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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획연재 -미국의 여성 불교 >
제쭌마 텐진 빠모
(Jetsunma Tenzin Palmo)
글 / 편집부
텐진 빠모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스님이 아니지만 서양인으로 불교계 발전을 위해, 비구니 불교계를 발전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고 있어 소개한다.
속명은 다이앤 페리. 194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8세에 책을 통해 불교에 관심을 갖고 1964년 스무 살에 인도로 가 영적 스승 캄툴 린포체를 만났다. 서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티베트 불교 계를 받았다. 그리고 수백 년간 금녀의 영역이었던 티베트 수도원에 들어갔다. 수행자 80명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는 그는 사원 내에서의 극심한 차별을 경험하면서 “반드시 여성의 몸으로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서원을 세우고 인도 최북단 ‘타율곰파’(선택된 장소라는 뜻의 티베트어)로 떠나 동굴생활 12년을 포함해 총 18년간 은거 수행을 했다. 12년간 히말라야 동굴에서 은둔 수행한 이야기가 ‘Cave in the Snow-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 책을 냈다. 수행의 힘을 바탕으로 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들려준다. 텐진 빠모 스님은 “남성이냐 여성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수행자냐 수행자가 아니냐 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설파한다. 지금 자기가 선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행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찾기를 권하다. 스님의 이런 이야기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세상과 사물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히말라야 지역에서 온 100여명의 어린 여성이 승려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동규 갸찰링(Dongyu Gatsal Ling) 비구니 사원을 인도 다람살라 근교에 설립하였다. 또한 독덴마 요기 전통을 수행하는 비구니들을 지도하고 있다. 2008년 둑빠까규의 수장인 제12대 걀왕둑빠로부터 여성수행자의 최고 지위인 제쭌마 칭호를 받았다.
아래의 글은 샤카디아 코리아서 번역하여 불광출판사에서 발행한 <불교 페미니즘과 리더십>에서 텐진 빠모의 글을 옮긴다.
노년을 찬미하며
이 글은 2013년 1월 5일에서 12일까지 인도 바이살리에서 열린 제 13차 샤카디타 세계불교여성대회(13th Sakyadhita International Conference on Buddhist Woman) "Buddhism at Grassroots"에서 발표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둑카(dukkha)' 혹은 고통을 생로병사로 정의하셨다. 우리가 젊어서 죽지 않는 이상, 우리 모두는 늙고 죽음을 경험할 것이며 이것은 인간 모두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젊음을 숭배하고 노쇠하면서 죽게 되는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속 젊고 아름다워 보이기를 바란다. -사실, 아름다움이란 대체로 젊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늙음을 멀어지게 하고 영원토록 젊게 머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책과 글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주름살 제거 수술을 하고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더라도, 마침내 이 몸은 쇠약해질 것이고 병들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이것이 조건에 의해 생성된 모든 존재들의 본질이다. 사실 불교는 삶과 죽음에 관련된 불편한 사실들을 드러내 보여주며 이것들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삶과 죽음을 초월하게 한다.
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노화를 자연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가능한 오래 피하거나 부정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노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한 지식과 이해력을 갖춘 현인으로 높게 평가된다. 그래서 노년이란 말은 종종 지혜나 경험과 동등하게 받아 들여진다. 가족 중의 나이든 구성원들은 존경받으며 조언자, 안내자의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사회 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서양에서조차 현명하고 나이든 여성(마녀뿐만 아니라)이라는 원형적인 캐릭터가 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마법사는 대개 노인들이다. 실로, 사랑과 지성으로 빛나는 눈과 주름진 얼굴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50살이 넘은 여성들이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 질서에서 노인들은 더 빨리 밀려나고 있으며, 연장자들로부터도 소외되어 있고, 주위로부터는 무시당하고 있다. 그들은 쓸모 있는 날들이 끝났으며 더 이상 사회에 기여할 것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결과적으로 나이 든다는 것은 공포스러운 것이며 최대한 피해야 할 그 무엇이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어떻게 이 피할 수 없는 노화를 우리 삶에 의미가 있는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전통적인 불교 국가들에서는, 아이들이 자라고 집을 떠날 때, 직업경력이 끝나갈 때, 외향적인 활동들이 줄어들면서 안오르 침잠하는 경향들이 늘어날 때, 사람들은 죽음과 미래의 환생을 좀 더 잘 준비할 수 있도록 불법에 더욱 관심을 갖고 삶을 정리한다.
