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바닥경전☆]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 ============
[바닥경전]
박해림 시집 / 나무아래서시인선 006 / 나무아래서(2011.09.30) / 값 10,000원
================= =================
바닥경전
박해림
엎드려야 보이는
온전히 몸을 굽혀야 판독이 가능한 전典이 있다
서 있는 사람의 눈에 읽힌 적 없는
오랜 기록을 갖고 있다
묵언의 수행자도, 맨발의 현자도 온전히 엎드려야만
겨우 몇 글자를 볼 뿐이다
어느 높은 빌딩에서 최첨단 확대경을 들이대고
글자를 헤아려 들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일찍이 도구적 인간의 탄생 이후
밤새 달려야만 수평선을 볼 수 있다고 믿게 되면서
바닥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졌던 것이다
온전히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긋불긋 방언을 새겼던 것이다
빗물이 들이치고 폭풍이 몰아치면서
웅덩이가 패었고 글자들이 합해졌거나 떨어져나가
텍스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생을 대부분 엎드려 산 사람은
상형문자가 되어버린 이 경전을
판독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손끝으로 감아올리는 경전經典의 구와 절에
바닥이 힘껏 이빨을 박고 있어 애를 먹을 뿐이라는 것이다
둥글다
박해림
햇살이 비스듬한 저녁,
전철역 좌판할머니 등이 둥글다
검정비닐봉지를 건네는 손등
관절 꺾인 무르팍도 둥글다
나물 봉지를 받아든 손
덩달아 둥글다
골목길, 이끼 낀 담장, 털 곤두세운 고양이의 발톱, 낡은 목제의자에 몸을 내맡긴 노인, 맨드라미, 분꽃, 제라늄, 세발자전거…
오래 전부터 둥글다
한 줄기 쏟아지는 소나기
그 빗줄기 속을 뛰어가는 배달꾼의 뒷모습
일제히 쳐다보는 눈길들
모두 둥글다
장작의 힘
박해림
일흔여섯 할머니 나무꾼 부엌 아궁이 앞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불씨를 일으켜 나무장작을 던져 넣으며
등짐 져 해 놓은 나무 다 때고 죽을란가
다 못 때고 죽을란가
혼자말이듯 아궁이 들으란 듯 중얼거린다
가마솥 한 가득 하얀 쌀밥 지어서 첫 밥그릇을 조왕신께
두 번째, 세번 째 밥그릇은 객지 나간 자식 몫으로
물 가득 담은 오지색 함지박에 차례로 놓는다
항상 배 고플 일 없어야 할낀디
장작을 휘저어 불을 일으키면서
어깨에 힘을 준다
봉제공장 밤낮없이 돌리던 큰아들 배곯을 일을 생각하면
내사 장작불 힘껏 일으켜야 하는 기다
그래서 시방 저 아궁이에 솟아오르는 것은
불이 아니다,
꿋꿋함인 기다, 내 인생인 기다
어머니, 오래오래 타고 있다
거룩한 작업
박해림
때가 잔뜩 낀 야구모자를 눌러 쓴 노인,
나사를 돌리고 있다
하도 천천히 의자를 뜯어냈으므로
새로운 의자를 조립하고 있다고 생각할 뻔했다
비죽비죽 솟은 머리칼이 귀를 덮고
이따금 땀이 송글송글 돋지 않았다면
가면이 아닌가 생각할 뻔했다
해체되는 것은 의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삐걱대는 관절, 어긋나는 어깻죽지
몸속 어딘가에 숨어버린 나사를 찾기 위해
저렇듯 손놀림이 정교한 건가
수 없이 등을 떠받쳤던 기둥들
노곤함이 차례로 바닥에 눕는다
비닐 끈에 몸통과 다리가 묶인다
하도 정성들였으므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그의 작업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간다
쉬ㅡ 쉬잇!
신발들
박해림
어디가지도 못한,
며칠씩 묵은 신발들이
동 서로 나뉘어져 등 돌리고 있다
늘 길들로 북적이는 현관
바쁜 걸은 쳤던 농수산물 시장 골목길
미용실과 세탁소와 K마트 가는 지름길
동네 야산 흙길 가파른 등허리에서 갈라지던
오솔길이 뒤엉켜 있다
이제는 식구 수가 줄어
신발 개수도 줄었는데
아이들이 벗어놓았던 예전의 그길, 길들…만
여전히 현관에서 서성이고 있다
신발장에도 낯선 길들로 꽉 채워져 있다
비에 젖어 말리고 있는 통가죽 단화
버리는 마음 반 고쳐 신는 마음 반인 브라운 색 샌들도
플라스틱 슬리퍼도
길을 하나씩 꿰차고 있다
매일 신발장에 길을 올리고 내리면서
정작 내 길은 고르지 못하면서
현관 앞
신발을 신기도 전에 길, 길…이 저만치 먼저 가고 있다
물집
박해림
꽃가루 분분한 오후
북북 긁어댄 발등 위에
물집 하나 생겼다.
좀체 터지지 않는 저 팽팽함
머리 가득 기계층을 덮어쓴 소년의 땟국
이슥한 밤 숟가락 장단을 두드려대던 골목길 초입엔
함바집 막노동꾼의 뽕짝꽃이 피었다 지곤 했다
‘금지된 장난’을 뜯던 키타줄과
선홍빛 칸나와 분홍 제라늄과 검붉은 동백의 마당을 버리고
서둘러 떠난 마흔 아홉의 아버지
발등을 문질러댄다
건드릴수록 더 옥죄인 고집
어둠 속의 분분한 꽃가루
이 골목 저 골목이
물집 부푸는 소리로 팽팽하다
분실
박해림
세탁소에 보낼 겨울옷들, 주머니를 뒤집니다 주머니가 이토록 깊은지 처음 알았습니다 개혓바닥처럼 마구 뒤집힌 허기, 몸이 쑥쑥 빠지는 것도 몰랐습니다
나를 맡기면서 정작 내가 없다는 것을,
빈 것들이 바퀴벌레처럼
꾸물꾸물 기어나옵니다
바닥 가득 물음표를 단 얼굴들이
톡톡 튀어오릅니다
알곡이 빠져나간 볏짚처럼
헐렁한 표정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계절마다 꼭꼭 눌러두었던
그 기억들은
아무래도 분실신고를 해야 할 모양입니다
이사 증명서
박해림
방마다 쌓아올린 박스를 풀고
싱크대 찬장에 그릇들을 채워 넣는다
가구들이 조립되고
신발장이 정리되면 모두 끝난 것이다
이삿짐들의 최종 마무리는
신발장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출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방을 싸고 푸는 일이
짐을 싸고 푸는 일이다
일상을 조립하고 해체하는 일이
살던 집을 버리고 새 집을 얻는 일이
묵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얻는 일일까
주민센터를 찾아 새로 부여된 증명서에
빈칸을 메운다
숫자와 한글과 한자를 정성들여 쓴다
떠나온 길, 습관적인 삶의 방식 위에 꼭꼭 눌러
눈에 익지 않은 통 반 지번도 기입한다
닻이 잘 내려지길 소망하면서 방점을 찍는 순간
신발 한 켤레가 대뜸 눈을 흘긴다
아직 이삿짐을 풀지 못한
마무리되지 않은
증명서 하나,
프린트 되다
박해림
한 편의 시를 프린트한다
가지런한 활자들
말끔한 입성이 아직은…봐…줄…만…하다,
프린트 롤에
죄수처럼 끌려나오는 백지자들
새 것으로 교체할 때를 넘긴 것이 화근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다섯이라니!
