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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1일 연중 제22주일
[수원] "끝자리"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집회 3, 17 - 18. 20. 28 - 29
† 제2독서 : 히브 12, 18 - 19. 22 - 24ㄱ
† 복음 : 루카 14, 1. 7 - 14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며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드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9월 첫날인 오늘, 예수님의 겸손하신 모습을
닮아 가기를 다짐합시다.
★ 집회서는 참지혜가 무엇인지 서술하고 있다. 지혜는 주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온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말씀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제1독서).
★ 시나이 계약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현존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새 계약을 맺은 우리는
천상 예루살렘 안에서 하느님을 두려움 없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어느 바리사이의 집에서 사람들이 윗자리를 탐하는
것을 보시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이가 높아진다고 가르치신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초대되었을 때에 윗자리가
아니라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끝자리’가
단순히 공간적인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앉고 싶지 않은
자리라면 거기가 바로 끝자리입니다. 이를테면 주일인데도 성당에
가기 싫다면 성당 좌석이 곧 끝자리입니다. 제삿날이지만 시댁에
가기 싫다면 시댁이 곧 끝자리입니다. 교회 활동으로 어려운 가정을
방문해야 하는데, 갈 때마다 불편하게 느껴지면 바로 그 집이
끝자리입니다.
보좌 신부 때에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회식 자리가 잦았습니다. 스무
명이 넘게 모이는데, 보통 친한 이들끼리 가까이 앉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안에서 다소 소외되는 이들은 한쪽 구석으로 몰립니다. 결국
한쪽에는 인기가 좋은 이들이, 다른 쪽에는 소외되는 이들이 모이게
됩니다. 그러면 보좌 신부인 저는 어디에 앉아야 했겠습니까? 마음으로는
좀 더 매력 있는 청년들 쪽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청년들에게서 “우리 신부님은 청년들을
편애하지 않는 것 같아.”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가기 싫은 자리, 하기 싫은 일, 선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이
바로 ‘끝자리’에 앉는 것이고, 겸손을 향한 지름길입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하면, 앉고 싶은 자리만 앉으려고 하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려고 하면 겸손을 배우지 못합니다. 겸손을 배우려면
‘끝자리’에 앉는 연습부터 해야 합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스타형 , 섬김형의 인생유형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9월1일 연중 제22주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루카 14,1.7-14
스타형, 섬김형의 인생유형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봅니다. 이시간 겸손한 주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베드로 광장에 모인
15만명의 군중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처음 군중 앞에 서실 때에
교황님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연단에 서기를 거부하시고 “나는 여기
아래에 서겠습니다.” 하셨습니다. 그 후 추기경단이 머무는 숙소로
미니버스를 타고 이동하셨습니다. 그곳의 추기경단은 새 교황을
맞이하려고 도열해 있었습니다. 그 때 버스에서 교황이 내린 것입니다.
교황님은 전용 리무진 기사에게 “추기경들이 타고 가는 버스에 함께
타고 가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본인이 묵었던 숙소에서
직접 숙박비를 지불하셨습니다. 숙소에서 교황청으로 가실 때에도
전용차를 타지 않으시고 일반 버스를 이용하셨습니다.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전화를 걸 때도 직접 교환원에게 총장 신부를 바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교황님의 몸에 밴 겸손한 생활의
일부입니다.
미국의 신문기자로 40년간 생활을 한 필립 얀시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8천여 명의 유명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깨달은 바를 자기 회고록에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생여정에 있어서 사람의 유형은 스타형(Star)
과 섬김형(Servant)이 있다 는 것입니다.
스타형에 속하는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선전만 하며 저 잘났다는 사람입니다. 기자가 볼 때는 잘난 것도
없고 빈껍데기뿐인데 자기를 선전해 달라고 매달린답니다.
여러분 스타가 뭔지 아세요? 스스로 타락한 사람입니다. 잠언서에
보면 “네 입이 아니라 남이 너를 칭찬하고 네 입술이 아니라 다른이가
너를 칭찬하게 하여라.” 하고 자화자찬하지 말 것을 권고 하고 있습니다.
