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내 오래된 친구의 이야기이다.
(성형외과 원장 이주혁님)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들어온 그 많은 수재들 가운데서도 언제나 천재 소리를 들었다. 한번 듣거나 본 지식은 잊는 법이 없었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천재들 특유의 잘난척이나 거만함따위를 찾아보기 어려운 친구였다.
그는 졸업을 앞두고 성적이 좋은 친구들이 많이들 지원하는 소위 잘 나가고 돈을 잘 버는 과들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같다. 그는 아무도 지원 않는 응급의학과를 지원했는데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당시 서울대학교 응급의학과는 첫 삽을 뜨는 시기였고 위에서 끌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 이 친구가 2기 전공의였을 것이다.
그는 응급의학과 전공의 4년차때 서울시립병원에 파견을 나갔다. 거기에는 행려환자 전용 구역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행려 환자 구역과 일반 환자 구역은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는 그런 환경을 보고 겪으면서, 오히려 행려 환자 구역에서 더 오래 머무르며 더 그쪽 일에 집중을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가 수련을 마칠 즈음, 누구나 그렇듯 그도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응급의학 전문의에 대한 수요는 여기저기 많았고, 혹은 서울의 메이저 병원들에서 테뉴어를 받는 교수가 되는 진로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당연했다.
그런데 그는 돌연 코이카 국제 협력단의 아프리카 장기 근무 의사로 카메룬에 지원한다. 팔순이 넘은 아버지가 계셨고 소중한 아내, 3살밖에 안된 아들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놀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는 "국제 협력단에서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아프리카에 장기간 가 있을 의사가 없을 것같아서"라고 하였다.
아프리카 카메룬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만 4살도 안 된 아들이 펄펄 끓는 고열이 났다. 어떤 처치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갈 만한 병원이 없는 의료의 불모지대였다.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그 시점에서 일찌감치 그런 나라를 떠날 생각을 했을 것같다.
그런데 그는 "이곳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응급 의료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살아갈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동분서주하면서 여러 한국 기업체의 지원을 받아서 기자재와 기계들을 지원받고 부족한 인력과 장비도 갖추고, 카메룬 최초의 응급 의료 역량을 갖춘 병원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굉장한 모험이었다. 그렇게 땀을 흘린 5년, 결국 카메룬 야운데 응급의료센터 (CURY)가 설립된다. 사회복지사까지 코이카에서 파견돼서 모든 인력이 포괄적으로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병원이다. 그와 이 병원은 카메룬 국민들의 감사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일화들을 남긴다.
2016년 10월 카메룬. 1300명을 태우고 달리던 기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상자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상황에서, 이게 재앙이 되지 않도록 붙잡고 막을 수 있던 것은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에 사고 통보가 접수되자 빨리 병원을 비워서 응급환자들을 받을 수 있게끔 준비했고... 사망자 70명 사고였지만 응급센터에 온 사람 중 누구도 사망하지 않았다.
이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의료 협력단원들은 더더욱 가슴 뭉클한 일화들을 남긴다.
어느 날, 센터의 한 간호봉사단원은 절도행위 중 칼에 찔린 환자에게 수혈해 줄 혈액을 구하기 위해서 밤늦게까지 택시를 타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끝내 혈액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원장의 명령까지 어겨가며 자신의 피를 헌혈해서 가져다 주었다.
범죄자라 손가락질하며 수술을 거부하려했던 현지 의료진은 그 혈액을 받은 뒤 수술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뼈를 갈다시피 하여 만든 이 아프리카의 병원은 그런 곳이었다.
아운데 응급의료센터. CURY 의 벽면에는 현지 봉사단원들이 쓴 글이 곳곳에 붙어 있다. 이런 글이다. "우리의 따뜻한 심장과 함께 당신의 심장은 계속 뛸 겁니다."
친구의 활동 무대는 이제 한국으로 옮겨 왔다. 카메룬의 국민적 영웅이나 다름 없었던 그에게 당연히 CURY의 원장직 제안이 왔으나 그는 거절했다. 현지의 사람들, 현지의 의사들이 여기서 계속 이 일을 해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응급의료를 담당할 현지 의사들을 육성하고 가르쳤다.
그는 코로나의 한 중간에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의 그 아비규환과 혼란 속 전쟁터와 같은 코로나를 지원도 별로 없는 공공병원에서 최전방에서 막아섰다. 그와 같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헌신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살렸다.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그는 아무도 모르게 들어와서, 아무도 모르게 신이 부여한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당시 그의 SNS를 보면 하루 종일 밥 한 끼를 먹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던 전쟁터와 같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는 2020년 해외 봉사상 중 국무총리상과 이태석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선 어떠어떠한 상이며 훈장들 등이 오히려 그 광채를 잃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삶이야 말로 가장 휘황한 광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 나의 오래된 친구. 정중식 박사에게 늘 경의와 존경을 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