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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영지연(絶纓之宴)
갓끈을 끊고 즐기는 연회라는 뜻으로,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해주거나 어려운 일에서 구해주면 반드시 보답이 따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絶 : 끊을 절(糸/6)
纓 : 갓끈 영(糸/17)
之 : 갈 지(丿/3)
宴 : 잔치 연(宀/7)
출전 : 설원(說苑) 복은편(復恩篇)
갓끈과 푸근한 술자리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옛 사람들은 주연에서도 근엄하게 의관을 정제하고 기품 있게 즐겼는데 갓끈을 풀어헤치다니 그만큼 격식을 잊고 분위기를 즐기라는 의미였겠다. 성대한 술자리에서 흥겹게 논다는 의미의 성어는 배반낭자(杯盤狼藉)나 굉주교착(觥籌交錯), 주야로 술 마시고 논다는 복주복야(卜晝卜夜) 등이 있다.
여기에 더한 절영지연(絶纓之宴)은 남에게 너그러운 덕을 베푸는 것을 비유하여 단순히 노는 술자리만이 아니고 화합이 잘 되어 생산성을 높이는 회의를 연상할 수 있는 뜻도 포함한다. 절영지회(絶纓之會)나 간단히 줄여 절영(絶纓)이라고도 한다.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에서 유래했다.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하나로 세력을 떨치던 초(楚)나라 장왕(莊王) 때의 얘기다. 어느 해 일어난 반란을 평정한 뒤 공을 세운 문무백관들을 궁중에 초청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궁녀들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 했다. 밤이 이슥하도록 주연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광풍이 불어 촛불이 모두 꺼져 버렸다.
그때 왕의 애첩이 비명을 질렀다. 어둠 속에서 누가 가슴을 더듬고 희롱했다며 갓끈을 끊었는데 불을 켜서 갓끈이 없는 사람을 잡아 처벌해 달라고 애소했다. 불만 켜면 왕의 애첩을 희롱한 자가 드러나고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그러자 장왕이 "오늘은 과인과 함께 마시는 날이니 갓끈을 끊지 않은 자는 이 자리를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今日與寡人飮 不絶冠纓者不歡)"며 모두에게 불 켜기 전에 갓끈을 끊도록 명령하고 여흥을 즐겼다.
3년 뒤 장왕은 진(晉)나라와의 전쟁에서 선봉으로 큰 공을 세운 장수에게 상을 내렸는데 그가 이미 왕에게 죽었던 목숨을 건졌던 사람이라고 실토했다.
이 사건은 성범죄에 해당되어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왕은 작음(개인)보다 큼(국가)을 보았다.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고 엄격히 처벌하는 처사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실천했던 것이다. 위법도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 너그럽게 대하는 자세 또한 필요한 것이다.
왕은 대의(大義)를 위하여 신하의 잘못을 덮고 관용으로 인간과 국가관리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를 실천하려면 용기, 관용, 정의, 과단성 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분노를 참아내는 모진 인내(忍耐)가 필요하다. 인내한다는 것이 권력자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참을 인(忍)자를 보면 마음심(心)자 위에 칼날인(刃)자가 놓여있다. 곧 심장에 칼날을 갖다 대는듯한 고통이 따르는 어려운 일이다. '한 때의 화를 참으면 백날의 근심을 면한다(忍一時之忿 免百日之憂)'고 한다.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를 꾸짖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라(責人之心責己 恕己之心恕人).'
이 시대는 남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남을 헐뜯고,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는 행위가 사회를 가득 메우고 있다. 요즈음 유행하는 '내로남불'이란말도 우연히 붙여진 용어는 아닌듯하다.
절영지연(絶纓之宴)
관(冠)의 끈이 끊어질 정도로 취한 연회라는 뜻으로,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절영지회(絶纓之會)라고도 한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의 복은(復恩) 편에서 유래했다.
초나라 장왕이 난을 평정한 뒤 공을 세운 장수들을 위로하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아끼던 애첩 총희로 하여금 옆에서 시중을 들도록 했다. 밤이 늦도록 주연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촛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이때 총희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그녀의 가슴을 더듬으며 희롱했던 것이다.