“입을 조심하는 이는 제 목숨을 보존 하지만 입술을 열어젖히는
자에게는 파멸이 온다.”(13,3) 고 말합니다. 그러니 결국 스타형은
파멸을 자초하는 형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하지 마십시오. 칭찬은
남이 해 주는 것이지 제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자랑해 주십시오.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섬김형에 속하는 사람은 그들은 언제나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이롭게 하며 기회가 있으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랍니다. 그야말로 콩 한쪽도
나눠먹고자 하는 유형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사람은 대체로
소득이 적고, 오랜 시간 일을 해야 하고 드러나는 박수갈채도 없지만
존경을 받는답니다.
바로 여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희생하며 봉사하는
삶을 사는데 왜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인정받지 못하느냐? 부자로
살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좋은 일을 했으면 그만큼
잘되어야 하는데…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14,14).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앞에 것을 추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상
것을 추구하기를 바라십니다. 곧 사라지고 말 것에 눈멀지 말고
영원한 가치에 마음을 두기를 바라십니다.
요즘시대를 피알시대라고 하나요? 자기를 알리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피알시대란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 알리는’ 것입니다. 천상것, 영원한 생명에
들지 않으면 피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얼마나 신이 낫겠습니까? 능력이 드러나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19-20). 고 하셨습니다. 지금
인정을 받고 칭찬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욥기1장 13절 이하를 보면 욥의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소와 나귀, 양, 머슴들, 심지어 자식들까지 죽음에 이르는 환난이 왔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깍았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말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1,21). 이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니 하느님을 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겸손이란 다름아닌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덕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섬김형의 삶을 말없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겸손의 상급은
결국 여러분의 이름을 하늘에 영원히 기록 하게 될 것입니다.
마더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우리가 겸손하다면 그 무엇에도 초연할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낙망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을 듣는다
해도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고 당신 자신을 “나는
하느님 손에 잡힌 몽당연필” 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몽당연필로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저를 가져다가 좋으실
대로 쓰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고 맡겨 드리는 그 겸손의
삶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성 토마스 아 켐피스도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고 잘 있으니, 그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겸손한
사람인지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바리사이들은 대개는 덕이 있고 결점이 없으며,
가난하고 욕심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자비로운 행동을
선전의 수단으로 눈에 보이게 이용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들은 열심한 유다교 신자들이었고 그들은
유다민족에 있어서는 헬레니즘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노력한
독립투사들이었으며 경건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로부터 받을 존경심을 그들이 스스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스타형이었습니다. 존경심은 누군가에게
강요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내세운다고 얻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오히려 밥맛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아지지 못하였기에 부정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기 마련입니다. 누가 만일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에 앉는 척한다면, 그는 끝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1베드5,5-6).
그러나 겸손한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좋은
결심을 해도 인간적인 마음이 금방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꾸준한
기도와 하느님 말씀을 듣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젖어들지 않고는 결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겸손을 배우고 또 익혀서 부디 여러분은 스타형으로 살지 말고
섬김형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서로를 섬기십시오.
겸손하게 섬기면 다 잘 될 것입니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버림받은 자의 표시이고, 겸손은 선택된
사람의 표시입니다”(성 그레고리오). 교만에는 재난이 따르고 겸손에는
영광이 따릅니다(잠언29,23).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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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의 한 골목에 맛좋기로 소문난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상호도 간판도 없었지만 미각과 식도락에 예민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골목에 새로 음식점이 생겼는데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집”하고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얼마 후 두 번째 음식점이 생겼습니다.
그 집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집” 이라고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아마도 후발 주자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터줏대감격인 식당에서는 뒤 늦게 시작해 놓고서는
자기 자랑만 내세우는 식당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간판을
내 걸었습니다. “이 골목에서 제일 맛있는 집”하고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원조’, ‘진짜원조’, 심지어 ‘태조’, ‘시조’라는 말을 붙여서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려는 곳이 많습니다. 식당은 맛으로 승부를
내야지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빛이 되어야지 천주교 신자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무엇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지 말고 삶의 향기를 통해 전해야겠습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인간의 품위는...
얼마 전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방에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냥 무작정 밖으로 나가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비까지 부슬부슬 오는 것입니다. 괜히 기분이 더 안
좋아지더군요. 부슬부슬 오는 비가 마치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거의 1시간 가까이를
걷다가 다시 사제관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우연히 어떤 자매님을 만났는데,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어제 낮에 산책하시는 신부님을 봤어요. 우산을 쓰고 깊은
사색에 잠겨서 홀로이 산책하는 모습이 정말로 멋있었어요.”
