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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소설
한 탈북 소년의 편지(2)
-쓰레기를 뒤져 주어 먹는 꽃제비 소년-
굶주림을 주민에게 안겨준 장본인의 죽음에 정부가 조문을 했어야 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북조선에 왔는가 하는 착각을 일으켰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강대실 아저씨가 맞은편에 앉아 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 아저씨, 미쳤고나.
그래놓고 새삼스레 텔레비전을 보니까 정부에서 조문사절이 가는 대신 김정일과 평양에서 회담을 했던 전 대통령의 유족들이 조문을 갔다 왔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전 대통령 본인은 이미 사망하여 가족이 대신 갔다는 것이었다. 북조선 인민 몇 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국 신문방송에서 떠들어 제치는데도 핵개발로 인민을 굶겨 죽이는 독재자의 죽음에 조문을 가도록 한 정부는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이런 생각이 들자 용식은 맞은 편 아저씨가 혹시 북조선 간첩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솟구쳤다. 이런 판에 아저씨는 한 술 더 떴다.
“좋은 게 좋지. 일국의 대표가 죽었는데 모른 채 해서 되나 말이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같은 거 가지고 조문을 안 간다면 옹졸한 거 아이가.”
용식은 이 말에 분노가 끓어올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머 옹졸하다꼬. 이 사람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꼬만. 삼촌이 어찌 죽었는데 그런 소리 하노.
독백처럼 분노를 씹고 있던 용식은 벌떡 일어났다. 씩씩거리며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갔다.
“와 벌써 갈라쿠나? 집에 한번 오느라이.”
그는 용식의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 했다.
용식은 집에 돌아온 후 방바닥에 누워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모진 마음을 먹기로 했다. 설마 그 아저씨까지 물이 잘못 들어 있을 줄 미처 몰랐다. 자유를 찾아 온 한국에서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른들이 여기저기 발을 붙이고 생뚱맞은 소리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무엇이 잘 못돼도 한참 잘 못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왕 부산을 떠나 멀리 가기로 한 마당에 그 아저씨도 함흥냉면의 악몽과 함께 지옥으로나 가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용식은 상경하기 전날 음료수 한 박스를 사가지고 강대실 아저씨 집을 찾았다.
“아저씨 한번 오라 캐서 왔심더. 이거 받으이소.”
“그냥 오지. 뭐 한다꼬 이런 걸 사오나.”
아저씨는 음료수 박스를 받아 옆에 놓고 용식의 손을 잡았다.
“니 그 동안에 고생 많았제. 엄마도 없는데 경란이 데리고 밥 해 묵고 집안 일 보느라 욕 봤다.”
“언제 예. 고생한 거 엄심더. 그보다도 예. 아저씨한테 하나 물어 볼까 예.”
용식은 부산을 떠나는 김에 쓸데없는 소리는 할 필요 없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속셈을 떠보고 싶었다.
“아저씨, 김정일이 죽었을 때 조문을 보냈어야 한다꼬 한 말이 진짭니꺼?”
“그럼 진짜지. 미우나 고우나 그 사람은 북한 대표 아이가. 우리 대통령 하고 회담도 했으니 예의상 조문을 가야 하는 기라.”
“사람을 그리 마이 굶어 죽게 한 사람인데도 예?”
“옛날부터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안 있나. 백성이 굶어 죽는 걸 우찌 일일이 다 멕여 살리노 말이다.”
그는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까 목이 마른지 음료수를 홀짝거렸다.
이 사람은 남쪽에서 배고픈 줄 모르고 살아 놓으니 풀뿌리를 캐먹다가 그것마저 없어 굶어 죽는 비참한 꼴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핵무기 개발한다고 그 많은 돈을 엉뚱한데 쓰면서 식량문제는 외면한 독재자에게 조문이란 당치도 않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용식이 북한에 있을 때 일을 새삼스레 떠올리자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런 사람은 떠난다고 인사말을 할 필요가 없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치부했다. 더 이상 이 집에 앉아서 시간을 끌 이유가 없어졌다. 그는 흰 소리를 하느라 시간이 길어지자 소변보러 간다며 화장실로 갔다. 그 사이 용식은 미리 준비해 간 청산가리를 슬그머니 꺼내 그가 마시던 음료수 잔에 붓고 흔들었다. 조금 기다렸다가 그가 나오자 바로 일어섰다.