허리도 펴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내쳐진나
줄을 잘 못선 것도 죄라며 자책의 끈을 놓지 않던
남편의 반성처럼
오랜 시간을 보내고도
시인이 되지 못한
구차한 변명!
자백을 마친 백지가
제 몸에 용서를 새겨 달라고 아우성이다
한 밤 중의 일이다
부끄러움
박해림
씽크대 수도꼭지가
힘주어 아랫도리를 짜내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방광을 열어놓는다
저 부끄러움, 멈출 수 없다
단단히 열려 있다
정신을 놓아버린
뚝뚝 떨어지는 목쉰 함성들
공명의 날들이 데굴데굴 구르며
내 하수관에서 요동치고 있다
채 발라내지 못한 말들
목울대에 걸려 자꾸 고꾸라지고 있다
오래 몸 안에서 삭혀낸 씨앗들
제 중심을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잘난 것들 콸콸 쏟아내던
제 방광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녹슨 말들
바글바글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다
미간眉間 넓은 집
박해림
눈은 정수리에 쌓였다가 미간에서 멈춘다
하루 반 내린 눈은 제 질량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의 허벅지에 이르면 현기증이 날까
두루마리 휴지 낱낱이 바스라뜨린, 삼켜도 허기진 알약 같은 눈 흩뿌릴 때
집은 제 젖가슴을 노출시킬까
굶주린 눈들 번뜩인다
저물면서 눈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다
살에 살이 와 닿는
살 위에 살을 내려놓는 것은 껍질을 벗는 것이다
갑자기 반성문이라도 쓰고 싶은 건지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지우고 싶다
잘못들 자꾸 포개지고
집의 정수리가 미끄러진다 미간이 확장된다
바닥에서 솟구쳐 올라와 붕붕거리며
허벅지를 쏘아대는 흰 벌떼들
집으로 향하는 모든 길들을 끊임없이 쏘아댄다
허벅지가 쓰러진다 현기증이 일어선다
몇 날 며칠, 아슬아슬 외줄타기를 하던 눈, 생의 미간에 오래 머물고 싶다
적멸
박해림
적멸보궁에 가서 적멸을 보았다고
너는 말하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한다
적멸 앞에 서서 적멸을 보려
몇 겹의 산을 돌고 지방도와 국도를 달려간다
길이를 가진 것들의 등줄기를 뛰어넘고
깊이를 가진 협곡을 내달린다
무욕의 마음을 깔아놓은
비포장도로를 걷고 또 걷는다
첩첩 산 속의 적멸이라니!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첩첩의 말들이
빠르게 둘레를 치고 가지를 뻗을 동안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을
탁,
손아귀를 빠져 달아나는 소리라니!
뒤돌아본 산등성이가 꿈틀한다
독설毒舌
박해림
언제부턴가 폭설暴雪이 독설毒舌로 읽혔다
난독증 내지 외이도염外耳道炎일지 모른다고 주위에서 경고했지만
병원엔 가지 않았다
한글 발음엔 유사성이 있지만 한자 뜻이 전혀 달랐으므로
머릿속에 인지된 획수와 상형이 다른 이미지였으므로
개의치 않았다
오독誤讀 내지 난청難聽일 확률보다
혓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들킬까 노심초사
어색한 눈빛과 행동에 더 신경 쓰였다
용솟음치거나(瀑), 역정 내거나(嚗), 답답하거나(懪), 터지거나(爆), 손으로 치거나(㩧), 쇠로 치거나(鑤), 수놓은 깃이거나(襮), 물새이거나(鸔)…
다 폭暴이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습관적으로‘暴’앞에 붙은 군더더기를 무시하고
뻔히 드러날, 마음 들킬까봐
혀를 입 속 중앙에 고정시켜 발음했다
그러니까
서로 벗어나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벗어나려 안간힘을 써대는
난독증 내지 외이도염일지 모르는
띄어 읽기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언어를 폭설暴雪이라 하는데
그것이 끝내 누구의 심장에서
용솟음치고, 역정을 내고, 터뜨리고 부딪치는 것은 폭暴과 매한가지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거 아닌가
폭설暴雪이나 독설毒舌의 미필적 고의가
폭설暴雪이나 독설毒舌의 입 속 중앙에 혀가 고정되긴 마찬가지
폭설暴雪이 독설毒舌로 읽히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오래된 이웃
박해림
익숙한 얼굴들,
근처 카페에서, 국수집에서 수다를 떨고
미용실에서 퍼머를 하고 과월호 잡지를 두적인다
가벼운 목례를 하고
네일아트에서 손톱을 정리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생을 진행하는 시키는 동안
조기축구회가 조직되고
주말 배드민턴 동호회가 결성된다
신설 초∙중∙고등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
교회첨탑도 날마다 쑥숙자란다
그 사이,
빵집과 치킨집과 미용실이, 떡볶이 집이
문을 열고 단기를 반복하도
오늘은 세븐 일레븐, 지에스25, 무료 휴대폰 셔츠 판매장이
건물의 모서리를 접수한다
장애학장학회 구두수선 어르신의 헐렁한 셔츠 뒤
부동산 유리창에 내걸린 아파트 평형별 가격대비표를 기웃대는
신도시 아파트 입주민들의 가자미눈들
경사에 매달릴 때
눈깜짝할새 한 마리 내 어깨를 툭 치며
나, 누구게?
