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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서 정 인
김갑동은 시위를 한 적이 없었다. 경찰서를 습격한 적은 더욱 없었고 무기를 탈취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바빴다. 그럴 틈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는 부자였다. 무슨 할 일이 그렇게도 없어서 가두를 방황했겠으며, 길거리에 뛰쳐나갔더라도 사람들 틈에 끼여 고함 몇 번 질렀으면 말지 관아는 왜 때려부쉈겠으며, 습격을 했더라도 덩달아 돌멩이 몇 개 던져 봤으면 됐지 총은 뒀다 지리산 포수하자고 뺏었겠냐. 그는 할 일이 많았다. 온몸에 피멍이 들고 마디마디 작살이 나고 뼈다귀들이 덜렁덜렁 부러지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그렇지 그는 지금 캄캄한 땅밑 구석진 방에 한가롭게 들어앉아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그의 가게는 그가 없어서 하루에 몇만 원씩 손해를 보았다.
“바른대로 말해라. 매가 부족하냐? 너 하나 쳐죽여 봤자 흔적이 안 난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을 고맙다고 해라. 맞아 죽는 것보다야 재판을 받는 것이 더 낫지 않냐? 살인을 한 것도 아닌데 설마 판사한테서 사형이야 떨어지겠냐, 나는 너하고 아무 개인적인 원한이 없다. 너를 해칠 생각도 없다만 너 때문에 손해를 보고 싶지도 않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법대로 하자. 이런 일에 감정이 끼이면 아주 안 좋다. 우리도 사람이라 특히 처음에는 실수를 더러 한다만, 우리는 흥분해서 사람을 패지는 않는다. 그러다간 오래 못 간다. 맞기만 힘든 줄 아냐? 치기도 힘이 든다. 기운 빠지는 거야 운동으로 몸푼 셈치면 되지만, 혈압 올라가면 제명에 못 산다. 직업 선수는 그런 서툰 짓 안 한다. 너도 그러지 마라. 아무리 우리가 점잖을려고 해도 상대가 독을 뿜으면 우리도 악해진다. 그것 참 이상하더라. 끼리끼리 만나는지 만나면 같아지는지 알 수가 없다. 너는 지금 순전히 독으로 버티냐? 너가 독해지면 우리가 순해질 것 같으냐? 애국이라는 것은 원래 감정이지만 오래되면 거짓이거나 과장이다. 순리로 해야 오래 간다. 우리는 이치에 맞게 나라를 사랑하려고 한다. 하루 이틀 하고 집어치울 장사가 아니란 말이다. 어떻게 해야 사리에 맞겠냐?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게 합리다. 합리가 편타. 규정대로 해라. 떼를 쓰거나 억지를 부리지 마라. 제보가 들어왔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들 상사한테서 배정받았다. 감정대로 하자면 너의 말을 곧이듣고 너를 풀어 주었으면 좋겠다만 우리는 너보다 더 자유가 없다. 너는 너 맘대로 떠들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우리 생각 말고 우리 생각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할 남의 뜻이 있다. 이게 층층이 시하다. 우리의 차상급 지휘자는 그의 뜻과 그의 상사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그의 상사도 마찬가지다. 그 위에는 또 없냐? 사닥다리 발판이 여닐곱 개만 돼도 맨 밑에서는 가중된 무게에 깔려 죽는다. 맨 위에서 하나이던 것이 둘, 넷, 여덟으로 불어나다 보면 바닥 발판에 가서는 열여섯, 서른둘을 거쳐 예순넷이 된다. 한 사람이 남의 뜻 하나 받들기도 어려운데 예순 개라니, 바닥에 깔린 사람들이 많아서 망정이지 밟혀 죽기 딱 알맞다. 예순몇 개를 예순몇 사람들이 갈라서 짊어지면 결국 한 사람이 하나씩 맡는 꼴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자기 바로 위엣사람 눈치만 보면 될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만 그것도 그렇지가 않다. 높은 사람의 뜻은 다음 사람을 통해서 차례차례로 내려오는데, 한 다리를 거칠 때마다 더 무거워진다. 여럿이 나누어 짊어진다고는 하지만, 꼭대기에서 기침하면 바닥에서는 독감 걸리고, 위에서 방귀 뀌면 밑에서는 생똥 싸는 냄새 정도가 아니라 살 썩는 내가 난다. 분담한 보람이 전혀 없다. 신문이나 방송 보면 점잖은 소리가 좀 많냐? 그게 우리들한테 내려올 때쯤해서는 티끌만한 것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정반대가 된다. 작은 것은 커지고 큰 것은 더 클 수가 없어서 다시 작아진다. 지금은 위에서 고함을 지른다. 밑에서는 더 지를 것이 없다. 위에서 군화발로 정갱이 깐다. 우리는 할 일이 없다. 대검으로 허벅지를 찌를 수야 없지 않냐? 그런 거야 술취한 병정들이 길거리에서 많이 했다. 허벅지뿐이냐? 머리통, 가슴, 배, 허리통, 어깨, 팔, 옆구리, 다리, 목, 닥치는 대로다. 그 애들 나무라지 마라. 진압작전인데 무슨 짓을 못 하겠ι꾸 그 애들 술 깨면 뉘우친다. 후회할 짓을 왜 하냐? 한 짓은 후회 마라. 무슨 소용이 있냐? 사무적으로 하자. 감정 빼고. 원수 졌냐? 감정을 뻬면 너를 봐줄 수가 없다. 마음대로 해야 도와 줄 수가 있을 것 아니냐? 너한테는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다.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한다면 너를 도울 수도 있고 해칠 수도 있다. 