“아저씨, 인자 갈랍니더. 잘 계시소.”
“벌써 가나. 오냐, 잘 가라.”
용식은 다음날 서울로 가는 KTX 열차 안에서 강대실 아저씨에게 작별을 고했다. 지금쯤 게거품을 물고 나자빠져 싸늘하게 식어 있을 그 몸뚱이는 이 세상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살덩이가 되었다. 그 살덩이는 불타는 지옥으로 떨어져 제값을 치를 것이었다.
장 형사는 용식 일행이 바누아투로 들어간 날 용식의 편지를 받아보고 고민에 빠졌다. 어린 탈북 소년이 숨겨 두어야 할 비밀스런 얘기를 자신에게 낱낱이 밝히는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용식이가 고백하고 있는 사건의 내용을 두고 단순히 형사로서 접근할 수는 없었다.
그 사건들을 담당해 온 수사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살인범임을 자백하는 물증을 확보한 이상 범인 체포에 나서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어린 탈북 소년의 고백 편지 그 자체만으로써는 증거능력을 믿을 수 없었다. 첫째 화재사건 현장에서 라이터 잔해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식당 아주머니의 손톱에 남아 있던 혈흔에서 강대실의 DNA가 확인된 사실 등 용식이의 범행으로 단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었다. 소년이 자백하고 있는 범행의 동기를 미루어 짐작컨대 원한과 분노가 뒤얽힌 보다 복잡한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즉 탈북소년으로서 감당하지 못할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는 흔적을 편지의 행간에서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탈북소년과 동시대인으로서 접근할 때 함부로 수사권을 발동할 수 없는, 민족적 난제를 던져주고 있었다. 장 형사는 편지를 든 손을 자기도 모르게 떨면서 어떤 숭고한 경지에 다가가고 있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
장 형사가 용식이로부터 받은 편지를 두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인천공항 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한 통이 장 형사에게 날아들었다. 발신인은 남영진으로 되어 있고 주소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누군지,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지난번 용식이의 편지가 생각나서 겉봉을 뜯고 편지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장 형사는 쇠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큰 충격에 빠졌다. 남영진이 전혀 뜻밖의 사건진상을 알려 왔던 것이다.
그는 지금 남태평양 한 섬 나라에 살고 있는 용식이의 의부로서 탈북하여 한국에 왔다가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소년을 위해 주소를 밝히지 않은 것을 양해해 달라며 애틋한 사연을 토로하고 있었다.
남영진이 태평양 상공을 날아오는 동안 용식이로부터 해운대 신도시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전말을 적은 편지를 장미향 형사에게 보냈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비로소 끔찍한 사건의 내용을 알게 된 그는 편지 내용과 용식이의 태도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어린 소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범행하며, 그것을 얘기할 때 마치 환상에 젖은 듯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눈길을 보고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했다. 특히 사건의 경과를 설명할 때 영화 속 주인공처럼 제법 생생하게 팔짓 손짓까지 섞어가며 열을 올리는 것이 과장되고 현실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열을 올리다가도 갑자기 숨이 막힌 듯 가쁜 숨을 쉬며 캑캑거렸다. 기내식을 잘 못 먹어 체했나 싶어 등을 두들겨 주었으나 여전히 헐떡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엄마! 하고 외치다가 개 거품을 물고 발작을 했다. 의학 지식이 없는 남영진으로서는 당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래도 어떤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남영진이 용식이의 동태를 살핀 후 바누아투에 와서 의사와 상담을 했다. 전후사정을 들은 의사는 시드니로 가서 정신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도록 권유했다. 정신과의사로부터 용식이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심한 정신적 충격 때문에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영진은 용식이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살인범으로 몰리겠다 싶어 부랴부랴 장 형사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시드니 정신과의사의 진단 소견으로는 불의에 삼촌을 잃은데다가 엄마마저 끔찍하게 살해된데 대한 분노와 절망이 혼합되어 현실의식이 흐려지게 되었고, 여기에다 엄마를 죽인 자에 대한 극도의 복수심이 소년을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살해원망이 편지로 나타났던 것이라고 장 형사에게 알리고 용식은 입원 치료 중이라고 밝혔다.
