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생 관홍장(冠紅粧)과 산홍(山紅) 1. 조선 시대 양반의 성문화
조선 시대는 축첩제가 공인되고 또한 많은 여성이 기생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두 가지 제도는 모두 양반 남성이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피 지배계층 여성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식을 많이 보아 왕실을 튼튼히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조의 왕들은 많은 여인들을 비빈으로 들이고 성적상대를 마음대로 바꾸곤 했었다. 왕이 정비 이외에 많은 여인과 성관계를 맺고 후궁으로 들이는 행위를 간통이라 하지 않았다. 간통인가 아닌가는 결국 권력을 쥔 사람의 제도에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인이 왕과 잠자리를 갖는 것은 승은(承恩), 곧 은혜를 입는 것으로 표현 된 반면, 양반집 여인이나 여염집 여인이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게 되면 간통죄로 치죄되었던
것이다. 먼저 조선조의 기생들의 삶과 사랑을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의 양반 사회의 성문화를 주마간산 격으로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1) 세종 시절에 일어난 사건들 세종 15년 병조참판 이춘생(李春生)의 딸이자 별시위 이진문(李振文)의 아내인 어리가는 양반집 부녀로서 저자 거리에서 만난 부사정 이의산(李義山)과 바람을 피우고 또 비첩(婢妾) 소생 허파회(許波回)와 간통을 했다. 그리하여 어리가는 해진(海珍)에, 이의산은 기장(機長)으로 보내졌고 허파회는 영북진(寧北鎭)군사로 보내졌다. 그러나 두 남자와 바람을 피운 양반중의 양반집 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이 다른 여인들처럼 극형을 받지 않은 연유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아주 높은 고위 공직인 승지 윤수(尹須)의 아내 조씨는 고종사촌 홍중강(洪仲康)과 잠자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님 하경천(河景千)과도 통간하였고 관찰사 이귀산(李貴山)의 아내는 지신사 조서로(趙瑞老) 와 간통하여 극형에
처하여졌다. 태조 이성계의 개국후 우부승지를 거쳐 우산기상시로 있다가 태조 7년 (서기1398) 제1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죽었던 변중량(卞仲良)의 누이 동생이 가노(家奴)와 간통한 사건과 유은지(柳殷之)의 누이동생 이
중과 비밀히
간통한 사건의 경우는 모두 죽이고 말았다. 세종 16년 종친 영양군(永陽君)의 아들로 판중추(判中樞)벼슬에 오른 이순몽(李順蒙)은 어머니 무덤에 성묘 하고 돌아오다가 경상도 상주(尙州)기생을 데리고 한 낮에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나무 그늘 밑에서 성관계를 하면서 ‘기생과 행음(行淫)한다’ 라고 고함을 질렀다 한다. 이런 광탕(狂蕩)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나 할까. 그의 아들 이석장(李石杖)은 아버지 이순몽의 첩 보금 (寶今)과 통간하여 아이를 낳았다. 당시 법에 의하면 이석장과 보금의 통간행위는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 하는
중죄였다.
그런데 정작 이석장은 옥중에 갇혀서도 보금을 불러 측간(화장실)에서 성행위를 가졌는데 이리하여 그녀가 그만 임신이 되어 쌍둥이를 낳다가 죽었고 한편 이석장도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레위기 18:7
-8)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 20:11) 2) 성종조 시절의 사건들
성종 13년 왕실 종친
청풍군 이원이 전 부평부사 김칭과 길거리에서 기셍 홍행(紅杏)을 두 고 설전을 벌린 사건이 있었는데 이론 인하여 김칭은
구속,이원은 종부시에서 국문을 당했다. 그 사건이 있은지 12일 후 김칭은 홍행의 집에 가서 마침 거기에 와 있던 이원과 몸싸움을 하다가 이원의 왼손을 깨물어 상처를 내고 한편 홍행은 김칭이 다칠까봐 이원의 허리를 붙잡았다가 옷이 찢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김칭은 장 100대 홍행은 장 90대의 중형을 받았다.
이원은 직첩을 박탈당하고 외방에 부처되었다.