사무적으로 하자는 말은 그 둘 다 그만두겠다는 말이다. 너가 우리 친척이나 친구라 해도 더 봐줄 수가 없고 우리 원수라 해도 더 해칠 수가 없다. 우리는 부속품들이다. 도구고 기계다. 실제로는 잘 안 된다만, 적어도 이론으로나 욕심으로는 우리는 우리 몸속에서 심장을 도려낸다. 무심한 사람이 우리의 이상이다. 장인을 취조한 수사관이 있다. 우리한테는 기피권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무심할 수 없는 사람들, 부모형제나 처자식들 같은 사람들을 맡지 않을 권리다. 친척, 친지를 공정하게 조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그 반대의 경우다. 미운 놈이 손아귀에 떨어지면 공정하게 처리할 자신이 없다. 우리는 담당 변경원을 낸다.§어차피 그놈은 죽었다. 굳이 우리 손올 더럽힐 필요가 없다. 여기 들어오면 누구나 죽는다. 죽을 놈만 잡아들인다, 장군도 소용없고, 재벌도 소용없다. 우리는 공평하게 콧수염을 뽑고 다리 몽댕이를 부러뜨린다. 법 앞에 만민이 평등하다. 우리가 그것을 보장한다. 홀랑 벗겨 놓고 보면 사람 다 똑같다. 그것이 너희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 아니냐? 너희들은 말로 하고 우리는 행동으로 한다. 행동이 더 어렵다. 맘대로 안 된다. 우리는 하나도 보태고 빼지 못한다. 너를 봐줄 수도 없고 해칠 수도 없다. 너는 책방을 경영하는 고귀태의 동지다. 그날 너는 고를 찾아갔다. 고는 폭도들을 이끌고 나주 경찰서를 습격했다. 그가 다 불었다. 내 말 틀렸냐?”
김갑동은 기가 막혔다. 맞다. 귀태는 그의 친구였다. 그날 그는 그의 책방에 갔었다. 그는 종종 그의 가게에 들렀다. 서점에 간 것이 잘못이냐? 그의 점방을 들여다본 것이 잘못이냐? 친구 집에 간 것이 잘못이냐, 책 파는 데를 간 것이 잘못이냐? 한 번 만나면 하루 종일 같이 있냐? 같이 있다고 다 경찰서를 쳐들어가냐? 그가 나주에 급한 볼 일이 있다고 하고, 그도 사업 거래상 영산포에 일간 들를 일이 있어서 이왕이면 가는 길에 같이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돼서 차를 몰았다. 그게 뭐 잘못됐냐? 그는 나주에 한 달이면 몇 번씩 다녔고, 지금까지 그는 수없이 거기를 다녀왔다. 아무도 그가 거기 다니는 것을 탓하지 않았다. 여기서 당장 풀려 나가면, 그는 또 거기에 갔다. 무엇이 잘못이냐? 친구가 잘못이냐? 친구가 잘못을 저질렀냐? 그 친구와 같이 간 것이 잘못이냐? 그 친구를 나무래라. 그는 혁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장사꾼이었다. 밀가루, 설탕가루를 도산매했다. 대양제분 호남 총판이었고 삼호제당 전남 대리점이었다. 장사꾼이 물건 팔아야지 언제 경찰서 쳐들어가냐? 뭘 먹자고 쳐들어가냐?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장사치라고 관청 공격하지 말란 법 없고, 혁명가라고 돈 벌지 말라는 법 없지만, 그는 수금하러 나주 갔지 건물 뿌수글라고 가지 않았다. 관공서가 됐건 개인 집이 됐건 그는 남의 집을 헐뜯은 적이 없었다. 그의 집도 그는 그의 맘대로 때려뿌수지 않았다. 애써 지은 집을 왜 무담씨 허냐? 그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군대에서 계급 빼쁠면 무엇이 남겼냐? 수사기관은 군대보다 위계질서가 더 가혹한 데가 아니냐?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는 무지막지한 군대를 포함한 모든 관료조직들 중에서 가장 독재적이고, 가장 강압적이고, 가장 권위적이고, 가장 기계적인 데가 조사기관 아니냐? 누가 그 애로를 모르냐? 그 사닥다리 높은 데 있어도 더 높은 데서 정강이 깨이기는 평야 마찬가질 것이다. 사정은 참 딱하게 됐다만, 그는 그들의 청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그가 죽자고 거짓말 하냐? 경찰서를 습격하고 살기를 바라겠냐? 파출소만 쳐들어가도 죽었다. 공비 살려 주는 것 봤냐? 자수를 해도 살 둥 말 둥 했다. 그는 자수가 아니었다. 붙잡힌 놈이 무슨 놈의 자수냐? 이왕 죽을 바에 참말 하고 죽자. 그는 어디 경찰서를 공격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 경찰서란 데를 쳐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는 그런 것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거래처가 스무 군데가 넘었고, 부리는 점원들이 넷이었다. 그 중에서 어느 하나 덜 요긴한 사람이 없었지만, 물건 내주고 잔심부름하는 공군이나 배달하고 수금하는 양군보다는 그의 차를 운전하는 김군이나 경리를 보는 장양이 더 비중이 컸다. 모흔 일이 순조로워도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가게에 혼란이 왔다. 그들은 그의 등뒤에서 틈만 있으면 싸우거나 좋아했다. 같이 일하면서 서로 사이가 나쁜 것도 안 좋았지만, 즈그들끼리 눈이 맞아 놀아나는 것은 더 나빴다 눈만 맞으면 꼴불견으로 그쳤지만, 대개 손발까지 맞았다. 그게 문제였다. 넷 중에서 둘만 마음먹으면 주인 하나 병신 만들기는 여반장이었다. 종업원들이 외봉치는 것을 막는 방법은 쫓아내는 것 말고는 예방밖에 없었다. 한번 가지밭에 길이 났다 하면 도벽은 돌이키기 어려웠다. 미리 막자면 평소에 감시를 잘 해야 했는데, 주인이 자리를 비우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감독이 없었다. 그는 지금 그가 없는 그의 가게가 어떻게 죽을 쑤는가를
