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대한 우리나라 첫 소설이 정신과 의사로부터 나왔다. 소설《우남의 꿈》을 저술한 신용구 안양 해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초대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의 일대기를 한 편의 영화처럼 그린 소설이 최근 출간되었다. 비봉출판사에서 펴낸 《우남의 꿈》이 그것.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우남이 걸어왔던 험난했던 시대가 대한민국의 풍요로운 모습과 겹치면서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20대 청년이던 우남 이승만은 70대 노인이 될 때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를 떠돌았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식민 국가가 자유와 인권,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부강한 자주독립국이 되기를 원했다. 이런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숨을 거두는 날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누려온 한미(韓美)동맹이라는 굳건한 안보환경과 경제성장, 번영의 토대는 시대를 앞선 이승만의 선견지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자신이 세운 나라 대한민국에서 철저하게 왜곡되고 지워져 있다. 심지어 국사 교과서 집필을 장악한 소위 좌파 사학자들은 이승만에게 남북 분단의 책임까지 뒤집어씌우며, 그가 세운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부정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우남의 꿈》 은 이승만에 대한 첫 번째 소설이다. 소설은 우남 이승만이 걸어온 생애를 나열식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 독자들이 그의 삶을 같이 체험하며 느낄 수 있도록 현실감 있게 구성했다.
이 책의 저자 신용구씨는 정신과 의사다. 그는 이 책 이전에 부조리한 조선 사회 개혁에 나선 율곡 이이의 혁명가 장편소설 《격몽》, 박정희의 내면심리를 그린 심리 성장소설 《나, 박정희》, 애증이 교차하는 한일간의 용서와 화해를 다룬 안중근 소설 《대의》 등 굵직한 소재를 통해 우리의 내면 문제를 역사적으로 더듬어 온 선이 굵은 작가로 그의 글은 인간의 내면 심리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 자신조차 장님 코끼리 만지듯 했으니…"
신용구 원장은 “오늘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왜곡과 편견이 심한 것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이번 소설이 이승만을 알고 싶은 독자들의 갈증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기도 안양에서 정신건강의학과를 운영하고 있는 신용구 원장을 직접 만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먼저 신용구 원장은 이승만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 계기부터 설명했다
“이승만 관련 소설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쓰게 되었습니다. 수년 전 친구의 소개로 어느 유명한 정치인을 사석(私席)에서 만났는데, 평소 무척 존경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은 이승만을 가장 존경한다’고 하더군요. 공사석을 막론하고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존경한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다닌다는 말에 저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러면 표가 떨어질 텐데요’하고 말씀드리자 그분은 ‘그것 때문에 표가 떨어진다면 어쩔 수 없지요. 옳은 건 옳은 것 아닌가요’하더군요.”
신 원장은 “아무리 그래도 정치를 하려면 입에 침도 바르고 적당히 둘러대면서 사람들의 귀를 간질이는 거짓말도 해야 하는데 당당하게 말하는 그분의 말을 듣고 느끼는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이승만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고 자료 수집을 해나갔다고 한다.
“이승만에 대한 자료를 접하면서 나 자신조차 그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글 좀 쓰고 역사와 사회문제에 제법 관심이 있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던 제가 이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저는 스스로 이승만에 대해 소경 코끼리 만지듯 하고 있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승만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그의 인생을 한 땀 한 땀 바늘로 옷을 짓듯이 차분히 적어 내려간 것이 바로 이 소설입니다.”
-현재 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뜨겁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사실 저도 국정화를 찬성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사고의 유연성을 저해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 국사 교과서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사춘기의 학생들은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떨어지고 마음만 뜨겁습니다.
이런 학생들에게 편향된 시각의 왜곡된 지식이 여과 없이 주입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학생들의 가치관 성장에 악영향을 끼칠 게 뻔합니다. 당연히 세상은 병들 겁니다. 근거 없는 증오가 판을 치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의미 없는 논쟁만 다시 일삼을 겁니다.
제가 국사 교과서 논쟁을 염두에 두고 이승만 관련 소설을 쓴 것은 아니지만, 이런 논쟁이 벌어졌을 때 마침 책이 나왔으니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본 모습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916년 12월 25일 여학생 기숙사 건립을 위한 땅 고르기 작업에 직접 나선 이승만(오른쪽에서 넷째)과 교포 유지들. /기파랑 제공.
