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시
제재의 구조화, 정서의 객관화
에세이문예 겨울호 시를 읽고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삶이 한복판인 도시보다는 자연을 더욱 존중하는 에세이문예 시인의 시론은 일상인들이 갖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일상인이 관심을 잘 안 가지는 대상의 발신음을 듣는 데서, 존재의 의미, 즉 생의 진리를 추구하려 한 점에 있어서 시의 본질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 이번 시 계간평은 에세이문예 봄호 시가 지니고 있는 개별성과 보편성의 정체를 탐색하고, 이 양자가 어떻게 예술적으로 합일되는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해 봄으로써 시의 참모습에 다가설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에세이문예에 시를 발표하는 시인의 시적 성장을 눈여겨 지켜봐온 비평가로서 나는 <거미>와 <쓸쓸한 말들의 여행>이라는 두 편의 시에 주목하고자 한다. 시 속에서 시인이 생성해낸 미의식은 사물의 내면을 밝히는 것이었다. <거미>에서 ‘천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거나, <쓸쓸한 말들의 여행>에서 ‘간혹 잃어버린 이야기가 간이역에서 기다렸지만’ 등의 시구는 시인이 비유로 형상화해낸 정서의 빛깔이다.
심오한 관조 속에서 획득한 ‘가볍게 살기’와 ‘유유자적 살기’의 철학적 지향성은 인문학적 가치와 잘 매치됨으로써 문학적 가치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시적 태도가 기본을 견지하고 있다는 의미라 하겠다. 시는 시인과의 가장 인간적인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통로라는 점에서, 평자는 어느새 그녀가 다듬고 있는 삶의 진실성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거미’나 ‘매미’로 상징되는 생명의 소리, 자연의 소리를 듣고 느낄 수 있는 뛰어난 감수성을 그녀는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상을 치환하여 현상학적으로 인식하는, 다시 말해 비유를 통해 시적으로 구축하는 시상은 우리에게 풍성한 정서적 울림을 선사한다. 또한 두 시를 통해 시인은 의식적으로 성장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 편은 구조적 관점, 한 편은 정서의 객관화 차원에서 조명해 보겠다.
거미가 현기증 나는 허공에 있다
모든 것을 던진 듯 메달려
한줄 한줄 살을 내고 피를 뽑아
터전을 만들어 시간을 엮어
바람결에 망을 채비한다
발끝에 메이진 세월
흐린 날에는 흐리게 살고
맑은 날에는 맑게 살면서
고요를 밀고 뿌리를 내린다
별 그림자 찌그러지고
지붕도 없는 밤을 이기는 새벽이 오면
천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한 점 부끄럼없이
땅에 내려 앉을 그날까지
가장 낮은 몸으로
가볍게 가볍게 살아야 한다.
- 장정애 <거미> 전문
전통시론으로 보면, 시형식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시적 담화를 ‘구조화’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제재를 어떤 틀 속에 짜맞추는 일이 형식의 기능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플롯을 처음 중간 끝으로써 엄격한 유기적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정의했을 때, 최초로 구조의 개념이 탄생된다. 제재의 구조화가 주목되는 점은 이것이 문학과 현실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현실적 삶의 과정은 문학에서처럼 처음 중간 끝이 명확하지 않고 산만하고 무질서하다. 따라서 제재의 구조화 자체는 그만큼 미적 거리를 확보하는 본질적 수단이 된다. 이 구조화는 결말맺기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기승전결의 시상 전개 방식은 시적 담화를 구조화하는 전통적 결말맺기의 대표적 사례다. 물론 현대시는 반목적론적 개방형식을 지향하기도 한다. 시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려는 노력이 이와 연관되어 있다.
어쨌거나 ‘거미’의 삶을 제재로 한 이 시는 ‘기승전결’의 전통적 구조를 갖고 있는데, 1연은 ‘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거미가 집을 지을 채비를 하는 순간을 나타내고, 2연은 ‘승’으로 허공에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거미의 한계를 짚어주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3연, ‘전환’에 와서는 비장한 어조로 극적 전환을 일어난다. ‘별 그림자 찌그러지고/ 지붕도 없는 밤을 이기는 새벽이 오면/ 천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한 것은 1,2연과는 다른 어조를 띤다. ‘천 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건 거 미의 운명이고, 생존과 관련이 있는 중요한 진술인 것이다. 세상의 어떤 존재이건 그 삶에는 위기가 있게 마련이다. 삶의 최초 단위인 하루의 시공간에도 편안한 시간이 있으면, 불편한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4연의 ‘결’은 그렇기 때문에 ‘가볍게 가볍게 살아야 한다’는 목적론적 세계관과 연관지어 맺었다.
