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에 참여하다)
졸라는 말년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1898년 1월 일간지 "로로르"에 실으며 드레퓌스 사건에 참여한다. 이로 인해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하여 같은 해 런던으로 망명을 가기도 하였다.
《나는 고발한다》
드레퓌스 사건 때 유태인 드레퓌스를 옹호하여 죽는 날까지 프랑스 군부와 가톨릭 신자들에게 살해 협박과 야유, 비난을 받았다. 졸라는 1898년 1월 13일을 기하여 《로로르지》에〈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기 전에 이미 40여 권의 책을 수백만 권씩 유럽에 판매한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문학적 성과와 명예와 목숨을 걸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 글 때문에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집은 경매에 붙여지고 벌금이 물리고 명예훼손 소송에 시달리며 결국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훗날 드레퓌스 사건은 졸라의 노력과 드레퓌스파의 힘겨운 싸움으로 무죄가 밝혀지지만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했던 가톨릭 교회와 군부는 끝까지 졸라를 괴롭혔다.
졸라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진실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늪지대를 지나가야 하는 것일까”
<드레퓌스 사건이란?>
이 사건은 1894년에 프랑스 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던 드레퓌스 대위의 필체가 프랑스 정보요원이 파리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빼돌린 문서(명세서)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외딴섬에 유배되면서 시작되었다.
증거가 명확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기소되었으며 실질적으로는 유대인이라는 이유가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가족의 구명운동과 소수 지성인들의 노력으로 1897년 진범이 구속되었다. 진범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군부는 신뢰 추락을 이유로 사건을 은폐하고 증거를 조작한 후 오히려 진범을 풀어주었다.
이에 격노한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1898년 1월 신문에 게재하여 군부의 부도덕성을 대중에게 알렸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는,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애국주의, 반유대주의, 반독일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다. 프랑스 국민에게는 드레퓌스 같은 희생양이 필요하였다. 이에 졸라가 불을 붙이자 지식인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다. 재심이 이루어졌고 1906년에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때 보수의 앞장에 선 단체가 카콜릭 교회이고, 특히 제수이트 교단이었다.
이때 입센이 ‘민중의 적’이라는 연극을 공연하자, 보수파와 공화파 사이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공공의 적’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