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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우리 앞뒤 자고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미기자 시리즈 여덟 번째 자기 중심과 교만을 이기자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외쳐봅시다.
자기 중심과 교만을 이기자
우리 서로에게 또 힘을 불어넣어줍시다.
자기 중심과 교만을 이깁시다. 이깁시다 이깁시다 이깁시다.
여러분 이기자 하고 이야기하면 이깁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선포하고 따라가면 승리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자꾸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는데 여러분 한 주간도 이 말씀 붙잡고 반드시 승리하여서 다음 주에 하나님 앞에 영광으로 찬양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한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요 세상의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 안에 사람들이 둘로 나눠져 버린 거 안타깝죠. 한마음으로 힘써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공동체가 두 마음으로 나뉘어진 것이죠. 그래서 안타깝게도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한 교회 안에 있는데 그런 형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임 중에 모임은 잘 이루어집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마구 오고 갑니다.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는 기도가 없어요. 사명이라 생각해서 앞다투어 봉사하겠다고 봉사는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그 속 마음에는 왜 나만 하는 것 같지라며 불평의 마음이 올라옵니다. 서로 감정이 상하다 보니 예배를 드려도 마음이 복잡합니다. 기도를 드려도 뜨겁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긴장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를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이 교회는 무려 2천 년 전 초대교회의 모습이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 교회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모여들었던 사람들.
그런데 그 모임 가운데 생각보다 갈등이 너무나 심했던 것이죠. 그들 안에 분열이 있었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이곳저곳에서 마구 올라옵니다. 서로를 향한 비교와 정죄가 끊이지를 않는 거예요. 만나면 좋아야 되는데 만나면 좋은 친구가 아니라 만나면 따지고 싶은 친구, 만나면 인상 쓰고 싶은 마음 그게 참 안타까운 현실인 거죠.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편지를 통에 매우 직설적인 표현으로 그들을 권면하는 메시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요. 여러분이 이렇게 직설적이고 강한 메시지를 주는데 거기에 쓰는 야고보의 마음이 그들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정말로 그들이 건강한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로 회복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서부터 나느냐 다툼이 어디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속에 있는 정욕 때문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거예요. 야고보는 지금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는 그 원인, 싸움과 다툼이 유발되는 그러한 갈등의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죠. 즉 환경 탓, 남 탓 아니라 바로 내 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갈등의 원인은요. 내 마음속 자기 중심적인 욕망이라는 교만의 뿌리에서 시작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서두에 제가 교회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안에도 그런 모습들이 없지는 않다. 사랑해야 될 공동체지만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고, 눈을 마주치고 인사해야 되지만 인사도 못하는 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여러분 그게 우리의 또 현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에 들여다보면 이러한 모습들이 사실은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생각들 하지 않습니까?
내 말은 옳은데 너의 말은 틀려 이거는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는 하나의 생각이겠죠. 내가 더 열심히 하는데 왜 나만 고생해야 되는 걸까라는 그러한 마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왜 내 뜻대로 안 되지? 내가 의견을 이야기하면 들어줘야 되는데 왜 내 말을 무시하는 것 같지라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마음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내 생각과 내 뜻과 내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보이는 말과 행동 뒤에는요. 반드시 교만이라는 그림자가 따라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정말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라고 꼽는다면 교만일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보다 보면 교만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하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만은 다툼만 일으킬 뿐이다. 여호와께서 교만한 집에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겠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성경은 이렇게까지 교만에 대해서 경계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여러분 우리의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망가뜨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기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 가로막는 영적 벽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야고보서 4장 1절에서 10절의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왜 교만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벽일까?
두 번째는 진정한 겸손은 무엇이며 왜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을까 그렇죠. 교만한 자에게 은혜 주신다는 말은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은혜를 받고 살아야 되는 자들인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이야기하죠.
