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어느 탁구소녀의 작은 꿈
堂井 김장수
어느 탁구 소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적응을 하기 위해 처음으로 탁구채를 잡은 소녀, 김현선. 비록 전국 꼴찌의 실력으로 시작했다 해도,
처음에는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할 것이라는 말을 굳게 믿고 노력한 결과, 중학교 2학년 때는 지역의 유망주가 되었다.
14살, 어린 날, 이런 나의 꿈과 추억, 그 소중함이 얼마나 큰지를 누구나 알고 있기에, 현선이는 꿈을 꼭 지켜야 한다고 누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현선이는 그들보다 더욱 절실했다. 그래서 더더욱 노력했다. 악착같이, 그리고 필사적으로.
14살에 철이 들다
14살,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 습관이 된 현선이는 매일 연습장에 무언가를 적었는데, 빼곡하게 채워지는 공책 한 면에는,
숙제나 반성문이 아니었고. 아이돌 가수를 위한 편지도 아니었다. 바로 훈련 후 자신을 반성하고 분석해놓은 연습일지였다.
현선이도 사람인지라 가끔 자신의 부족함에 실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다!”
이 말을 일지에다 수백 번이나 적어놓은 덕에 자신은 용기가 생겼다. 과거에 겪은 슬픔을 잊을 수 있어서 그 자신감은 더했다.
한창 멋을 부리고 친구들과 어울릴 14살 어린 나이에 현선이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일찍부터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전국 꼴찌에서 2, 3위까지
고향인 인천광역시 동구에서 2009년 3월 22일에 태어난 현선이는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50세의 나이에 그녀를 낳은 아버지 슬하에서 바르게 자랐다. 그냥 초등학교 1학년에 학교에서의 적응을 위해 잡았던 탁구채였지만,
도덕 과목과 사회 과목에서는 반 1등을 놓친 적이 없는데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해도 전국 꼴찌였던 현선이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였고, 4학년 때에는 인천에서 유망주가 되었다. 인천광역시 대표선수 선발대회 탁구 개인전 2위,
인천광역시 교육감배 탁구대회 개인복식 1위, 전국 소년 체육대회 인천 대표 금메달 등.
아버지의 뒷받침
그날부터 현선이의 꿈은 하나 더 늘었다.
“국가대표가 된 후에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서 꿈은 있지만 집이 어려워 망설이는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현선이의 꿈은 훗날에 이루어졌다. 현선이가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원인은 아버지의 뒷받침이었다. 그 덕분에 크게 성장한 건지도 모른다.
가족의 수입원은 아빠의 국민배당금 150만원이 전부였지만, 코로나를 이겨낸 한국이 이렇게 발전하여
새 대통령이 국민배당금을 챙겨주는 현실이 현선이의 꿈을 이루게 한 원동력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통장에 돈이 꽂히니
일을 못 해도 마음 놓고 병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 현선이 아버지는 무릎의 통증을 앓고 계셔서 현선이는 그것을 마음 아파했다. -
현선이도 학교 등록금과 체육 발전 지원도 무료였다. 게다가 현선이가 태어났을 때 낡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았었으나,
나라의 도움으로 새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한때 과일 야채 노점상을 했었으나, 나라의 도움으로 상점을 마련하여
시민들을 위한 커뮤니티 조성에 앞장서서 작은 어린이 도서관도 운영하게 되었다. 게다가 안전 수칙도 잘 지키고,
집에 가면 보일러가 잘 되어가고, 낡고 허름한 집에서 태어난 현선이가 새 아파트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이제 현선이가 하고 싶은 탁구를 원 없이 하게 해줄 수 있어 아버지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늦게 얻은 딸, 하고 싶은 탁구 원 없이 하게 해주고 싶은데, 내가 죽으면 그나마 그것도 못해 줄까봐 너무 미안하고 두려워요.
비록 현선이도 원 없이 탁구 하면서……. 이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면 좋겠어요.”
내년이면 65세를 바라보는 아빠는 거칠어진 손으로 현선이를 챙기신다. 그 손길은 왠지 따뜻하고 온기가 넘친다.
겨울이 되면 그 온기가 집 안에 퍼짐은 말할 나위도 없을 터이다.
효성스러운 딸, 아버지를 향한 염려
그런 사정을 알아도, 오늘도 현선이는 돈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탁구에 전념했다. 예전이었으면 불량학생들의 괴롭힘과
선생님의 설득 때문에 꿈을 짓밟혔을 현선이지만, 괴롭히는 아이들이 없이 탁구에 집중하니, 실력은 배나 늘었다.
아버지의 불안과 아픔, 꼭 씻어주고 싶은 딸, 현선이.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실력 향상과 성공에 대한 의욕은 더해 간다.
그리고 또래 선수보다 체격이 조금 작지만 나라의 도움으로 다른 선수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연습을 한다.
코로나 시대를 이겨내고 전국대회와 세계대회에서 연거푸 금메달과 은메달을 동시에 휩쓸고, 저절로 학교마다 환경이 좋아지니
용기를 내면서 마음이 한층 강해진다. 그것도 올림픽을 꿈꾸며 말이다. 쉬는 날이면 현선이는 독거노인들을 위한 무료 식사봉사에 나선다.