눈으로 보는 듯했다. 그의 운전수는 그가 향리에서 집안 어른들의 다짐을 받고 데리고 온 착실한 총각이었는데, 그의 둥뒤에서 경리 장양과 주고받는 눈길이 수상했다. 그가 눈치챘을 때는 그들의 이야기가 틀림 없이 오래되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신중해서 그가 몰랐다. 그들은 차츰 자신이 생기고 방자하고 경박하고 소홀해져서 꼬리를 밟혔다. 그가 있어도 그들은 호시탐탐 발호할 기회를 엿보았다. 지금은 그들이 얼마나 마음 놓고 횡포를 부리는지, 그들이 놀아나는데 나머지 둘이라고 무사할는지 그는 궁금했다. 쑥밭이라는 것이 그의 집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주인은 잡혀가서 골병 들고 병신 되고, 가게는 박살이 났다. 아무도 아귀를 맞출 생각은 하지 않고, 먼저 본 놈이 임자고, 돈이고 물건이고 챙기는 놈이 차지했다. 기반을 잡고 사업을 일으키는 데에 십 년이 결렸다. 남들 대학다닐 때 그는 어린 나이에 공부를 포기하고 돈벌이에 나섰다. 가게를 세우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그것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잠깐이었다. 지금 당장 그가 여기를 뛰쳐나가서 손을 쓰면 집안이 폭싹 내려앉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망하는 것만 막는다면 지금까지 그가 당한 고초와 곤욕은 운수불길한 횡액 정도에 그쳤다. 그의 몸은 입원을 해서 급한 치료를 받고 한약 몇 제 지어서 달여 먹고 보하면 아직 젊은 나이라 차츰 회복될 것이고, 점포에 든 멍은 한 일 년 허리띠 졸라매고 설레발치면 아물고 새살이 돋을 것이다. 만일 때를 놓쳐서 십 년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날이면, 그가 지금까지 겪은 온갖 고생과 굴욕은 영영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촌각이 급했다. 그는 빠져나가서 가게 건질 생각을 하기는커녕 매 덜 맞을 궁리에 여념이 없었고, 육 척이 못 되는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데에 뼈가 자근자근 빠졌다. 그는 죄가 없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지금 그를 풀어 주면 원죄 하나가 없어졌다. 원통한 죄인 하나가 살아났다. 일 주일 전 가게에서 찾아온 친구들과 점심 먹을 궁리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이름을 외치며 사복들 둘이 들이닥쳐서 그를 나꿔채 갔다. 그는 죄가 없으니 곧 풀려나겠지, 무슨 오해가 있어도 난난히 있는 모양이다,고 생각하고 안심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한편으로는 벌써 그때 아, 일이 어떻게 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냐, 그의 운이 여기서 끝장이 났단 말이냐, 하고 절망했다. 난데없이 나타나서 멀쩡한 사람을 옭아 간 솜씨를 가졌으면,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느닷없이 풀어 놓는 재주도 있을 것 아니냐. 제발 늦기 전에 그의 말에 귀 좀 기울여다오. 그는 그들이 자백받아 내려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짓지 않은 죄를 억울해서 어떻게 뒤집어쓰냐? 죽어서 혼백이 구천을 떠도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짓은 못 하겄다. 그들의 힘으로 안 돠면 더 높은 데에 놨는 사람한테 그의 원한을 전해다오.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 또 안 되면 또 그 다음. 사닥다리 발판들을 오르고 올라서 꼭대기까지 기어올라서라도 그의 말에 임자를 찾아다오. 교통사고를 당해도 청기와, 시험에 낙제해도 청기와, 병원에서 쫓겨나도 청기와, 마누라가 달아나도 청기와, 시장·군수·서장·동장이 할 일도 청기와, 모두가 기를 쓰고 청기와들이니, 그놈의 기와집 새우 싸움에 고래등 터지느라고 정신이 없겠지만, 어쩔 것이냐, 삼천리 방방곡곡을 혼자서 통째로 맡아 다스리자면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랄 수 없었다. 청기와집은 청원이니 민원이니 부탁들이 팔도에서 산더미같이 밀려드는데다가 본업이 국방이다 외교다, 산업이다, 정치다, 무역이다, 교육이다 해서 따로 있으니 그렇다 치고, 경찰서나 파출소나 지서 같은 데를 습격하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족치는 일을 맡은 그들은 어떻게 된 거냐? 본업 하나 제대로 해치우지 못한단 말이냐? 그들과, 그들 같은 수많은 다른 그들이 각자 맡은 바 할 일을 다하지 못 해서 기와집이 바쁘냐, 기와집이 바빠서 그들과 딴 그들이 할 일을 못 하냐? 일을 맡았으면 끝내든지, 끝내지 못하면 맡지를 마라. 나라 녹만 축낼 테냐? 불알 두 쪽 차고 장가간다더니, 붉은 주먹 두 개 믿고 수사관이 되었냐? 증거를 수집하고 추리를 해라. 축구를 못 하면 운동장에 들어가지 말고, 악기 탈 줄 모르면 청중을 마주 보고 앉지 마라. 그는 억울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고, 그들은 사실을 캘 의무가 있었다.