전통적인 불교 사회에서, 나이든 이들은 ‘팔계(8 Precepts)'를 받고, 공덕을 쌓기 위해 명상수행, 유물 및 유적지 참배, 절, 염불, 사원순례 등에 전념한다. 불법(佛法)이 삶의 중심이 되고, 신심은 성숙해진다. 그러므로 중심축이 바뀌었을 뿐 삶은 여전히 의미 있고, 중요하다.
특히 여성의 젊은 시절은 대개의 경우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이행하는 시기이다. 여성은 우선 남성들의 신체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그들의 환상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고 유혹적이기 위하여 노력해야만 한다. 다음 역할은 가족을 돌보며 가정을 키우는 데 헌신하는 아내이자 어머니다. 게다가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하루 종일 전력투구해야 하는 직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사는 스트레스성 생활방식이다
그러나 심지어 현대사회에서, 이제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직업인으로서 삶의 의무를 완수한 여성들이 이제 예술, 대체치유 분야, 심리학, 그리고 영적 탐구와 수행 등과 같은 자기 성찰적인 직종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대개 고등교육을 받았고 의욕이 넘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배워서 자신의 활동 영역을 넓혀나갈 능력을 갖추고 있다. 골프나 치고 텔레비전이나 보며 노년을 소비하는 대신, 그들의 내면세계는 더욱 더 성장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플로리다의 한 부유한 작은 마을에 사는 여성들과 만났는데 그들은 노련을 , 영적 수행과 자신의 이웃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도 도움의 손길을 뻗는 자선사업에 바치고 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자기 시간을 내주면서 그들은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년이 이전보다 더욱 만족스럽고 의미 있어졌다고 말했다. 이제 그들은 단순히 사회의 기대에 맞춰 살기보다는 자신의 순수한 관심사를 추구할 수 있다. 이전의 삶에서 추구했던 것들이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긴 했지만 그들은 이제 비로소 삶의 이유를 찾았다고 느낀다. 마치 천천히 자라나다가 때가 되었을 때 그 진정한 특성을 드러내는 나무처럼, 죽음을 앞둔 이들의 가장 커다란 후회가 “다른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진실된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을 ----”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스물다섯 살의 육체를 좋아한다. 그러나 수물다섯 살의 정신으로 돌아가기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늙음이 동반하는 신체적, 정신적인 유연성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노화가 다가오는 것을 단지 두려워하기만 하는 대신에 이 새로운 삶의 단계를 환영할 수 있으며 새로운 가능성들을 탐험할 수 있다. 늙어가는 것을 우리의 모든 꿈들이 점차 쇠잔해가는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새롭고 흥미진진한 시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볼 것인가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늙어가면서, 우리는 동시대의 사람들-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 구성원들이 질병과 죽음에 굴복하는 것을 보게 되고 이러한 단계들을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강요받는다. 어성 불자로서 우리는 더욱 큰 자유와 더욱 의미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해 줄 중요한 역할이 있다. 비록 결가부족하고 명상하기엔 무릎이 너무 늙었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픈 곳들 때문에 활동에 약간의 지장이 있을지라도 마음은 여전히 밝고 청정할 수 있다. 우리의 명상은 더욱 깊어지고 성숙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으므로, 영적인 길을 추구하고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하며,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 또한 이롭게 하는, 의미 있고 즐거운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삶에서 얻은 능력들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멋진 기회이다. 옛 삶을 버릴 필요 없이 새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일단 ‘공식적인’ 직업과 책임이 끝나면,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하거나 새로운 기술이나 운동, 그 밖의 다양한 것들을 배운다. 불교도로서 우리 자신에게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제 세속적인 책임은 완수했으니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이 삶을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할까? ” 이것은 반드시 긴 시간 동안 안거수행을 하거나 불교 공동체의 일에 완전히 몰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 자신을 계발하고 마음을 길들일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다. 나이 들면서 격정의 소용돌이는 잠잠해졌고 어느 정도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으며 수행 또한 수년에 걸쳐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수행의 어린 보리수를 키워 열매를 맺도록 하고 최대한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북돋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갖게 되었다.
몸의 기능들이 쇠퇴해감에 따라 앞으로 어디서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도 생긴다. 가족 단위가 감소하고 가정의 기능을 제공할 수 없게 되면서 노인들은-특히 서양에서 현저하지만 점차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데- 양로원에서 노년을 보내야 할 기능성에 직면하고 있다. 영적인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간호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생을 마쳐야 하는 것은 매우 우울한 전망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은퇴 후의 노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을 건립하자는 논의가 있어 왔다. 주된 문제는 재정일 것이다. 적당한 토지와 건물들, 그리고 시설 유지비 등에는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은 노력할 보람이 있는 일이기 때문에 많은 생각과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설사 신체적인 기력은 쇠퇴할지언정 아직 신체적 기능들이 작동할 때, 우리의 노년을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자신의 가능성을 발전시킬 최고의 기회로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가 받은 사람 몸은 정말 귀중하다. 왜냐하면 몸은 우리의 마음을 계발하고 불도(佛道)를 따라 나아가기 위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후회 없이 죽을 수 있는 주변환경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의 날들을 사용하도록 하자.