놀란 총희는 그 장수의 갓끈을 잡아 뜯고는 장왕에게 울며 호소했다. “대왕, 어떤 장수가 저를 희롱했나이다. 속히 촛불을 켜 갓끈이 없는 자를 잡아주십시오!” 이때 장왕이 화를 내는 대신 하령했다. “불을 켜지 마라. 오늘은 경들이 과인과 함께 즐겁게 술을 마시는 날이다. 지금 모두 갓끈을 끊어라. 갓끈을 끊지 않는 자는 이 자리를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 장수들이 모두 갓끈을 끊고 나자 촛불을 다시 켜고 뒤 술을 마셨다.
세월이 흘러 3년 뒤 초나라가 중원의 패자인 진(晉)나라와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장왕이 지휘하는 군대가 함정에 빠져 크게 고전하고 있을 때, 한 장수가 선봉에 나서 죽기를 무릅쓰고 장왕을 구해 낸 뒤 전세를 가다듬어 초나라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장왕이 그 공을 치하하기 위해 장수를 불러 물었다. “과인은 평소 그대를 특별히 잘 대우해준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그토록 죽기를 무릅쓰고 싸운 것인가?” 그러자 그 장수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은 이미 3년 전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갓끈을 뜯긴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애첩을 희롱한 죄는 죽어 마땅했습니다. 그때 대왕의 온정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목숨을 바쳐 대왕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부하의 잘못을 관용으로 대한 장왕의 리더십은 결국 자신을 죽음에서 건지는 보상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갓끈을 끊고 연회를 즐긴다’는 절영지연(絶纓之宴)이다.
관용의 법칙은 전쟁터에서 더 확실히 나타난다. 전쟁에서 패배한 장수를 엄벌에 처한다면 전쟁이 확실히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역사학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전쟁은 어떤 장수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특징이다.
그런데 패배한 장수를 가혹하게 다루면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서도 승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게 아니라 오직 패배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대담하게 작전을 짜고 용맹하게 전투를 수행하기보다 방어적인 작전과 소극적으로 전투를 수행하게 된다. 더군다나 패배할 위기에 놓이면 적에게 항복하는 일도 속출하게 된다. 패장으로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능한 리더일수록 부하의 실패에 관대하다는 것은 서양의 마키아벨리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는 로마제국이 주변 나라와 전쟁에서 숱하게 패배했음에도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을 이렇게 밝힌다. “로마는 군대의 지휘자를 처벌하는데 있어서 다른 나라에서 찾을 수 없는 자비와 동정을 베풀었다. 장군이 저지른 죄가 악의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을 인간적으로 처벌했다. 또한 무능에 의한 경우에는 전혀 처벌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상이나 명예를 수여받은 적도 있었다. 이런 정책은 현명하게 채택된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군대를 통솔하는 장수가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패배 이후 등의) 외부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기꺼이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수가 불안한 미래 때문에 과감하게 작전을 짜고 총력을 다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흉노열전'에서 한무제(漢武帝)가 패배한 장수에게 책임을 물어 가혹하게 처벌하면서도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보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제의 장수가 흉노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흉노에게 투항하자 고향에 남아있는 그의 가족을 몰살했다. 뿐만 아니라 몰살 소식을 알려준 이들까지 색출해 처벌했다. 그 결과 무제 때는 적군에게 투항하는 일들이 빈번했다.
아시아 동서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건설하고 한 번도 재패해 보지 못한 흉노를 정벌하고 고조선까지 멸망에 이르게 하여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한 난세의 통치자 한 무제. 그도 처음에는 부지런한 황제였으나 마침내 해이해지고 신하들의 간곡한 진언을 묵살한 채 끝내 사치와 향락에 빠져 ‘가장 닮지 말아야 할 군주’로 남았다.
그의 통치 시대를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온 백성이 유랑민이 되고 그 절반은 죽었으며, 풍년이 들어도 기아를 면치 못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었다.”
