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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말라기 1장 6절-14절
우리 글로벌 찬양의 교회는 현재 이 장소가 2013년 2월 17일 첫 예배를 드린 후 6번째 예배 장소를 옮긴 장소입니다. 그래서 2002년 12월 15일 북경 찬양의 교회를 개척한 이후 예배 장소를 몇 번이나 옮겼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려 40번을 옮겼다고 기억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합니다. 예배장소를 갑작스럽게 옮겨야 하는 형편이었음에도 언제나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옮겨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차질 없이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목적은 제일 먼저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배드리기에 훌륭한 시설과 환경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습관과 타성에 젖은 예배, 몇 사람이 주도하기 때문에 회중은 참여 하지 못하고 구경만하는 예배,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간절함이 없는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나 오늘의 예배가 비슷했던지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하시면서 노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호통을 치십니다.
그러나 정작 꾸중을 듣는 그들은 도리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불경스런 모습을 깨닫지 못하는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께서는 7절 이하의 말씀으로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가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비교하면서 혹여 잘못된 것이 있다면 바로 잡고, 회개하여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잘못된 예배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더러운 떡을 예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그렇다면 더러운 떡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상한 떡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먹어서 몸에 해롭기 때문에 먹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예배 태도입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polluted bread" ‘오염된 빵’이란 말입니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에게도 상한 음식은 주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동물에게는 상한 음식이 해롭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드린 진설병을 상한 것으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살아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분이라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주의 상을 경멸히 여기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드리기 싫은 예배를 억지로 드리는 분들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지 않으면서 예배드리는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므로 예배드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또한 “눈먼 짐승, 저는 짐승, 병든 짐승을 예물로 드리는 태도”입니다.
이것을 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본래 구약의 제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지적하는 책망의 대상은 희생이 없는 제사. 곧 의미를 상실한 예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을 심히 모욕하는 예배가 되고 맙니다. 자기에게 큰 가치가 없는 것, 바쳐봐야 큰 손해가 없는 것, 없어도 자신에게 전혀 불편이 없는 것, 그러므로 마치 쓸데없어 버리려다 인심 쓰듯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귀찮지만 자꾸만 나와 달라고 하니 누군가가 불쌍해서 나와 주는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에서 어떻게 헌신을 찾아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이 얼마나 죽어 마땅한 죄인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총독에게 그런 예물을 드려 보라”하십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두말할 것 없이 당장 총독 모욕죄로 목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도리어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뻔뻔스럽게 말 한다는 말씀입니다.
엉터리 예배를 드리면서도 “은혜를 듬뿍 내려 주소서”라고 한다고 하니 얼마나 어이가 없는 일입니까? 헌신하기는 손해 보는 것 같고, 봉사하기는 피곤하지만 교회에 나와서 뭐 얻어갈 것이 없을까? 생각하면 두리번거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런 자는 단 한명도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아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헌신이 결여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13절 상반부에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면서 코웃음하고”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예배에 집중하십니까? 아니면 돈 벌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십니까? 귀찮으니 빨리 끝나기를 바라십니까?
‘번폐’는 싫증난다. 피곤하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Weariness"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리는 시간이 정말 졸리고, 피곤하기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단절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없는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기쁨이 있을 수 없고, 감격이 있을 수 없는 생기 없는 예배입니다. 생각은 다른 곳에 있고, 몸만 예배당에 있는 그야말로 억지로 몸을 비비 꼬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어찌 받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곤하고 귀찮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찮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찮고 성가 싫게 여기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토색한 물건을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13절 하반부에서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 왔느니라. 너희가 이 같은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토색’이란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자기 자신의 헌신, 나 자신을 예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남의 것으로 내 것 인양 생색만 내는 제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쁘고, 취미가 없어서 교회에 나가지 않겠으니 자기 아내에게 내 대신 예배드리고 오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대신 남이 나를 위하여 드려주는 예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예배는 마치 도둑질하여, 빼앗아서 드리는 예배와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바꿔치기 하는 제물”을 잘못된 예배로 말씀하십니다.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바칠 제물로서 흠 없고, 좋은 수컷을 골라 놓았다가 막상 바칠 날이 되자 아까운 생각이 들어 흠 있는 짐승으로 바꿔치기하여 드리는 예물입니다.
사기는 무엇입니까? 눈속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사기를 치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하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은혜를 받았을 때는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감사할 때는 풍성히 드려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아서 약속합니다. 진리를 깨달았을 때는 이 믿음 영원히 변치 않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합니다. 그러나 막상 지키려 하고, 드리려 하고, 진리대로 살려 하다가 욕심 때문에 인색해 지고, 바빠서 은혜를 잊어버리고, 귀찮아서 대충 얼버무리고 마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 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며, 이러한 마음으로 제물을 드린다 하여도 도리어 제물은 저주의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까우면 아예 드리지도 마십시오. 아니니아와 삽비라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 말씀이 6절부터 14절까지 거의 각 절의 서두와 말미에 7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이유는 ‘만군의 여호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사람은 “예배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에 예배드립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십니다. 온 우주에 광대함과 위대함이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한 분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낌없이, 주저함 없이,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생각하면 예배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예배드리는 것, 이것이 예배드리는 목적이며, 이유의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바른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첫째 “무릎 꿇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굽혀 경배하는 자세의 예배입니다.
그것을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 있어 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는 어떤 관계입니까?
신. 구약 성경에서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위가 아버지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큰 임금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백성은 왕에게 오로지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고 싶어 하십니다.
“나를 아버지와 왕으로 생각하나, 그리고 존경하고 사랑하는가? 반대로 존경하고 사랑하지도 않고, 도리어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나?” 궁금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왕으로 생각하며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제물을 그리고 나의 삶을 모두 아버지와 왕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임금 앞에서 아들과 종은 겸손히 무릎 꿇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땅에 댑니다.
그러므로 최상으로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자녀와 백성으로서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 꿇고, 영혼을 집중하여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터져 나오는 찬송이 있는 예배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장 2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확실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배 받으시는 목적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찬송을 들으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찬송가 404장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치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그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생전에 한번이라도 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간절히 부르는 우리들의 찬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저릴 만큼, 우리 영혼의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을 울려내어 찬양하십시다.
그리고 마귀가 물러가고, 병마가 물러가고, 걱정과 근심이 물러 갈만큼 크고 우렁차게 찬양하십시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가장 영광스런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하며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영혼과 뼈에 새기는지, 흐르는 물에 새기는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릴 때마다 잊지 말고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택하여 주시고, 불러 주시고, 그리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먹이시고, 입히시고, 기르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장차 본향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아낌없이 마음과 영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나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나 예배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만이 이 자리에 나와 영으로 진실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주만물과 나를 지으신 하나님으로 믿는 자만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나를 끝까지 사랑하실 분으로 믿는 자만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아버지 되시고 주인이신 하나님께 겸손하게 무릎 꿇고, 찬양하며, 감사하도록 돕는 분으로 믿는 자만이 예배 드릴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무릎 꿇고 드립시다. 목 놓아 찬양하십시다. 마음 다해 감사하십시다.
어느 곳이던 열중하고, 단련하는 곳은 강해집니다.
잔머리를 너무 굴리면 더 잔머리만 굴리게 됩니다. 체육관에서 열심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면 근육이 발달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인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한 사람의 삶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영의 일을 생각하고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장을 위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사랑을 알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또한 “하나님 용기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시겠습니까?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 저를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해 주시겠습니까? 거룩해 질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예배는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기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드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 중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며, 예배를 통해서 영혼이 강건케 되는 복을 받으시는 글로벌 찬양의 교회 형제자매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