심기가 착잡해진 장미향 형사는 대학병원 정신과 조병구 박사를 찾아갔다. 용식의 증상과 관련한 얘기를 자초지종 듣고 있던 조 박사는 용식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다가 조현병(調鉉病)에 시달리는 것 같다고 소견을 말했다. 병명으로서는 생소한 ‘조현병’이란 말을 듣고 설명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조박사는 의학계에서 2011년에 정신분열병(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을 ‘조현병’으로 바꾼 것 이라고 알려주었다.
“사실 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이 사회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뜻과 어감을 가졌기 때문에 편견을 없애기 위해 병명을 바꾸게 된 것이지요. ‘조현병’이란 용어에서 조현(調鉉)이라는 것은 현악기의 줄을 고른다(조율)는 뜻인데, 정신분열증 환자가 마치 현악기를 제대로 조율하지 못해 줄이 헝클어진 것처럼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신분열증을 현악기 조율하듯 해서 치료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그런데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와는 어떻게 관련되는 겁니까?”
“어떤 사건이나 사고로 환자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은 후 일어난 정신착란을 반복하다가 정신분열증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장 형사는 전문의의 설명을 듣고 용식이가 보낸 편지 내용이 실제인지, 아니면 환상 속에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착각하여 고백한 것인지, 밝혀야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즉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는 용식이가 정신착란으로 직접 살해한 것인지, 아니면 증오와 분노에 의한 공격성과 현실감각의 마비로 살인환상을 갖게 된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용식이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게 된 것은 엄마의 죽음을 본 이후인 만큼 그 이전에 엄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 화재사건은 용식이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살인혐의와는 관련성이 없는 사건이 된다. 이 지점에서 화재사건이 단순 실화였는지, 살인을 위한 방화였는지, 아리숭해졌다.
만약 방화살인이었다면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단 말인가. 드러난 증거로 봐서는 유력한 용의자가 식당 아주머니를 살해한 혐의가 짙은 강대실일 가능성이 컸다. 청진댁과의 결혼을 방해한 식당 아주머니에 대한 원한 살인이 강대실의 범행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청진댁을 집적거린 식당주인을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었다. 다만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은 강대실이 화재사건의 범인이라면 왜 결혼하고자 했던 청진댁까지 살해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녀가 식당 주인과 가깝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면 이에 분개하여 그녀도 함께 살해했을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남는 문제는 그가 원한살인이라는 복수극을 마친 후 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는지 하는 점이었다. 용식이가 자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석연찮은 사실로 다가왔다. 용식이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그 소년의 살인혐의가 풀릴 수 있는 실마리는 얻었지만 사건의 전말을 명쾌하게 밝힐 수 없어 답답했다. 장 형사는 경찰서로 오가며 압박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혼자 끙끙 앓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장 형사는 수사관으로서 사건의 진실을 밝힐 의무와 국가 공무원의 차원을 넘어 분단된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양식을 놓고 저울질했다. 그녀는 결국 민족통합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는 길을 택했다.
장 형사는 편지를 두고 고심한 끝에 스스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나섰다. 기자들에게 용식과 남영진의 편지를 받게 된 경위와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 내용을 먼저 밝혔다. 이어 용식의 처리문제를 두고 기자들의 질문이 잇따르자 지금으로서는 행방을 알 수 없거니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앓고 있는 용식의 자백이 지닌 신빙성 문제 때문에 일반 형사범과는 다르게 취급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그만 단서이기는 하지만 용식이의 자백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단서가 있다고 밝혔다. 기자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일제히 질문을 던졌다.