절영지연(絶纓之宴)
갓 끈을 끊은 잔치 자리
사(私)적인 일보다 공(共)적인 일을 우선(優先)하는 참다운 도량(度量)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絶( 끊을 절) 纓(갓끈 영) 之(어조사 지) 宴(잔치 연)으로 구성되었다.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해 주거나, 남을 어려운 일에서 구해주면 반드시 보답이 따른다는 보은(報恩)의 가치를 깨우쳐 준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 장왕(莊王) 때의 일이다. 초나라 장왕이 나라의 큰 사건(투월초의 반란)을 평정한 후 공(功)을 세운 신하들을 치하하기 위해 연회(宴會)를 열었다. 그리고 모든 신하와 후궁, 비빈들까지 초대했다. 이 잔치는 벼슬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모두 마음껏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잔치 이름을 태평연(太平宴)이라 했다. 잔치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뒤에도 계속되어 마침내 잔치자리는 흥이 절정에 달했다.
장왕은 그의 애첩 허희(許姬)에게 모든 대부(大夫)들께 골고루 술을 따라 오늘의 이 잔치를 더욱 빛내라고 일렀다. 허희가 일어나 한 대부에게 술을 따르자 모든 대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허희가 잔치 자리를 반쯤 돌았을 때였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와 잔치 자리의 모든 촛불이 동시에 꺼져버렸다. 잔치 자리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대부가 억센 팔로 허희의 허리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허희는 대부의 가슴을 밀어내면서 다른 손으로 그 대부의 관(冠)끈을 잡아끊었다. 그러자 그 대부는 허희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이어 허희는 관 끈을 손에 쥐고 장왕에게로 와서 귀에다 자초지종을 말하고 관 끈의 임자를 찾아내라고 하였다.
이에 초장왕은 “아직 불을 밝히지 마라. 과인이 오늘 잔치를 베푼 뜻은 경들과 함께 기뻐하기 위한 것이니 경들은 마음 놓고 마시기 위해 그 거추장스러운 관(冠)끈을 끊어버리고 마음껏 마시도록 하오. 만약 관(冠)끈을 끊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과인과 함께 즐기기를 거역하는 자로 간주할 것이오.” 모든 백관들은 일제히 관 끈을 끊었다. 그제야 장왕은 불을 밝히게 했다. 따라서 허희의 허리를 안았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잔치가 끝나고 장왕이 내궁으로 들자 허희가 아뢴다. “첩이 듣건데 남녀는 함부로 범하지 못한다 하더이다. 더구나 임금과 신하의 사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오늘밤 대왕은 첩으로 하여금 모든 대신들에게 술을 따르게 해서 공경하는 뜻을 보이셨건만 무례하게 첩의 몸에 손을 댄 자가 있었습니다. 왕은 그 무례한 자를 잡아내려고 하지 않으시니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왕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자고로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서 술을 마실 때엔 서로 석잔(三杯)이상을 못 마시는 법이며, 그것도 낮에만 마시고 밤에는 못 마시게 되어 있다. 그런데 과인은 오늘 모든 신하와 함께 취하도록 마셨고, 또 촛불을 밝히고서 까지 마셨다. 취하면 탈선하는 것은 인정(人情)이다. 만일 그 대부를 찾아내어 벌(罰)한다면 모든 신하의 흥취가 어찌 되었겠는가? 그렇게 되면 오늘 과인이 잔치를 차린 의의가 없지 않느냐?”
허희는 이 말을 듣고 장왕의 큰 도량(度量)에 탄복해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시대의 분위기에서 왕의 여인을 희롱한 것은 왕의 권위에 도전한 역모(逆謀)에 해당하는 큰 불경죄(大不敬罪)로 죄인은 물론 온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수 있는 중죄(重罪)였다. 그런데 왕은 오히려 그 중대한 사안을 신하들의 마음을 달래는 치하(致賀)의 연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수(失手)로 넘긴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장왕은 놀랍게도 그 일이 자신의 경솔(輕率)함에서 빚어진 일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장왕이 큰 뜻을 품고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총애하는 후궁보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칠 신하를 더 소중히 여긴 큰 도량(度量)의 발로(發露)이기도 하며, 자신에 대한 자존감(自尊感)이 충만(充滿)한 사람임을 입증한 결과까지 인정되었다.