그런데 두 달 뒤 김칭은 홍행을 귀양지로 불러들여서 못다한 사랑의 열락을 나누다가 발각되어 다시 처벌을 받았다 한다. 김칭과 홍행의 경우에서 보듯이 남녀간의 성애(性愛)에의 집착은 참으로 쉽게 끊을 수
없는 것 같다. 그 후 성종 20년
팔월 보름 한가위의 밤.
왕은 의정부,육조판서,경연당상,승지,홍문관,예문관 등 고급관료와 더불어 장악원에 모여 달 구경을 하는 중에 마침 구름이 달을 가리자 야음을 이용하여 승지 조극치(曹克治)는 임금이 주최한 달맞이 잔치에서 기생과 성행위를 벌렸는데 성종 임금도 알게 되었지만 남자의 허리아래 일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하여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해인 성종 20년 12월 1일에는 공조 정랑으로 임명된 이계명(李繼命)의 인사가 합당한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는데, 이계명이 전에 기녀 때문에 다른 남성과 다투다가 머리털이 잘린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말썽이
되어
하마터면 이 때문에
벼슬 자리를 놓칠 뻔 했었다.
2. 비부지자(婢夫之子) 장안의 거부 외동아들로 태어나 누만금의 재산을 탕진하는 탕아의 얘기로 우리에게 익숙한 주인공은 바로 이춘풍이라는 사람이다. 이춘풍이 죽은 아버지로부터 누만금의 재산을 물려 받은 뒤 하는 일이란 오로지 돈을 쓰는 일이다. 돈을 탕진하는 일 첫 번째가 도박 즉 노름이다. 그 다음이 기방 출입이다.
한동안 그 많은 재산을 들고 방탕한 생활에 세월 가는 줄 몰랐던 이춘풍은 드디어 돈이 떨어지고 말았다. 돈 떨어진 탕자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인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돌아온 탕자 남편을 아내는 쫓아내지 못하고 애절한 노래를 부르면서 받아준다.
ㄱ) 여보소. 내말 듣소. 대장부 되어나서 문무간에 힘을 써서 춘당대 알성과에 문무참예하여, 계수화를 숙여 꽂고 청라삼 떨쳐 입고 부모전에 영화 뵈고, 후세에 이름내어 장부의 사업을 하면, 패가를 할지 라도 무엄치나 아니할고 ? 그렇지 못하면 치산을 그치말고 농업을 힘써서 자식에게 전장하고 내외가 종신토록 환력평생하게 되면, 그도
아니 좋을손가. ㄴ) 부귀공명 마다하고 이녁이 어찌 굴어 부모의 세전지물 일조일석 다 없애고 수다한 노비 전답 뉘에게 다 전장하고 처자를 돌아보지 않고 주지탐색 수투전에 주야로 방탕하여 저렇듯이 되었으니 어이하여 사잔말고
ㄷ) 마오 마오, 그리 마오. 주색잡기 좋아 마오. 자고로 오입한 사람 뉘 아니 탕패한가. 내 말 잠깐 들어보소. 미나릿골 이패두는 청루 미색 즐기다가 나중에 신세 글러지고, 동문 밖의 오패두도 투전 잡기 즐기다가 말년에 걸인되고, 남산골 화진이도 소년의 부자로서 주색잡기 즐기다가 늙어서 그릇 죽고, 모시전골 김부자도 술 잘 먹고 허랑하기 장안에 유명터니, 수만금을 다 없애고 기름장사 다니네. 일로 두고 볼지 라도 주색잡기
다시
마오.
아내의 추궁에도 몇 번이나 가산을 탕진하던 이춘풍도 드디어 완전히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진심으로 잘못을 용서 빌며 가장의 권한을 포기한다. 아내가 돈을 모아도 다시는 손을 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문서를 써주자 아내가 못 미더워하자 “ 이후로 딴 소리를 하면 비부지자(婢夫之子)-종놈의 자식” 이라는 치욕적인 내용의
문서를
써주고 다짐을
한다.
한동안 꿈쩍 않고 지내던 이춘풍이 갑갑증이 들어 호조 돈 2000냥 거금을 빌려 돈 많고 허랑한 사람 세워 두고 벗긴다는 평양으로 장사를 떠나려 한다.