마지막 세 번째는요. 그러면 우리가 겸손하게 낮아졌을 때 누가 우리를 일으키시고 높이시는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 답을 찾을 것인데 이 해답은요. 사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누구에게 배우라고요?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데 내게 배우면 된다라는 그 말씀 안에 다 집약되어져 있는 것이죠.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교묘하게 숨어져 있는 자기 중심적인 교만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서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그래서 그 은혜로 사는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자기 중심 교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죠. 첫 번째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교만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는 적이다. 한번 따라 합시다.
교만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막는 벽이다.
서론에서 나눈 것처럼 우리 안의 관계에 갈등이 있고 마음이 삐걱거릴 때 그때의 우리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은가 인간관계가 좋지 않은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라고 물음을 물을 때에는 정말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그 안에 하나님과의도 거리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고요. 늘 혼란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야고보서는 4장 1절을 통해서 우리 안에 나타났던 그러한 갈등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정확하게 지적을 해줍니다. 우리 1절 말씀 한번 읽어보실까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냐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여기에 정욕이라는 다툼과 싸움은 외부가 아니라 너희 직체 중에 내 안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시작이 된다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정욕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헤도네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욕하면 떠오르는 음란이라든지 욕망이라든지 성적인 욕구 이런 것만을 취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의미는 달콤함, 쾌락, 자기 만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편한 것,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마음, 여러분 그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저기 있어요.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그럼 정말 속 시원하겠네요. 그런데 내 마음처럼 또 사라지지 않는 게 인생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내 욕구, 내 뜻, 내 생각 이것들이 집약되어져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헤도네라는 자기 중심은 내 생각이 먼저야 내 감정이 우선이지 내 이익이 더 중요한 거야라고 내 속에서 계속해서 외치는 거예요.
문제는 이런 태도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내 안에 있으니까 보이지가 않죠 누가 봐도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입니다. 신앙생활 정말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교만이라는 것이 재미 있음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들을 할 거예요. 직장에서 들어가서 이제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가 만든 것인데 직장 상사가 자기 걸 그냥 써버릴 때 우리의 속마음은 내가 내가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할 수가 있어 이런 마음들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게 가정에서도 자녀들을 이렇게 양육하다 보면 자녀들이 고마워해야 되잖아요. 부모에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 내가 이러고 이 자녀를 키워야 되나 하는 마음들이 가끔들 올라오지 않아요. 다 키우시는 분들은 옛날에 올라왔던 마음들이겠지만
하여튼 그러한 마음 교회 안에서도요. 열심히 봉사 수고했습니다. 왜 봉사 수고했어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어서 한 거예요. 사실은 내가 뭐 누가 시켜서 한 거일 수도 있지만 그래 그래도 내가 믿는 사람이니까 이 봉사는 해야지 그러면서 속으로 왜 안 알아주지 왜 인정해 주지 않지 그러면서 이 속에서 내 마음의 생각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내 깊은 속에서는 말하는 것입니다.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가 죄송합니다. 그러한 마음들이 우리 속 가운데 나타나는 것 도대체 날 뭘로 보고 이런 마음들 있죠?
여러분 이것이 바로 헤도네라는 단어 자기 중심에서 비롯된 교만인 것이죠. 성경은 이 교만이 무서운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 가로막는 벽이 되어 버린다는 거예요.
여러분 겉보기에는 신앙생활 정말 잘하는 것 같은데 기도가 메마릅니다. 말씀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예배를 들어도 마음에 뜨거움이 없어요. 왜 일까 한번 진단해 보셔야 돼요. 꼭 내 안에 교만함이 있지는 않아요.
그래서 여러분 3절에는 실제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양태를 보여주죠.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무엇 때문인가?