이승만에 대한 올바른 정보 제공을 차단한 좌파 역사학자들
-국사 교과서 문제는 결국 ‘대한민국을 어떻게 보느냐’ 혹은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입니다. 소위 좌파 세력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집요하게 헐뜯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들이 이승만을 비난하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친일파 청산 문제, 남북 분단에 책임, 장기간의 독재로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막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많은 젊은이가 이승만을 단순히 타락한 독재자라거나 혹은 권력에 눈이 먼 반민족적인 친일파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승만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 분명히 비난받을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친일파에 대한 정치적인 판단에는 합당하다고 할 순 없어도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분단의 책임을 자꾸 이승만에게 뒤집어씌우는데, 북한은 해방 이듬해에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설치해 전격적으로 토지개혁까지 실시했어요. 북조선 인민 위원회가 이미 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스탈린의 지시로 북한에는 헌법까지 만들어놓은 상태였고요.”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까지 설명하신 대로 국사를 배웠는데요.
“분단의 원인에 대해 좀 더 설명드리자면, 미국은 남한을 버릴 카드로 생각했고, 소련은 북한을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했어요. 조선을 둘러싼 두 나라의 생각이 전혀 달랐습니다. 소련은 미국과의 갈등으로 지중해 지역 진출에 실패하면서 대신 눈길을 동북아시아로 돌려 북한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정권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좌파들이 분단의 책임을 김일성이나 스탈린에게 먼저 물었으면 물었어야지 이 두 사람을 젖혀두고 이승만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짓이나 다를 바가 없는 처사라 생각합니다. 비난을 하고 비판을 하는 것은 좋은데 적어도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국사 교과서를 집필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사정을 다 알고도 이승만을 비난했다면 후안무치한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저의가 의심스러운 것이지요. 또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반일투쟁에 몸담아 온 사람이 이승만이었고, 일본을 향해 평화선을 선포한 사람이 이승만입니다. 그런데 친일파라니요? 참으로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시쳇말로 죽은 소도 웃을 블랙코미디입니다.”
신 원장은 “대중들의 의식에 나타나고 있는 이승만에 대한 이 모든 인식의 오류는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 자체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인지의 왜곡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뒤틀린 정보가 올바른 판단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떡 방앗간에 준 건 밀가루인데 어찌 쌀 떡이 나오길 바라겠습니까?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이건 세상이 불신의 병에 단단히 들었다는 뜻입니다. 한 인물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최소한 올바른 정보 제공이 먼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지금 국사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소위 좌파 진영 인사들은 대중들에게 이승만에 대한 정확한 정보제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이승만의 삶이 정상적으로 평가받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것을 학자적 양식과 양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겁나서 이승만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을 꺼리는 것입니까?”
'사랑과 정의' 아니라 '불신과 증오'로 도배된 교육현장
신용구 원장은 “이승만이 없는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가 없는데도 소위 좌파학자들은 그런 사실을 모두 부정하고, 이승만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미래를 책임져야 할 우리 청소년들을 ‘지식의 절름발이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승만의 선택이 결국 옳았다는 것은 오늘날 남과 북의 차이만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의 노선을 따른 북쪽은 유교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장유유서의 봉건적 전통 극복에 실패하면서 사실상 왕정(王政) 국가로 되돌아갔지만, 이승만의 노선을 따른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 세계의 경제와 문화를 주도하는 ‘세계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해방 후 공산주의가 들불같이 번지고 좌익세력들이 득세한 상황에서, 이 모든 도전을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선택한 이승만의 혜안(慧眼) 한 가지만으로도 그는 마땅히 재평가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이승만에 대한 연구서와 관련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점은 다행이지만, 보다 대중적인 책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그래야 이승만을 더 많이 알 수 있을 테고, 이른 시일 안에 우리의 왜곡된 생각을 수정하고 혼란을 바로 잡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제 좌파 지식인들도 사실을 감추려 하지 말고 학생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가감 없이 소상하게 제공해야만 합니다. 정작 자신들은 진실을 감추고 사실을 왜곡하면서, 상대편을 향해서는 ‘왜 정부가 한 가지 생각만 주입하려고 하느냐’고 목소리만 높입니다.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편을 보면 민주 대 반민주, 독재와 저항 등 지나치게 투쟁 중심적으로 기술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국사 교과서는 자기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기술되어야 합니다. 그 바탕에는 사랑과 정의의 정신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소위 좌파들이 집필한 국사 교과서는 우리 역사의 어두운 면을 지나치게 강조해, 세상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 가르치는 데 집중하는 것 같아 이 나라의 장래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대한민국이 타락한 집단에 의해 세워지거나, 불의한 이들만 득세하는 세상인 것처럼 가르치다 보니, 성공적인 기업인에 대한 비난은 물론이고 이승만이나 박정희(朴正熙) 前 대통령이 남긴 긍정적이고 훌륭한 유산까지도 모두 폄하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좌파 지식인들이 사고의 경직성을 버리지 못하고 모든 사회 현상을 선(善)과 악(惡)이라는 이분법적인 대결 구도로만 파악하는 것이 몹시 안타깝고 서글프지만, 이들만 탓할 수는 없습니다.”