국민배당금만으로 현선이 부녀가 잘 살 수 있는데다 또 70만원의 노후연금과 국민배당금을 받을 이웃,
특히 노인들과의 나눔을 몸소 실천하는 이유는 항상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경쟁자도 포용할 수 있는 선수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선이는 취미생활로 독서를 했는데, 다독은 못해도 좋은 책은 많이 읽을 줄 알았다.
그 덕분에 마음가짐과 실력도 예쁘게 가꿀 줄 아는 선수가 되고 있었다. 좋아하는 책은 《안네의 일기》와 《몽실 언니》였다.
탁구공을 칠 때마다
“저는 탁구공을 칠 때마다 가슴이 뛰어요. 탁구는 저한테 미래라는 희망을 주거든요.”
오늘도 아버지의 응원을 받으며 연습장으로 향하는 현선이.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주먹을 불끈 쥐어 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인기 가수보다는 땀과 눈물, 무엇보다 자신의 노력이 서린 탁구채가 좋다는 현선이는,
오늘도 오른손에 꼭 쥔 탁구채로 큰 꿈을 키운다. 추운 겨울에도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설 때마다
전화로 아버지에게 안부전화를 하곤 하는 현선이는 아버지의 응원을 가슴 속에 새기며 탁구채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탁구 국가대표 장현경도 응원하는 14살 현선이의 꿈. 탁구 레슨비용, 대회 참가비용, 탁구용품 구입비용 등은 만만치 않았으나,
국민배당금과 1년 후에 아버지가 받는 노인연금으로 충당하니, 그 사실을 안 정부에서는
현선이가 탁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원을 해 주었다. 물론 고등학교는 체육고등학교를 알선해 주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까지 땄다. 또 한국체대 1학년 때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
영광의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것이다. 아버지와 이웃들도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해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참, 현선이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대학 입시 시험에 체육과 한국사 과목만으로
한국체육대학교 스포츠청소년지도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예전에는 체육 이외에도 국어, 수학, 한국사(필수), 사회탐구, 과학탐구, 제2외국어와 한문 등을 모두 공부해야 대학에 갈까 말까였는데,
새 대통령은 수능시험을 과감히 폐지하여 대학 압박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을 구해 주었다. 대신 한 가지 과목만을 시험을 보고
대학에 갈지 취업을 할지 선택의 기회를 주었으므로 학생들의 수업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어른이 되어, 꿈을 이룬 현선이.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 성인이 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또 땄다.
금메달 3연패 이후에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고, 은퇴를 한 뒤 탁구 코치인 남편과 결혼하여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꿈은 있어도 집안이 어려워 망설이는 친구들을 도와주니, 처음에는 단순한 동정으로 여겼던 아이들도
차츰 현선의 진심을 알고 따르기 시작하여, 어느새 현선은 이 지역에서 존경받는 탁구 지도자가 되었다.
물론 현선의 도움과 교육을 받고 아이들이 바르게 자랐다는 것도 빠질 수 없다. 이 영광을 보고 나서 아버지는 101세까지 장수하셨다.
현선은 부친상을 치른 후에도 탁구에 대한 열정은 잃지 않았다. 탁구야말로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현선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되어도 탁구에 대한 김현선의 열정은 여전하였고,
이제는 딸과 장남은 탁구를 시작했지만, 차남은 피아노를 잘 치는데 – 취미로 즐기는 수준이다 - 차남이 손에 쥔 건 탁구채가 아니라
배드민턴채였다. 딸은 탁구 선수가 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4번이나 땄다. 현선의 사위는 배구 선수였다.
사위는 ‘현무 미사일’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배구를 잘했고, 역시 올림픽 금메달을 딸 정도로 우수한 선수였다.
딸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았는데, 외손녀는 탁구선수가, 외손자는 통일 한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장남은 탁구선수가 되어 결혼을 했는데, 아내는 테니스 선수였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손자는 키가 커서 농구선수로 활약을 하여 올림픽 금메달을 땄으며, 둘째 손자는 탁구에서 큰 활약을 하였으나,
나중에는 민의회 민의원으로 활약했다. 손녀는 고고학자가 되었고, 그녀의 남편은 화학자였다.
차남은 배드민턴에서 함께 금메달을 딴 여자 선수와 결혼을 하였는데, 아들은 배드민턴 선수, 딸은 배구 선수가 되었다.
최후
어느덧 현선은 노인이 되었다. 통일 한국은 각 분야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었고, 놀랄 만한 발전을 하여
지금은 크고 강한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거듭났다. 현선은 110세까지 장수했다.
과거 탁구대회에서 크나큰 활약을 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던 효녀 탁구선수 현선은
자연의 법칙만은 거역할 수 없어서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손주들의 활약과 증손자들의 기쁨,
그리고 자식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 사위의 노벨 문학상 수상…. 거동이 불편해도 사회를 위해 힘쓴 현선은
천국에 가기 2년 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스포츠를 통하여 세계 평화를 증진하고 한국의 행복지수 향상에 공로가 컸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병석에서 누운 채 아버지만을 생각하다가 결국 아버지를 따라 하늘의 별이 되었다. 유언은 다음과 같다.
“너희 덕분에 후회 없이 살았다. 절대로 처음에 먹던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해라.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
그 말을 남기고 현선은 드디어 눈을 감고 말았다. 장례는 기독교장으로 치러졌고, 나라에서 장례비용을 대 주었으며,
죽은 현선은 평안남도 성천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국민훈장이 추서되었고, 김현선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는 외로웠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꿈을 놓치지 않고 꼭 잡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