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요일曜日, 차빛귀룽나무 / 박수현
그 물가에는 차빛귀룽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햇귀를 끌어당겨 푸른 머리핀처럼 꽂고
심심해지면 고요 밖에서
한눈팔듯이 제 몸을 비쳐보기도 한다네
그러고 나면 어찌 눈치 채고 빈 데마다
쓸데없는 구름그늘끼리 몇 평씩 떠 흐르네
낮결 내내 부젓가락처럼 아궁이를 뒤지던
부레옥잠도 어리연도 마냥 엎질러져
복사뼈째 찧으며 물살을 나르네
한나절 봄빛을 덖어낸 차빛귀룽나무
조붓하고 어린 나비잠을 스치며
희디흰 산그늘 한 마리
드문드문 허기져서 느린 봄날을 건너네
초승달, 봄 / 박수현
봄볕에 마른 노랑을 한 번 더 말린다
복수초가 밀어올린 귀때기 시린 노랑
생강나무 가지에서 눈 부비는 새끼 노랑
개나리 울타리에서 여기저기 떼창하는 노랑
노랑 원복 입은 아이들이 병아리 떼를 데리고 와
종알종알 노랗게 나들이 간다
봄 햇살을 빨아대는 어린 노랑들을 뒤집으니
민들레, 씀바귀, 애기똥풀 꽃이 노랑 노랑 풀밭에 쏟아진다
바람이 들판에다 노랑 바리케이드를 둘러친다
젊은 연인들이 두고 간 새뜻한 노랑 속에
언 발을 옹송거렸던 노랑턱멧새 한 마리
팽팽히 하늘 한 자락을 들어 올린다
누가 저 출렁이는 노랑들을 한 다발 묶어
별무늬 꽃병에다 꽂아 두었나
초승달 샛노랗게
돋아난, 삼월의 어느 저녁
초록의 무늬 / 이선유
누가 다녀갔을까
연둣빛 나뭇잎에 새겨진 상형문자
쓰다 지운 흔적의 필체가 둥글다
은밀한 식탐에
숲은 얼마나 진저리를 쳤을까
잎맥이 끊어진 자리마다
어느 미물의 한 끼 식사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오월의 빗방울이 찢어진 페이지를 읽고 또 읽는다
구멍으로 모음 하나가 또르르 구른다
이가 빠진 잎사귀들의 안간힘,
상처가 힘이다
잎사귀를 닮은 노모의 낡은 팬티
빨랫줄 집게가 늘어진 허리를 물고 있다
햇빛에 드러난 구멍들
본래의 문양인 듯 태연하다
내 옆구리 어디쯤 접혀있는 얼룩들
그때 온몸으로 진물을 흘렸다
가만히 꺼내보면
상처위에 밀어 올린 꽃이 더 향기로웠다
상처도 아물면 초록의 무늬가 되었다
수국水菊 1/ 류인채
영종도 교원연수원 길이 비에 젖는다
며칠째 가는 비 온다
길모퉁이 연보라 자주 꽃송이가 젖는다
목이 젖는다 고개를 떨군다
탐스러운 꽃송이를 받쳐 든 받쳐 든 턱이 춥다
개미도 꽃 섶을 파고든다
외국에서 수년을 떠돌다 온 그도
저렇게 머리가 무거울까
끼니를 거르며 게스트하우스에서 새우잠을 자고
허름한 레스토랑에서 접시를 닦던 사내
걸어서 수십 블록 밖 학교에 다녀
십 년 만에 받은 학위
며칠 전 교수 채용 면접에 간다는 그에게
더 이상 고개를 떨구지 않도록
저 수국빛 넥타이를 골라줬었다
연수원 길은 여전히 비에 젖고
굶주린 고양이 소리처럼 가늘게 되울리는 전화목소리
또 물먹었다고
면목面目 없단다
박사가 지천인 수국水國,
연수원 오르는 길목
연보라 자주 꽃 허리가 휘청거린다
고개 숙인 것들이 널브러져 수구수국 소란스럽다
생강나무 / 허형만
누군가가 목매달기로는 너무 부드러운
세상에서 가장 선한 빛으로 물든 나무를
동네 뒷산에서 만났네.
모시나비 날개처럼 투명한 이파리마다
시간의 물결소리 번지는 듯
저 푸른 하늘 더욱 푸르기만 한데
한 세상 치명적인 만남은
아예 아니 만남만 못한 것이라
본향의 침묵으로 되돌아가고자 염원하는
세상에 병든 영혼 하나
말없는 생강나무를
두 손 모아 우러러 경배하고 있네.
죽은 피리 살리기 / 마경덕
어느 시인이 선물한 쌍골죽
잎마름병을 버틴 병죽病竹이라
골이 파인 살이 단단하고 소리가 잘 여물었단다
뚫린 구멍으로 선계仙界까지 불러들인다는데,
취구에 숨을 밀어넣고 지공을 막아도 맥이 뛰지 않는다
사람의 입김으로만 혈이 트인다는
이 어둠은 몇 겹일까
거슬러 오르면 만파식적의 뿌리에 닿을
영목靈木이라,
헛바람으로는 감히 심장에 닿을 수 없어
어깨와 입술로 곡진히 받든다
대숲은 봄의 뼈마디에 또 방을 짓고 칸칸 맑은 바람을 쌓는데
탁한 가슴은 받지 않겠다는 듯,
꽉 닫힌 죽관
대금 속으로 들어갈 문이 없다
갈대 속청의 떨림도 말라 죽음과 잠의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