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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그의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주의 날"에 그에게 임한 계시의 내용이다.
요한 계시록 전체의 내용들이 사도 요한이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한 것이다(계1:19).
우리 성도들이 요한 계시록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도 요한이 "본 것"과(1장) " 이제 있는 일"(2-3장) 보다도 "장차 될 일"이다(4-22장). 그 "장차 될 일" 중에서도 『666』이란 숫자와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이 『666』에 대한 해석은 어쩌면 [정답]이 없다는 것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솔직한 진실이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정답]이 없기에 각자 나름대로의 구구한 해석이 나오게 된다.
본문 18절에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그 수 『666』은 "짐승의 수"이다. 곧 짐승의 심볼마크( Symbol Mark)라는 것이다. 이것이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한다(본문17절). 그런데 그것은 숫자로 표기되며 사람이 계산하는데 사용하는 수로 『666』이라는 것이다.
또하나 분명한 것은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은 그 숫자 『666』을 세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과연 지혜 있고, 총명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제 각기 지혜 있고, 총명한 자가 되어 그 숫자 『666』을 세어 보는 것이다. 그러니 제 각각이 될 수밖에 없다. "장차 될 일" 이기에 지금의 우리로서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 진실하고 솔직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칼빈도 요한 계시록은 덮어둔 책으로 [주석]을 하지 않았나 보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정답]을 찾자는 것이 아니다. [정답]은 모르나 이런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대처하는 마음의 준비를 가지자는 것이다. 하도 [정답] 같은 서로 다른 [정답]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 우리가 무방비 상태로 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666』이란 숫자가 주는 의미를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1.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
본문 17절에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했다. 왜? 그렇게도 관심이 집중될까.... 계시록에서 말하는 『666』의 수가 무엇이기에 뭇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관심을 끌고 있는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들은 모두다 나와 무관하지 않고, 더구나 내 손익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⑴. 환란과 핍박이 예고되기에
요한 계시록 13:7-8절에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했다.
성도들과의 싸움에서 『666』의 짐승이 이긴다는 것이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는 다 짐승에게 경배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결국 까닥 잘못하다가는 말짱 헛것이 되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과연 내 믿음으로 이 시련의 용광로를 통과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고난의 깊은 밤을 무사히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두려움에 잠기게 되기 때문이다.
『666』의 수가 세인들에게는(불신자) 첨예의 관심사가 아님을 보게 된다. 그리고 [확신에 찬 신자]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은 되어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⑵. 확신 없는 믿음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3: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했다.
이 한 절 속에 "너희"라는 말이 6회나 반복되고 있다. "'너희 자신"이란 말이 2회나 반복되고 있다. 확신의 신앙은 "나와 주님"과의 문제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그 두 사이에 그 어느 누구도 끼여들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끼여들 수 없다. 오직 "나와 주님"만의 문제이다.
나의 거듭난 "신앙 양심"이 내 속에 주님이 계심을 스스로 고백하고 증거하는가? 그것을 묻고 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을 해도, 내 [스스로가 인정]을 못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해도 나의 거듭난 신앙 양심이 내 속에서 성령으로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이라 증거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롬8:16).
『666』의 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확신에 서지 못한 신자]이다. 매매를 못하는 경제적 통제가 따라오고, 무시무시하고, 어마어마한 환란과 핍박이 『666』의 숫자 주인에게서 [자신]에게 가해지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의 설교] 정도라면 무시할 수도 있겠는데..... 말이다.
누가복음 18:8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했다.
지금 이 시대를 보라!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개신교의 통계만 해도 국민의 ¼이 넘는 1천 수백만 명을 헤아리고 있다. 한국뿐인가? 온 세계의 믿는다는 사람을 집계하면 어마어마한 숫자가 될 터인데.... 왜?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을까....
『666』의 짐승이 주는 환란과 핍박으로 수많은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굴복 되어진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어느 누구의 설교나 해석이면 좋으련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조마조마한 가슴이 되고 『666』이라 하면 귀가 쫑긋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확신에 찬 믿음의 사람은 [관심의 대상]은 되어도 결코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이미 세상을 이기신 주님 안에서(요16:33) 참 안식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마11:28).