저는 힘들고 어려워서 그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싶어서 산책하고
있었던 것인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런 내가 오히려 멋있게 보였나
봅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은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다른 사람의 눈에서는 멋있게 보이고 부러워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스스로가 힘들어 할 뿐이지, 엉망진창의 시간도
아니었고 최악의 순간도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미워하셔서 그런 시간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가장 좋은 시간을 주셨는데,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주님께서 가장 좋은 시간을 주셨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들을
내세워서 어렵고 힘들다고 불평불만 속에 빠지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 뜻은 자신을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세상의 기준들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추는
것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부유한 이웃들만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과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그 보답을 하느님께서 직접 해주신다고 하시지요.
인간의 품위는 오로지 주님만이 높여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직접 높여 주시는 그 보답을 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큰 꽃은 단지 클 뿐이고 작은 꽃은 단지 작을 뿐이다. 오래 피어 있는
꽃은 오래 피어 있을 뿐이고 일찍 지는 꽃은 일찍 질뿐이다. 그것은
차이이고 다양성일 뿐 우열이 아니다(이승헌).
송태일 신부의 아버지 송준호(마티아) 아버님의 칠순미사.
영육간에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첫 마음(정채봉)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고 정채봉 시인의 ‘첫 마음’이라는 시입니다. 이처럼 첫 마음을 늘
간직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을 만났던 그 첫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진정한 행복.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9월1일 연중 제22주일 복음묵상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루카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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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를 바라지 않는 베풂.
이를 봉사라고도 하고 선행이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감동한다.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살만한 세상임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전염병 아닌 전염병에 감염되고 만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사실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운 우리네 삶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단계 넘어서야 한다.
선(善) 자체가 주는 선물이 있다. 아름다운 일을 하는 동시에 그 대가를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 선물이자 대가는 행복감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순간 그 행복감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좋은 마음이
서운함을 넘어 미움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냥 좋아서 하는 우리여야 한다.
그것이 옳기에 하는 우리여야 한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우리여야 한다.
‘주고 받는다(Give-and-take)’란 말이 너무도 귀에 익숙한 세상이다.
능력이 되면 그냥 주면 된다. 그것이 행복한 일이다.
순수하게 주어야 한다.
세상이 바보라고 해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우리여야 한다.
사랑에도 정의에도 평화에도 계산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그 안에서 어떻게 진정한 행복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보여주신 길을 걸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여러분은 행복해야만 하는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것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답변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끝자리"
2013년 다해 9월1일 연중 제22주일
<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높아질
것이다. >
복음 : 루카 14,1.7-14
< "끝자리" >
우리는 모두 미운오리새끼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오리가
태어났는데 형제들과는 너무 모양세가 달라 형제들은 물론 부모님께도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이에 시름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자신과 비슷한 모양과 목소리를 지닌 새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백조들입니다. 이에 삶의 활기를 찾아 백조의 삶을 기쁘게 살아간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안합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만 누구도 그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다만
부모님만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너를 낳았단다!’하며 내가 존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열심히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 느끼며 갖는 마음이 ‘자아존중감
(自尊感)’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마음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존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자존감은 내 스스로가 아닌 어떤 대상을 통하여 얻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마치 강아지를 사람취급하면 그것이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운오리새끼에서 보듯이 이 자존감, 즉 나도 귀한 존재의
이유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갖지 못하게 되면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 자신이 귀중한 존재임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습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직 자존감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은
아직 불안한 어린이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어른이 되어도 스스로 자신이 존귀한 존재임을 인정받고 싶어 할까요?
그 이유는 부모님의 사랑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춘기입니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해서 만들어 준
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나의
머리카락 하나도 다시 만들어 줄 수 없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때는 더 원초적인 나의 근원, 즉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분이 나를
존재하게 해 주셨음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면 영원한 불안감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시대의 탈옥자 신창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다른 많은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그렇게 만든 가장 큰 책임은 부모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 삶을 자포자기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육성회비와 급식비를 가져오라고 독촉했고 그것이 싫어 학교를 빠지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자신을 속였다는 이유로 아들을 때렸고 나중에는
아이들에겐 전혀 관심 없는 젊은 새엄마까지 들어왔습니다. 새엄마는
신창원의 동생이 아픈데도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결국 가출을 했다가
갈 데가 없어 돌아와서는 또 맞고, 학교도 집으로도 세상에서도 자신을
받아줄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에게 대한 증오, 아버지에 대한
증오, 새엄마에 대한 증오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입니다. 미운오리새끼
신창원은 작은 도둑질과 싸움으로 시작하여 남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살아가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죽지
못해서 살게 되더라도 폭력과 쾌락, 재물 등을 삶의 의미로 붙들게
됩니다. 그런 것들의 집착이 커지게 되면 범죄자까지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나의 존재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극도의 불안함 속에 죽지 못해 그것들이라도 붙들고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창원이 요즘 조금 변했습니다. 사실 많이 변했습니다. 바로
이해인 수녀님과의 ‘만남’을 통해서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사랑과
종교의 의미를 알려주었습니다.