말言들은 완행열차를 타고 역마다 머물곤 했다
삼등칸 순례자가 되어 창밖 풍경에 몽환의 눈빞을
보내고 추억을 소환해 오기도 했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면 천천히 짐을 꾸렸다
간혹 잃어버린 이야기가 간이역에서 기다렸지만
여행에 꼭 필요한 말은 아니어서 서두르지 않았다
어느 역장이 가꾸어놓은 세평 꽃 역을 지날 때면 가만히
세평 하늘길을 헤아렸다
언제부턴가 말들은 낡은 선로를 자주 이탈했다
깨어 있는 순간마저 간이역처럼 점점 사라져갔다
때론 내릴 때를 잊을까 조바심에 출근길 환승역으로
몰려갔다
내리지 못한 말들 종착역에 닿아 머츰한
눈발처럼 쓸쓸한 날이었다
- 최해숙 <쓸쓸한 말들의 여행> 전문
최해숙의 시는 서정시학의 힘을 업고 문학형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시와의 치밀한 감상적 조우라는 이 시 해설을 통해서 최해숙 시의 정체와 시적 울림의 메카니즘에 접근해 볼 수 있었다. 존재의 집이기도 한 언어에 대한 사랑 없이 세상이 어떻게 건강할 수 있는가. 완행열차에서조차도 사라져가는 말의 존재를 시인은 ‘언제부턴가 말들은 낡은 선로를 자주 이탈’하고, ‘깨어있는 순간마저 간이역처럼 점점 사라져갔다’라고 한 점에서 그녀는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정서를 시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하겠다. 이 시 역시 제재의 구조화가 빛나는데, 특이한 것은 1연에서 4연까지 시상을 전개해 나가면서 시적 화자는 정서를 객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이런 시인의 형상화를 위한 노력은 이 시의 문학적 성취를 안겨주는 부분으로써 대단히 중요한 시적 특징이라고 하겠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연 ‘말들은 완행열차를 타고’, 2연 ‘간혹 잃어버린 이야기가 간이역에서 기다렸지만’. 3연 ‘언제부턴가 말들은 낡은 선로를 자주 이탈했다’, 4연 ‘내리지 못한 말들 종착역에 닿아’ 등의 묘사가 전부 그렇다.
살아있는 시인의 문학작품을 두 편의 시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장정애 최해숙의 시가 자연주의와 서정주의의 변증법적 완성을 통해서 한국시의 전통과 품격을 격조 있게 계승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으리라 본다. 이들의 시는 한마디로 차분하고 순수하다. 시작詩作에 임하여 본성 차원에서 사물의 존재해명은 물론 역사적 환경 속에서의 바람직한 삶을 위한 순수의식에 천착함으로써 초월적이면서 당대적인 미의식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사상과 형상의 변증법적인 통일을 통해 세계를 자아화하는 것이 바로 장정애의 시적 특성이며, 예술시학의 전개다. 최해숙의 시는 하나의 압축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완행열차와 간이역에 빗대어 형상화했는가 하면 문명의 이기와 과학의 발전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기에 이들 시는 시적 자아의 성숙한 정신세계를 환기시켜 준다. 따라서 이들의 시가 환기하는 언어들은 그대로 우리를 미적 사유로 몰아넣는다.
Ⅲ.
제물상과 합일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과 화해해야 한다는 장정애 시인의 메시지나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문명비판적 시 성격을 지니는 최해숙의 메시지는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풍성하게 한다고 하겠다. 자연 대상과 서로 교감하고 나눔 속에서 더 찬란한 꽃을 피우는 것이 시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하는 그녀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녀의 시적 성장은 따논 단상이나 다름없다. <쓸쓸한 말들의 여행>의 ‘결’에서 보인 ‘내리지 못한 말들’은 지배적 정황으로, 최해숙의 세계관과 작가정신을 잘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인간은 물론 자연계의 온갖 생명들의 놀이터와 쉼터가 되어주는 저 푸른 ‘깨어있어야 한다’는 시인의 소망은 시를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좋은’ 시로 인정받게 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