2. 적 그리스도의 수이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666』의 주인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짐승도 아니다. 참으로 [괴물(beast)] 같은 존재이다.
⑴.사람도 아니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666의 수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문제의 짐승들은
①.바다에서 나온 열 뿔 일곱 머리의 괴물 같은 짐승이 있다(계13:1)
②.땅에서 올라온 새끼양 같은 짐승이 있다(계13:11)
③.이 두 짐승과 관계되는 더 우월적인 용이 있다(계13:2)
본문 11절에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고 했다.
『666』의 수의 [주인]은 땅에서 올라온 "새끼양 같은 짐승"이다. "새끼양"이 무엇인가? 우리는 쉽게 "어린양"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곧 적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다.
⑵.짐승도 아니다.
오늘 본문의 『666』의 숫자의 [주인]은 짐승이 아니다.
본문 14-15절에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동물" 같은 보통 짐승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이적을 행하고, 사람을 미혹하고, 사람에게 명령을 하고, 심지어 만든 우상으로 "말"을 하게 한다. 절대로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동물 같은 짐승이 아니다.
⑶.짐승 같은 사람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짐승]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짐승 같은 사람]이다. 곧 [괴물(beast)]이라고 하겠다. [괴물]이라 하니 굉장히 흉칙한 생각이 떠오르겠지만 이 짐승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본다. 아마도 요즈음 화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복제 인간]이 되리라고 본다.
아무리 인간이 날뛰어도 "영"은 복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복제하는 대상인 [자연인]은 이미 "영"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는 한 "영혼"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몸의 세포는 복제 기술로 세포 분열을 시켜 완전한 몸을 이룰 수 있다 할지라도 "영혼"은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복제된 세포 속에 "영혼"도 있다면 결국 산업 재해나 교통사고로 지체의 일부를 잃는다면 그 지체 속에 또다른 "내 영혼"이 있다는 말이 된다.
"영혼"이 없는 사람.... 바로 짐승 같은 사람이다. 이 [괴물]이 최우수한 세포나 염색체로 [복제 인간]으로 완성된다면 우리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 [괴물]이 적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가 되어(요일4:3) 적 그리스도가 등장하리라고 본다.
[인간 복제]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이 일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본다. 물론 해석에 따라 달라지고, 입장 차이가 달라진다고도 본다. 솔직히 진실된 말은 아직은 [정답]은 없다가 되어야 한다.
요한 계시록 13:17-18절에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고 했다.
짐승의 이름이나 수인 『666』은 "사람의 수"라고 했다. 곧 짐승의 이름이나 수를 가지고 행세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이름이나 수"를 가지고 사람 앞에 나타나 큰 이적과 능력으로 "사람의 대장"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이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한다. 그 불로 자신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자를 뭇 사람들 앞에서 태워 죽인다는 말이다.
누가 감히 그 앞에서 [거역]은 고사하고 [항변]을 하겠는가.... 말이다. 싸움을 하고자 해도 가능성 있는 싸움이어야 한다. 이미 처음부터 결과가 나와 있는 싸움이다. 패망이요 죽음뿐이다.
본문 15절에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고 했다. 마치 사람 앞에서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다. 우상을 만들게 하고, 그 우상에게 생기를 주고, 그 우상으로 말하게 한다. 아담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불케 한다.
이 큰 이적과 능력 앞에 넘어가지 않을 자 누구이랴, 더욱이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더라』는 살기 등등함 앞에서.... 말이다. 그래서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에 필요했다. 곧 순교의 제물이 되라는 말씀이다.
본문 10절에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했다.
본절의 말씀은 각 사본 상의 문제가 있는 말씀이다. 우리 개역 성경이 [원문]으로 삼은 "사본"이 아닌 다른 사본의 말씀이 더욱 본문의 내용과 일치한다고 본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 보면.『사로잡히게 된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임을 당할 자는 칼에 죽으리니』이다. 이는 구약의 말씀과 일치한다.
예레미아 15:2절에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고 했다.
예레미아 43:11절에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고 했다.
우리 개역 성경처럼 되면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필요한 이유도 불분명해지고, 앞뒤의 말이 서로 의미가 통하지 않음도 있다.
3. 한 사람이다.
요한일서 2:18절에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고 했다.
