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사계
앙상하다. 한때 무성하던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목 홀로 서 있다. 외롭고 쓸쓸한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명함을 버리고 농사를 짓다 보니 사람보다 하늘을 먼저 눈에 들어온다. 농사일이 서툴러 손은 느리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일만큼은 나름 익숙하다. 하늘에 자유로이 떠가는 구름은 바람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꽃과 나무로 계절을 느끼지만, 나는 구름의 표정을 읽고 살피며 그 속에 머문다.
봄의 구름은 설레는 숨결을 닮았다.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걷히면 희고 얇은 꽃처럼 피어난다. 부드럽게 번지는 층적운이 봄볕 아래서 꼬리를 흔들면, 비닐하우스 밖으로 나와 반갑게 마중한다. 그 구름이 내려와 대지를 촉촉이 적실 때, 밭에 거름을 뿌리고 땅을 고르며 푸성귀를 심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막 눈을 뜬 새싹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넨다. 구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겨우내 우울했던 마음에 새로운 희망이 싹튼다.
여름 구름은 생명의 폭발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대지는 꿈틀거리고 하늘에서는 솜사탕처럼 뭉실뭉실한 적운이 부풀어 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적운은 거대한 산이나 탑처럼 솟은 적란운으로 변해간다. 천둥과 번개를 품은 비구름이 하늘을 가를 때, 고추와 가지, 그리고 토마토는 설 자리를 잡고, 참외와 수박 덩굴은 기어가며 숨을 고른다. 또 땅바닥에 널브러진 상추 아욱 바질 등 여러 채소는 하늘을 향해 너울너울 춤춘다. 구름이 한바탕 굿을 하고 지나가면 대지의 신록이 더 짙어진다. 그 거칠고 뜨거운 구름 속에서 생명의 놀라운 열정을 배운다.
가을의 구름은 그리운 노을빛을 닮았다. 먹구름이 물러가면, 하늘엔 희고 작은 비늘구름이 부드러운 물결처럼 펼쳐진다. 산마루에 모든 시름 벗어버리고 흘러가는 높쌘구름에서 자유의 바람이 불어오고, 산자락 농막 옆에 낙엽 지는 소리에서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농부의 상념은 잠시뿐이다. 붉은 고추를 따고, 고구마 줄기를 다듬고, 채소를 정리하느라 바쁘다. 가끔 지인이 찾아와서 거들면, 밭 가장자리에 빨갛게 익은 꾸지뽕과 농막 옆에 누렇게 익은 대추를 따서 선물로 건넨다. 가진 건 적어도 성숙의 계절인 가을이 오면 마음은 넉넉하다. 그런데 가을의 구름 아래서는 모든 것이 조금은 느리게, 그리고 조금은 쓸쓸히 지나간다.
겨울의 구름은 고요다. 잿빛 층운이 하늘을 덮고, 세상은 낮게 웅크린다. 백설을 품은 어두운 회색의 난층운이 천천히 흘러가며 모든 소리를 잠재우고 세상을 흰색의 고요로 덮는다. 그럴 때면 너와 나의 경계는 사라진다. 부와 빈, 높음과 낮음, 모두 한빛의 침묵 속에 묻힌다. 하얀 세상 앞에서 인간은 그저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농부는 고춧대를 뽑고 수박 줄기를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땅을 파야 새봄을 맞이할 수 있다. 겨우 내 땅을 파느라 삽질이다. 어떤 이가 농막 옆에 세워둔 경운기를 보며 “기계로 갈면, 한나절이면 될 일을 사서 고생한다.”라고 나무란다. 오랜 시간 비밀로 했던 일을 이실직고다. 사실 먼저 주인이 그 경운기로 비닐하우스 안에서 땅을 갈다가 사고를 당해 세상 떠났다. 어쨌든 고요 속에서 구름은 지난 시간을 솔직히 토해낸다.
갑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의 강을 건너고 돌아보니 구름은 형태를 지우며 스스로 다시 쓰는 존재, 그 변화 속에 자유의 본질이 숨 쉬고 있었다. 봄의 구름은 희망이요. 여름의 구름은 열정이다. 가을의 구름은 성숙이고, 겨울의 구름은 고요를 품는다. 우리의 삶도 자연의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구름의 사계처럼 돌고 돌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그간 사는 게 낯설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나를 옥죄고 있던 수많은 조건을 넘어 진정한 자유를 찾은듯하다. 예전 같으면 산에 둥지를 틀 나이다. 나목처럼 홀로 조용히 구름과 어깨동무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느덧 벌써 미틈달 첫날이다. 비가 내리다 눈이 온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애매하다. 마치 젊은이 축에도 끼지 못하고 늙은 축에도 끼지 못하는 내 모습이다. 그런들 어떠리. 젊음은 지나갔어도 따듯한 목로에 앉아 구름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니 내 인생의 화양연화이지 싶다.
아직 가슴속에 피고 지는 꽃이 많다. 천천히, 새봄을 준비해야지.
2025년 11월 1일
구름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