정욕 때문이다. 그렇게 말해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이유는 구함을 얻기 위함이죠. 그런데 여러분 기도하는 것마다 다 받아요. 다 받기를 소망합니다. 이왕이면 하나님한테 기도했는데 받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기도해도 받아지지가 않는 거예요. 내 마음이 만족함이 없는 거예요. 그러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죠. 그런데 성경은 이야기해요. 그것 정욕을 위해서 잘못 쓰려고 구하는 잘못된 기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사실 여러분 우리는 건강도 구합니다. 물질도 구합니다. 여러분 우리 가끔 그런 기도하는 사람들 있어요. 건강 주시면 나 회복시키시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정말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그래서 건강 주면 죽도록 충성합니까? 그게 쉽지 않다는 거 어쩌면 조건적 하나님 나에게 물질을 얻을 수 있는 능력 주시면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겠습니다.
아니요. 내가 살아가는 삶이 문제죠. 하나님께서 건강 주셔서 물질 얻을 수 있는 능력 주셔서 직장 허락해 주시고 했는데도 그 이후에 하나님과는 별개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교만한 마음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건강을 주셨을 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정말 소중한 마음인 것이죠. 여러분 건강을 주시고 물질을 주신 하나님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4절을 한번 보십시오. 4절 이렇게 기록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 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여러분 나 중심 세상 중심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과 원수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죠.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지만 그래도 우리 세상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세상의 즐거움도 좀 맛보고 살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럴 수 있다고 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렇죠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지만 세상에 속해 있고 세상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세상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죠. 어느 정도까지 가느냐 5절에 보니까 이런 표현을 해요.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을 시비하기까지 사모한다. 세상의 맛을 들어봤더니 참 맛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는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데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그 세상을 사모하고 살아간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구해서 내가 얻은 것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지 않고 세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일들을 따라가면서 이제는 내 안에 있는 성령이 신비하기까지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 그래서 야고보서 4장 6절은 이렇게 경고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할렐루야 여러분 여기에서 물리친다라는 말은 안티타세타이라는 용어인데 군사 용어입니다.
적군과 맞서 싸운다. 즉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실 때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무슨 이야기예요?
내가 교만하면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가 돼버린다는 거죠. 이 굉장히 무서운 거죠. 그래서 이 교만을 이기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만은 우리의 성격 문제 아니면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아니라는 거예요.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전쟁을 세상과 하지 않고 하나님과 하기 시작합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집단 싸움을 해요. 집단 싸움 그런 영화들 많이 나오죠. 제가 가끔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야 저렇게 얽히고설키고 싸우는데 내가 누군가를 쳤는데 저 꾼이 아니고 아군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영화를 보면 굉장히 요 적군과 아군을 굉장히 잘 분별해서 싸워요. 저렇게 뒤엉켜 있는데도 그게 가능하다 영화니까 그러겠죠.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 다 알면 또 그럴 수 있겠어.
여러분 누군지도 모르고 막 싸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사실 아군 적군인지도 모르고 싸우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해야 될 믿음의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영적 전쟁을 하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영적 전투력을 주셨는데 막 싸우다 보니까 정신 차리지 않고 싸우다 보니까 하나님하고 대적하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여러분 어처구니가 없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그래서 겉보기에는 어쩌면 정말 멋진 신앙인 같지만 하나님과의 대접받는 관계가 내 안에 있다면 거기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말씀합니다. 왜 구해도 받지 못하느냐 정욕을 위해서 잘못 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기억하셔야 돼요. 내가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
그러면 한 번쯤 물어봐야 내 기도가 무엇을 위한 기도인가 내가 말씀을 들어도 어떤 느낌이 없다 어떤 감동이 없다 그러면 고민해 보셔야 돼요. 하나님의 뜻과 내 뜻 가운데 혹시 내 뜻이 너무나 강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지는 않는가 이런 생각들을 해보셔야 된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내 모습을 진단하고 내가 하나님과 벽을 두고 살고 있으니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찬양 가운데도 고백되어졌잖아요. 하나님께 가까이 하나님께 가까이 할렐루야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하는데 예수 믿고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건 뭐예요?
기도하면 기도에 기쁨이 있고 능력 있고 할렐루야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게 뭐예요?