신 원장은 “세상이 부조리해지고 지역 간, 계층 간, 세대 간에 불신과 증오가 이처럼 만연하게 된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진 자들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반작용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며 “진보와 보수 진영은 서로 ‘네 탓’만하며 비난할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 진영논리를 벗어나 다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자인 조봉암을 내각에 참여 시켜 토지개혁을 성공시킨 이승만
-국내 정치를 보고 있자면 멀리 내다보고, 큰 그림을 그리면서 국민을 인도하는 진짜 ‘지도자(指導者, ㅣleader’는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고래(古來)로 명분 싸움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왔습니다. 정치인들이 자기 진영의 이익을 위한 진영논리에 늘 얽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진영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편 가르고, 이용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국민을 통합하고 국가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요?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후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념과 계파를 초월하여 모두 국정에 참여시켰습니다. 전형적인 예가 죽산 조봉암(曺奉岩)의 농림부장관 발탁이었습니다. 이승만이 공산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발탁하자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이승만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조봉암은 이승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한의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고, 이것이 한국전쟁 때 남한 땅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던 큰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만약에 진영논리에 갇혀 이 같은 대담한 결정을 하지 못했다면, 한국전쟁의 승패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갈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중요한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여러 논란에도 이승만은 이 땅에 실로 오랜만에 출현한 큰 지도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승만은 적어도 숲을 볼 줄 알고 역사의 흐름도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야 지도자들도 대국적인 시각에서 이젠 진영논리를 벗어던지는 이승만의 대범한 지도력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 전후 공간에서 당대 지식인 사회 분위기가 좌익으로 흘러갈 때 이승만은 어떻게 시종일관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견지할 수 있었는지요?
“저도 이승만의 인생을 추적하면서 그 부분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20세기 초반에는 소위 먹물 좀 먹었다는 사람들치고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어요. 젊은이들은 더 했지요. 어쩌면 젊은이들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건 그 시대를 산 젊은이들의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역시 과거를 부정하고 왕정타파를 주장한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평등 세상을 꿈꾸는 공산주의라는 시대적 조류에 휩쓸려 들어가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런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습니다. 이례적인 일입니다.”
1948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 /조선DB
"이승만이 없었으면 우리는 김일성 왕조의 백성으로 살고 있을 것"
신 원장은 “이승만이 여느 청년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승만과 일반 청년들 사이에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개의 젊은이는 자기 확신에 차서 자신을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신념과 판단이 모두 옳다고 믿는 거지요. 자기 확신은 저항의식이라는 청년정신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완벽하게 정의로울 수 있고 완벽하게 자비로울 수 있고 영원히 완전할 수 있다는 전제가 충족된다면, 사실 인간 세상에 공산주의만큼 매력적인 사상도 없을 겁니다. 아무튼 당시 젊은이들은 공산주의의 최면에 걸려들어 넋이 나가 있었어요.
이승만도 젊은 시절에 열정이 가득 차서 고종과 갈등을 겪었고, 그로 인해 5년 7개월이라는 긴 옥살이도 했습니다. 한때는 여느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고 그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는 갖은 풍파를 겪으면서 이 세상에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 속의 수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는, 인간의 불완전함과 미숙함을 깨달았던 거지요. 그때 이승만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였습니다. 전지전능한 신(神)의 완벽함이 인간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이승만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신 원장은 “결국 오랜 독립투쟁 과정과 종교적 체험을 통해 이승만은 일찌감치 공산주의 허구성을 간파했던 같다”며 “그리고 계급투쟁을 조장하는 공산주의만으로는 세상의 현안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 상호 간의 증오나 불신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승만은 현실 세계의 여러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투쟁보다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사랑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적 사관에 깊이 빠져들었다고 봅니다. 결국 이승만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사랑의 힘으로 인간의 문제와 현실의 여러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해방 정국에서 이분이 없었다면 그 후에 우리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조금 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승만이 없었으면 한반도에 자유 대한민국이 아니라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섰을 것이라는 겁니다. 아마 봉건사회로 되돌아가서 독재화된 왕정(王政) 하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요. 결국 김일성이 다스리는 김일성 왕조의 백성으로 살고 있을 겁니다.”