몇 해 뒤에 초(楚)나라는 진(晉)나라와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린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 전쟁에서 장왕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장웅(蔣雄)이라는 장수가 나서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초나라의 수호신이 되어 온몸이 붉은 피로 물들며 마치 지옥의 야차(夜叉)처럼 용맹하게 싸워서 장왕을 구하고 초나라는 결국 승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장왕은 그 장수를 불렀고 용상에서 내려와 그 손을 감싸 쥐고 공로를 치하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맹하게 싸운 연유를 물었다. 그 장수는 장왕의 손을 풀고 물러나 장왕에게 공손하게 큰절을 올리고 나서 말하기를, "몇 해 전에 있었던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해 죽을죄를 지은 소신을 폐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그날 이후로 소신은 새롭게 얻은 제 목숨을 폐하를 위해서 바칠 각오를 했고, 마침내 전쟁터에서 그 각오를 실현코자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그 임금에 그 신하가 아닌가? 왕은 대의(大義)를 위하여 신하의 잘못을 덮고 관용으로 국가관리에 성공했고, 신하는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는 신하의 본분을 다했다. 채근담(菜根譚)에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따뜻하게) 하고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같이(엄격하게) 하라(待人春風 持己秋霜/ 대인춘풍 지기추상)”고 했다. 관용(寬容)과 따뜻함이 넘치는 사회를 기원해 본다.
초(楚) 장왕(莊王)의 리더십에 주목한다
우리는 어떤 리더를 갈망하고 있는가?
충고 수용과 소통의 함수관계
직언과 충고를 허심탄회하게 수용하는 리더는 드물다. 역사적으로도 그렇다. 우리 사회의 리더들은 더욱 그렇다. 직언과 충고를 수용한다면서 그것을 이용하여 인재들의 약점을 잡고 그들을 통제하려는 불순한 리더들도 적지 않다. 장왕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필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남의 말을 잘 듣는 그런 리더였다. 충고도 잘 받아들였는데,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의 충고조차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역대 코미디언들의 행적을 모아 놓은 사기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왕은 말을 아주 좋아했다. 옛날에는 말이 전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귀한 대접을 받았지만 장왕은 말을 좀 지나치게 아꼈다. 사람도 먹기 힘든 대추와 마른 고기를 먹이로 주고, 비단옷을 입혀주고 말을 침대에서 자게 했다.
이 때문에 장왕의 애마는 운동 부족에 비만으로 일찍 죽고 말았다. 상심한 장왕은 관을 잘 짜서 대부(大夫)의 예로써 장사를 지내주라고 명령했다.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장왕은 막무가내로 “내가 아끼던 말(馬)을 가지고 감히 말을 하는 자는 목을 베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키가 8척에다 변설에 능하고 언제나 담소로 세상을 풍자하기를 즐기던 악공 우맹(優孟)이 이야기를 듣고는 조정에 뛰어 들어와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했다. 장왕이 그 까닭을 묻자 우맹은 이렇게 말했다. “말은 폐하께서 정말 좋아하신 영물인데, 이 막강한 초나라에서 무엇을 얻지 못하겠습니까? 대부의 예로 장사를 지내는 것은 너무 야박합니다. 임금의 예로 장사를 지내야만 합니다.”
장왕은 우맹에게 그 방도를 물었다. 그러자 우맹은 이렇게 청했다. “폐하, 옥을 다듬어 속 널을 만들고 무늬가 있는 가래나무로 바깥 널을 만들며 단풍나무, 느릅나무, 녹나무 등으로 횡대를 만드십시오. 군사를 동원하여 큰 무덤을 파고 노약자로 하여금 흙을 지게 하여 무덤을 쌓고, 제나라와 조나라의 조문단을 앞에 하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조문단을 뒤에서 호위하게 하십시오. 사당을 세워 태뢰(太牢; 소 양 돼지 한 마리씩을 바치는 최고의 제사)을 지내고 만 호의 읍으로써 받들게 하소서, 제후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듣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대왕께서 사람보다 말을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통렬한 풍자에 장왕은 “과인의 잘못이 그렇게 크단 말인가”라고 후회하면서 죽은 말은 평범하게 묻어주게 했다. 장왕은 우맹의 통렬한 풍자를 통한 충고를 뼈저리게 수용한 것이다.