한다
테이블 위에 핀 꽃
박해림
테이블 위에 두 개의 포크가 있다
그 포크들이 양배추를 찍는다,
고깃덩어리를 들어 올린다
혼자 4인용 테이블을 다 차지하고도
다른 테이블을 넘본다
불빛들이 흘리는 난해한 이야기들이
테이블 위에서 꽃을 피운다
화병에 꽂혀 있던 꽃들이 조화라는 것을
이미 나는 알고 있다
치킨 말고,
또 무엇을 찍기 위해 양손을 거머쥔 것인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포크가 가벼워진다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이 포크들
무엇을 찍을 것인지 들어 올릴 것인지
더 가벼워지기 전에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한다.
불빛 깜박이고
웃음 깜박이고,
앉았다 일어선 테이블도 깜박인다
포크가 깜박이는 것을 나는,
방금 보았다
바람이,
소나기를 몰고 온 어둠이,
가볍게
나를 접시 위에 내려놓는 것도
포크, 불빛 속에 내가 꽃으로 피어난다
빈집
박해림
종일 바위가 운다
층층이 얹힌 슬픔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멈출 수 없는 날갯짓인 거다
껍질만 남을 작정인 거다
슬픔을 모두 벗어버린 후
빈집이 되기로 마음먹은 거다
몸속에 고인 물이
모두 눈물이 된다면
눈물에 고여 있는
슬픔을 모두 짜낸다면
저 바위도 빈집이 될 수 있을까
눈물이 구를 때
어디로 가지도 못하는 세상의 작은 집들
이끼를 평생 먹여 살린 바위가 개미떼들에 둘러싸여 있다
헐거운 몸 좀체 움직이지 않는다
꽃들에게 희망을
- 줄2
박해림
물결무늬 애벌레가 길게 몸 기울이던 길 노란 애벌레가 말없이 따르던 길 명동에 애벌레들이 줄을 잇고 있다
누가 불러낸 것도 손짓한 것도 아닌데 날갯짓 하나로 한달음에 이어진 행렬 지하철 버스길 뭉갠 애벌레들 미쁘다
저마다 마음속에 빚 하나쯤 지고 있어 속죄의 마음 하나로 줄을 따라 가고 있다 어깨 짐 덜 수 있다면 땅 끝도 가깝겠다
뛰고 달려온 길 속도에 치여 있을 때 한 번 쯤 쉬어가라고 후한 인심 베풀어 주는 영정 속 환한 웃음에 뼛속까지 시리다
얼얼한 발을 벗고 그 삶에 기대본다 가지 끝 꽃이 피고 애벌레가 나비되듯 싸늘한 아궁이 지펴 온몸 태우고 싶다
봄, 지다
박해림
봄날, 아프게 꽃이 피고 있다
네가 지고 있다
아파, 아파…하며
몸의 일부가 네게서 떠날 때
꽃잎도 그냥 지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저건 눈물이야
저건 슬픔이야
할 때도 네가 피어 있는 동안에는
몰랐다
후루루, 봄이 진다
후루루, 네가 진다
눈 아프게 지는 너를 보며
발등 위에 툭툭 떨어져 내리는
저 끝맺지 못한 이야기
저 그리다 만 이야기
오늘 안간힘 쓰고 견뎌야 한다
봄 지나고 또 봄이 와서
숱한 꽃 떨어져 내릴 테지만
가지 끝
그 떨켜는
오랜 얼룩으로 피어있을 것이다
나무전봇대의 로망
박해림
그저께는 골목 끝이 잘려나갔어요 깜짝 놀란 유리문들이 새 주둥이처럼 짹짹거렸어요 담장에 치즈처럼 늘어뜨린 노란 이불에서 푸른 바늘이 돋았어요 오금 저린 햇살이 뒷걸음질 치다 유리 박힌 담장에 딱 걸린거죠
그 집 늙은 남자의 몸에선 아직도 비닐을 막 뜯은 비누냄새가 나요 하지만 수전증으로 떨리는 면도날에 햇살이 서걱서걱 잘리는 소리가 불안해요 거품 속에서 푸른 바늘이 턱을 찌르고 핏방울 뚝뚝 떨어져요
나는 내 푸른 갓등이 좋았어요 팔뚝에 매달린 아이들이 내 몸에서 고향 냄새를 알아차렸어요 심장 건너 바다 건너 줄을 당겨대던 아이들,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아준다면 아이들은 천사가 될 게 분명했어요 밤늦도록 아이들과 펄쩍펄쩍 뛰며 고무줄놀이를 멈출 수가 없었어요 아아, 수챗물소리 아기 엉덩짝 때리는 소리 양은냄비 부딪는 소리 미닫이 문 열리며 아침 인사하는 소리, 소리
태풍이 몇 번이나 지나갔을까요 그 흔한 의료보험증도 지팡이도 없이 뚝심 하나로 버텨요 아이들은 내 근처에 오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믐밤만 오래 내 몸을 핥고 가요
어제, 내 허리에 다리를 걸치고 영역을 표시한 짐승이 우우 골목을 울었어요 마지막 갓등이, 골목의 남은 등짝이 뜯겨나갔어요 뿌리만 남은 골목의 밑둥이 열리고 수만 마리의 나비 떼가 날아올랐어요 주남저수지에서 날아온 철새 떼 같았어요
돋보기를 끼지 않은 탓일까요 날개를 단 아이들이 내 몸에서 풀냄새를 맡고 있어요 처음 이곳에 올 때처럼 몸이 근질거려요 이제 감춰두었던 신발을 신을까봐요
잠을 밟다
박해림
봄 햇살이 그녀의 잠을 비추면
금방이라도 기지개 켜며 일어날 것 같다
후루 비쭉새
잠을 콕콕 쪼아본다
돌아눕는 기척조차 없다
요지부동이다
한 때, 고 작은 몸으로
부엌에서 방으로
골목에서 신작로로
힘차게 노를 저었었다
폐선이 되었을 때
포구에 닿고 싶어서 한다는 것을
오래 잠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그녀의 귓바퀴를 뱅뱅 돌며
햇살을 쪼아대는 후루 비쭉새
그녀의 오랜 잠을
꾹꾹
밟고 있다
마스크
박해림
콧물, 제채기가 쉼 없이 흐르고 터지면
마스크가 제 격이다
내 체질이 알려지라는 걸 믿기 어려워
손목에 알러지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귀를 건드리지 마세요
코를 만지지 마세요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물을 자주 마셔요
충분한 휴식을 가지세요
무엇을 말고, 무억을 하라는 모호한 처방에
알 수 없는 알약을 삼키며
콧물과 재채기와 귀의 가려움을 참아야 했다
저 지독한 속임수의
비알러지 체질의 알라지 현상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인가
질문은 있고 답은 없는 생의 오후
약국에서는 마스크 한 통을 산다
.♣.