예배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고 할렐루야 예배의 자리가 사모함 되어지고 어떻게 예배와 TV와 비교가 됩니까?
사실 우리의 눈으로 정욕으로 보면 TV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예배가 훨씬 재미있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인간의 욕구를 가지고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를 진단하셔야 된다는 거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즐거움 즐겁습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더 즐거운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것이 믿음 생활 아니겠어요?
정말 행복하고 내가 예수 믿어서 오늘 하루가 즐겁고 여러분 100일 감사 1천 번제 이틀 동안 제가 썼는데 참 쓰기 쉽지 않아요. 하루에 10가지 쓴다는 거. 그런데 제가 이거 쓰면서 느끼는 건요. 야 기적이 일어나겠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루에 10가지씩 감수하면서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만큼 10가지 불평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시오. 감사하는 자에게 왜 하나님이 돈을 것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그 집을 하신다고 했어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갈 공간이 단 1도 없는 다. 내 마음 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그래서 하나님이 갈만한 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러분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나는 저 세례와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기도입니까? 자랑입니까? 기도입니까?
하나님 나는 저 세리 같지 않아서 그런지 세리는 막 엎드려서 머리를 굽고 정말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면 하라고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은혜가 누구에게 임했다고요?
세리에게 임한 것이죠. 이 교만한 자 교만한 자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빈 그릇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 생각, 내 뜻, 내 자아로 가득 차버린 그러한 가운데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비우고 비우셔서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겸손한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두 번째는요. 진정한 겸손은요.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흔히 겸손을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말 좀 줄여야겠다 나서지 말고 조용히 해야겠다. 겸손한 척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무슨 이야기예요 사람들에게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의 겸손을 위하여.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겸손은요. 사람 앞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더 나아가 겸손은 우리의 태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향이라는 거예요.
오늘 야고보서 4장 7절에서 8절은 이렇게 기록해 줍니다. 우리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런 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 남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여러분 이 구절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지금 명령하고 있다는 거예요. 복종하라 대적하라 피하라 등등 깨끗하게 하라. 정결하게 하라. 여러분 이처럼 겸손은 그냥 말이나 표정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삶의 방향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결단, 하나님의 마음을 추구하는 마음 따라서 진짜 겸손한 사람은 이렇게 고백하는 거죠. 하나님 제가 제 뜻대로 살 수 있었던 것 같은데 하나님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동안 내 뜻 가지고 살았고 내 생각 가지고 살았는데 하나님의 뜻이 뭔데
여러분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가 있죠. 그 베드로가 그물을 깊습니다. 그리고 배를 띄워드렸어요. 예수님께서 한참 동안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도 그물을 지우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사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화날 만한 말일 수도 있어요. 평생을 그물을 내렸던 사람이잖아요.
주님 이건 아닙니다. 평생토록 그물 내려봤지만 이 시간에 늦은 그물을 내린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라니요. 주님 지금 깊은 데 가도 못 잡겠네.
그렇게 말해야 정상적이고 지극히 정상적인 대화라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말씀에 의지해서 내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할렐루야 자기의 생각과 뜻이 없었던 게 아니에요. 분명히 그 안에는 자기의 뜻과 경험들을 다 가지고 있어요.ㅜ그러나 그것이 우선되지 않고
주님 제가 그냥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여러분 그리에서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뒀다라는 거예요. 왜 이런 기적이 가능했습니까?
베드로가 자기 지식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냥 복종하는 삶 순종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이죠.
여러분 큰 용사였지만 나병 환자였던 나만이 있습니다. 찾아와서 선지자에게 묻습니다.
나 좀 좀 고쳐주세요.
요단강에 가서 7번 담궈라
그러면 고침 받으러 왔으면 따라야 될 거 아니에요?
여러분 병원 가서 의사 선생님이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의사죠.
그거 아닌 것 같습니다. 내 몸은 내가 잘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이야기하는데도 내 몸은 내가 잘합니다.
