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70)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獨不知之
홀로 이를 모르네요.
요즈음 정치권에서는 독재(獨裁)가 횡행한다고 말한다. 여당에서는 야당의 이재명 일극(一極) 독재 체제가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야당에서는 검찰 독재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반 국민이 그 말을 믿고서 자기들 편이 되어 주기를 상정한 것이겠지만 그들의 패거리가 아니라면 일반 국민이 그렇게 믿어줄까?
815 해방부터 625, 419, 516, 518, 1212, 413, 629까지 직접 몸으로 겪어 온 필자는 독재가 어떤 것인지를 경험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대하여 반대하는 시위가 심하였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멋진 말인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선언했다. 413 호헌선언이다. 이때 헌법이란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간접으로 뽑는 유신 헌법이었는데, 헌법은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이었지만 이때만은 헌법은 지켜져야 한다는 미사여구에 속을 국민은 많지 않았다.
대통령의 호헌선언으로 더 이상 대통령에게 직선제의 수용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내가 속한 대학에서도 뜻있는 교수들, 특히 40대의 젊은 교수들이 이제 교수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0여 일이 지난 5월 5일은 공휴일이어서 호헌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자는 교수들이 성명서를 쓸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우리 집으로 삼삼오오 모였다. 한편에서는 성명서를 기초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평소에 대화한 성향을 감안하여 동참을 권유하는 전화를 돌렸다. 독립운동이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시기였다.
동참하기를 권유하는 전화를 동료 교수에게 해 보면 흔쾌히 호헌반대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은 핑계를 댔다. 예컨대 지금 바쁜 일이 있으니 한 시간 뒤에 전화해 주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 뒤부터 몇 번 전화해 보아도 아예 받지 않았다. 참여를 거절하기 어려워 피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때는 정말 정부의 서슬이 시퍼렜다. 반정부 언론은 여지없이 제재받았고 교수가 반정부 언론을 한마디 쓰기라도 하면 면직될 수 있었다. 그러니 마음과는 달리 반정부성명서에 이름 올리기를 꺼리었으니 비난하기 어려웠다. 이런 시대를 독재 시대라고 명명(命名)해도 된다. 그런데 이 서슬 시퍼런 독재 시대는 629로 끝났다.
그 후 벌써 근 40년이 지난 지금 검찰 앞에 독재를 붙이거나 또 야당을 일극 체제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는 거꾸로 돌아가지 않고 독재 시대는 완전히 갔다. 그런데 상대를 독재라고 하는 것은 ‘독재는 나쁘다.’는 개념에 기대어 상대에게 독재의 모자를 씌우려는 저열한 잔꾀이니 일을 잘하려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넘어트리는 것이 목표인 정상배의 전형이다.
남송 시절에도 권력을 틀어쥔 재상이 자기 이익을 구하려고 (起復)이라 모자를 자기에게 씌워 권력을 계속 누리려고 한 일이 있다. 마치 호헌이라는 멋진 모자로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과 유사한 일이다. 기복이란 관원(官員)이 부모상을 당하면 사임하고 복상(服喪)해야 하는데, 복상하는 3년 중에 국가의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그가 아니면 이 국가적 난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다시 관직을 주는 일이다.
이 좋은 제도를 꼼수로 쓰려했던 사람이 남송 이종(理宗)시기의 사숭지(史嵩之)이다. 그는 3대에 걸쳐서 독재한 사씨 집안의 마지막 재상이다. 그는 영종(寧宗)이 후사(後嗣)로 정해놓은 조횡(?~1225)이 ‘등극한 다음에 사숭지를 제거하겠다.’고 한 말을 듣고, 황제가 정해놓은 조횡 대신 조윤(趙昀, 理宗)을 세우고자 준비했다가 영종이 죽자 바로 조윤으로 황제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하가 황제를 바꾼 것이다.
황제를 바꾼 사숭지도 세월을 이길 수 없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고 복상(服喪)하려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을 걱정하였다. 당시에 몽고와 대결 과정에 있으니 이를 핑계로 자기 아버지가 죽어도 황제가 자기를 기복시키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생뚱맞게 자기만 기복하면 체면이 서지 않으니 먼저 다른 사람을 기복시켜서 관례(貫例)를 만들어 자기도 기복하려는 꾀를 냈다.
그래서 우선 마광조(馬光祖, 1200~?)라는 사람이 부모가 죽고 졸곡(卒哭)도 하지 않은 사람을 기복시켰고, 같은 방법으로 허감(許堪)을 기복시켰다. 그들은 군수(軍需) 관계를 총괄하거나 군사를 통제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그 업무가 중요하다는 이유였다. 이쯤 되면 사숭지가 친상(親喪)을 당하고 기복한다고 하여도 충분히 명분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잔꾀였다.
그런데 정말로 사숭지가 친상을 당하였다. 그는 분상(奔喪)도 하지 않고 황제가 자기를 기복시키도록 미리 조치하였고, 이대로 황제 이종은 사숭지에게 기복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일인데 사람들이 그의 속내를 모르고 속을까? 그렇지 않았다.
태학생인 황개백(黃愷伯) 등 1백44 명이 들고 일어나서 황제에게 사숭지를 기복시키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하였다. ‘저 사숭지(史嵩之, 1189~1257)는 어떤 사람입니까? 심술(心術)은 삐뚤어져서 바르지 않고 종적(蹤迹)은 은밀하여 쉽게 알지 못합니다. 과거에 독부(督府)를 열어 화의(和議)를 가지고 장사(將士)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넉넉한 물자를 가지고 재상(宰相)의 지위를 훔쳐서 천하의 소인(小人)들을 벌려 놓아 사당(私黨)을 만들고, 천하의 이권(利權)을 빼앗아서 개인 집으로 돌리며, 모의(謀議)를 축적한 것이 오래 쌓이고 음험(陰險)한 것을 헤아릴 수 없으니, ‘조정(朝廷)에다 하루를 두면 하루만큼의 화란(禍亂)을 끼치고 조정에 1년 있게 하면 1년만큼의 걱정거리를 끼친다는 것’은 만 명의 입에서 똑같이 나오는 말이니 오직 그가 떠나는 것이 빠르지 않을 것을 걱정할 뿐입니다.’
사숭지는 자기에게 적용한 기복이라는 멋진 제도와 논리를 이용하려 했지만 속지 않은 것이다. 백성들도 17자로 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마광조는 총령(總領)을 담당하고, 허감은 절제(節制)가 되었으니, 승상(丞相)이 기복하려고 원례(援例)를 만들었네.’(光祖做總領, 許堪爲節制, 丞相要起復, 援例)라는 것이다. 황개백은 황제에게 ‘무릇 마을 골목에 사는 소민(小民)도 오히려 그 간사함을 아는데 폐하만이 홀로 이를 알지 못하십니까?’
지금 여야는 서로 상대를 독재로 몰고 있지만, 이는 ‘기복’을 내세운 사숭지의 꾀만도 못한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그 ‘독재’프레임에 속을까? 오히려 속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닐까?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속임수가 아니라 진정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무리가 있다면 전문 정치꾼, 정상배(政商輩)라는 말이 있는데, 이들에게 민생을 기대하는 내가 순진해서 인가?
첫댓글 감사합니다. 역사 평론 잘 읽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