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94/200223]설민석의 ‘삼국지三國志’
최근 한 사흘 두 권짜리『설민석의 삼국지』에 쏙 빠졌다(1권 439쪽, 2권 485쪽, 세계사 2019년 8월 발간).『조선왕조실록』으로 유명한 설민석이라는 스토리텔러를 아시리라. 요즘 유투브와 종편 등에서 엄청 요란하게 뜨는 친구(1970년생)이다. 특강을 두어 번 시청한 적 있는데, 일목요연하게 얘기를 풀어가는 게 무척 흥미로워서 호기심이 앞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 평역評譯’은 월탄 박종화 삼국지 5권, 이문열·황석영 삼국지 10권 등이어서 처음에는 다이제스트판인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900쪽이 넘는 긴 역사소설은 시종일관 재밌었고, 처음으로 삼국지를 독파讀破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삼국지는 몇 번이고 읽은 듯,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독파를 하거나, 시시콜콜한 내용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처음 시작하는, 같은 날 죽자던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와 희대의 간웅이라는 조조 그리고 몇몇 장군의 이름만을 기억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곳곳에 그려진 도표와 지도 등을 보며 읽으면 깔끔하게 정리가 된다.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인생을 살면서 삼국지를 세 번은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고, 누구는 ‘삼국지야말로 인생의 영원한 스승’이라고 말하지만, 또 어떤 이는 ‘암짝에도 쓸데없는 소설로 시간 낭비’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삼국지』는 원래 1700여년 전 중국 후한 말기(AD 2∼3세기) 천하가 삼분三分되어 위(조조)·촉(유비)·오(손권)나라가 벌이던 전쟁사戰爭史를 당시의 역사가인 진수가 쓴 ‘역사서’이다. 역사서인만큼 당연히 팩트 위주로 되어 있던 것을, 그로부터 1천년이 더 지나 명나라때 나관중이라는 작가가 정사正史에 수많은 구전된 민담들을 덧붙여 소설로 완성한 것이, 이른바 우리가『삼국지』의 원문原文이라 하는『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演義』이다. 1494년, 우리나라로 하면 연산군때이며,『서유기西遊記』『금병매金甁梅』『홍루몽 紅樓夢』와 함께 중국의 ‘4대 기서奇書’로 통칭되는, 가장 내용이 길고 깊이가 남다른 대서사시大敍事詩인 것이다.
삼국지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중학교 2학년때, 아버지는 오수면소재지에 처음 생긴 책방에 끌고 가 “사고 싶은 책을 모두 고르라”고 했고, 나는 박종화의『삼국지』다섯 권, 박종화의『자고가는 저 구름아』5권, 김교신의『광복 20년』5권을 골랐는데, 그 15권을 군말하지 않고 몽땅 사주셨다. 어떻게 그런 통큰 결정을 하셨을까? 그때의 희열喜悅은 지금도 생각난다. 십리길을 걸어서 그 책들을 어린 넘이 이고 지고 왔으므로.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좋을까’하며 놀렸던 기억들이. 그때 읽었던 삼국지 내용이 모두 가물가물하던 차, 최근 독파함으로써 온전히 기억을 되살렸다. 설민석이 고맙고, 두 권짜리 삼국지가 고마웠다.
등장인물이 이처럼 많이 나오는 대하소설은 없으리라. 박경리의 『토지』에 700명이 나온다던가. 우리가 흔히 아는 사자성어인 도원결의, 계륵鷄肋, 읍참마속泣斬馬謖, 괄목상대刮目相對, 수어지교水魚之交, 삼고초려三顧草廬, 비육지탄髀肉之嘆, 칠종칠금七縱七擒, 수화불상용水火不相容, 만전지책萬全之策, 세한지송백歲寒之松柏, 백미白眉 등도 모두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제갈량의 전前·후後「출사표出師表」를 원문을 더듬으며 한번 읽어보시라. 사나이들의 충忠이 무엇이고, 의리義利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리라. 숱한 영웅들이 할거하던 시대, 용쟁호투 龍爭虎鬪의 리얼한 현장에서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던 죄없고 힘없던 민초民草(grassroots)들의 애환들도 새겨봐야 하리라.