그런 것과 같아요. 지금 나만이요. 다메의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보다 낫다. 차라리 거기 가서 씻는 게 낫겠다고 등을 돌려버립니다. 그때 종이
아니 장군님 선지자가 나와서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하라고 하실 거 아니에요? 한번 좀 해보시죠.
그래서 그 동의의 설득을 받고 요단강에 7번 몸을 담갔다는 거 아니겠어요?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어린 아이에 살갗이 회복되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게 바로 순종의 힘 겸손한 자의 모습. 그래서 믿음 순종 겸손은요 하나예요 하나 순종할 수 있는 여러분 나만의 문제는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내 생각에는 이렇게 있어요. 하나님의 뜻이 있고 내 생각 분명히 있죠. 여러분 그러한 일을 우리는 수도 없이 겪잖아요. 기도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정말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내 생각이요. 굉장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건 안 될 거야 이건 빼고 저건 아니고 다 지워요. 믿음이 하나도 없어 보면 기도를 해도 거기에 대한 소망도 없습니다. 이건 될 거야 아니요. 인간적인 생각을 보면 되지 않는 것들을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훈련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래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순종해야겠다는 그 마음 이것이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죠.
오늘 4장 7절에 복종하라라는 이 헬라어는 피파 타겟테라는 단어입니다. 이것 또한 군사적 용어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상관이 명령하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군인들이 예 상관이 명령한다 그러면 예 수절하고 그냥 하잖아요. 그게 진짜 군인이라는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야 되는 것 군인의 자세 이것을 바로 겸손이라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이런 마음이 있어요.
주님 분명히 제 마음 가운데 이해되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해보겠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러한 결단이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진정한 겸손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거 여러분 특별히 8절은 말씀합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을 같이 품고 있는 사람들 여러분 성결하게 하라는 것은 하나로 모으라는 거예요.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집중하라는 것이 내 안에 있는 교만 비선 이중적 태도를 씻으라는 거예요. 즉 여러분 이 교만함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회개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여러분 우리가 주일에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니까 또 교회에 왔으니까 표정 들으니까 굉장히 행복할 수 있지.
그런데 월요일부터 직장에 가면 거친 말로 교만한 태도로 사람을 힘들어하는 경우 여러분 이것은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겉으로는 주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요.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금방 상심하는 겁니다. 내 뜻대로 안 되지 하나님 왜 안 되죠? 그러다가 상심해버리는 여러분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 앞에 진짜 낮아진 것이 아니에요.
회개 없는 겸손은요. 여러분 껍데기 겸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가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 겸손하게 해 주십시오. 눈물 흘려야 됩니다. 여러분 야고보서 4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9절 한번 읽어보실까요?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의 웃음을 애통으로 너의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여러분 기도하면 이 웃음으로 바뀌죠. 그죠 근심을 즐거움으로 바꿔야 되는데 지금 야고보서 2장 거꾸로 이야기하잖아요. 애통하며 울어라.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중심으로 바꿀 시 무슨 이야기예요?
내가 지금 세상의 즐거움을 가지고 교만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정말 그것을 내가 봤다면 놀라는 거예요.
하나님 내가 이렇게 교만했네요. 하나님 내가 이렇게 무지했네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살았네요.
그것을 발견하고 내 모습을 진단하고 울라는 거예요. 지금 누구한테 하는 이야기라고요?