=================
■ 시인의 말
세상의 그 수많은 바닥은
어디서 생겨난 걸까
융기했을까,
누군가 만들어낸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저 혼자 생성했을까
길을 걷다가 분득 바닥을 내려다 본다.
누군가의 탄탄한 바닥
누군가의 울퉁불퉁한 바닥
또 누군가의 한심한 바닥
바닥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음을 본다
후드득 빗방울 듣는 소리
바닥이 흥건히 젖는다
둥글게 구름다
.♣.
=============== == = == ===============
박해림 詩集 [※바닥경전※]
[ 에스프리 ] -
둥근 것을 꿈꾸기, 그리고 버리고 채우기
박해림(시인)
문학을 한다는 것은 몽상을 꿈꾸는 것인가, 가장 속엣 것을 잘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친구조차 이따금 나를 몽상의 눈으로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정말 그럴까, 거울 앞에 서서 요리조리 나를 돌려보기도 한다. 겉으로는 무슨 차이가 있으랴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대화에서 알게 모르게 타자와 서로 어긋나는 것을 가끔 느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 친구는 유독 내게 거리를 둔다. 이럴 때 난 별로 할 말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서로 조금씩 벌어진 차이로 결국 서로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간극이 생기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은 여느 분야보다 특별한 경우가 된다. 개개인 간의 간극을 만들기보다 이어주는 역할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서로 전혀 다른 삶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의 경계를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순간에 봇물 터지듯 영혼의 합일까지 일어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의 역할과 비중이 어떠한가는 증명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현실에서 문학을 그다지 말하고 있지 않지만 마음속 내재한 세계엔 늘 문학이라는 세계가 함께하고 있다. 어떤 기회가 오거나 상황과 순간이 주어지면 자연발생적으로 정서가 감응하여 스스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문학이 가진 속성이 인간 본성에 가장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시를 쓴지 20년이 되었다. 곰곰 생각해보면 내 시에 대해서 제대로 들여다보거나 확신을 갖거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는 늘 생활의 중심에서 나를 움직였고 이끌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조금씩 앞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닐 때가 더 많았다.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산문적인 시간과 운문적인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자주 끼어들었다. 그 둘을 적절히 잘 운용한다면 훌륭할 것이지만 그러지 못해 너무 산문적이거나 너무 운문적이어서 나의 의식은 자주 무장해제 당했다. 나를 위한 독서의 시간조차 결국 나를 해체하거나 무용지물의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도구가 되었던 적이 많았다. 내가 만든 올무에 스스로 갇힌 꼴이다. 이럴 때 나는 시선을 치열한 생존의 진열장인 삶의 변두리로 옮기게 된다.
햇살이 비스듬한 저녁
전철역 좌판할머니 등이 둥글다
검정비닐봉지를 건네는 손등
관절 꺾인 무르팍도 둥글다
나물 봉지를 받아든 손
덩달아 둥글다
골목길, 이끼 낀 담장, 털 곤두세운 고양이의 발톱, 낡은 목제의자에 몸을 내맡긴 노인, 맨드라미, 분꽃, 제라늄, 세발자전거…
오래전부터 둥글다
한 줄기 쏟아지는 소나기
그 빗줄기 속을 뛰어가는 배달꾼의 뒷모습
일제히 쳐다보는 눈길들
모두 둥글다
- 졸시「둥글다」
위의 시는 잡지에 발표해 놓고 다시 수정 작업을 거쳤다. 발표시는 가급적 고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갑자기 고치고 싶었다. 시를 다시 보는 순간 정작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어 잠깐 덮어놓았다가 다시 여는 순간 그래, 이 말이었던 거야하며 과감히 리모델링 했다. 길이도 한결 짧아지고 호흡도 순해졌다. 땅 위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경외심은 생명 사랑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지하철을 타거나 내릴 때, 버스 승강장에서나 심지어 대형 마트 앞에서 자주 맞닥뜨리는 좌판의 삶을 만날 때 왜 나는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그 앞을 어정거릴까. 뭘 딱히 살 것도 아니면서 한눈을 팔게 된다. 오늘 좌판에 늘어놓은 것이 또 어떤 것들인가. 그러나 정작 이들을 향한 내 시선은 물건에 있지 않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저녁 무렵, 마디가 구부러진 손, 그 위에 자글자글 퍼지던 햇살을 보게 된다. 지폐가 오고 가고, 검정 봉지가 오고 가는 순간 그 위에 놓인 향기를 맡게 된다. 일부러 의식한 것도 아닌다. 맞닥뜨린 순간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둥근 것에 발이 걸리는 것이다.
일상은 자주 나를 곤경에 밀어 넣는다. 느긋하거나 종종 걸음치거나 그도 아니면 게으름의 연속이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정해놓고 해야 할 것들이 대책 없이 뒤로 밀려나는 일들을 눈앞에서 보고도 속수무책인 무대책의 날들은 나를 힘들게 한다. 짜인 일들을 잘 하다가도 한 번 어긋나면 반나절이면 해치울 수 있는 일을 사나흘 씩 전혀 딴 곳에 신경을 쓴다. 뭐, 이런 일이야 나한테만 있는 일은 아닐 터이다. 문제는 바로 이 핑계를 댈 때 습관이다.