“그 조그만 단서라는 게 뭡니까?”
“용식이 편지에서 함흥식당 뒷 창문으로 라이터를 켠 채 주방으로 던졌다고 했는데 화재 현장에서는 라이터의 잔해로 볼 수 있는 어떤 증거품도 찾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용식이가 자백하고 있는 방화살인을 뒷받침할 단서가 없기 때문에 용식이의 방화살인 혐의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백의 진위를 밝힐 수사는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현재 용식이의 행방을 알 수 없어 강제 수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수사관으로서 책무를 져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나섰다. 장 형사는 어른들의 잘못으로 저질러진 사건을 둘러싸고 진술한 어린이의 범행 자백을 외형만 보고 다룰 수 없다고 담당 수사관으로서 고민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용식이 문제는 단순한 살인사건보다 민족적인 갈등문제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녀의 의도는 범행을 자백한 용식의 편지 내용과 전문의의 소견을 토대로 사건의 경과를 밝혀 수사관으로서 책무를 다 하고, 나아가 잘못된 시대정신에, 전염병에 오염되듯 병들어 자기도 모르게 환자가 된 용식이의 희생양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일대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결론에 기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6
계절은 봄을 지나 완전한 여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벚꽃이 이전보다 일찍 북상한다는 뉴스가 나온 지도 오래된 듯 해운대 달맞이고개 벚꽃나무들은 제법 무성한 잎사귀를 늘어뜨려 초여름의 더위를 가려 주었다. 장 형사는 용식의 편지 건으로 무거웠던 마음에서 해방된 후 규칙적인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루 일을 마치고 해질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퇴근하면 혼자 집을 지키던 토토가 반가움에 꼬리를 휘저으며 달려와 안겼다. 연신 정이 베어든 소리를 내며 손이며 얼굴을 핥아 제쳤다. 그녀만의 공간에서 노처녀 장미향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일상의 여유를 찾고 있을 때 바누아투 타나섬 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발신인은 남영진이었다. 용식이의 근황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그렇잖아도 궁금하던 중에 반가웠다. 건강이 회복되어 간다는 얘기 끝에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사실을 늘어놓았다. 장 형사는 숨을 죽인 채 읽어 내려갔다.
용식이가 정신을 차리게 되자 시드니 정신과 의사가 차분하게 한국에서의 사건 진상과 관련한 상담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면서 내용을 알려주었다.
용식이는 방화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날 뜻 밖에 식당 아줌마가 먼저 집으로 가자 한 순간 당황했다. 강대실 아저씨와 미리 짜놓은 식당 주인 부부 살해 계획이 틀어지게 되어서였다.
용식이는 그날 아저씨가 식당 주인 부부를 살해할 수 있도록 가스밸브와 창문 고리를 열어 놓은 후 엄마와 함께 집으로 가려고 했다.
“엄마 인자 가자.”
“그래 가자.”
둘이 막 식당을 나서려 할 즈음 식당 아줌마가 갑자기 엄마의 팔을 잡았다.
“청진댁, 내일 우리 아아들 소풍 간다 캐서 가서 준비 좀 해야 돼. 월요일 장 볼 꺼 대신 좀 챙겨 줘.”
주인도 거들고 나섰다.
“그래 청진댁이 좀 해주소.”
그는 잘 되었다는 듯 청진댁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의미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늦은 시각 단둘이 있게 된 것이 찬스다 싶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아저씨에게 지금 연락할 수도 없고 해서 혼자 식당 문을 나섰다. 밖에서 엄마에게 휴대폰으로 연락을 할 생각이었다. 부부가 함께 있는 날을 노렸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식당 주인 혼자라도 해치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응답이 없었다. 일을 하는가 싶어 기다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엄마에게 꼭 연락해야 되지만 시간을 무작정 끌 수 없었다. 아저씨와 약속 시간이 밤 10시였다. 주인이 나오기 전에 아저씨에게 연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단 할 일은 해놓고 엄마에게 바로 전화하면 될 것 같았다.