야고보 선생님이 그 교회를 다녔어요. 다툼과 분쟁이 너무 많으니까 야 너희들 그거 다 교만 때문이다. 교만 내 속에 있는 교만 때문이다. 그걸 좀 봐라. 그리고 그 보았다면 좀 들어라. 하나님 앞에 본지 주세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물 앞에 우리 하나님은 연하고 있습니다. 이누의 성을 아시죠? 요나서 3장에 보면 니느웨의 백성이요. 요나의 경도를 입고 내 옷을 입고 눕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뜻을 벗으셨잖아요. 하나님은 우는 자들에게 약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교만이 있다면 발견하시고 겸손을 위해 우는 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져 내 주변에 자꾸 다툼과 싸움이 있다면 여러분 꼭 점검하십시오. 내 안에 것이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도 있어 그게 해결되면 다툼과 분쟁도 사라지게 되어요..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진짜 높아짐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교만의 위험성, 겸손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꼭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낮아질 때에 우리를 높이시는 분이 있다는 거예요.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 6절 4장 6절 한번 큰 소리로 읽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10절도 읽습니다. 크게 읽습니다. 시작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러분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거요. 사람들 관계 속에서의 높임도 있습니다. 그렇죠 사람들이 높여주는 것은 그런데 조건이 따라요. 성과를 내야 하고요. 능력을 보여줘야 높임을 받습니다.
그렇죠 직장에 가보세요. 일해 보시면 아시죠 내가 높임을 받으려면 적어도 성과가 있어야 돼. 어느 정도 능력치가 있어야 사람들이 높여주고 인정해 준다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높임은요. 그런 조건이 아니라 겸손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세요. 그리고 그 은혜가 우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은혜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죠.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말하죠. 남보다 앞서야 된다고 여러분 그렇게 우리가 배우고 살았잖아요. 자식들도 그렇게 키우잖아요. 자기를 피하할 줄 알아야 된다. 높아져야 성공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크다. 섬기는 자가 지도자다.
무릎 꿇는 자가 하늘의 도움을 받는다.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이 빌립보서 2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모습을 이야기하잖아요. 원래 하나님과 동등됨을 주시할 것으로 여긴 그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낮아지고 낮아지셨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2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읽습니다. 시작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누가 높이셨어요? 하나님 누가 높이셨어요? 하나님이 높이셨어요?
주님이 먼저 내려오시니 하나님이 그 주님을 높여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앞서 우리 베드로 이야기를 했죠. 이 베드로가요. 그물에 물고기가 잡히고 나니까 주님 나와 동업해서 멋진 사업을 일으켜 보시죠. 그렇게 안 했다니까 주님이 말씀하셔서 매일 113마리를 잡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주님과 동업하면 부자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와서 한 얘기가. 무릎 꿇고 빌어 이야기하는 주님이 날 떠나시고 나는 죄인 그 순간에 회개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있다 이렇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겸손한 자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은혜 주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신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가운데 연봉이 오르는 거 참 좋지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참 좋습니다. 건강과 성공을 누리는 것 좋아요. 하나님께서 그거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믿음의 사람 연봉이 올라가는 거 하나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내 사랑하는 자녀가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누구보다 바라시는 것이 우리 아버지 마음 아니겠어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박수받는 거 하나님이 누구보다 야 우리 교회 누가 누가 세상에서 인정받았더라 그러면 기쁘지 않겠어요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 믿음의 백성들 건강하기를 소망하고요. 어떡하든 성공을 누드리기를 원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높이심은 거기에서 끝난다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높이심이 훨씬 더 깊고 넓고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높이심 속에는 그 차원을 넘어서 상한 마음을 회복시키시고 할렐루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가정 안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허락하여 주시고 여러분 이런 것들이 다 우리에게 소중하지 않습니까?
자녀가 말씀 위에 바로 서게 하시며 낮아진 우리에게 그 누구보다도 높은 자리에서 뛰놀게 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낮아짐이 없으면 높아짐이 없습니다. 나 스스로 높아질 수는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요. 한계가 있습니다.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나의 생각, 나의 자존심, 나의 판단, 나의 경험, 이러한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결론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초대교회 안에 있었던 다툼과 분열, 경쟁과 부다의 뿌리가 교만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요. 이러한 교만으로 인해서 다툼과 앞으로 분쟁이 있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에 이 교만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막혀 있는 방은 없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고 전하에 대해서 입담을 하셔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서 이 땅 가운데 사는데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인생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