장왕과 우맹 중에 누가 더 매력적인가? 장왕도 부럽고, 우맹도 부럽지만 더 부러운 것은 그런 보잘것없는 코미디언까지 나서서 최고 권력자와 소통을 할 수 있었던 그 시대의 분위기다. 물론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장왕이었다. 이렇게 상하가 서로 소통이 되는 민주적 분위기가 결국은 초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고 언로가 막혀 있거나, 최고 지도자가 귀를 꼭 닫고 있으면 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지난 십수 년 간 우리 사회의 리더들은 입이 아프도록 소통을 떠들어댔다. 이는 소통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소통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굳이 소통을 거론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상호작용이다. 중국 속담에 ‘마음이 맞지 않으면 반 마디도 많다’고 했다. 마음이 맞아야 소통의 길이 열린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서로 마음이 맞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준비가 상호작용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리더는 더 나아가 이 필요조건을 뛰어넘어 소통을 위한 충분조건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천하 패권을 가늠하다 : 문정경중(問鼎輕重)
기원전 606년 초나라 장왕(莊王)은 주 왕조 변경에서 군대를 사열하며 시위를 벌였다. 주의 정왕(定王)은 대신 왕손만(王孫滿)을 초군으로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다. 초 장왕은 왕손만에게 주 천자의 상징물인 세발솥 정(鼎)의 무게가 얼마나 나가냐고 물었다. 여기서 왕권에 대한 도전이나 중앙 최고 권력을 탈취하려는 의도를 뜻하는 ‘문정경중’이란 고사성어가 탄생했다. 이 고사는 문정중원(問鼎中原)이라고도 쓰며, ‘문정’이라고 줄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주나라의 세발솥은 천자의 상징이자 지존무상으로 타인이 함부로 물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초 장왕의 질문은 실질적으로는 주 천자의 권력에 대해 물은 것이자 천자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무례한 언동이었다. 왕손만은 초 장왕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주 왕실의 통치는 덕에 있지 세발솥의 무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국가의 정치가 밝고 분명하면 세발솥이 작아도 함부로 옮길 수 없으며, 국가의 정치가 혼란스러우면 세발솥이 아무리 크다 해도 언제든지 옮겨질 수 있다. 주나라가 700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천명이다. 지금 주 천자의 권력이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천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아무도 세발솥의 무게를 물을 권리는 없다. 왕손만의 대답은 대체로 이러했다. 왕손만의 조리정연한 말에 장왕은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고 싹싹하게 군대를 철수시켰다.
장왕은 중원에 대한 패권에 큰 관심을 가진 야망이 큰 군주였다. 그래서 기회를 잡아 천자의 권위에 우회적으로 도전해 본 것이다. 하지만 천자의 신하인 왕손만의 당당한 태도와 빈틈없는 언변에 자신의 생각을 바로 접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크게 추락했다고는 하지만 주 천자의 권위가 여전하고, 따라서 중원의 패권을 넘보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장왕이 무력으로 주 왕실을 공격하여 쓰러뜨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춘추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관의 하나는 대의명분(大義名分)이었다. 이것을 확보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장왕은 아직은 주 왕실을 넘볼 대의명분이 축적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장왕은 흔히 무(武, 군사력)를 중시한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좌전 선공(宣公) 12년(기원전 597년)조에 보이는 다음 일화는 장왕이 어떤 리더인지를 잘 보여준다. 반당(潘黨)이 말했다. “신이 듣기로는 적을 물리치면 반드시 자손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여 그 공을 잊지 않게 한다고 했습니다.”
초나라 장왕(莊王)은 이에 대해 이렇게 대꾸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오. 대저 글자를 가지고 말한다면 ‘지과(止戈)’, 이 두 글자가 ‘무(武)’라는 한 글자를 구성한다는 것이오.”
초 장왕의 말인즉슨, 무력을 뜻하는 ‘武’자는 ‘止’(그친다, 그만둔다)자와 ‘戈’(창 무기 무력)자로 이루어진 글자로서, 난을 평정하고 군대(무기로 대변되는)를 쉬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무력이라는 것이다. 훗날 이 말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뜻으로 바뀌었다. 2600년 전 장왕이란 리더의 식견이다.