나이 들면서 우리는 암이나 심장질환같이 목숨을 위협하는 질환을 앓을 수 있다. 이는 흔한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질병의 습격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하고 있다가 자면서 조용히 죽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아무 준비도 없이 죽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설사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인식할 때 우리는 차분하고 만족한 태도로 이생을 떠날 수 있도록,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준비할 기회를 갖게 된다.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고 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것을 앎으로써, 우리는 보다 중요한 것들에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면서 많이 변하는데 집착과 오랜 분노들을 마침내 놓아버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차이들을 조화시키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며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랑받고 있으며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기회이다. 죽음이 다가온 지금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단 집착만 제외하고.
임종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수행이나 기도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 가장 좋다. 아니면 적어도 빛에 집중하거나, 빛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라. 주위 사람들은 조용히 그 상황을 받아들이며 비통해하지 말고 부드럽게 염불하는 것이 좋다.
선한 삶을 살아왔다면, 특히 불법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했다면,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consciousness)은 익숙한 길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어느 정도 우리의 생각과 감정들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앞으로의 여정이 자신이 바라던 길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덤불도어 교수는 어린 해리포터에게 충고했다.
“잘 준비된 마음을 지닌 이에게, 죽음은 단지 놀라운 모험일 뿐이다.”
이 글은 본지 2013년 12월호에 실린 글인데 다시 소개한다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cave in the snow)의 저자로 히말라야 동굴에서 홀로 14년간 수행을 하신 텐진 빨모 스님이 201년 11월6일, 7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샤카디타(Sakyadhith) 한국 창립 축하를 위한 이번 방문에서 기념 강연 및 좌담회는 이화여대에서 “여성과 영성”을 주제로 시작하였고, 서울대에서는 “영국인 티벳불교 여성 수행자의 삶과 수행” 그리고 조계사에서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 마지막으로 봉녕사 강원에서 “세계 비구니 계단 설립의 중요성에 대하여” 한 법문의 일부를 요약해 소개한다.
글 / 전현자 (본지 취재기자)
불교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도교에서 거의 모든 경전들은 남성학자 , 그리고 많은 경우에 비구스님들, 남성 성직자들이 작성한 것이다. 그럼으로 남성들이 정신적으로, 지적으로 훨씬 우수하다는 개념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불교 종파에서도 그러겠지만, 티벳 불교에서는 대부분의 전기들은 남성들에 대해서 쓰여져 있다. 여성에 대해서 쓰인 것은 거의 없고, 있어도 비구니 스님들이 아니라 여성 불자에 대해서 쓰여져 있다. 이러한 내용들이 여성이 항상 뒤떨어졌기 때문에 남자가 필요하다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 때 어떤 티벳 라마 (Lama)께서 나에게 티벳 불교에서 남자들에 대해 쓰인 전기들이 수없이 많고 여자들은 거의 없다는 말을 하면서 “이것은 여자들에게 이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해 전기가 쓰여지면 거만해지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머리가 안 발달된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밀라레빠 (Milarepa)처럼 전기가 쓰여진 모든 남자들은 다 불쌍한 대상이라고 해야 하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그래서 지금 어떤 현상이 벌어지고 있냐면, 사람들이 남성에 관한 것에 대해서만 읽고 여성들은 무시되고 있으니까, 여자에 대해서 쓸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착각을 전달한다. 그리고 예를 들자면, 한국의 상황은 잘모르지만, 티벳의 비구니 절에 들어가면, 비구 절보다 훨씬 단순한 것 만이 아니라, 불상들이 거의 다 남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여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를 생각하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한 때 나는 우리 비구니 절에 있는 비구니들에게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본질적으로 더 똑똑하냐?”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네. 그렇죠”라고 했고 나는 “아니, 그렇지 않다”라고 했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모두 다 교육 된 것에서는 그 능력이 같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증명이 되어있다. 우리는 모두 그냥 인간이다. 나는 절대로 여자가 더 똑똑하다는 말은 하지않는다. 단지 전혀 덜 똑똑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공부를 한 사람들은 다 남자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왜 그런가? 그들이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높은 자리에 올라서려면 남자가 되야 한다는 개념이 세워져 있다. 왜냐하면 여성의 몸이 남성의 몸보다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알고 있듯이, 근육의 힘이 부족할 지는 모르지만, 여성의 몸이 남성보다 절대로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동전과 같다. 앞면과 뒷면이 있을 뿐이다. 앞면이 뒷면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은 같은 동전에 두 면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전반적으로 같은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다.