이때 식당 주인은 용식이 나가고 단둘이 남게 되자 청진댁에게 옆에 앉으라고 권했다.
“커피나 한잔 하고 일하소.”
청진댁은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들고 주인 곁에 앉았다. 주인은 애들 데리고 수고한다며 위로했다. 그때 휴대폰 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청진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평소 주인의 호의를 알고 있던 터라 다소곳이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만 있었다. 그러자 주인은 바짝 다가앉더니 청진댁을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심신이 외로웠던 청진댁도 그 정도 호의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둘이서 점점 열이 오르고 있을 즈음 또 휴대폰 소리가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고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용식의 전화를 받은 강대실이 식당 뒤쪽으로 돌아갔다. 주변 동정을 잠시 살핀 후 용식이가 고리를 풀어 놓았던 창문을 열고 불을 켠 성냥을 주방으로 던졌다. 그는 불길이 확 붙는 것을 보자마자 후닥닥 달아났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용식은 휴대폰을 통해 다급하게 엄마를 불렀다. 신호만 가고 받지를 않았다. 큰 일 났다 싶었다.
-엄마 빨리 받아 응! 빨리 빨리... .
속이 탔다. 곧 불꽃이 번지면 큰 일인데 다시 식당으로 들어 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함을 지를 수도 없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식당 주방 쪽에서 불꽃이 확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폭발음이 들렸다. 동시에 용식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엄마아! 내가 엄마를 죽였어! 응 응 응... .”
본의 아니게 엄마가 살해당하자 살아남은 식당 아줌마에 대한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와 저 여자가 살아 있나. 죽을 여자는 죽어야지.
용식이는 하는 짓거리를 봐서는 당연히 식당 주인 부부가 죽었어야 했는데 하필 그 시간에 식당 아줌마가 애들 소풍 때문에 먼저 들어가다니, 이건 하늘이 잘못 짚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 여자 때문에 본의 아니게 엄마를 죽게 했으니 그냥 둘 수 없다고 다짐했다. 며칠을 끙끙대던 끝에 좋은 생각이 났다.
-그렇지. 그 아저씨를 시켜서 없애면 되는 기지.
용식은 장미향 형사가 몇 번 나타나서 엄마가 식당 아줌마로부터 수모를 당하게 된 이유를 캐묻는 바람에 식당 아줌마에 대한 증오심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용식은 학교 앞에서 엄마를 좋아했다는 그 아저씨를 만나 전화번호를 알게 된 것이 정말 잘 됐다 싶었다. 공책에 적어 고이 간직하고 있던 전화번호를 돌려 아저씨를 만났다. 그가 묻지 않았는데도 엄마와 식당 아줌마 관계를 제 나름대로 과장해서 일러바치듯 얘기했다.
“주인 아저씨가 엄마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된 식당 아줌마가 시기심이 나갔꼬 엄마를 막 지어박고 못 살게 했심더.”
“그래 그 여자가 그렇게까지 못되게 굴었단 말이지.”
“하모 예. 잘 하모 엄마가 아저씨랑 결혼해서 우리랑 함께 살까 했는데 예, 그 아줌마가 훼방났다 아입니꺼.”
“그 여자가 그랬어? 이년 가만 놔둬서 안 되겠다.”
“하모 예. 나도 엄마 땜에 속상해 죽겄는데 가만 둘 일이 아입니더.”
이렇게 둘이서 배짱이 맞아 돌아가자 용식은 아저씨에게 몰래 복사한 식당과 상가 열쇠를 갖다 주고 본때를 보여주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상가와 식당과 관련되는 정보를, 묻지 않은 것까지 나서서 알려주었다. 모처럼 미모의 과부를 만나 홀애비 신세를 면할 것이라고 부풀어 있던 강대실은 식당 여주인 때문에 신세를 망쳤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마침 용식이가 보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바람에 부글거리는 분노를 터뜨릴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용식이를 몇 번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식당 아줌마를 불러내기 좋은 날을 용식이가 알아서 연락해 주었다. 월요일 밤이었다. 한 주가 시작되는 날인만큼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게에 나와 볼 생각을 할 수 있는 날이었다.