“사랑해요, 창원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알죠? 우리 모두 기도하며
응원하고 있으니까 힘내요.”
이해인 수녀님을 이모라 부르며 둘은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과 이해인 수녀님의 암투병 소식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증오하던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자신도 죽고 싶을 정도로
한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녀님께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수녀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렇게 썼습니다.
“새장 같은 공간,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 나약한 의지를 어찌할
수 없는 장벽 앞에서 절망하며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바삐 날아온
사랑이 있었습니다. 35년이 흘러 지금은 희미해져 버린 어머니의 향기
그리고 요람 같은 포근한 가슴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홍역을 앓듯 마음의
몸살을 앓을 때면 마치 곁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처럼 한 걸음에
달려오셨지요. 이모님은 때론 어머니처럼, 때론 친구처럼 그렇게 그렇게
저의 공간을 방문하여 손을 내미셨습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심정으로 내리사랑만 베푸시다 지금은 알을 품은 펭귄의 헤진 가슴으로
홀로 추운 겨울을 맞고 계시는군요. 처음 이모님의 병상소식을 접했을
땐 눈물뿐이었습니다.”
자아존중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한다고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챙겨줄 여유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기만을 바랄 뿐인 것입니다. 바로 윗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입니다. 남을 높여주기 보다는 남들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창원은 이제 아버지의
마음도, 수녀님의 마음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기
시작하면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은 좀처럼 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범죄를 저지를 때는 남의 고통에 대해서는 극히 무감각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전에는 남의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젠 자신이
남의 감정을 알아주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을 둘로 나눈다면 아이와 어른일 것입니다. 아이 때는
사랑을 받으며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느껴야 할 때입니다. 그 때는
부모로부터 왕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신창원은 이렇게 대접만 바라는
아이였다가 어떤 한 사람의 사랑으로 어른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나게 해 준 어른, 그 분이 이해인 수녀님인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이 택한 자리가 바로 남들이 원하지 않는 가장 ‘아랫자리’,
즉 가장 ‘끝자리’인 것입니다. 이 자리를 다른 말로 하면 ‘희생’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을 위해 택하는 자리, 그것이 희생인 것과
같습니다. 이 끝자리를 택할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고 자녀에게도 삶의
의미를 심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끝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마구간이었고, 성가정이었으며, 차디찬 십자나무의 멸시와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귀중하고 사랑받을만한 존재인지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어른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얻게 된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이
사라져도 남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십자가, 멸시, 고통, 죽음을 내 이웃을 위한 제물로
바칠 줄 알 때 하늘나라에서 커다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내가 제물이 되는 단계입니다. 나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제물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세상에 온 것처럼, 우리 존재의 궁극적 의미는 바로 이 끝자리,
즉 십자가의 희생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월요일 묵상은 쉬겠습니다~ ^^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연중 제22주일
2013년 다해 9월1일
매일 교구청에서 식사를 합니다. 교구장님을 중심으로 자리를
배정합니다. 아침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식사를 하지만, 점심과
저녁에는 자리가 조금씩 변경됩니다. 교구장님께서 외식을 하시면
그 자리에 사무처장 신부님이 앉습니다. 사무처장 신부님께서
외식을 하시면 그 자리에 관리국장 신부님께서 앉습니다. 관리국장
신부님께서 외식을 하시면 그 자리에 사목국장 신부님께서 앉습니다.
저는 그런 순서를 잘 몰랐습니다. 당연히 저의 자리인줄 알고 앉았는데,
제 자리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잔치에
초대 받거든 가장 낮은 자리에 가서 앉으라는 말씀입니다.