“개새끼. 입만 깠어. 우리가 한 일을 일러줄 테니 들어 봐라. 우리들이 너희 집을 덮쳤으니 정보가 정확했고, 너를 붙잡았으니 작전이 기민했고, 너를 족쳤으니 조사가 완벽했다. 너의 죄상을 밝히는 데 너의 입만큼 정확하고 권위 있고 손쉬운 것이 또 없었다. 딴것은 몰라도 손쉬운 것은 놓칠 수가 없다. 조금 틀리고 신빙성이 조금 없는 것은 괜찮지만, 시간이 오래 결리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우리는 너 같은 사람을 하루에 열도 맡고 스물도 맡고 서른도 맡는다. 우리들 하나가 너 같은 사람 하나에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매달릴 수 있을 때 우리들은 첩보영화 같은 연기를 해도 괜찮다. 지금은 안 돼. 나라 형편이 안 좋다. 재판은커녕, 조사도 받지 못하고 사람들이 죽어 간다. 말하자면 전쟁이다. 내란이란 말이다. 기와집까지 갈 것이 없다. 현지 지휘관이 처리한다. 너희 집이 지금쯤 박살이 났다면 오래 갔다. 우리 대원들이 너를 데리러 갔을 때 너희 집은 작살이 났다. 우리는 조사 받고 풀려날 사람 집에는 가지 않는다. 바쁜 저승사자가 사잣밥도 안 말아 놓은 집을 찾아가겠냐? 고귀태가 자백을 했다. 그 자백의 증거 능력을 보강하자면 너의 자백이 필요하다. 너의 자백은 너한테는 자백이지만 그한테는 증거다. 그의 자백도 마찬가지다. 너한테는 객관적 증거다. 너희들은 서로 증인이다. 너는 그의 죄의 증인이고, 그는 너의 죄를 증언한다. 너 하나가 나자빠지면 두 사람이 눕는다. 너를 못 잡는 것은 좋다 치자. 다 잡은 고를 놓칠 수야 없지 않냐. 우리는 고를 조사한 사람들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너를 조사했다. 왜 그들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해야 하냐? 그들이 성공하면 우리도 성공하고, 우리가 실패하면 그들도 실패해야 말이 된다. 같은 사건 아니냐? 너가 고보다 독하냐, 우리가 그들보다 무르냐? 우리는 얼마든지 더 조일 수 있다. 적어도 그들만큼 조일 수 있다. 너가 고보다 더 독하다면 더 독한 만큼 더 조일 수 있다. 깨지는 것은 결국 너다. 평소 불온서적을 상습적으로 비밀리에 공급해 온 고귀태는 고등학교 동창인 자금책 김갑동을 이십일 십팔시 삼십분경 그의 서점으로 초치, 폭도들을 규합 선동하여 경찰관서를 습격할 것을 모의하고, 곡물상을 경영하는 김의 곡물 운반차량인 적재정량 일천 키로 화물차를 동원, 진압군의 작전 지역을 벗어난 변두리에 원정, 치밀한 사전 계획과 답사 아래 나주경찰서를 습격하였다. 너는 그날 그곳에 간 것은 인정하면서 습격한 것은 부인한다. 그럴 수가 있냐? 반은 하고 반은 안 했냐? 차라리 처음부터 모른다고 발을 뻗어라. 목격자와 증인이 있는 데까지만 자수할래? 만두 가게 주인과 종업원이 너를 보았고 너의 점포 직원이 증언했다. 김철순, 이십팔 살, 국제경리타자학원 수료, 미혼. 운전수 장태경, 이십사 살, 이종 소형면허 소지, 가족 사항, 노모, 처자 일남. 너는 그날 손수 차를 몰고 갔다. 계림동에서 고를 태운 데까지 너의 거동이 밝혀졌다. 그 다음부터는 너가 증언을 해라. 너의 행적은 너가 가장 잘 알겠지. 현장에 간 것까지는 너가 자백을 했다. 마저 해라. 끝매김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이 대목에서 그만둔다면 우리가 욕을 먹는다. 돈을 먹었다고 오해들을 한다. 말이 안 나오냐? 돈을 먹었더라도 너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났다. 생사람도 잡는데 다 잡은 사람 놓치겠냐? 몸이 아프면 말이 나온다. 말이 안 나오는 것은 아직 맛을 덜 봤다는 증좌다. 더 아프게 해주랴? 그거야 우리들 생업이다. 그거 하자고 우리들 산다. 분골쇄신, 그래 피차 일반이다. 감정을 넣어서 하면 재미는 있지만 몸에 축이 나고, 우리 몸 말이다, 너의 몸 말고. 너의 몸이야 축나자고 여기 들어왔다. 기계적으로 하면 정확은 하지만 지겨워서 차라리 장작을 패는 것이 더 보람 있다. 직업 선수는 불필요한 가학을 하지 않는다만, 혹 지나치게 아프더라도 감정 잡았다 원망을 하지 마라. 우리도 사람이라, 같은 일올 되풀이해도 상대가 바뀌면 감홍이 새롭다.”