장자(長者)의 풍모 : 절영지연(絶纓之宴)
장왕은 즉위 초기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권신 두월초의 반란으로 곤욕을 치렀지만, 명사수 양유기의 공으로 반란을 힘겹게 평정했다.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궁중에서 열렸다. 장왕은 오랜만에 실컷 즐겨보자며 무희들까지 동원하여 밤이 으슥하도록 마셨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방에 등불이 켜졌다. 그런데 갑자기 일진광풍이 몰아쳐 등불이 모두 꺼져버리고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빠졌다. 그 순간 장왕이 아끼는 애첩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이냐? 대왕, 얼른 불을 밝히십시오. 어둠 속에서 어떤 자가 첩의 몸을 어루만졌습니다. 첩이 그 자의 갓끈을 끊어서 쥐고 있느니 불이 켜지면 어떤 작자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순간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왕이 가장 아끼는 애첩의 몸을 더듬었다니, 그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죽음 면키 어려워 보였다. 침묵에 이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장왕의 우렁찬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직 불을 켜지 마라! 그리고 여러 장수들은 모두 갓끈을 끊고 갓을 벗어 던져라. 오늘밤 신나게 놀아볼 것이다. 만에 하나 갓끈을 끊지 않은 장수가 있으면 흥을 깬 벌로 당장 이 자리에서 내쫓을 것이다0”
이렇게 해서 애첩의 몸을 더듬은 자는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침실로 돌아온 장왕에게 애첩은 볼멘소리로 항의했다. 이에 장왕은 왕과 신하들이 실로 오랜만에 관례를 깨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중에 장수 하나가 취기에 여인의 몸을 더듬는 것은 큰일이 아니거늘, 그걸 가지고 범인을 잡는다고 소란을 떤다면 그것은 한창 흥이 오른 장수들을 무시하는 처사이자 왕의 체통을 깎는 일이 아니겠냐며 애첩을 다독거렸다.
이 일화가 유명한 절영지연(絶纓之宴)이다. ‘갓끈을 끊고 벌인 연회’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일화는 뒷이야기가 더 남아 있다. 그 뒤 장왕이 다른 나라와의 전투에서 악전고투하는 곤경에 빠졌다. 그때 웬 장수 하나가 나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정말 용감하게 적진을 유린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장왕이 그 장수를 불러 공을 치하하자, 장수는 그 때 갓끈을 끊고 술자리를 계속하게 하여 자신의 실수를 감추어준 왕의 은혜에 보답하게 되어 기쁘다며 장왕에게 공을 돌렸다. 애첩의 몸을 더듬은 그 장수였던 것이다.
장왕은 인간의 얼굴을 한 리더였다. 실수도 했고, 또 그 실수를 지적하는 보잘것없는 악사의 충고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부하 장수를 곤경에 빠뜨리지 않게 하려고 모든 장수들에게 갓끈을 끊게 한 대목에서는 가슴이 넓은 장자로서의 풍모가 느껴지기도 한다. 여러 모로 매력적인 리더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장왕의 진정한 매력은 그가 한 나라를 이끄는 최고 리더로서 식견과 자기 성찰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 絶(끊을 절)은 ❶회의문자로 绝(절)은 간자(簡字), 撧(절)과 絕(절)은 동자(同字)이다. 실 사(糸; 실타래)部와 卵의 오른쪽 부분, 刀(도; 날붙이, 자르는 일)의 합자(合字)이다. 실이 끊어지다, 실을 끊다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絶자는 '끊다'나 '단절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絶자는 糸(가는 실 사)자와 色(빛 색)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糸자와 色자의 조합만으론 '끊다'라는 뜻을 유추하기 어렵다. 그러나 絶자의 갑골문을 보면 본래는 絲(실 사)자 사이에 여러 개의 칼이 그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문에서도 위아래로 잘린 실과 刀(칼 도)자가 그려져 있어서 역시 칼로 실을 잘랐다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소전에서는 刀자가 色자로 바뀌면서 본래의 의미를 유추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絶(절)은 ①끊다 ②단절하다, 숨이 끊어지다, 죽다 ③다하다, 끝나다 ④막히다, 막다르다 ⑤뛰어나다, 비할 데 없다 ⑥건너다 ⑦기발하다, 색다르다 ⑧으뜸 ⑨매우, 몹시 ⑩심히, 극히 ⑪결코 ⑫절구(시의 한 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끊을 절(切), 끊을 초(剿), 끊을 절(截), 끊을 단(斷),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이을 사(嗣), 이을 소(紹), 이을 계(繼)이다. 