남쪽 지방의 한 상인이 배에 생강을 가득 싣고 평양으로 들어갔다가 평양기생에게 홀라당 날리고 빈 털털이가 되어 쫓겨나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遠看似馬目
(원간사마목)
멀리서 보니 말 눈깔
같고 近視如濃瘡 (근시여농창)
가까이서 보니 고름주머니
같네.
兩頰無一齒
(양협무일치)
두 볼에는 이가 하나도
없는데 能食一船薑
(능식일선강)
배 한척에 실은 생강을 죄다
먹어 치웠네
평양기생의 아랫도리 깊숙한 곳의 별난 맛에 가진 것 모든 것을 거기에 다 쳐 넣었다는 자괴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내의 반대를 어쭙잖은 남편의 권위로 누르고 색향 평양에 당도한 이춘풍은 평양기생 추월에게 홀려 장사 밑천을 다
날린다. 통한단 쌍문초 도리(桃李) 불수(佛手) 능라단(綾羅緞), 초록 저고리감 날 사 주오. 으죽절 금봉채 갖은 노리개 날 해주오. 두리소반 ,주전자,화로,양푼, 대야 날 사주오. 동래 반상(東萊飯床),안성유기(安城鍮器),구첩반상,실굽다리 날 사주오. 요강,타구, 새옹 남비, 청동화로 날 사 주오. 백통대 ,은대,금대, 수북 담뱃대 날 사주오. 문어,전복,편포 안주하게 날 사주오. 연안(延安) 백천(白川) 상상미(上上米)로 밥쌀하게 팔아주오. 동래 울산
장곽(長藿)
해의(海衣)
날 사주오.
돈을
다 털린 이춘풍은 이빨 까지 빼주고 급기야 추월이 집의 사환이 되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이와 같은 이춘풍의 얘기는 당시 빼어난 미모와 성적기교로 이름깨나 날린 기생들이 몸으로 사내들을 유혹하여 가진 재물을 고스란히
빼앗는 또 다른 생태를 가진 기생들의 세상을 보여준다.
3. 기생도 기생 나름
기생들에게는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시와 노래를 남기고 있는 기녀 시인들 중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했기에 그들의 시와 사랑을 더듬어 보면 이들이 단순히 양반남성들 의 성욕을 채워주는 대상으로 전락해서 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통속적인 평양 기생처럼 사대부의 돈을 호리고자 몸을 함부로 굴리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 빼어난 재치와 뛰어난 미모,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의 절절한 사연으로 오늘 날까지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매창, 홍랑, 황진이 같은 기생 외에도 많은 기생들이 역사 속에 등장하고 있다.
몸은 배고픈 노모를 위하여 딴 데 가 있으면서도 한결 같은 마음으로 20년 동안 귀양살이로 떨어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무서운 여인 관홍장과, 왜정 치하에서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문세가 중추원 고문 이지용의 유혹을 매국노의 첩살이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못한다면서 거절하였던 진주기생 산홍의
얘기를 통하여 우리는 또 다른 기생의 높고 굳은 의절을 엿보게 된다.