그날 그는 마지막으로 매를 맞았다. 생업이니, 전공이니, 직업 선수니 해쌓지만, 숙련도가 그 정도라면 고문 전문가랄 것도 없었다. 아무나 양 어깨에 근육 좀 붙었고, 주먹 마디에 티눈깨나 박혔으면 별다른 교육 안 받고도 못 할 것 없었다. 다만 인명경시, 인명까지 아니라면 인권유린, 인권까지 아니라면 사람 무시만 할 줄 알면 되었다. 그런 거야 사람 한두 번 패보면 습관이 되어 금방 이골이 났다. 이력이 안 나도, 사람 홀랑 벗겨서 앞에 세워 놓으면 제아무리 잘난 사람도 권위나 존엄성이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입은 사람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보드락쳐 있는 초라하고 처량한 몸뚱이야 아무 가책, 아무 불평, 아무 불안, 아무 후회 없이 실컷 치고 박고 차고 밟을 수 있었다. 맞는 것도 되풀이되자 도가 텄다. 몽둥이나 각목이나 주먹이나 발이 남자답다면, 대야나 사발이나 주전자나 전구 구멍은 여자다웠다. 더 독했다. 둘 다 그는 잘 견뎠다. 아플 때는 수치심으로 참고, 원통할 때는 살이 찢기는 통증으로 버텼다. 살려 줘. 살려 줘. 그가 견뎌 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말할 줄 몰랐다. 예, 습격했소. 옳지. 부는군. 잘 생각했어. 누구와 언제 어떻게? 혼자, 밤중에, 담을 넘어. 총은, 탈취한 총은? 지하실, 지하 창고. 어디다 감췄어? 길가, 숲속, 연못 속. 누구와? 혼자, 둘이. 아니, 셋이. 어디서? 벽장, 찬장, 책장. 총은? 또 무슨 총? 그는 세 사람들한테 조사를 받았다. 하나는 현역 군인 하사였고, 또 하나는 정보부원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경찰 경사였다. 사람은 속한 세상대로 살았다. 군인은 그중 가장 어리고 소년티를 아직 못 벗은 순하디순한 대학생처럼 생긴 사람이었는데 언동이 셋 중에서 제일 잔혹했다. 정보원은 몸매는 가냘팠지만 눈매가 매섭고 동작이 기민하고 셋 중에서 공갈을 제일 잘 쳤다. 마지막 경찰은 나머지 둘에 비하면 허우대는 제일 크고 다부졌지만 기관원이라기보다는 민간인 같았다. 그는 그곳 사람으로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군대에서는 이북 말씨가 섞인 서울말을 써야 행세를 했다. 그는 형사였는데 촌스러워서 주눅이 들어 보였지만 셋 중에서 제일 능글맞고 자신만만했다.
“나는 송정서에서 차출돼 나왔다. 도경이 쑥밭이 되어 뿌렀는디 경찰서가 문제다냐? 광주가 난장판인디 나주가 성허겄냐? 니는 영 얼굴이 익어야. 어디서 봤겄다냐? 충장로에서 만났는갑다 잉. 거기 십 분만 서 있으면 광주서 만날 사람 다 만나야. 고향 사람인께 우리들끼리 허는 소린디, 절대 경찰서 습격했다고 자백허지 마라. 총살이여. 했어도 안 했다고 잡아떼라.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헌당께. 아픈 것은 잠깐 아니여? 자, 몇 대 맞아 보더라고, 잉. 시늉만 힐 수는 없고, 어깨에 심 빼고 팔목 심으로만 칠 텐께, 돼지 멱따는 소리 한번 질러 뿌러라. 씨팔놈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여, 돼지 목숨이여?”
아이고, 이거이 무신 소리당가? 사람 좀 살려 주라. 안 헌 일을 했다고 허겄냐, 어이쿠, 헌 일을 안 했다고 허겄냐? 헌 일을 하고, 윽, 안 헌 일 안 했다고 헐 턴께, 사람 좀 살려 주라. 으이그, 말 꺼내기가 불행이지, 컥, 운만 떼놓고 말래? 길을 가리켜 줬으면, 컥, 끌어 줘야지, 오르지 못 헐 나무 쳐다만 보면 뭣 허냐? 악, 그가 버티면, 그는 끝까지 버틸 텐디, 언젠가는 이곳을 빠져나갈 테지. 설마 누워서 나가지는 않겄지만, 초주검이 되어서 산송장으로 나간다면 나간들 나갔달 것이 무엇이냐? 송장칠라고 나가냐? 이왕 동향 친구 놀음 했응께 말 난 짐에 그를 당장 그곳에서 빼데 주라. 나가서 나간 보람 헐 수 있을 때 나가게 해주라. 뜻이 있으면 길이사 없을라드냐. 그의 동네에 헌병 상사가 살았다. 제대헌 지 채 일 년이 안 되었는디, 바로 여기 헌병대 인사계로 복무허다 옷을 벗었다. 그 사람한테 그가 여기 잽혀 있다는 것만 좀 알려주라. 나머지는 헌병이 어련히 알아서 허겄냐. 그의 집에서도 그의 행방을 몰랐다. 아마 그의 처는 미친년겉이 온 시내를 싸돌아다님서 꺼적떼기마다 들추고 송장 냄새 썩는 냄새 맡니라고 정신이 없으 거이다. 그의 집에만 그가 어디서 무엇을 허고 있는지 알려주면 동네 헌병한테는 집에서 연락이 갔다. 적선해라. 집에서는 죽은 사람 살아 온 거만큼이나 고마워헐 거이다. 그의 집 전화는 삼국에 삼륙새륙이었다. 이왕 전화를 건 짐에 면회 좀 오라고 해라. 전헐 말이 태산 겉다. 옆에서 시켜도 못 허는 것들이 깝지는 사람이 없으니 오죽허겼냐. 으그그그. 너무 세게 때렸는갑다. 이거이 시방 뭣이다냐. 끈적끈적허고 비릿헌 것이?