과일을 받쳐 든 소쿠리가 두 다리로 서 있다
다리 세 개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도 모르고
발 끝에 힘을 주고 있다
저 직립,
빈곳도 팽팽할 수 있다니
온몸으로 기어가는
시장 바닥의 저 사내
바닥과 구분되지 않는 직립의 생을 가졌다
허리를 굽혀 겸손히 떼어내는 발이
바닥을 밀어내고 또 끌어올릴 때
비어 있는 다리의 힘으로도
추락하는 내기 버틸 수 있는 건인지
소쿠리 한쪽이 비워지면서
텅 빈 모서리가 공중을 번쩍 들어올린다
생의 한쪽이 좌르르 쏟아지고 있다
-졸시「발」
20년 쯤 된 소쿠리가 어느 날 다리 하나가 달아났다. 감자와 고구마도 찌고, 양배추도 찌고 꽈리고추를 찹쌀가루에 버무려 쪄내던 것인데 아쉽게 되었다. 버리기엔 아주 멀쩡한 두 다리와 몸체가 ‘제발 나를 머리지 말아주세요’ 간청했다. 그동안 정들었던 것과 나누었던 시간들을 생각하며 한참 싱크대 한 쪽에 밀어두었는데 어느 날, 문득 눈길이 갔다. 꼿꼿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쿠리를 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혹 제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을 모르는 건 아닐까. 알면서도 능청을 떨고 있는 것은 또 아닐까. 저 직립의 세계를 바치고 있던 것은 혹 강한 생명의지 때문은 아닐까. 하여 이따금 재래시장에 가면서 만나게 되는 고무다리를 가진 배밀이 만물장수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의 직립 역시 다리 한 쪽을 잃으면서부터 시작될 것이리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갈 때 그들의 삶은 직립일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 툭 건드리게 되면 어김없이 좌르르 쏟아버리게 되리라. 땅에 떨어져 내리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생명일 것이다. 생명의 진정성이란 어쩌면 다리 한 쪽보다 잃어버린 또 다른 그 무엇은 아닐까.
일흔 여섯 할머니 나무꾼 부엌 아궁이 앞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불씨를 일으켜 나무장작을 던져 넣으며
등짐 져 해 놓은 나무 다 때고 죽을란가
다 못 때고 죽을란가
혼잣말이듯 아궁이 들으란 듯 중얼거린다
가마솥 한 가득 하얀 쌀밥 지어서 첫 밥그릇을 조왕신께
두 번째, 세 번째 밥그릇은 객지 나간 자식 몫으로
물 가득 담은 오지색 함지박에 차례로 놓는다
항상 배고플 일 없어야 할낀디
장작을 휘저어 불을 일으키면서
어깨에 힘을 준다
봉제공장 밤낮없이 돌리던 큰아들 배곯을 일을 생각하면
내사 장작불 힘껏 일으켜야 하는 기다
그래서 시방 저 아궁에 솟아오르는 것은
불이 아니다
꿋꿋함인기다, 내 인생인기다
어머니! 오래오래 타고 있다
-졸시「장작의 힘」
요즘은 다큐멘터리 전성시대이다. 지상파 TV에서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여 허구로 짜인 것들의 재미도 꽤 쏠쏠하지만 치밀하게 준비된 리얼 버라이어티가 주는 감흥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국의 부엌’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각 지방마다 각기 특색을 가진 전통적 부엌이 소개될 때 장작불을 지핀 아궁이에 얹힌 무쇠 가마솥을 보았다. 오래 전 내 기억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그 가마솥이었다. 연탄이 들어오기 전의 도시의 가정에서도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했는데 식구가 많은 우리집은 늘 한 가득 밥을 해야 했다. 그 많은 밥을 누가 다 먹었는지 해도 해도 자꾸 바닥이 드러났고 시간은 흘러 어느 날 가마솥은 연탄에 밀려 사라지게 되었다.
화면에 비친 그 가마솥 역시 조만간에 그런 처지에 놓일 것이다. 나무를 등짐 가득 걸머진 할머니 나무꾼이 장작을 부엌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하나씩 한쪽 벽에 쌓아올리면서 노래인 듯 혼잣말인 듯 중얼중얼 거린다. 나무를 할 때마다 장작에 걸쳐놓은 가마솥을 생각하고 가마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 쌀밥을 생각한다. 그러면 벌떡 힘이 솟는다는 것이다.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 배곯을까 생각하면 잠시도 밥을 거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내 귀에는 그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다 시詩였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언어의 생명은 이런 것이다. ‘어머니’ 만이 갖는 생명의 생생한 현장은 전율을 일으켰다.
화분의 잎과 가지들이 한쪽으로 휘어있다
물을 휘저어 몸을 일으켰지만
몇 번 풀썩이다. 그대로 주저앉는다
무엇이 이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았을까
뚫어져라 응시한다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는 군인처럼
압구정동 쇼윈도의 마네킹, 그 도톰한 입술처럼
늦도록 가장을 기다리는 백열등 아래의 중년 아내
붉은 벽돌 담장 끝 반쯤 몸을 밀어올린 채송화
철거 직전의 세운상가 계단 중간 쯤
낡고 해진 시간의 발밑
기울어진 천막지붕도
뜨거운 햇볕아래 한쪽으로 휘어있다
한쪽으로 휘었다는 건 끝까지 한 마음이라는 것
벌어진 틈조차 휘어버린
출렁이는 땅 위
절실한 것들은 모두 한 쪽으로 휘어 있다는 것
나를, 식물에게서 읽는다
-졸시「한쪽」
잘 키운 식물들이 어느 날 시름시름 앓거나 죽어버리면 낭패다. 주인의 성의를 봐서라도 잘 자라주어야 한다. 식물을 좋아하는 것만큼 챙겨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혹 반성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내 곁에서 잘 살고 있다. 이들은 햇볕은 향해 항상 몸이 구부러져 있는데 가끔 골고루 햇볕을 쐬기 위해 돌려세우기도 하였다. 그런데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이 현상이 어느 순간 내게 낯설게 다가왔다. 매일 반복되는 휘어짐과 구부러짐이 전혀 당연하지 않는 것이었다. 몸을 돌렸으되 빛을 향해 다시 휘어지는 것은 어떤 과학적 원리의 작용 때문이겠지만 내겐 전혀 다른 각도로 인지되었다. 한쪽의 의미와 기울어짐의 의미는 상통하는 것이다. 생의 절실함이야 수도 없이 많은 이유를 달고 오늘도 제자리를 사수하고 있겠지만 정작 내가 들어갈 틈이 없었다. 사랑과 관심 그리고 스킨십을 해주어도 모르는 척 오직 빛만을 향한 이들의 모습은 내가 절실하게 갈구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었다. 진공 상태의, 숨 막히는 삶의 현장은 잠깐의 여유마저 긴장으로 꽉 조여져 있을 것이다. ‘한쪽으로 휘었다는 건 끝까지 한 마음이라는 것/벌어질 틈조차 휘어버린/출렁이는 땅 위/절실한 것들은 모두 한쪽으로 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오직 한 방향으로 휘어버린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절실한 삶을 갈구하는 저 식물들의 함성을 들었다.
