한 주요 인물들은 시인 신석정(辛夕汀)[1907~1974]과 이매창(李梅窓)[1573~1610], 보안면에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저술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 계화도에 정착한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 등이 있다.
부안군에는 부안 댐과 사산 저수지, 청호 저수지, 고마제, 영전 저수지, 남포 저수지, 청림제, 우동제, 석포 저수지, 운호 저수지, 유유 저수지, 개암 저수지, 종암 방죽 등의 수리 시설이 있으며, 변산면 대항리에 변산 온천이 있다. 부안군의 특산물로는 과거 칠산 어장으로 유명하던 위도의 조기, 위도 명치, 곰소 젓갈, 유유마을의 뽕잎과 오디, 곰소의 천일염과 함초, 개암사의 죽염, 보안면 유천리의 고려자기, 부안 쌀, 줄포 해풍 수박, 부안 노을 감자, 부안 해풍 양파, 변산 누에, 뽕잎 절임 고등어 등이 있다. 전북 서해안권 국가 지질 공원에서 부안군은 변산면에 5곳[적벽강, 채석강, 솔섬, 모항, 직소 폭포]와 위도가 포함되어 있다. 부안군의 대표 축제는 5월에 관광 문화 종합 축제인 부안 마실 축제, 10월에 곰소 젓갈 발효 축제, 4월에 개암동 벚꽃 축제, 5월에 유유 참뽕 축제, 8월에 변산 바다로 페스티벌 및 고슴도치섬 위도 상사화길 달빛 걷기 축제, 10월에 부안 가을애 국화빛 축제, 12월에 설숭어 축제 등 부안의 자원을 활용한 축제가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다.
참고문헌
유재영, 『전북 전래 지명 총람』(민음사, 1993)
『한국 지명 유래집』-전라·제주 편(국토지리정보원, 2010)
『부안군지』(부안문화원, 2015)
『부안 이야기』15(부안역사문화연구소, 2016)
『부안군 통계 연보』(부안군, 2019)
『2018 변산반도 국립 공원 자연 자원 조사』(국립공원공단 국립공원연구원, 2019)
「2019년 주민 등록 인구 통계」(전라북도, 2020)
「1:50,000 지형도」-위도, 군산, 부안, 정읍 도폭(국토지리정보원)
기상청날씨누리(https://www.weather.go.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5-01-27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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