“니가 여그 있는 것은 군사비밀이다. 니가 어디서 무엇을 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니를 아는 사람들은 니가 여기서 좆나게 얻어맞고 있는 것을 모르고, 니가 여기서 네 발로 뽁뽁 기는 것을 두 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니가 누군지를 모른다. 니를 영창에 가두고 지키는 헌병들은 니가 폭도라는 것밖에 모른다. 비밀이 왜 있냐? 샐라고 있다. 세상에 비밀만큼 잘 알려지는 것이 없더라. 특히 군사기밀 말이다. 니가 여기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아, 안 죽었으면 잽혀갔지. 비상계엄 밑에서 계엄 사무소 아니면 어디로 잽혀갔겼냐? 영창 헌병들이 니가 누군지 모른다지만, 니가 광주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냐?
광주가 어디 서울만 허냐? 몇백만이 사냐? 충장로 동방극장 황금동 텍사스, 손바닥만헌 거, 뻔해야. 가들 외출 어디로 나가겄냐? 내가 여기 와 있는 것이 이급 비밀이다. 비밀이 많은 이유를 알겄지야? 언제 다 아냐?
헌병 상사는 그를 면회하러 오지 않았다. 그는 딴 일로 그 부대를 출입했다. 간수 헌병들이 그를 다루는 솜씨가 알게 부드러워졌다. 발길질을 하도 많이 당해서 그들 옆을 지나가자면 엉덩이 꼬리뼈가 근질근질하고 뭐가 날아오지 않으면 불안했다. 선착순 집합에서 머리에 붙어도 정갱이가 깨였는디, 꼬리에 붙어도 주먹 이나 군화발이나 개머리판이 旨아오지 않았다. 그만 쏙 뺐다. 앞뒷사람들이 부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군인들은 그들에게 불공평의 이유를 설명할 의무가 없었다. 그들이 법이었다. 그도 동료 죄수들에게 미안할 겨를이 없었다. 간수들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 불가촉 천민들이 어서, 언제 처형될지 모를 폭도들보다 더 천하고 더러운 사람들이 없었다, 결국 상대적으로 군인들이 가마득하게 높았다. 그들은 적어도 그들 앞에서는 법이 되고도 남았다. 얼마나 사람 같지 않았으면 판사는커녕 육법을 배웠다는 검사 낯짝도 못 보고 굴비두름처럼 줄줄이 한 줄에 엮어 극락강 강둑으로 개처럼 끌려가서 총알밥이 되겠느냐. 그는 갑자기 달라진 파수병들의 태도에 온 희망을 걸었다. 똥다리 뼈 한 번 덜 차이고 시멘트 바닥에 머리통 한 번 덜 처박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길목이었다. 갈림길이라 그들은 서로 어깨를 부빔서 같이 있었지만 차이는 하늘허고 땅이었다. 그는 좋은 소식이 늦어질수록 불안하고 불길했다. 혹시 꺼꿀일까? 동정받는 그가 땅이고 두들겨 맞는 동료들이 하늘일까? 곧 풀려나갈 놈들, 어디 실컷 맛 좀 보고 나가거라.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목숨, 인생이 가련하니 마지막으로 봐주마. 그는 등짝이 싸늘했다. 역시 아직 갈림길이었다. 아무것도 분명치 않았다. 조금 걸어가 봐야 차츰 차이가 났다. 소식이 늦어지면 또 하나 나쁜 것이 있었다. 그는 기다릴 처지가 못 되었다. 너무 늦으면 나가 봤자 쓸데가 없었다. 폐인이 되어서 나가느니 식어서 나가는 것이 더 나았다. 마디에 옹이라고, 갈림길에 갈림재였다. 기회가 아직 남았다. 아니, 벌써 놓쳤다. 그가 마침내 늦었다고 절망하고 포기했을 때, 현역이 」에게 종이허고 필기구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 자백을 혈라면 골병들기 전에 했다.
“새끼, 각서를 써라. 여기 들어온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우리가 부르면 즉시 달려와라. 주거를 당분간 현주소로 제한해라. 앞으로 한 달 동안 병원에 가지 마라. 네 가지다. 혐의가 풀린 것이 아니다. 의문점이 많지만, 박상사의 부탁과 보증으로 방면한다.”
박상사? 박범수 상사? 하니면 그들의 상사? 사닥다리 다음 발판? 당분간이라니, 얼마 동안? 일 주일? 한 달? 일 년? 의문점이 남았어? 자백을 못 받았지. 의심은 그들이 했다. 그가 하라더냐? 병원? 한의원도 안 되냐? 약국도 안 되냐? 똥물이나 받아 마실거나?
