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매섭게 추운 겨울 어느 날!
83세 언니의 비보를 들었다.
이 세상에 혈육이라고는 딱 한분. 나보다 14년 위인데 돌아가시다니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언젠가 서울 올라갈 때, 언니 집에 간다고 전화했더니 백숙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제는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 한다.
혼자 살던 언니는 늘 잠자는 듯이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때가 언니와 얼굴 보면서 이야기 한 게 마지막이었다.
언니의 대녀가 문을 두드리고 전화해도 기척이 없으니
큰 아들에게 엄마 집에 좀 가보라고 전화하면서 위급한 상황을 알게 됐다.
자식이 아무리 효자라고 해도 늘 곁에 있을 순 없다.
정이 많은 큰아들과 막내아들은 가까이 살면서 먹을 것을 살뜰히 챙기고
자주 들여다 보았지만 마지막 순간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자식들이 도착하니 당뇨병이 있던 언니가 이마를 다친 채 저혈당으로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곧 숨을 거두었다.
주변에서는 마지막 가는 언니 얼굴이라도 보라고 권했다.
나는 살아생전 모습을 기억하고 싶었다
이마의 상처가 내 가슴에 아픔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 같아 돌아가신 언니 얼굴은 보지 않았다.
마지막 혈육이었던 한분, 언니를 영원한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지만 또 다른 슬픔이 나를 통곡하게 한다.
인생이 너무 허무했다.
언니는 내가 5살때 우리집과 같은 경북 풍기로 시집갔다.
나를 업어키운 언니가 시집을 갔지만 천지 분간도 못하고 언니 집에가서 살다싶이했다.
나보다 2살 많은 언니 시누이와 같이 소꿉놀이와 숨박꼭질을 했다.
혼자 자란 나는 언니 시누이를 친언니처럼 좋아하면서 붙어 다녔다.
해가져도 집에 갈 생각을 안하니 언니 시할아버지는 "이제 해가 졌다. 집에 가야지" 하신다.
그래도 눈치없이 형부와 언니가 자는 방에서 같이 자고 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철이 너무나도 없었다.
몇 년 후, 언니 시댁은 경북 봉화군 석포면 탄광촌에 가서 장사를 한다고 이사갔다.
언니와 형부는 소를 기르며 농사를 짓는다고 석포 산골로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 방학이면 산골 언니 집에 갔다. 풍기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영주에서 기다렸다가 갈아타곤 했다.
내가 꽤 똘똘했던 것 같다.
언니 시댁에 가면 탄광에서 트럭으로 석탄을 실어 날으는 아저씨에게 부탁했다.
언니 시누이와 나를 언니네 집으로 가는 신작로에 내려주면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따라 언니 집엘 갔다.
언니는 늘 반색하며 나를 안아주었다.
언니 시누이와 친정 조카들과 함께 지내는 게 마냥 즐거웠다.
그런데 언니는 시할아버지를 산골에 모시고 살았다.
그래도 풍기에서처럼 "해졌다. 집에 가라"는 소리는 안하셨다.ㅎ
지금 생각하면 TV에 "나는 자연인이다." 라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산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 그대로였다.
사방을 둘러봐도 숲속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밤이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말린 쑥으로 모기 쫒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감자와 옥수수를 삶아 먹으면서 밤하늘에 별자리를 찾아보고 별도 세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 별은 더욱 반짝반짝 빛났다.
반딧불도 불똥을 몰고 폴폴 날아다닌다.
여러가지 풀벌레도 앞을 다투며 노래를 한다.
지금은 볼 수도 없는 자연 그대로를 오롯이 느끼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산속에서 내려오는 물을 통나무를 길게 골을 파서 걸쳐 놓은 곳은 멱감는 장소였다.
물이 떨어지면서 파인 웅덩이에서 신나게 놀았다. 다래도, 빨간 망게도 따먹었다.
나의 유년 시절, 잊을 수 없는 산골의 아련한 아름다운 추억이다.
언니는 5년 동안 고생한 돈을 정리해서 강원도 정선군 고한으로 이사갔다.
새로운 장사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현찰이 많이 있는 것을 안 언니 시동생이
어떤 사업에 투자하면 대박난다고 권유했다.
거절못한 부부는 산골에서의 고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어디에도 평탄한 인생은 없는 것 같다.
누구나 벼랑 끝에 섰다가도 오뚜이처럼 일어나는 게 또한 인생이다.
고한에서 빈 털털이가 된 형부와 언니는 생강 도너츠를 만들어 대박을 냈다.
철물점을 인수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다.
탄광 경기가 없어질 즈음, 자식들 교육때문에 사놓았던 서울집으로 이사갔다.
점포에서 나오는 세에 큰 평수의 분양아파트 등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생지사 새옹지마. 사람 좋고 정이 많은 형부는 환갑 지나자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고 혼자라는 무서운 현실속에 언니의 충격은 이만 저만 아니었다.
자식들이 5남매나 있지만 배우자가 없는 현실은 공허했다.
결국 외로운 노후를 혼자 보내면서 삶의 마무리했다.
언니는 아픈 엄마를 대신한 나의 엄마였다.
영원히 볼 수 없는 언니의 모습, 벽제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항아리에 담아
진열장속에 두고 오는 마음이 너무나 참담했다.
왜 그렇게 갈 때는 허무하고 슬픈지 저절로 눈물이 났다.
언니 유골은 나중에 풍기 형부 산소에 합장했다.
나부터 지금이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이란 걸 모르고 산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긍정적인 삶을 살아도 후회가 따를 텐데.
하루 하루 주어진 삶을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게 인생의 승리자가 아닐까.
선물같은 오늘도 기쁘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