매창, 홍랑, 황진이, 관홍장, 산홍 이들이 걸어 간 삶 속에 엿 보이는 예사롭지 않은 편린 만으로도 기생 논개가 왜장의 목을 끌어안고 진주 남강 물에 빠져 죽을 수 있음을 믿게 만든다. 1) 매창 유희경, 이귀, 허균 등과 정인으로 또는 시와 인생을 나누는 벗으로 사귄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음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 쓴 시이다. 2) 홍랑
기생의 생명, 아니 여인이면 누구나 생명 같이 여기는 자신의 얼굴에 스스로 상처를 내서 남자의 유혹을 막고 평생을 수절한 기생 홍랑. 무덤을 만들어 주고 해주 최씨 문중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묘를 가꿔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그녀는 기생 중에서 유일하게 양반의 문중에 받아들여진 여인이라고 할
수있다. 묏버들 갈 것거 보내노라 님의손,
折楊柳寄與千里人 다시 서울로 부임명령을 받게 되었다. . 이 때 그녀가 쌍성(지금의 영흥)까지 따라가 서러운 이별을 하고 돌아오다가 날이 저문 함관령(咸關嶺)에서 눈물처럼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애틋한 사모의 정이 담긴 시 한 수를 나지막히 노래하여 최경창에게 보냈다. 이 시가 바로 홍랑이 남긴 유일한 시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3) 황진이 황진이는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던 그녀
황진이. 죽음을 앞둔 진이는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후회도 원망도 없는 고요한 체념관이 가슴에 가득한 채 '내가 죽거든 울지도 말고 고악(鼓樂)으로서 상여를 전송해 달라'고 한 말은 일세의 명기다운 얘기이나 '생전에 업보로 관도 쓰지 말고 동문밖에 자기의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으라'고 한 것을 보면 너무도 자신을 잘 알고 가혹한 자학의 채찍을 가했던 여인이라 보여진다. 어쨌든 진이는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재질이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그녀 한 인간으로서는 불행한 여인 이었다. 그렇게 자유분방한 여인이어서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여인이었는지도 모른다.
4. 관홍장(冠紅粧)삼국지에 나오는 청룡도 한 자루로 영웅 반열 첫 자리에 오른 영웅 관운장과 헷갈릴 것 같은 이름을 가진 중종조 시절의 서울명기로 동시대에 이름을 떨친 명기로는 황진이가 있다.
관홍장은 사랑하는 사람 사인한주(舍人韓澍)의 첩이되여 딸 하나를 낳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한주 (韓澍)는 남해로 귀양을 가고 관홍장이 혼자 딸을 키우며 살았는데 당시 부호와 조정 대신들이 구애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한주가 귀양간 후 제법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관홍장은 노모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생활이 매우 곤궁 하여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이때 이천군(伊川君)(성종의 자)이 매파를 시켜 구혼해 왔다. 「 내 비록 창가의 여자이긴 하나 이미 한사인(韓舍人)에게 몸을 허락했으니 재가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노모의 기아를 볼 수 없어 우선 공자의 말에 따르겠읍니다. 다만 한사인이 풀려서 돌아온다면 비록 나으리의 댁에서 아홉 아들을 낳았다 하더라도 구속받지 않겠읍니다. 이 약속이 이루어 진 뒤에야 나으리의 말에 따르겠읍니다.」 이천군이 약속을 하자 관홍장은 20여년 동안 이천군의 집에 살면서 많은
자녀를 낳았다. 비록 가난 때문에 절의를 지키지는 못하였지만 관홍장의 첫 사람 한주에 대한 여필종부의 정신은 비교하기 어려울 만치 굳세다고 볼 수 있다.
그 뒤에 한주가 귀양에서 풀려났다. 관홍장은 이천군과 결별하고 그 사이에 낳은 자녀들도 버리고 한주의 집으로 돌아갔다. 비록 아들을 아홉을 낳은 뒤라도 귀양간 남편이 돌아오면 그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맺고 이천군의 사람이 되어 20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첫 사람 한주가 귀양에서 돌아오자 많은 아들 딸을 낳은 뒤임에도 불구하고 당초의 약속대로 그 날로 이천군을 떠나 돌아오는 그녀의 매몰찬 모습 에서 참으로
여자의
서릿발 같은
차거운 성정을 만나게 된다.
관홍장은 먼저 그 딸을 시켜 길 위에서 한주를 맞이하게 했는데 딸은 아버지를 위하여 옷과 버선을 만들어 가지고 갔으며, 또 어미가 이천군을 버리고 돌아왔음을 말한다.
「네 어미가 늙어서 망녕 들었단 말이냐? 내 어찌 감히 공자의 부실(副室)을 차지한단 말이냐. 다시 말하지 말라」 조선조의 양반사회에 있어서 기생과의 성문화는 매우 타락하여 서로 기생을 뺏기 위하여 몸 싸움을 벌리고 태종 7년에는 백주에 병사를 동원하여 기생 쟁탈전을 벌리는 일도 생겼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20여 년의 오랜 귀양에서 풀린 한주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소유의 집착이라는 남자들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비록 속 마음이야 쓰리고 아프겠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체 관홍장을 나무라며 이천군에게로 돌려 보내고 있다.