조조曹操와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에게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흔히 ‘삼국지 경영經營’이라며 기업경영의 지침서로 접목을 시키는 사람들도 있고, 장삼이사라도 처세술로 손색이 없다고 하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삼국지의 굽이굽이 장강長江(양자강揚子江 5000km)의 옛이야기가 이제 다시 읽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내가 직장생활 등을 하면서 만난 숱한 인물 중 누가 지장智將, 덕장德將, 용장勇將이었는지? 나는 그중에 어디에 해당될 것인지도 짚어보는 계기도 되었다. 의리를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릴 수 있는지도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흘러가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1700여년 전에 흘러간 기라성같은 인물의 이름이라도 한번 불러보자. 유현덕, 관운장, 장익덕, 상산 조자룡, 제갈공명, 방통, 서서, 마초, 황충, 엄안, 공손찬…. 조조, 사마의, 진궁, 방덕, 허저, 하후돈, 하후연…. 손견, 손책, 손권, 주유, 노숙, 육손, 제갈근, 황개, 여몽…. 중국의 4대 미인 초선, 손상향. 쓸데없는 인물들도 많이 있다. 후한말 황제들(환제, 영제 등), 유표, 유장, 장로, 독우, 동탁, 여포, 십상시, 장건 등 황건적…. 역사가 마치 파노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삼국지의 세계에 몰입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원문과『명심보감』에 나오는 유황숙(유비)의 이 말도 되새겨보면서. “勿以惡小而爲之(물이악소이위지)하고 勿以善小而爲之(물이선소이위지)하라” 나쁜 짓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하지 말고, 착한 짓은 아무리 작은 것이더라도 반드시 행하라.
삼국지 원본은 시작하기 전에 아주 멋드러진 서시序詩가 실려 있다.
滾滾長江東逝水 곤곤장강동서수
浪花淘盡英雄 낭화도진영웅
是非成敗轉頭空 시비성패전두공
靑山依舊在 청산의구재
幾度夕陽紅 기도석양홍
白髮漁樵江渚上 백발어초강저상
慣看秋月春風 관간추월춘풍
一壺濁酒喜相逢 일호탁주희상봉
古今多小事 고금다소사
都付笑談中 도부소담중
굼실굼실滾滾 동쪽으로 흘러가는逝 장강의 물결이여!
파도의 포말浪花처럼 흘러가버린淘盡 많은 영웅들이여!
머리를 돌려보니轉頭 시비是非도 성패成敗도 모두 공空이네.
청산靑山은 언제나 옛 모습 그대로인데,
석양夕陽의 붉으스레한紅 빛은 무릇 몇 번幾度을 졌을고?
백발의 어부漁夫와 나무꾼樵夫이 강가에서
세월을 낚는 버릇慣처럼 가을달秋月과 봄바람春風을 바라보며
한병一壺 막걸리濁酒로 반갑게喜 서로 만나相逢
고금古今의 크고작은多小 일들을
모두 웃음에 부치며付笑 이야기하고 있네.
허허허. 설민석의 삼국지 속표지에 저자의 사인이 들어 있는데, 문구가 재밌다. “관우의 용기와 공명의 지혜를 그대에게…” 기특한 친구임에 틀림없다. 마침 서가書架에서 찾은 ‘원본현토原本懸吐 삼국지三國志’ 5권이 있다. 이 시절에 읽으라고 사놓은 게 틀림없다. 옛이야기를 웃으면서 읽어보리라. “話說天下大勢가 分久必合하고 合久必分하나니 朱末에 七國이 分爭타가 幷入于秦하고 及秦滅之後에 楚漢이 分爭타가 又幷于漢하니 漢朝 自高祖斬白蛇而起義로 一統天下하고……” 말씀인즉슨, 천하대세라는 것이 나눠지면 반드시 합해지고, 합해진 지가 오래되면 반드시 나눠지게 마련이라는 것인데, 그나저나 이 원본현토 삼국지는 언제 다 읽을꼬? 어려운 한자가 수두룩한데, 일일이 옥편을 찾아볼 수도 없고? 삼국지 읽다 늙겠다. 오 마이 갓이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