6·25 전쟁이 계속되던 1952년 7월 3일 제주도 제1훈련소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뒷줄 오른쪽), 훈련소장인 장도영 준장(왼쪽 두번째) 등과 함께 지프를 타고 시찰하고 있다. /정부기록보존소
"6, 25 전쟁의 승리는 이승만 평생의 대미(對美) 투쟁이 결국 승리한 것"
-북한은 최악의 왕정국가처럼 되었는데요.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남북의 차이는 앞서도 잠깐 말했지만 구시대의 유물이었던 봉건성을 타파했느냐 하지 못했느냐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 당시 식민지 시대를 거친 이 땅에는 남북한 어느 쪽도 국민이 주인 되는 공화정의 경험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북한에 공산당 일당 독재가 시작되자마자 김일성은 곧바로 절대 권력을 가진 봉건왕조의 임금처럼 행세할 수 있었어요. 이것은 최고지도자가 곧 왕이라는 봉건시대의 인식이 대중들의 뇌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대중들의 봉건적인 의식을 타파하기보다, 지도자들에 대한 충성을 선(善)으로 알고 있는 대중들의 봉건의식을 교묘하게 이용해 권력을 잡은 인물입니다.
김일성은 자신이 권력을 잡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지, 실상 대중을 위한 진정한 의식 개혁에는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김일성은 인민들의 자발성을 함양시키는 적극적인 의식개혁 운동에 나서기보다 단지 대중들에게 은혜만 베푸는 시혜적인 군주로서의 역할에 만족해 한 사람입니다. 김일성이 대중들이나 동남아시아 혹은 제3세계 나라들에 대해 선물공세를 많이 해 인기를 꽤 끌었다는 사실은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정신적 허영과 사치를 즐긴 김일성의 무절제하고 무분별한 태도가 대중들의 건강한 의식성장을 가로막아 끝내는 대중들을 김일성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유아적인 존재로 전락시켰다고 할 수 있어요. 북한이 자생력을 잃어버려 오늘날 이 같은 불행을 겪게 된 밑바탕에는 김일성의 이 같은 우민정책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일성에 대한 그런 식의 분석은 상당히 이례적이고 흥미롭습니다.
“지나친 사랑과 과보호는 바람둥이들의 무책임한 사랑만큼이나 위험한 것 아닌가요? 아무튼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 실현이란 현실에 안주한 김일성의 안이한 태도로 말미암아 봉건성 타파에 완전히 실패해 과거로 회귀해 버린 유례없는 역사 퇴행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신 원장은 “북한 김일성과 달리 이승만은 기독교적인 자유 독립국을 건설하고자 했다”며 “이것은 어떻게 보면 대중들의 눈에 익숙한 모든 전통적인 틀을 바꾸고 새로운 가치관을 육성하는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이승만의 종교적 신념이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이 땅의 뿌리 깊은 봉건성을 타파하는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하지만 해방 후 모두가 공산주의의 달콤한 이상사회 건설에 취해 있을 때 이승만이 공산주의의 허구를 정확하게 간파했기 때문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공과가 있겠지만, 그런 것은 또 다른 문제이고 건국을 하고 자유민주의를 싹 틔운 공로만 해도 그의 공적을 따라올 만한 자가 없습니다.”
-이승만의 지도력이 없었으면 6, 25전쟁 당시 3년간이나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수가 없었겠죠?
“당연하지요. 6,25라는 전쟁은 사실 미국 입장에서는 별로 개입하고 싶지 않은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 결국 개입하게 되었어요. 미국이 ‘이승만의 전략에 말려든 때문’이었어요. 이승만이 거둔 6,25 전쟁의 승리를 달리 표현하자면 그 자신이 평생 해왔던 대미(對美) 투쟁이 드디어 첫 결실을 거둔 것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4. 19 세대가 이승만과 역사적 화해를 해야 할 때
-그것은 어째서 그런지요?
“이승만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미국 정부에 수없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태 줄 것을 요청했지만, 미국 정부는 한 번도 눈여겨 봐주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의 노력은 냉정한 외교현실의 벽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이승만은 미국의 속성을 속속들이 파악하게 됩니다.