용례로는 상대하여 견줄 만한 다른 것이 없음을 절대(絶對), 모든 기대를 저버리고 체념함을 절망(絶望), 힘을 다하여 부르짖음을 절규(絶叫), 이것과 견줄 만한 이 뒤에는 다시없음을 절후(絶後), 더할 수 없이 훌륭한 경치를 절경(絶景), 멀리 떨어져 있는 땅을 절경(絶境), 산의 맨 꼭대기를 절정(絶頂), 아주 기묘함을 절묘(絶妙), 병 등으로 음식을 끊음을 절곡(絶穀), 더할 수 없이 좋음을 절호(絶好), 세상과 교제를 끊음을 절세(絶世), 먹을 것이 끊어져 없음을 절식(絶食), 출판하여 낸 책이 다 팔리어 없음을 절판(絶版), 매우 두드러지게 뛰어남을 절륜(絶倫), 기절하여 넘어짐을 절도(絶倒), 다시 생환할 수 없게 아주 뿌리째 끊어 없애 버림을 근절(根絶), 남의 제의나 요구 따위를 응낙하지 않고 물리침을 거절(拒絶), 참혹하리 만큼 구슬픔을 처절(悽絶), 막히고 끊어짐을 두절(杜絶), 유대나 연관 관계 등을 끊음을 단절(斷絶), 어떤 일 특히 임신을 인공적으로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함을 중절(中絶), 빼어나게 아름다움이나 매우 좋음을 가절(佳絶), 정신이 아찔하여 까무러침을 혼절(昏絶), 정신을 잃음을 기절(氣絶), 긴 것을 잘라서 짧은 것에 보태어 부족함을 채운다는 뜻으로 좋은 것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함을 이르는 말을 절장보단(絶長補短), 이 세상에서는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를 이르는 말을 절세대미(絶世代美), 세상에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여자를 이르는 말을 절세가인(絶世佳人), 배를 안고 넘어진다는 뜻으로 몹시 우스워서 배를 안고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웃음을 일컫는 말을 봉복절도(捧腹絶倒), 궁지에 몰려 살아날 길이 없게 된 막다른 처지를 일컫는 말을 절체절명(絶體絶命) 등에 쓰인다.
▶️ 纓(갓끈 영)은 형성문자로 缨(영)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실 사(糸; 실타래)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嬰(영)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纓(영)은 ①갓끈(갓에 다는 끈) ②관(冠)의 끈 ③노끈(실, 삼, 종이 따위를 가늘게 비비거나 꼬아서 만든 끈) ④새끼(주로 볏짚으로 꼬아 만든 줄), 오라(죄인을 묶을 때 쓰던 붉고 굵은 줄) ⑤가슴걸이(말 가슴에 걸어 안장에 매는 가죽 끈) ⑥감다, 휘감다 ⑦두르다 ⑧매이다, 매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실이나 털을 묶어서 깃대 따위에 꽂는 꾸밈새를 영두(纓頭), 관이나 갓의 끈에 꿴 구슬을 영주(纓珠), 갓끈과 신을 영화(纓靴), 관의 끈을 관영(冠纓), 열쇠를 꿰는 끈을 시영(匙纓), 보옥을 꿰어서 만든 갓끈을 보영(寶纓), 수정을 꿰어 만든 갓끈을 정영(晶纓), 옥으로 만든 영자를 옥영(玉纓), 나무 구슬에 옻칠을 하여 실에 꿰어 만든 갓끈을 목영(木纓), 구슬을 꿰어 만든 갓끈을 주영(珠纓), 갓에 다는 끈을 입영(笠纓), 붉은빛의 갓끈을 홍영(紅纓), 높은 벼슬아치가 쓰는 쓰개의 꾸밈이라는 뜻으로 높은 지위를 이르던 말을 잠영(簪纓), 사모에 갓끈이다는 말로 격에 어울리지 아니한다는 뜻의 속담을 사모영자(紗帽纓子), 갓끈과 발을 물에 담가 씻는다는 뜻으로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초탈하게 살아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탁영탁족(濯纓濯足),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관을 쓴다는 뜻으로 머리를 손질한 틈이 없을 만큼 바쁨을 이르는 말을 피발영관(被髮纓冠)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남지북(之南之北),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의 말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둘이 다투는 틈을 타서 엉뚱한 제3자가 이익을 가로챔을 이르는 말을 어부지리(漁夫之利),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격세지감(隔世之感),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이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창상지변(滄桑之變),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등에 쓰인다.