“병, 의원 이름 붙인 곳이면 다 안 된다. 당분간이란 별명이 있을 때 까지 다.”
“가라는디 말이 많냐? 집안에 들어박혀서 개나 몇 마리 곽 묵음서 근신허라는 말이다. 관할 파출소에 신고하고 지도를 받아라. 말하자면 집행유예여. 까불었다가는 어느 구신이 어디로 채간지도 모르게 또 물어간다. 한 본으로 부족허겄냐? 명심허드라고, 잉.”
그는 서약서를 써주고 보름 만에 반병신이 되어 병영을 나왔다. 뼈 마디마디가 빠지고 풀려서 사지가 따로따로 놀았다. 이런 몰골로 집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어디 조용한 물가로 가서 아무도 모르게 물귀신이 되는 것이 피차 편헐랑가 모르겄다. 송정리 쪽에서 영업용 승용차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물귀신이 되기 전에 선 자리에서 논두력이 아니라 길가 인도 모서리 베고 자동차 귀신이 될 뻔했다. 차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급히 섰다. 운전수가 머리를 창 밖으로 내밀고 상소리를 했다. 짖어라, 개야. 문둥이 죽이고 살인헌다. 그를 깔아뭉개 봤자 반 살인밖에 더 되겄냐. 운전수가 차를 멈출 때만큼이나 성질 급허게 떠났다. 그는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었다.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 무엇인지 몰랐다. 시내 승합을 어디서 탔냐? 그것으로 집에 갈 수 있냐? 돈은 있냐? 그의 수중에는 끌려올 때 오만 원이 있었다. 무엇에 쓸 돈이었더라? 지금은 그 돈이 그의 호주머니 속에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언제 없어졌을까? 토끼 뜀할 때 빠졌을까? 빠진 것이 아니라 누가 꺼냈을까? 누굴까? 원산폭격할 때였을까? 맡겼던가? 뺏겼던가? 주었던가? 버렸던가? 돈은 사람한테 소용이 닿는 물건이고, 그는 그 동안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은 큰 차가 없었다. 조금만 사람이 아니면 아주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그 동안 거기서 실현한 반인간, 반자연은 그 열 칸에 하나, 백 칸에 하나만 가지고도 그를 사람 아닌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람이 아니기는커녕, 사람이라는 이름조차 부끄러웠다.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다니, 그건 사람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가 어떻게 감히 그를 짓밟은 수사관들과 같은 종류의 짐승이냐? 그가 사람이라면 그들은 사람들이 아니라 신들이었고, 그들이 사람이라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개나 개미였다. 사람 아닌 것이 사람 아닌 것 노릇 하니라고 그 동안 속이 편했는디, 갑자기 사람 노릇 하자니 어쩔 줄을 몰라서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 돈이라, 돈. 그렇지,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했다. 이럴 때는 영업용 승용차를 타는 것이 좋았다. 구급차를 부를까? 병원? 집에 전화를 해서 김군을 불러낼까? 전화? 그렇지 전화, 그는 전화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전화를 했냐? 그는 구멍가게로 갔다. 아, 물건들도 많구나. 더 들여놀 틈이 없었고 발디딜 틈도 없었다. 남파 간첩들이 이것을 보고 귀순한다고? 백화점?
“뭣이요? 술이라? 쇠주요? 두 홉들이요?”
“사탕가리도 파요?”
“설탕가루라? 일 키로짜리가 있소.”
“큰 포장은 안 갖다 놓소?”
“찾는 사람이 있어야지라. 작은 포장도 있는가 모르겄소.”
“없응께 안 찾지라. 조미료 봉지만헌 것 갖다 얻다 쓰겼소? 밀가리는 있소?”
“밀가리라? 없소이다.”
“쌀은요? 구멍탄은요?”
“당신 간첩 아니요?”
“뭔 첩이라? 당신은 방첩이요?”
“화가 나서 해본 소리요. 고생 많이 허셨소. 아, 구멍가게에다가 전화를 해가지고 쌀 한 가마만 펴라, 구멍탄 백 장만 띠라, 허면, 누가 좋아허겄소?”
“전화를 허요?”
“집에 가서 푹 쉬시요. 제발로 겉어나온 것만도 천행으로 생각허고, 지난 일들은 싹 다 잊어뿌시요. 좋자잖은 일 미주알고주알 새기면 뭣 헐 것이요? 골병든 디다가 홧병꺼지 도지면 당신 인생도 볼장 다 봤소. 속병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요? 달게고 가라앉히시요. 건딜고 쑤시면 썽내리다. 덮고 감추고 가리고 깜싸고 우돠도 틈만 삥긋허면 탈이 옴붙소. 억울헌 깜냥으로 허면야, 세상을 뒤엎어도 시원허겄소?”
“복마전 코앞에서 세상을 뒤집을라요?”
“당신은 검정필, 시험필이라, 내 맘놓고 허는 소리요. 요즘 세상에 말이나 어디 맘대로 허겼습디요?”
“아이고, 뚜드러 맞은 것이 무신 벼실이라고.”
“고육지계라는 것이 있소. 얻어맞았다고 다 믿을 수 있간디요?”
“어째 가게는 위장업소 같소? 여그서 우리 접선 한본 해볼께다?”
“접선 아니라 합선이라도 헙시다. 겁 한나도 안 나요. 당신이 가짜라고 허드라도 말이요. 아닌 사람이 있어야 겁이 나지라.”