때가 잔뜩 낀 야구모자를 눌러 쓴 노인
나사를 돌리고 있다
하도 천천히 의자를 뜯어냈으므로
새로운 의지를 조립하고 있다고 생각할 뻔 했다
비죽비죽 솟은 머리칼이 귀를 덮고
이따금 땀이 송글송글 돋지 않았다면
가면이 아닌가 생각할 뻔 했다
해체되는 것은 의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삐걱되는 관절, 어긋나는 어깻죽지
몸속 어딘가에 숨어버린 나사를 찾기 위해
저렇듯 손놀림이 정교한 건가
수 없이 등을 떠받쳤던 기둥들
노곤함이 차례로 바닥에 눕는다
비닐 끈에 몸통과 다리가 묶인다
하도 정성들였으므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그의 작업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고 간다
쉿, 쉬잇!
-졸시「거룩한 작업」
산다는 일은 다 거룩한 작업이다. 하나 유독 돋보이는 경우도 있다. 동숭동 대학로 근처에서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어느 볕 좋은 가을 날, 차가 끝도 없이 밀리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사방을 둘러볼 기회는 이때였다. 앞만 보고 달릴 때는 주어지지 않던 달콤한 이 여유는 주변의 것에 눈을 돌리게 한다. 보도블록을 오가는 사람들의 현란한 몸짓들, 그 사이에 펄럭이는 오색 간판들, 간간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정지한 사람들과 사물들의 겹침은 참 묘했다. 끊임없이 움직여야 살아가는 이유가 될 땅 위의 것들은 무심한 듯 제 존재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아, 그때 뭔가를 보았다. 보도블록 가장자리에 서서, 찻길 가장자리에 무언가를 떼어놓고 옮기는 한 사내를 보았다. 빠르게 또는 천천히 오가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그 리듬의 흐름에서 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든 한 노인을 본 것이다. 그 동작이 하도 느려서 하마터면 사람이 아니고 근처 술집의 간판인 줄 알았다. 사람들 눈길을 끌기 위해 남루하고 이상야릇한 복장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떠 보았다.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오는데도 아무런 물러섬도 없는 이 노인의 영역은 그 어떤 강한 자장이 있어 보였다. 빠른 걸음의 사람들이 그 부근에서 한 발 옆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었는데 간발의 공간엔 고요가 꽉 차 있었다.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다. 한쪽 리어카에 잔뜩 쌓아올린 폐휴지 위에 의자 다리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아느냐고 지나치는 사람들의 외마디가 들리기라도 할까. 때가 잔뜩 전, 붉은 알파벳이 이마를 누른 야구모자의 그 노인은 얼굴 표정이 무감각해 있었다. 표정 없는 무감각의 얼굴이, 사물로 읽힐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낡은 의자를 하나하나 해체하고 떼어내는 작업이 매우 진지해보였고, 온갖 정성으로 거룩해 보이기까지 했다. 주말 오후, 차는 꼼짝도 못하고 제 자리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노인이 가진 한 줌의 여유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이었다.
엎드려야 보이는
온전히 몸을 굽혀야 판독이 가능한 전典이 있다
서 있는 사람의 눈에 읽힌 적 없는
오랜 기억을 갖고 있다
묵언의 수행자도, 맨발의 현자도 온전히 엎드려야만
겨우 몇 글자를 볼 뿐이다
어느 높은 빌딩에서 최첨단 확대경을 들이대고
글자를 헤아리려 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일찍이 도구적 인간의 탄생 이후
밤새 달려야만 수평선을 볼 수 있다고 믿게 되면서
바닥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졌던 것이다
온전히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긋불긋 방언을 새겼던 것이다
빗물이 들이치고 폭풍이 몰아치면서
웅덩이가 패었고 글자들이 합해졌거나 떨어져나가
텍스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생을 대부분 엎드려 산 사람은
상형문자가 되어버린 이 경전을
판독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손끝으로 감아올리는 경전經典의 구와 절에
바닥이 힘껏 이빨을 박고 있어 애를 먹을 뿐이라는 것이다
-졸시「바닥경전」
사람은 제 눈높이의 것만 보고 세상을 판독한다. 더 높은 데에 있는 것을 본다하더라도 온전히 보기란 매우 힘들다. 눈높이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까치발을 하거나 의자를 놓아 그 위에 설 수 있겠지만 진정한 제 높이가 아니다. 마음의 높이는 더욱 그렇다. 속일 수가 없다. 과용은 금물인데 누구나 자주 이것을 잊어버린다. 제 위에도 제 아래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세상으로 난 길을 걷고 있는데 그 위치를 제 마음대로 바꾸어버리거나 그러고 싶은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혹 부족하여 그런 것이라면 채우면 될 일이나 착각이라면 조금 부족해진다. 고집과 아집이 든든하게 뒤를 받치고 있어서 제 부족함을 채우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넘치면 비우고, 부족하면 채우는 삶이란 사실 말이 쉽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늘 깨달았나 싶은데 내일이면 미망에 빠져든 나를 발견하게 일쑤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제 발밑의 삶을 내려다보고 또 봐야 하지 않겠는가. 위의 시는 사막 한 가운데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에게, 내가 누구인가 알고 싶어 썼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뭔가 알 듯해서 직진하다가 표지판을 잃어버려 간혹 길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표지판을 오독하거나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는 나를 확인한다.