▶️ 宴(잔치 연)은 ❶형성문자로 醼(연)과 통자(通字)이다.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妟(안; 편안하다; 연)으로 이루어짐. 집에서 편안하게 즐기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宴자는 '잔치하다'나 '편안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宴자는 宀(집 면)자와 妟(편안할 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妟자는 태양이 여자를 비추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편안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宴자는 이렇게 '편안하다'라는 뜻을 가진 妟자에 宀자를 결합한 것으로 '집안이 편안하다'나 '안정되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지금의 宴자는 손님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잔치를 베푼다는 의미에서 '잔치하다'나 '술자리를 베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宴(연)은 ①잔치, 술자리 ②침실, 내실 ③잔치하다, 술자리를 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④즐기다 ⑤편안하다(便安--), 편안(便安)하게 쉬다 ⑥안정되다(安定--) ⑦늦다, 더디다 ⑧햇빛이 빛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축하 위로 환영 석별 등의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 베푸는 잔치를 연회(宴會), 잔치를 베풀고 부르는 노래를 연가(宴歌), 나라의 경사 때에 베푸는 잔치를 연례(宴禮), 잔치를 베푸는 자리를 연석(宴席), 몸이 한가하고 마음이 편안함을 연안(宴安), 연석에서 술을 마심을 연음(宴飮), 국빈을 대접하는 잔치를 연향(宴享), 축하 잔치를 연하(宴賀), 잔치 자리를 연좌(宴座), 잔치를 베풀고 즐김을 연락(宴樂), 고요히 앉아서 참선함을 연좌(宴坐), 잔치 때에 차리는 음식상을 연상(宴床), 잔치에 드는 물건과 비용을 연수(宴需), 편안히 쉼을 연식(宴息), 평안히 입적함 곧 성자의 죽음을 연적(宴寂), 장수함을 축하하는 잔치를 수연(壽宴), 경사스러운 연회를 가연(佳宴), 술을 마시며 즐겁게 노는 간단한 잔치를 주연(酒宴), 축하하는 뜻으로 베푸는 잔치를 하연(賀宴), 차를 마시며 즐기는 모임을 다연(多宴), 송별을 위하여 베푸는 연회를 송연(送宴), 나라에서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을 초대함 또는 그 잔치를 사연(賜宴), 특별히 융숭하게 베푸는 잔치를 향연(饗宴), 밤에 잔치나 연회를 베풂 또는 그 잔치나 연회를 야연(夜宴), 일흔 살이 되는 해의 생일 잔치를 희연(稀宴), 집안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술 잔치를 가연(家宴), 궁중에서 베풀던 작은 연회를 곡연(曲宴), 헤어질 때 베푸는 잔치를 별연(別宴), 잔치가 끝남 또는 끝냄을 파연(罷宴), 결별을 아쉬워하여 베푸는 연회를 결연(訣宴), 원숭이의 잔치라는 뜻으로 어수선하고 시끌시끌하여 모양새가 없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후원연(猴猿宴), 행실이 바르지 못하여 놀고 즐기는 것은 마시면 죽는 독주인 짐주(짐새의 깃을 술에 담근 독주)의 독과 같아서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한다는 말을 연안짐독(宴安酖毒), 나라에서 늙은이들을 받들어 베풀던 잔치에 연주하던 음악을 일컫는 말을 양로연악(養老宴樂), 사돈의 잔치에 중이 참여한다는 뜻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남의 일에 끼어듦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사돈연객승(査頓宴客僧)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