풀려 돌아오는 날을 여삼추로 기다리며 때때로 이천군의 가슴에 그대로 안주하고파 하는 자신의 흩으러지려는 마음을 다 잡고 하기를 그 얼마였던가? 50여 년이 지난 남북 이산 가족 중에도 서로가 다른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있으면서 수십 년 세월 저 너머에 맺어졌던 그 안타까운 귀한 인연이 끝내는 서로 따로 따로 흩어지고 떨어져 다른 인연으로 얽힐 수 밖에 없었음에 가슴 아파하며 돌이키지 못함을 서로 인정하는 그런 슬픔과 아픔을 수 없이 볼 수밖에 없었듯이, 사랑하는 임 한주와의 사이에 20여 년의 세월이 갈라놓은 높은 벽이 있음을 관홍장은 운명의 얄궂은 장난으로 받아들이며 체념하기에 이르고 만다.
그리하여 이천군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천군은 관홍장을 나무라지 못했다. 뒤에 한수의 딸이 참판 홍인경(洪仁鏡)의 부실(副室)이 되었는데 이천군은 혼수를 마련하여 자기 딸과 다름없이 했다. 이천군의 아들은 모두 수(종실에게 주는 벼슬)가 되고 자손이 현달했다.
출처 : 서울 육백년사 –
<서울의 명기 중>에서 일부 발췌 5. 의기사의 진주기생 산홍
진주 촉석루 벼랑에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후세에 좋은 이름으로 길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새겼을 것인데, 보는 이들은 눈살부터 지푸린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던 그 이름들도 함께 있으니, 말 그대로 오욕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논개의 넋이 깃들인 곳에 한점 부끄럼을 남긴 것이 아닐까. 진주 출신 기생 이름이다.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씨(1919-1960)는 노래로써 산홍을 애타게 찾기도 하였다.
구수하게 불렀을 이 노래 가사 중, 나를 혼자 버리고 무정하게 떠난 산홍이 도대체 누구길래 너없는 내 가슴은 눈오는 벌판이요, 달없는 사막이요, 불꺼진 항구라고까지 말하면서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일까. 예부터 ‘북평양 남진주’라고 불릴 만큼 진주 기생은 조선 8도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진주 기생들의 가무는 조선 제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정조가 두텁고 순박함으로 총애를 받아 왕실에서 베풀어지는 잔치에 불려나간 명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산홍은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만날 수 있다. 매천야록 광무 10년(1906)
조에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 라는 기록이 있다. 사람이다.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니, 그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였다. 이런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달라고 했는데 기생의 신분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이 일을 들은 어떤 사람이 이지용에게 시를 지어 주면서 희롱까지 하였다. 이를 들은 매천 황현은 일개 기생의 기개이지만 세상에 소개한 것이다. 올렸다. 이때 올라온 기생들 중 일부는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면서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다 보니 같은 이름의 기생이 많아 분간하기 어려웠으므로 기생의 원적과 성명을 함께 부르는 풍속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평양 기생 이난향 대구기생 서향파 진주기생 김영월 해주기생 이벽선 등등으로 불렀다. 진주 기생 산홍도 당시 서울에서 이지용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한 기록을 보면, “어떤 친일파 인사가 거금을 주고 당시 이름난 요정인 명월관의 진주기생 산홍을 소실로 삼으려하자.....”라고 하였다. 산홍은 명월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매천 황현의 작품이다. 1898년 매천이 진주를 방문하여 의기사에 참배하고 지은 시이다. 산홍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에 알린 매천의 시가 산홍이의 시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다. 나무란 지조 높은 진주 기생 산홍의 시가 나란히 논개 사당에 걸려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의기사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논개 영정만 보고 발길을 돌린다. 2명의 의기(義妓)를 배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출처 : 네이브 블로그
물처럼 바람처럼 |
첫댓글 홍랑,,그녀는 기생 중에서 유일하게 양반의 문중에 받아들여진 여인이라고 할 수있다.해주 최씨면 지가긴디요,ㅎㅎ,,^^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