재래시장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 심부름을 다녀오던 곳, 늘 사람이 북적이는 곳, 생선가게를 지나 푸성귀로 넘쳐나던 곳,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고 배가 촐촐해지면 따끈한 멸치국물에 후루루 국수를 말아먹던 곳, 호떡과 군고구마와 통닭집이 있었고, 단팥찐빵과 꽈배기가 있던 곳이었다. 시장 부근엔 늘 약국과 신발 수선집과 세탁소가 있었고, 목욕탕이 있었다. 양장점도 있었고, 양복점도, 만두집도 있었고, 신발가게와 신상품을 들여놓은 기성복집이 있었다. 그 사이사이 골목이 있어서 앞집 옆집 수챗물 쏟아지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기도 했다. 바닥이 제 삶을 떠받쳐주던 온기의 날들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영미식 자본주의 논리가 판을 치면서 위로만 올라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면서 바닥은 사람들에게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시대의 조류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엎드리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 삶이 있다. 세상 그 어떤 시대가 도래해도 절대 바뀌지 않을 삶의 온기는 저 바닥에 있다. 상형문자처럼 단단히 새겨져 있다. 몸을 구부려야 겨우 판독할 수 있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 주변의 텍스트를 동원하고 자문을 구해야 한다. 내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과 권력과 물질만으로는 절대 판독되지 않는다. 몸만 구부리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기하학이나 미적분처럼 어렵지도 않다.
그 계단 아래 한낮에도
해 기우는 그 지붕이 살고 있다
칡덩쿨처럼 허공에 발을 뻗는 저 촉수
낮은 키 때문에 자주 비를 들이고 내치기도 했을
엇 포갠 하늘만큼 날아오를 태세다
유리 박힌 블록 담장, 처마에 걸린 양철홈통
엉덩이 들썩이게
개숫물도 콸콸 쏟아낸다
세상은 너무 환해서 높고
다 낮아질 수 없어 아늑한 것을
아직도 온기를 증언하는 도심의 산 일 번지
카키색 천막지기 여린 바람에도 펄럭이고
그 내력까지 품는다
그 지붕들
올 겨울 북서풍을 견딜까
슬레이트 깨진 난간 끝에 잘게 베어진 햇살만
종일 통통통 지붕 위를 뛰어다니고
쇠창살 난간에 놓인 맨드라미, 다알리아, 봉숭아
재개발이라는 희망으로 한창 성업 중이다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
한 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해 기우는 이 한낮!
-졸시「지붕들」
청계천 세운상가 계단을 오르다가 만난 풍경이다. 몇 해 전이니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거의 비어가는 상가 건물의 한 쪽 부분의 모습은 지금도 서울 곳곳에 많이 있다. 삶의 높이를 지붕으로만 판독할 수 없지만 카메라에 담으면서 특별히 눈에 들어온 것은 지붕마다 화분을 올려다 놓았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좁은 마당에도, 창틀에도 어김없이 크고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영화 <레옹>에서도 살인청부업자 레옹이 이리저리 쫓기면서도 작은 화분을 버리지 못했다. 겹겹이 쌓인 지붕들 사이 화분에서 레옹을 보았던 것일까. 식물을 매우 좋아한 아버지 덕분에 유년의 마당엔 늘 꽃으로 가득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일까. 맨드라미, 제라늄, 다알리아, 과꽃, 수국, 봉숭아, 샐비어, 분꽃, 나팔꽃, 칸나는 해마다 피고 지고 마당을 지켰다. 아버지 손길은 늘 꽃을 만지고 안부를 물으며 햇빛을 받을 키순서 따라 앞에 놓을 것과 뒤에 놓을 것만 확인했지 더 이상도 없었다. 담장을 타고 기어오르던 남보라 나팔꽃은 얼마나 독하게 색이 짙던지 볼 때마다 예쁘다는 생각보다 진저리쳐지던 때도 있었다. 그 기억 속 잘 다듬어지고 정리된 꽃보다 제 있는 모습을 당당히 있는 그대로 보이고 싶었던 꽃들이 기특해서 일까.
아직은 안정된 시멘트 콘크리트가 아닌 가엾은 지붕들이 가쁜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일까. 그 지붕 아래 살고 있는 사람과 그 사람들이 품고 있는 희망이 제발 재개발 논리에 모든 것을 걸지 말았으면 하는 턱도 없는 소망 탓일까. 자산의 가치를 소망으로만 가치판단한다는 것은 우스운 계산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어떤 논리정연하고 해박한 설명보다 세상 모든 것을 쭉쭉 펴고 반듯하게 다듬어야 직성이 풀리는 미래형도시 개발은 영 아니다. 피곤한 마음을, 몸을 펴고 쉬고, 눕힐 수 있는 공간은 곡선과 곡선이 갖는 둥근 틈새, 문과 문이 갖는 공간의 매끄럽지 못한 틈새이며, 되도록 직각을 피하고 정면을 피하면서 사람의 다면적 모습을 다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짧은 것과 긴 것, 작은 것과 큰 것의 교차가 빚어내는 그런 높낮이와 넓이를 가진 편안한 주거공간이어야 한다. 오늘 날 우리의 삶은 크고 편안한 공간이 주는 소외는 반듯하고 높은 것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가져왔다. 이집트의 피라미돈과 신전도 외양 외 실내나 주거의 공간은 다 구불하거나, 둥근 것의 틈새로 연결되어 있다. 산자나 죽은 자나 모두 둥근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낮으며 적당히 좁고 거리 또한 멀지 않다. 오래 전부터 서로의 간격을 좁히며 살아온 것인데 왜 점점 퍼지고 멀어지고 높아지는 것인가.