요즘에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남성만큼 교육되어 있다. 물론 교육을 받은 후에도 아직 문제가 있지만, 기회는 어쨌든 있다. 물론 아직도 여러 나라에서 여성이 학교조차 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기회의 측면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훨씬 줄었다. 한국이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육과 기회이다. 그리고 나는 여성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은 다른 여성들일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모두 힘을 모으고 서로 지지한다면, 남성들은 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남성들의 편을 들 때가 많고 여성 스스로를 비하하며 또 다른 여성들을 비하하고 있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그런 예가 있었는데, 영국 성공회의 주교회에서 여성 성직자들이 생긴 이후, 어떤 성공회 주교가 “ 여성 주교를 세우자”라고 하여 회의에서 그 안건으로 투표를 하자 하였는데 거절당했다. 누가 거절 했는가? 여성 성직자들이었다. 여성주교를 여성 스스로가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여기에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물어봐야 된다. 우리는 모두 엄마가 키웠다.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엄마가 아들과 딸을 다르게 대하며 키운다고 한다. 비록 의도된 것은 아닐지라도 아들과 딸을 다르게 대한다. 나의 어머니는 굉장히 자유로운 (liberal) 여성이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내가 2살때 돌아가셔서 나의 어머니께서 나와 나보다 6살 많은 오빠를 혼자서 키웠다. 그리고 그녀는 굉장히 강한 여자로써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가게도 운영했다. 하지만 집안 일과 요리는 내가 했다.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오빠는 아무것도 안 했다. 청소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로서는 굉장히 자유로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대접 받고 여성은 배려해야 한다는 편견이 있었다.
인도에 있는 절에서 비구니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낮은 자존감과 자신감이라고 한다. 비구의 절에서는 절대로 이런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면 여성이 서로를 도와줘야 한다. 여성이 성공할 때, 그 여성을 시기하거나 무너뜨리지 말고 우리는 그녀를 지지하고 응원해줘야 한다. 우리는 자매애로 모두 함께 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사캬-디따(Sakya-dittha)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자들이 여자들을 위한 주제에 대해서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불교 단체이기 때문이다. 한번 인도 델리에서 우리는 국제 불교 연대(International Buddhist Congregation, IBC)에 참석했다. IBC라고 부르지만, 거의 남자만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International Boys Club (국제 남자 클럽) 이라고 했다. 뒷자리에 여성 몇 명이 있었지만 앞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패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다 남자였다. 그리고 세계 불교에 대한 모든 결정들은 다 남자들이 했다. 우리는 지금 2013년에 있다. 상황이 조금씩 변해나가고 있지만, 변화는 느리고 여성들이 모두 함께 모여서 “이제는 그만하자”라고 할 때까지는 더 빨리 변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화를 내거나 대적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알려야 할 것이다.
여성들은 영적으로 가능성이 굉장히 많고, 많은 경우 남성들보다 더 충실하고 헌신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왜 우리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가?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이 우리의 목소리 임에도.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없었다. 우리는 사실 말없는 다수로만 존재 해 왔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소리를 잘 들으려 하지 않는데 더욱이 소리 없는 소리를 어떻게 듣겠는가? 사실 근본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불성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불성은 성별을 넘어선다고 알고 있다. 내가 아까 언급했던 라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이 진정으로 성별을 넘어선다면, 왜 한 쪽으로 강한 편견이 있고, 다른 쪽에는 완전한 침묵으로 일관되는가?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남성들만을 탓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한테도 문제가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것이다. 지금도 여성에 관한 잡지들을 보면, 어떤 내용으로 가득 차있는가? 내가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의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적인 물품으로 생각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을 몸이라고 생각하고 남성의 애정을 일으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렇게 본다면, 남자들이 “이건 정말 매력적이야! 와 이 여자들을 봐라.”라고 할 때 탓할 수 없다. 이 것은 누구의 탓인가?