“아니, 그럼 다 우리들 겉단 말이요?”
“그럼 다른 줄 알았소? 당신 혼자 땅바닥을 네 발로 뽁뽁 기고, 다른 사람들은 그 땅바닥을 손바닥으로 침서 격양가를 부른 줄 알았습디요? 당신헌테는 모진 소리가 되겄소만, 당헌 것이 당신 혼자뿐이라면 무신 걱정이나 되겄소?”
“그래이라, 잉? 나는 나만 고생을 헌 줄 알았더니, 딴사람들도 안녕허들 못 허셨그만이라. 난들 나 혼자만 고초를 겪었다고 생각했겄소? 그럴 겨를이 없습디다. 당신은 어쨌다고 봉패를 했소? 구멍가게 헌다고 펩디요?”
“하, 팰람사 핑계가 없어서 못 패겄소? 어째서 팼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팼냐가 문제요;”
“허긴 뒤보다가 잽혀갔당께 앉아서 장사허는 것은 죄도 큰 죄였겄지라. 어떻게 쳤냐? 어떻게 맞았냐? 거 알아서 뭣 혈라요? 어떻게 낫았냐가 문제 아니요?”
“낫았냐가 아니라 낫느냐겄지라. 혼자 집에 가시겄소? 전화를 해서 누구 하나 나오라고 헐까요? 집에 전화 있으시요?”
“전화요? 전화가 있소? 그 말이 왜 인자사 나왔다요?”
“없으시요? 없다고 화낼 건 없고. 이웃집이나 동네 가게에서 급헐 때 좀 전해 주면 편리헌디. 두 집에 하나 있으면 두 집 전화고, 열 집에 하나 있으면 열 집 전화 아니요? 동네에 한 대 있으면 동네 전화 아닐라고? 헐 수 없소. 인심 사나운 동네에 사는 것이 불찰이지. 차를 탑시다. 내가 찹아 드리리다. 차비는 있으시요? 내가 빌려 드리리까? 운전 기사가 사정을 알면 차비를 받기는커녕 보태 줄라고 헐 꺼이요. 당신은 대표요, 우리들 대표.”
“내가 대표? 무신 대표? 뽑도 않앴는디 무신 대표? 뚜드러 맞는 것도 대표?”
“난리가 나면 앉은뱅이가 삼십 리를 뛴다요. 급헌디 언제 뽑고 말고 헐 것이요? 대표가 되면 맞기도 허고 채이기도 허고 터지기도 해야지 좋은 일만 있겄소? 궂은 일 몹쓸 일을 대신허는디 재미있기만 바랄 수가 있소? 갑시다. 저기 빈 차가 오요. 두 팔로 불난 시늉을 헙시다.”
“대표는 허고 싶어야 허는 것 아니요? 피안 감사도 지 싫으면 그만이요. 나는 내 일이 바빠서 넘 일 볼 틈이 없단 말이요.”
“이왕 해뿐 것 어쩔 거이요? 앞으로나 허지 마이다. 보고도 모르겄소?”
그는 영업용차를 타고 그의 가게 앞에까지 왔다. 그가 차비를 내자 그의 이망빡에 “대표”라고 씌어 있는지 운전수가 손을 내저었다.
“오는 동안에 들은 이야기 고마웠소. 차비는 무신 차비요.”
“내가 무신 이야기 했간디요? 뚜드러 맞은 이약도 이약이다요?”
“선상은 그 이약을 아무헌테도 해서는 안 되지라? 걱정 마시요. 나는 선상 성함을 모릉께, 나헌테 헌 이약은 안 헌 것이나 다름없소.”
“겁 한나 안 나요. 실컷 떠들어야겼소. 그 이약 누구 모른 사람 있간디요, 다들 골병 들었는디?”
“그 사람들이 본래 좀 수선시럽단 말이요. 안 것은 모르고, 모른 것은 안당께요. 몸 조섭이나 잘 허시드라고요, 잉.”
“안 것을 몰라도 등신이지만, 모른 것을 알아도 폭폭헙디다. 넘을 병신 맨들더랑께요.”
그의 가게문은 열려 있었다. 장양 혼자서 점방을 지키고 있다가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자지러지게 놀랐다. 귀신을 봤어도 그렇게 질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메, 사장님, 정말 사장님?”
“다들 어디 갔냐? 별일 없었냐?”
별일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장양이 그래도 오래 같이 일을 했다고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했다.
“공군은요, 엄마가 아파서 못 나왔고요, 양군은요, 지가 머리통이 깨져서 못 나왔고요, 김군은요, 김군은요, 김군은요.”
“김군은 어찌 되었어? 죽었냐? 왜 고장난 축음기판겉이 헛도냐?”
“아니요. 안 죽었어요. 안 죽고요, 차 몰고 나갔어요. 거래, 처,에.”
“안 죽고 살았으면 됐다야. 안집은 별일 없냐?”
“안집요? 안집은요, 사모님이요, 사흘째요, 안 들어와요, 요.”
그의 부인은 그날 밤 집에 돌아왔다. 그는 그의 부인의 예상보다 하루 빨리 방면됐다. 그는 그의 부인이 그 동안 어디 갔었는지 그가 어떻게 해서 풀려나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나 그의 부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대견했다. 골병이 든 사람은 할 일이 많았다.
(『해바라기』, 청아출판사, 1992)
2016년 5월 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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