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맨 워킹
히10: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by a new and living way which He consecrated for us, through the veil, that is, His flesh,”
오래전에 본 영화에서 사형수가 사형실로 걸어 들어갈 때 데드맨 워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은 자가 걸어간다는 것은 사형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표현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히9:27
이고 단지 그 날과 시를 모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죽음을 미리 받아들이고 주님을 위한 덤의 인생을 삽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으시고 그 길을 열어놓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우리의 죽음도 지성소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어 놓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당신에게서도 휘장이 제거되고 지성소가 성소와 하나가 되는 체험이 일어날 것이다.’(그리스도의 영 211쪽)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주님의 은혜로 극복하지 못할 시험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지성소 은혜 보좌 앞에 나아가는 은총을 누리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그것을 저주에 넘겨주는 것이다. 십자가와 저주는 분리할 수 없다.(신21:23, 갈3:13)
(위의 책 245쪽) 이 저주받아 마땅한 육체를 죽음에 넘겨주지 못하고 애물단지처럼 끌어안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아는 자는 기꺼이 자기 육체를 죽음에 넘겨줍니다.
‘그 사랑의 능력이 너무나 약하고 알아채기 어려운 것은 육체의 휘장이 우리 속에서 찢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위의 책 255쪽) 우리는 하나님보다 자기 육체를 더 사랑함으로써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릴 때가 많습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배후에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 육체가 존재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감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예비단계입니다. 따름의 결국 곧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됨으로써 육체의 휘장이 찢어지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 영혼은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받습니다. 생각하거나 느끼는 감정도 변화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학3:18
적군이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박국 선지자는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이처럼 삶의 절박한 순간에도 성도는 영혼을 치유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성도의 최대의 소원은 살아계시는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때, 부끄러운 모습이 아닌 진정 순결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소원을 가진 성도는 자기 영혼의 순결을 위해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진정한 영혼의 변화는 지성소 안에서 성령의 활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 떠날 날이 가까워질수록 그리워지는 곳은 지상의 고향이 아닌 하늘의 본향입니다. 미움이나 적개심, 거짓이나 죄악, 사망이나 질병이 없는 곳,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나는 곳, 형제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마치 주님을 뵙듯이 기쁘고 반가운 곳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오늘도 성도는 죽은 자로서 새 삶을 삽니다.
20. 12. 11 청덕동에서 장기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