지금의 [많은 적그리스도]와 마지막 때의 [한 사람 적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다. [많은 적그리스도]는 실상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흉내내는 무리들이요, 진짜 [적그리스도]의 졸개들이다.
마태복음 24:24-25절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고 했다.
가짜 그리스도들과 가짜 선지자들이 일어난다고 주님이 친히 말씀 하셨다. 그들이 큰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고 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케 하리라고 하셨다. [적그리스도]의 졸개들이 판을 친다는 말씀이다.
요한 계시록 19:20절에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라 했다.
최후에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복수가 아닌 단수로 된다. [한 사람 적그리스도]가 된다는 말이다. 세계는 지금 이 [한 사람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위하여 그 터전을 닦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외치는 말 "우리는 하나!"이다. 그 하나를 이루기 위해 여러 방면의 "하나되기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크게 나누어 정치, 경제, 종교, 정보화의 "하나 되기 운동"이다.
⑴. 하나의 정부를 위하여
아마도 UN을 중심으로 해서 정치 세력이 하나가 될 것 같다. 유럽 지역의 나라들은 이미 "하나의 정부"를 출범시키려 하는 단계이다. 저 유럽이 "하나의 정부"로서 성공을 거두면 세계는 "하나의 정부"를 만들기 위해 더욱 힘을 모으게 되리라.
⑵. 하나의 경제를 위하여
세계는 지금 GATT, W.T.O, UR 협정 등 세계를 "하나의 경제"로 묶으려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어느 국가도 이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외로운 외톨이 국가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경제는 지금 블록(Block)화 되어 가고 있다. 유럽 지역, 남미 지역, 환태평양 지역등으로 지역 중심의 경제가 이룩되어지면 다음 단계로 지역과 지역의 통합으로 마침내 세계는 "하나의 경제"를 이루게 되리라.
⑶.하나의 종교를 위하여
종교의 하나 되는 일이 불가능 할 것 같으면서도 [종교간 대화]란 명목으로 그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종교간의 담]이 무너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참으로 기막히는 일은 "신앙 생활"의 목적이 "인간을 위하여"로 자연스럽게 바뀌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기맥힐 노릇은 거기에 기독교도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 다원주의]가 우리 교회에 스며들어 오고 있다. 곧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게 아니라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굳이 예수 믿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아무 종교나 진실히만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것이다. 엄청난 [복음의 변질]이다. 이런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기독교의 지도자란 이름으로.... 말이다.
아마도 세계의 종교가 "하나의 종교"가 되어지면 우리 성도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지리라고 본다. 저들의 허락 없는 예배도 찬양도 기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주님이 그래서 하신 말씀인가 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4.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도구가 P.C
다니엘 12:4절에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했다. 말세가 되면 지식의 발달로 사람들의 왕래가 빨라진다는 말씀이다. 세계는 지금 국경도, 언어의 장벽도 무너지고 교통 수단의 발달로 생활권도 하나로 되어져 가고 있다.
⑴. 무너지는 국경
과학 문명의 발달로 엄청난 교통 수단이 빨라졌다. [일일 생활권]이란 개념은 이미 한 국가적인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 국가적 단어가 아니라 국제적인 용어라 하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를 부르짖으며 뭉쳐지고 있으니 배타적일 수도 없다. 외톨이가 되면 지금의 "북한"처럼 몰락할 수밖에 없다.
