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살고싶은 곳 - 퇴계 이황이 살았던 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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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4. 02:35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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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이 살았던 도산
예로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꼽았던 ‘영남의 4대 길지’는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과 안동 도산의 토계 부근, 안동의 하회마을, 봉화의 닭실마을이다. 네 곳 모두가 ‘사람이 모여 살 만한 곳’으로 대부분 산과 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고 들판이 넓어 살림살이가 넉넉하다. 특히 낙동강 범람으로 만들어진 저습지를 개간한 하회마을 입구의 풍산평야는 안동 일대에서 가장 넓은 평야이며, 또 양동마을 건너편에는 형산강을 낀 안강평야가 발달해 있다.
양동마을 © 이종원
영남의 4대 길지는 모두 ‘사람이 모여 살 만한 곳’으로 대부분 산과 물이 어우러져 경치가 좋고, 들판이 넓어 살림살이가 넉넉하다.
앞서 살폈듯, 이중환은 이중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우리나라 시냇가에서 가장 살 만한 곳으로 꼽았다. 게다가 “도산은 두 산줄기가 합쳐져서 긴 골짜기를 만들었는데, 산이 그리 높지 않다. 태백의 황지에서 비롯된 낙동강이 이곳에 와서 비로소 커지고 골짜기의 입구에 이르러서는 큰 시냇물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은 최근에 와서 더욱 들어맞는다. 지금의 도산서원 1) 일대는 안동댐으로 더욱 드넓어져 바다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의 퇴계마을은 현재 안동댐에 수몰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지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양쪽의 산기슭은 모두 석벽이며, 물가에 위치한 경치가 훌륭하다. 물이 넉넉하여 거룻배를 이용하기에 알맞고 골짜기 옆으로는 고목이 매우 많으며 조용하고 시원하다. 산 뒤와 시내 남쪽은 모두 좋은 밭과 평평한 들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퇴계가 거처하던 암서헌(巖栖軒) 두 간이 아직도 있으며 그 집 안에는 퇴계가 쓰던 벼룻집과 지팡이, 신발과 함께 종이로 만든 선기옥형(璇璣玉衡: 옛날 천체를 관측하던 기구)을 보관하고 있다.
현재 도산서원은 토계리 680번지에 있다. 명종 15년(1560) 이황은 공조참판(工曹參判)의 벼슬을 내놓고 도산에다 서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다. 퇴계는 그 옆에 암서헌, 완락재(琓樂齋), 농운정사(隴雲精舍), 관란헌(觀瀾軒), 역락서재(亦樂書齋), 박약재(博約齋), 홍의재(弘毅齋), 광명실(光明室), 진도문(進道門) 등의 건물을 지은 후 모두 자필로 현판을 썼다. 명종 21년(1566) 임금은 어명을 내려 여성군(礪城君) 송인으로 하여금 그 경치를 대상으로 「도산기(陶山記)」와 시를 짓게 한 후 병풍을 만들어 내전에 두고 때때로 구경하였다. 또 후대의 영조와 정조 임금도 각기 화공에게 명하여 도산서당의 그림을 그려오게 한 후 보고 즐겼다고 한다.
도산서당 뒤편의 도산서원이 세워진 것은 선조 7년(1574)이다. 서원을 창건하여 퇴계 이황을 배향하고, 그다음 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도산서원’의 넉 자는 선조의 명으로 조선 중기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고 뒤에 퇴계의 제자 월천 조목을 추배하였다. 앞에 있는 전교당(典敎堂)은 보물 제210호로, 뒤에 있는 상덕사(尙德祠)는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서원을 나와 낙동강을 보면 강 가운데에 시사단(試士壇)이라는 작은 집 한 채가 있다. 1792년 3월에 정조 임금이 영남 사림을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과대인 별시를 베풀었던 것을 기념하여 단을 쌓고 정자를 세운 곳이다. 응시자가 너무 많아 도산서원에서 과장을 열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와 강변에서 과거를 보았다는데 그 당시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이 3,63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을 찾았던 성호 이익은 「퇴계 이황이 살았던 온계마을의 운치와 생리」라는 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토계 골짜기, 그 그윽하게 깊은 경치를 즐기며 살아오기 40년이다. 계곡의 돌로서 스스로 즐거움을 삼고 집 가에 있는 시냇물로는 수백 고랑의 논을 관개하기에 충분하여 약간의 여축(餘蓄)도 있었다. ······ 물은 거룻배를 이용하기에 족하고 골 복판에는 고목이 매우 많아서 조용하고 시원하다. 산 뒤와 시내 남쪽은 모두 좋은 밭과 평평한 밭둑이다.
한편 퇴계는 이곳에서 시조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지었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청상하리라.
하지만 그의 노래와는 달리 세월 속에 변한 것도 많다. 옛날에는 퇴계의 종손과 혼사를 맺으려고 여러 집안에서 혼삿말이 오고 갔지만, 근래 들어선 제사도 많고 할 일도 많은 퇴계 선생의 종손에게 시집을 오려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란다. 그래서 모 대학의 대학원에 다니는 종손에게 집안의 아녀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시집을 온다고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절하지 말고 데려와! 집안 따지지 말고.” 세월은 가고 사람들의 인정 또한 이렇듯 변하는 것이다.
만산고택 © 이종원
옛날에는 퇴계의 종손과 혼사를 맺으려고 여러 집안에서 혼삿말이 오고 갔지만, 근래 들어서는 시집오려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란다. 세월은 가고 사람들의 인정 또한 이렇듯 변한다.
퇴계가 태어난 마을은 도산서원에서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도산면 온혜리이다. 그 마을에는 퇴계의 할아버지인 노송정(老松亭) 이계양이 1445년에 지은 집이 있는데 ‘노송정고택’으로 불린다. 이계양이 봉화고을의 훈도로 있을 때 그 근처에서 굶주려 쓰러진 스님을 구해 준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스님이 집터를 잡아 주면서 “이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계양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인 이식의 일곱째 아들이 이황이었다. 노송정고택은 정면 7칸에 측면 6칸의 ‘ㅁ’자형 안채와 별도의 건물로 사랑채인 노송정 그리고 그 밖에 사당이 있는데 안채 마당가에 불쑥 튀어나온 온돌방이 퇴계가 태어난 태실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동강 가운데에 시사단이라는 작은 집 한 채가 있다. 1792년 3월에 정조 임금이 영남 사림을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과대인 별시를 베풀었던 것을 기념하여 단을 쌓고 정자를 세운 곳이다. 응시자가 너무 많아 도산서원에서 과장을 열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와 강변에서 과거를 보았다는데 그 당시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이 3,63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퇴계 이황이 살았던 도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2012. 10. 5., 신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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