봄날, 밭을 갈아엎습니다
허리를 한껏 구부리며 삽과 곡괭이로
땅의 가슴팍을 열어젖힙니다
고추며, 상추며 싱싱한 푸성귀를 따 먹겠다는 욕심으로
친구에게 무상 임대받은 것입니다
스무 평 남짓이라 겁도 없이 호미를 들이대고
삽질로 돌을 골라냅니다
봄날, 햇빛늘 쨍쨍하였고 바람은 알맞게 불어주었지만
이랑을 만들기는커녕 내 몸은 금세 땀범벅입니다
아직 10분의 1도 갈지 못했는데
돌들이, 잡풀이, 딱딱한 토층이 영 제 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보입니다
내 손은 더디기만 합니다
얼마나 많은 돌들이 땅속에 제 발걸음을 묶어두었는지
얼마나 많은 흙의 고집이 잡초에 죽기살기로 매달려 있는지
뽑아내고, 움켜쥐고, 긁어낸다고 흙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습니다
공짜 아닙니까 거저 받았는데 땀 좀 흘린다고 허리 좀 아프다고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땅에 코를 갖다 댑니다
귀도 대어 봅니다
말도 걸어봅니다
땅속엔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꿈틀거리는 것이었습니다
흙이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공짜 하나도 없습니다
-졸시「경작」
위의 시는 성서聖書를 주제로 써 본 것이다. 집 부근 텃밭을 경작하면서 돌을 고르고 땅을 고르는 작업을 하면서 성서를 읽는 과정과 실천적 덕목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마음 먹고 덤벼든다고 다 내 것이 되지도 않는다. 무수히 땀과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귀에 들어온 것들 다 빠져 나가버리고 만다. 부단한 몸놀림과 노력이 깃든 일에 풍성한 기쁨을 얻기 마련이다. 지속적일 때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하지만 노력이 여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노릇이다. 살면서 이 핑계 저 핑계 뒤에 숨느라 바쁠 것이며, 꾀가 생겨 자꾸 변명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오래 성서를 공부했어도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이 경작하지 않아 잡풀이 돋은 묵정밭과 뭐가 다를까 싶은 것이다. 이 만큼 내 땅이고 싶으면 이 만큼보다 더 많은 넓이를 개간하고 작물의 씨앗을 심고 물을 뿌리며 잡풀을 솎아내는 수고로움이 병행되어야 한다. 때로는 농약을 쳐주어야 하고 필요하면 장마와 한발에도 작물을 보호하고 쓰러지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한다. 한 치 앞에 기다리고 있는 어리석음은 벌레를 보고도 어찌하지 못하거나 잡풀을 보고도 뽑지 못하고 엉뚱한 핑계를 대는 일이다. 바로 그러한 모습을 스스로에게 발견했다는 것은 아마 큰 수확일 것이다. 문제는 아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정말 걱정이 된다.
‘네가 앉은 가시방석이 알고 보면 꽃자리다’라든가, ‘우물을 판 사람의 은공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내 속에서 절대씨앗으로 자라게 하고 싶은 열망은 오늘도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이 얼마나 좋은 꿈인가.
종당엔 나를 탈주하면서 궁극에 가 닿는 그 곳은 결단코 둥근 곳이어야 하며, 빼앗아 채우기를 꿈꾸기보다 과감히 버리기를 먼저 해야 한다. 하하, 근데 그게 잘 될까?.★.
.♣.
=================
◆ 표사의 글 ◆
사소한 생명체의 사소하고 미세한 떨림까지 시상으로 포착해낸 박해림 시인의 작품은 자칫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것들이 지닌 독자적인 존재다움과 존엄함을 증명하려 애썼다. 이는 시인 자신의 삶에서의 성장통과 유년기의 가족얘기로서, 시인으로서 자아정체성을 발견하고 운명적인 시인으로서 성장과정 즉 자아확림과정이었다. 따라서 시인자신의 상처 치유를 사소한 사물의 사소한 상처에 연민하는 예리한 시적 감각으로 시도하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박해림 시인의 작품 세계가 시적 감동이라는 보편성에 충분하다고 본다. 나머지 그의 작품만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만들어 가는 노력 역시, 자신을 사소한 사물과 동일시한 예리한 감각으로 확대 확장되어 더 큰 시세계를 구축하고, 동시에 모국어를 선택하고 구사하는 박해림 시인만의 표현방식에서도 더욱 다채롭고 다양하게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새 시집상재를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왠지 이 시인의 미래에 큰 기대를 갖게 되어 더욱 기쁘다.
- 유안진(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박해림 시인의 시를 대하면서 사물과도 꿈을 구는구나 하는 착각에 빠진다. 꿈이란 현실에서 잃어버린 그 어떤 것, 그것이 있음으로 우리의 미흡한 현실이 완전해질 수 있는, 어떤 것의 이름일 터이다. 그래서 인간은 현실과 더불어 꿈이 있음으로 한 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박해림 시인은 그 꿈을 인간 아닌 사물 - 물질에게서 본다. 사물들은 왜 꿈을 꾸는가. 아마도 독자들은 그 해답을 이 시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이 세계와의 교감을 무구한 상상력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눈빛이 맑기만 하다.
- 오세영(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살아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살아 있기에 나는 움직이고, 움직임으로써 세계는 흔들린다. 우주 속의 작은 혹성인 지구를 흔들리게 한다. 근년에 나온 시집 중에 이렇게 많은 동사를 사용한 시집이 있었던가? 시인은 자판기를 부단히 두드려 시를 생산하는데, 움직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들에 대한 세심한 관찰기록이 한 권의 시집이 되었다. 온몸으로 기어가는 시장바닥의 저 사내, 움직이니까 먹고 사는 것이다. 때가 잔뜩 낀 야구모자를 눌러 쓴 노인, 나사를 돌리고 있다. 나사를 돌리니 한참 더 살겠다. 큰아들은 봉제공장을 밤낮없이 돌리고 일흔여섯 어머니는 장작을 휘저어 불을 일으키면서 어깨에 힘을 준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곤충이든 인간이등 살아 있는 것들은 제각각 움직인다. 움직이는 온갖 것들의 모습을 살펴보는 시인의 눈빛이 날카롭다. 서정시를 자연과 나와의 거리 두기로 보았던 예전 시인들과 달리 박해림은 자연과 사회 한복판에 서서 움직이는 것들을 살펴본다. 그것들을 엿본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거룩한 작업을 하고 있다. 시인은 생명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 모양새를 정밀화라도 그리듯이 꼼꼼하게 그린다. 형용사는 가급적 줄이고 동사 중심으로 써서 그런지 이번 시집은 아주 힘차다.
- 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
=================
▶ 박해림 시인∥
∙ 부산출생.
∙ 1996년 <시와시학> 으로 문단 데뷔.
∙ 1999년 월간문학 동시 당선.
∙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 2001년 제7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 2003년 수주변영로문학상 우수상.
∙ 2008년 이영도시조문학상신인상 수상.
∙ 2010년 청마문학상신인상 수상.
∙ 200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개인창작지원금 수혜(시조).
∙ 2003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개인창작지원금 수혜(시).
∙ 2003년 경기문화재단 개인창작지원금 수혜(동시).
∙ 2010년 서울문화재단 개인창작지원금 수혜(시).
∙ 시집『실밥을 뜯으며』『고요, 혹은 떨림』
∙ 동시집『간지럼 타는 배』
∙ 시조집『눈 녹는 마른 숲에』『저물 무렵의 詩』
∙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한국어문학과 졸업(문학석사).
∙ 아주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 논문집 「황동규 시 연구」「일제강정기 저항시의 주체 연구」
∙현재 : 아주대학교, 호서대학교에 출강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