나는 명상 스승을 만날 때 마다 여자들이 훨씬 더 밝고 명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에너지를 조절 할 수 있다면, 남자들보다 훨씬 영적으로 멀리 그리고 높이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 때 나는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가진 사야도 우 빤디따(Sayadaw U Pandita)를 친견했다. 그분은 나에게 수행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은 시골마을 여자들이다라고 했다. 왜 그러냐면 그가 여자들한테 “이렇게 수행해라”라고 하면 그들은 그냥 가서 가르친 대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자들에게 “이렇게 수행해라”라고 하면 그들은 가서 “그는 이렇게 수행하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은 저렇게 수행하라고 했다”고 하며 서로 비교하고 의심을 하는데 시간을 쓴다고 하셨다. 사야도 우 빤디따는 또한 여자들은 직관이 발달돼 있다고 하면서 확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했다. 반대로 남자는 차근 차근 가는 성향이 있다고 했다. 티벳 불교에서는 칸드로마 (산스끄리뜨어로는 다키니, Dakini)라는 여성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허공에서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단계마다 분석할 필요 없이 그냥 뛰어넘을 수 있다. 이런 면이 우리 여성의 위대한 장점이다. 심지언 기독교에서도 가장 대단한 신비주위자들은 여자였다. 그리고 티벳 전통에서 지금도 많은 대단한 수행자들이 여자들이다. 우리는 500명의 비구니가 머무는 비구니 절에 살고 있다. 그녀들은 눕지도 않고 나무 상자 안에서 수행을 한다. 연세 드신 분들이 특히 훌륭하다. 하지만 이들의 수행생활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지금 이런 경우가 너무나 많다. 베트남의 사캬-디따 모임에서 7000명의 비구니가 머무는 절에 계시는 스님을 만났다. 나중에 이 절에 실제로 간 사람들과도 만났다. 그녀들은 굉장히 단순하고 가난한 작은 오두막에서 살고 언덕에 구멍을 파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수행을 한다. 이것은 수 백 년, 수 천 년 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것은 즉 누구나 똑 같은 수행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수행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여성들이 서로를 응원하고 비난하거나 질투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될 일이다. 지금 세계는 너무나 불균형적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여성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깨달은 여성의 목소리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가능성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괴로움에 빠져있다. 우리는 내면이 비어있기 때문에 술을 마시고 파티를 한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니까 관계나 재미로 채우려 애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쾌락과 행복이 같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사실 그것들은 다른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면에서 일어난다. 밖에 있는 것과 별 상관이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내 스스로 깨달았다. 내가 동굴에서 살았을 때, 사람들이 “맙소사. 눈이 많고, 춥고, 좁고, 먹을 거리도 없고… 동굴에서 사는 것은 참 끔찍하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내 자신을 어렵게 만들려고, 종교적으로 자신에게 체벌을 주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때만큼 인생이 기뻤을 때가 없었다. 내가 벼랑 끝에서 산을 바라보면서 내 자신에게 “내가 세상에서 어떤 곳에라도 있을 수 있다면, 어디에 있고 싶겠나?”하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수행하기 가장 좋은 장소였다. 나는 강제로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떤 맹세를 했기 때문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고 싶었기 때문에 있었다. 외면적으로 볼 때 고생스러워 보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진정 풍부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특히 젊은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이 밖에 있는 것으로 아는 이들이 많은데 진정한 행복은 우리 자신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만이 행복을 생산해 낼 수 있다. 이것은 한 면으로 매우 좋은 소식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들을 바꿀 수 없고, 밖에 있는 세상도 많이 바꿀수 없지만 (항상 문제들은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아!”하는 순간이 있어서 그 때부터 모든 것이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아… 아… 아…”의 순간들을 여러 번 겪는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변할 수 있고 우리의 태도를 바꾸면 모든 것이 변한다. 이렇기 때문에 진정 매우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알고는 있다. 그리고 불교는 사실 이 문제를 풀려고 한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바꾸려고만 하지 않는다. 물론 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좋지만, 진정한 변화는 우리 자신 안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
청중의 질문:
“최근 한국에서 한 서양의 사회학자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현대 사회 특히,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문제 제시를 해준 강사에게 그러한 수많은 문제들을 잘 파악해 주었는데 해결방안은 있는지를 물었을 때 그 강사의 답이 “불교”라고만 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듣지 못한 상태로 강연이 끝나 스님께 여쭌다면 불교의 어떤 면이 어떻게 현대사회의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지요?”
텐진 팔모스님:
마음입니다.
또 다른 이가 묻기를, “저는 왜 여성으로 태어나 많은 불이익과 어려움을 겪나요?”
텐진 팔모스님: 스스로 여성으로 태어날 행위를 했기 때문이며 여성인 것 만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생각을 하기 보다는 여성이 갖고 있는 장점을 생각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또한 남성인 것만으로 우월한 것은 분명 아니며 남성들도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가족을 부양하느라 어려움을 겪는 이도 참으로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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