동양의 성현인 맹자가 제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만약에
지금 약손가락이 구부러져서 펴지지 않는다고 하자. 이것이 별로
아프지도 않고, 일을 하는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일 그것을 펴지도록 고쳐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진나라나 초나라같이 먼 곳이라도 기꺼이 찾아갈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가 구부러졌다고 걱정할 줄은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비뚤어져 있는 것은 걱정할 줄 모른다. 이것이 무엇이 정말
값진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나 또는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어린 오동나무라도 이것을 잘 키우려고 마음먹으면 그 방법을
알게 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그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 몸을 오동나무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것이 더 귀하고 어느 것이 덜 귀한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어느덧 9월의 첫째 주일입니다. 들판의 곡식들은 이제 곧 알찬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알찬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겸손과
온유의 거름을 듬뿍 주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인간이 하느님 앞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겸손
2013년 다해 9월1일 연중 제22주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1.7-14
인간이 하느님 앞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겸손
잔치에 초대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참 못 볼꼴을 보셨습니다. 초대받는
손님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 생애가 겸손과 낮춤 그 자체였던 예수님이셨기에
그런 모습을 견디기가 정말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덕행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행인 겸손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모든 덕행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이 바로 겸손입니다.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이 또한
겸손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영성생활을 해나가셨던 신앙의 모델들, 모든
성인(聖人)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덕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열등감에 의해,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나는 잘 못합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모릅니다’ 라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능력이 있고, 갖출 것 다 갖췄으며, 내가 상대방보다
다방면에 우월하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양의 덕이 바로 참된
겸손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더욱 요구됩니다. 크신 하느님,
관대하신 하느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나였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티끌
같은 존재, 먼지 같은 존재, 한 마디로 무(無)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생명으로 나를 초대해주셨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봉헌생활자로 초대해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는 한 나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겸손의 첫걸음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시간에 종속된 유한한 존재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필연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유한한 우리들입니다.
채무자이신 하느님 앞에 채권자들인 우리들입니다. 무죄한 하느님
앞에 죄인인 우리들입니다.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 피고인들인
우리들입니다. 순수한 존재 앞에 선 불순자인 우리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태도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지만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덕분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맨 끝자리라도 감지덕지하면서, 늘 기뻐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는 아침마다 묵묵히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자신의 등에 짊어집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이 오면 낙타는 또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조용히 기다립니다.
언제나 주인 앞에 고분고분 무릎을 꿇는 낙타 모습에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매 순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인 앞에
말없이 무릎 꿇는 모습, 매일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행하는 모습, 주인이
매일 얹어주는 짐을 아무 불평 없이 지고 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낙타는 자신이 지고 가는 짐으로 인해 의미가 있습니다. 낙타에게 짐은
무거우나 짐으로 인해 낙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고통과 십자가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그 무엇이나 그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더욱
겸손해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생각할수록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할 때 사실 우리는 가장 약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가장 강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약자이기에, 또는 무지하기에 뒤로 물러서는 나약함이나
비굴함이 결코 아닙니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는 일입니다.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어놓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는 일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내려만 갑니다.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심연의 밑바닥 거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열린 영성 강좌 안내
다가오는 2015년은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한국 살레시오회는 교우들이 교회 안의 다양한
영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삶 안에 적용시키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열린 영성 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이 강좌를 통해 많은 교우 분들이
모범적인 신앙의 선배들을 만나고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서길
바랍니다.
개최 일시: 2013년 9월부터 매주 월요일 10:00~13:00
(10:00 고해성사, 10:30 강좌, 11:30 미사, 12:30 식사)
장소: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회 교육관
강사: 양승국 신부, 백광현 신부, 장동현 신부 외 살레시오 회원들
문의: 02-828-3500
*9월 2일 월요일 첫 강좌가 시작됩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신세를 지면 갚으려는 마음
2013년 다해 9월1일 연중 제22주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인간이 알아냈거나 깨달은 게 아니라 봅니다.
자연의 운행에서 하늘과 통하는 어떤 힘(에너지)이 알려주었다고 봅니다.
성현님들, 깨달은 자들,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말씀님 같은 분들입니다
사람이라면 신세를 지면 갚으려는 마음이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를 그대로 갚으려 해도 못 갚는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런 마음을 하늘의 힘이 모았다가 자비로운 마음에게 부어주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3)”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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