강대실은 그날 밤 용식에게서 받은 열쇠로 상가 문을 열고 들어가서 동정을 살핀 다음 식당 문을 열었다. 밤 11시가 지나서 상가는 캄캄하여 인기척이 없었다. 휴대폰으로 주인집 전화번호를 돌렸다. 마침 식당 아줌마가 전화를 받았다. 막 샤워를 한 후 잠자리에 들려다가 전화를 받은 것이다. 한밤 중 전화라서 의구심이 생겼다.
“누가 밤중에 전화하노? 여보시요, 누고?”
“아, 화재사건 수사 형사인데요. 빨리 좀 가게로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거든요.”
“예, 지금 가야 됩니꺼?”
“수사상 중요한 일이라 빨리 나오시오. 빨리요.”
식당 아주머니는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형사라는 사람이 다그치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벗던 옷을 다시 주어 입고 식당으로 달렸다.
“어서 오시오. 나는 신도시 사건 담당 박길룡 형사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홀에서 인사를 했다. 그러나 형사가 아니었다. 그는 스타킹을 뒤집어 쓴 얼굴이라 그녀로써는 인상을 알 수 없었다. 다만 흠칫 놀랄 뿐이었다.
“그렇십니꺼. 이 밤중에 무신 일로 그랍니꺼?”
“이 열쇠가 이 가게 거 맞지요.”
그는 놀라는 식당 아주머니에게 복사한 열쇠 두개를 건네주었다.
“맞십니더. 이 열쇠를 우찌 아저씨가 갖고 있는 기요?”
“우찌 갖고 있기는... 여기 들어올라꼬 갖고 왔지.”
그러면서 그녀를 잡아끌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스타킹을 벗고 윽박질렀다.
“내 얼굴 기억나지. 여기 무릎 꿇고 앉아!”
그제야 사나이가 강대실이라는 것을 눈치 챈 그녀는 사시나무 떨 듯 사지를 떨기 시작했다.
“살려 주이소. 내가 멀 잘 몬 했십니꺼 예?”
“꼭 내 입으로 설명해야 아나. 왜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내려와 열심히 살려는 청진댁을 못살게 굴었어.”
“내가 와 못살게 했어 예. 일자리도 주고 그랬는데 예.”
“일 자리 좋아 하네. 실큰 부려 먹을 대로 부려 먹고 네 남편이 청진댁을 좋아하니까 질투심에서 구박을 했지. 안 그래.”
“아입니더.”
“아이기는 뭣이 아이라. 청진댁이 뭣 때문에 죽었는데. 나와 결혼할 사람을 죽게 했으니 천벌을 받아야지.”
그 말을 하자 강대실은 자기 체면에 걸린 듯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주방 안을 둘러보다가 자루가 불탄 식칼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일단 이것으로 위협하면 꼼짝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식칼을 그녀의 목에 들이대고 다그쳤다.
“네년이 청진댁을 죽였지? 바른대로 대라. 남편이 청진댁을 껴안고 히히덕거리는 것을 보자 순간적으로 질투심과 분노가 뒤엉켜 엘피지 가스통에 불을 붙였지? 안 그래.”
“내가 와 그라요! 쌩 사람 잡지 마소 고마.”