사실 당시 한국인 가운데 이승만만큼 미국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신생국가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 입장에서는 아주 얄미운 골치 아픈 사람이긴 했으나, 숨통을 끊을 듯이 미국의 목줄을 잡고 물고 늘어져 미국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6, 25 전쟁 중에 있었던 반공포로 석방입니다.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하자 미국은 난리가 났습니다. 미국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휴전협상이 이승만 때문에 물거품이 되는 것은 아닌가하고 속을 끓이다 결국 이승만을 달래지 않으면 전쟁이 다시 전면전으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비롯해 이승만이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신 원장은 “이것은 이승만의 통쾌한 외교적 승리였다”며 “이승만의 이런 벼랑 끝 전술이 미국에 통했던 것은 그의 주장에 명분이 있었고 또 그가 미국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소위 세계 역사에서 ‘독재자’라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데모 군중이 물러나라고 한다고 해서 스스로 물러난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이 대통령은 시위도중 학생들이 죽고 다친 것을 알고 곧바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는데요.
“저는 이승만의 하야를 민중의 저항에 굴복한 불명예 퇴진이 아니라, 그들의 부르짖음에 화답한 자발적인 역사적 퇴장이라 보는 입장입니다. 자유 민주주의 신봉자였던 이승만이 자신의 손으로 자식 같은 학생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큰 분노와 슬픔을 느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한마디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승만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책임지려고 했던 겁니다. 그는 뼛속까지 민주주의자였습니다.”
-이제는 4.19 세대가 마음을 열고 이승만 전 대통령하고 역사적 화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분명히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또 충분히 화해가 가능합니다. 4.19 당시 청년들의 눈에 이승만은 모든 악의 근원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당시의 청년들이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이승만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만한 충분한 시간이 흘렀지만, 불행히도 이승만에 대한 기억이나 인상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하와이로 나가셨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고, 이후 정부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언급을 거의 금기시 했습니다. 이 때문에 4.19 세대는 이승만에 대해 갖고 있는 불편한 감정을 해소할 기회를 놓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4.19 세대의 기억에는 이승만의 이미지가 일그러진 추물의 형태로 고착된 채 최근까지 흘러왔던 겁니다. 이승만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봄눈 녹듯이 그와의 화해와 용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 봅니다.”
맨 왼쪽 중죄수 복장이 이승만,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이상재,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안국선. 이승만은 5년 7개월이라는 긴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저술과 교육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이승만의 교육혁명이 민주화와 산업화의 원동력"
-소설을 보니 이승만 대통령이 교육에 무척 관심이 많았더군요.
“그분은 원래 교육자였습니다. 감옥생활, 배재학당, YMCA 등등을 거치면서 교육활동을 했고, 미주 지역에서 독립 활동을 할 때도 항상 동포들의 교육을 최우선으로 강조했습니다. 대통령이 되신 후 정말 열악한 재정 상태에도 불구하고 교육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었습니다.
해방 당시 85%에 이르던 문맹률은 그의 집권 기간에 5% 이하로 줄어들었고, 해방 당시 남북한을 통틀어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사람의 수가 2만6천명에 불과했는데, 이승만 집권 말기에 남한의 대학생 수가 8만 명에 달했습니다. 매년 보릿고개를 걱정하며 살아야 했던 시기에 이만한 대학생을 길러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저도 이승만의 전기를 접할 때마다 당시 그 열악한 옥중에서 교육이나 저술 활동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배는 주려도 책만큼은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승만이었습니다. 지식이 곧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지요. 이승만은 그 스스로도 사형수 생활을 하면서 옥중에서 책을 놓지 않았어요.
한때 너무 많은 대학생이 배출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긴 했지만, 이승만의 교육혁명이 일구어낸 수많은 인재가 결국 훗날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박정희 대통령과 기업인들이 산업화 과정에서 필요한 고급인력을 무슨 수로 충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대통령 자신이 하야하게 된 원인도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데모에 의한 거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이승만의 교육혁명은 그가 평생에 걸쳐 소원했던 자유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꿈을 이루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는 배경도 되는 아이러니한 면이 있습니다. 교육을 통한 국민들의 의식 개혁이 타락한 권력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이어진 게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이승만 정부를 평가할 때 너무 부정선거와 독재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승만이 이룩한 위대한 교육혁명까지 전혀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는 개인적으로 아주 안타깝습니다.”
"우리 사회의 불신과 증오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주는 소설 쓰고 싶다"
-결국 이승만이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고 보시는지요?
“그는 다시는 외세에 굴종하지 않고,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물질적 풍요를 한번 보십시오. 이승만이 간절히 바라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승만은 아마도 무덤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겁니다.”
-의사 신분으로 역사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저는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입니다. 진료실에서 한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글을 통해 집단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특히 제가 정신과 의사다 보니까 사람 자체에 관심이 많습니다.
역사 속의 훌륭한 인물들이 살아온 과정을 추적하고,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인생의 새로운 면을 배울 수 있고,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불신과 증오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