⑵. 무너지는 언어의 장벽
창세기 11:7-8절에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짓거리들이 "'악함" 뿐임을 보시고 "하나로" 모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곧 언어의 혼잡으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 곧 말의 달라짐이다. 그래서 말이 같은 사람들이 함께 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나라가 나누이게 되고 삶의 터전도 달리할 수밖에 없었고,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을 그들이 처한 환경에 맞추게 되어 문화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세계는 지금 "우리는 하나!"를 외치며 언어를 혼잡케 하시어 온 지면에 흩으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다시금 하나로 뭉치고 있다. 이 "하나 되기 운동"에 가장 큰 장애물이 "언어의 혼잡"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이 [언어의 장벽]이 무너져 가고 있다. 영어나 일어를 모르는 사람도 "번역 프로그램" 하나로 웬만한 [의사 소통]은 가능해지고 있다. 이 "번역 프로그램"의 발달로 세계는 글자로 주고받는 [의사 소통]은 지장이 없으리라고 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음성 인식] 기술이 점점 발달해 가고 있다. 머지 않아 우리가 손으로 자판기(Key Board)를 치지 않고 마이크를 잡고 말로서 입력시킬 날도 곧 오리라고 한다. [음성 인식] 기술과 "번역 프로그램"의 발달로 외국어를 몰라도 노트북 P.C 하나만 있으면 세계 어느 나라 사람과도 [의사 소통]이 가능해진다는.... 어찌보면 꿈만 같은 일이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⑶. 가능해지는 중앙 통제
세계는 지금 컴퓨터(Computer) 기술의 발달로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추세로 "하나 되기 운동"이 활발해져 가고 있다. 인터넷(Inter Net)이란 통신망을 통해 안방에서도 온 세계를 누비고 있다. 이 인터넷이란 통신망은 뜻만 같이 하면 언제라도 세계를 [하나의 정보망]으로 묶을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중앙 통제]가 가능해진다. 곧 이 넓은 세상도 한 곳에서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에게 이미 친숙해진 온-라인이란 제도를 이용해 본 사람은 한 두번은 경험했으리라 본다. 온-라인으로 타지역으로의 송금이나, 타지역에서 출금을 하려는 그 은행의 중앙에 있는 [본부 컴퓨터]의 고장으로 송금도 출금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바로 [중앙 통제]가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지금 우리 교계에 『666』이 [바코드(Bar Cord)]라는 이야기도 이러한 관점에서 설득력 있는 해석이 된다. [바코드]에서 굵고 긴 검은 선은 "6"이란 숫자이다. 그 [바코드]가 이 "6"이란 숫자 셋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바코드]가 지금 세계적으로 [매매의 표준]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가 상품을 사고 계산대 앞에 가면 계산대의 아가씨들이 [정가표]가 아닌 [바코드]를 읽어서 계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이 [바코드]가 "표준화" 되어 가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계가 "하나의 정부", "하나의 경제", "하나의 종교", "의사 소통 가능", "하나의 정보망", 이 모두가 이룩되어지면 [중앙 통제]가 가능해진다. 그 통치자의 자리에 적그리스도가 앉게 되면 요한 계시록은 결코 "공상 과학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그러한 조짐들을 지금도 [세계의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들이 읽을 수 있다.
『666』이 [바코드]라는 분들의 말에 의하면, 현재 브르셀(벨기에)의 EC 본부에는 Beast라는 초대형 컴퓨터가 5개 대륙 1천개 이상의 [은행]에 연결되어 가동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의 약 50억 인구의 정보를 입력할 수 있는 용량이라고 한다.
『The Beast』 바로 [적그리스도]라는 단어이다.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본문 말씀의 짐승이란 단어가 바로 이 [Beast]이다. "짐승 같은 사람" 곧 [괴물]이다. 이 [The Beast]가 통치자의 자리에 앉게 되면, 세계가 "하나의 정보망"이 되어지면, 그 정보망 속에 금융기관이 하나로 묶어지게 되면, 전 세계적인 [매매의 통제]도 가능해진다.
세계는 지금 신용 카드의 도용으로 [신용 사회] 구축에 큰 지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의 몸에 [바코드]를 새기는 구상이 발표된지 오래이다. 이미 실험 단계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 보다도 축산계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소문들은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이 현실화되면, 『666』의 인(印)이 없이는 [매매의 금지]도, [예배의 금령]도 [The Beast]의 통치로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666』이란 숫자가 주는 의미, 그것은 "장차 될 일"이기에 지금 이 시점에서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진실이 될 것이다. 세계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갈지 아무도 모른다. 다가올 『666』이란 심볼마크으로 등장할 [The Beast], 반드시 온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로 인한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환란"과 "핍박"도 예언되어진 말씀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우리 성도들은 단지 [순교의 제물]이 될 준비를 해야 할 따름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요구하신다(계2:10). 동시에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약속이 있는 요구이다.
이 주님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진 자는 아무리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666』이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주님,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뒤돌아 보지 않고 달려갈 뿐이다.
『승리는 내 것일세. 승리는 내 것일세. 구세주의 보혈로서 승리는 내 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