식당 여주인은 자기가 직접 관계하지 않았는데도 살인자로 몰리자 길길이 날뛰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강대실의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손톱자국이 목 줄기에 박히자 숨이 막힌 강대실은 캑캑거리며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고 비틀었다. 한 동안 실랑이를 하던 강대실은 청진댁을 잃은 분노에 식당 여주인의 심장을 찔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가슴팍을 찌르고 또 찔렀다. 그녀의 시신이 나뒹굴어지자 식칼을 깨끗이 닦은 후 제자리에 갖다 두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준 열쇠 두 개를 그대로 두고 나왔다. 그녀가 가져 온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용식이는 식당 아줌마가 살해당한 후 식당 주변의 동정을 강대실 아저씨에게 전해 주었다. 일단은 별 일 없는 것 같았다. 용식이는 서울로 가기 하루 전 인사차 아저씨 집을 방문했다.
“아저씨 부탁한 것 가지고 왔는데 예.”
용식이는 그가 집에 올 때 사오라던 음료수 박스를 내밀었다.
“오냐 고맙다. 게 앉아라.”
그러면서 음료수 캔을 하나 따서 용식에게 권했다. 자기는 마시지 않고 얘기만 했다.
“용식아 서울 가면 만나기 어렵겠다. 낯선데 가서 잘 지내라.”
그냥 이런저런 얘기만 하다가 집을 나섰다. 왜 아저씨는 음료수를 사 오라고 해놓고는 마시지도 않고 얘기만 했는지 아리숭했다.
용식이가 떠나자 강대실은 마음의 정리를 끝내고 그제야 음료수를 벌컥 벌컥 마셔댔다. 모처럼 청진댁과 결혼을 통해 새 삶을 살려고 했던 자신의 희망에 걸림돌이 되었던 사람들을 제거하고 청진댁을 찾아 이승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저승에서나마 그녀와 사랑을 일구어 볼 욕망에 빠져 청산가리가 든 음료수를 게걸스럽게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액체의 유연한 맛에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끼던 그는 갑자기 음료수를 도로 토하며 쓰러졌다.
용식은 부산을 떠나는 날 울적한 심정을 달래고 있었다. 그가 미워했던 것은 어렵게 탈북하여 자유 대한으로 찾아왔으나 여동생 경란이와 함께 마지막으로 기대며 살아갈 엄마를 두고 가만 두지 않는 야박한 인간관계였다. 거기다가 삼촌 같은 젊은이들을 죽인 비인간적 반민족적인 만행, 수백만명이나 굶어 죽게 만든 잔인한 독재자를 외면하는, 한국인의 황폐해진 정신상태-물질문명에 찌든 몰골들을 그대로 보고 견딜 수 없었다. 해서 한반도에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동족애에 어긋나는 이런 작태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
결국 살인과정에 간여한 것에 따른 죄책감과 삼촌, 엄마의 피살에 따른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로 인한 망상장애가 혼합되어 이때까지의 살인행위가 자신이 저지른 것인 양 착각함으로써 만족감을 만끽했다. 그리고 할 일을 다 했다는 성취감에 빠진 용식은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는 편지를 장미향 형사에게 쓰게 되었던 것이다.
장 형사가 남영진으로부터 두 번째 편지를 받은 후 조병구 박사를 찾아 갔을 때 용식이의 증상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조 박사는 환상 살인 욕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환자가 정신적 충격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망상장애로 환상 속에서 살인을 저지르고는 마치 현실에서 살인을 한 것처럼 대리만족을 추구하려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이코패스처럼 정신병 환자가 저지르는 살인과 어떻게 다른지요?”
“정숙한 인간은 꿈꾸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사악한 인간은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을 넘느냐 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범행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환상 속에서 살인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 실제 행동으로 옮긴 경우에만 범행이 된다는 얘기군요.”
장미향 형사는 정신적 충격이 컸을 용식이의 사정을 알게 되자 수사관으로서의 사명감과 한반도에서 소년과 삶의 터전을 함께 가졌던 동시대인으로서의 인간적 연민이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대에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한민족 후예로서 자신을 돌이켜 보게 한 그 사건이 한국인인 그녀의 존재감을 예사롭지 않게 느끼게 했다. 그 어린 소년의 피맺힌 절규를 쏟아 놓듯 구구절절이 엮어 내려간 편지 내용의 행간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바로 민족적 양심이 사라져버린 시대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