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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일(대림절 첫 번째 주일)
요한계시록 3:7~13
약한 힘으로도 말씀을 지키는 교회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 적 주제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예수님은 약한 힘으로도 말씀을 지켰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셨다.
*설교 목적: 우리는 인내와 소망을 굳게 잡아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where?
지난 주간에 갑자기 내린 눈으로 전국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많이 있었습니다. 눈길에 미끄러진 대형 트레일러가 고속도로 교량에서 넘어진 사고가 있었습니다. 트레일러 운전자가 11m 높이의 난간에 매달렸는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대원이 무려 45분간 맨손으로 운전자의 손을 맞잡고 버텼다고 합니다.
구급대원은 추위와 통증을 느끼면서도 운전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 결과, 운전자는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고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이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급대원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의식도 존경을 받아 마땅하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통을 인내한 구급대원의 행동에 우리는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출처: https://www.mbn.co.kr/news/society/5076044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이라는 도시에는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루스 그레이엄 여사의 묘가 있습니다. 이 묘에는 한문으로 ‘義’(의)라는 단어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義’(의)는 ‘羊’(양 양)이라는 단어와 그 아래 ‘我’(나 아)라는 단어가 만나 완성된 글자입니다. 루스 여사는 중국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글자를 알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만이 나의 의가 되신다.”라는 것이 그녀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다시 영어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공사 끝, 당신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 자기 동네 길가에 오랜 기간 세워져 있던 표지판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공사 중,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표지판의 문구가 “공사 끝, 그동안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바뀐 것을 보고 남편에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여보, 내가 죽으면 내 무덤에 저 글을 써 주세요.”
우리가 아직은 공사 중이지만, 성령님이 이 공사를 완성하실 날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살다 보면 루스 그레이엄 여사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공사 끝, 당신의 인내에 감사드립니다.”
-출처: 이동원, 「다시 들어야 할 처음 복음」(두란노, 2014); 「생명의 삶」(두란노, 2015년 3월호), 111쪽에서 재인용.
우리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인내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께 칭찬을 받은 교회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예수님께 책망 대신 칭찬만 받았던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과연 빌라델비아 교회가 처한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빌라델비아는 교통의 중심지였고, 유명한 포도 생산지로서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또 이 지역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서 사람들은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섬기며 술과 향락에 젖어 살았습니다.
또 이 지역에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 지역에 살던 기독교인들을 혐오해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지속적인 핍박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교회는 교인수도 작았을 것이고, 교회 재정도 약했을 것이며, 교인들의 사회적인 지위도 낮았을 것입니다. 저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묵상하면서 우리 교회를 떠올렸습니다.
우리 교회도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입니다. 성도 수도 많지 않고, 교회 재정도 약하며, 교회의 주변 환경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빌라델비아 교회 이야기가 다른 교회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과연 빌라델비아 교회에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곧 예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문을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셨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쫓겨났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처럼 들립니다. 비록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회당에서 쫓아낸 후 회당 문을 굳게 닫았겠지만, 예수님은 쫓겨난 기독교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셨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열린 문”에 관한 기록이 몇 군데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다”고 말했는데, 이는 선교의 기회가 열렸다는 의미였습니다(고전 16:9).
또한,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골 4:3). 이상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열린 문”은 ‘선교의 기회’, ‘전도의 기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으나, 주 예수께서는 이런 작은 교회에 선교의 기회, 전도의 기회를 열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신데, 예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 교회가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교회에 선교의 문,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면 아무도 그 문을 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우리교회에 선교의 문,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what?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신 이유는 그들이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8절).
우리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10절에서, 예수님은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인내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을 겪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 장차 온 세상에 시험의 때가 임할 것입니다. 이 시험의 때에, 사람들은 큰 능력을 가진 자가 시험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이기는 비결은 능력의 크기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내의 정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비록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내의 말씀을 지킴으로 시험을 때를 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내의 말씀을 지킨 자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인내는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 줍니다. 앨런 크리이더의 「초기 교회와 인내의 발효」(IVP, 2021)라는 책을 보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높은 덕목 중 최고의 덕목이 ‘인내’였다고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인내의 발효’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인내의 발효에는 많은 시간과 공력이 들어갑니다. 마치 된장이 발효 기간이 길수록 항암 효과가 높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적당히 발효된 음식이 우리의 건강을 증진시켜 주고, 우리 몸에서 나쁜 독을 해소해 주듯이, 신앙의 인내는 우리의 삶에 좋은 선물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인내의 발효’를 통해 처음에는 더디지만 ‘끈기 있는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부터 기독교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인내를 통해 끈기 있는 성장을 이루던 것에서, 기독교의 하향평준화와 균질화를 만들어 낸 ‘속도’를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은 결과에 대한 ‘조급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점차 조급증이 기독교의 최고 특징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교회 안에서 ‘이중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특별한 사람의 회심과 일반 성도들의 회심이 나누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가볍고 빠른 회심만 요구되었고, 그들은 인내의 발효가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성도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가 바로 현대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현대 기독교가 본질을 회복하려면 다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강조했던 ‘인내의 발효’를 추구해야 합니다.
-출처: 이도영, 「탈성장교회」(새물결플러스, 2023);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9월호), 51쪽에서 재인용.
저는 흥미로운 통계 자료를 보았습니다. 이른 나이에 대통령이 된 사람들은 일반인들보다 7.2년 먼저 죽었고, 교황 직위에 빨리 오른 이들은 13년이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노벨의학상을 받은 이들은 7.1년 일찍 죽었고, 아카데미상을 받은 이들은 3.6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연구 결과는 그런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결국, 일찍 성공했거나 1등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강한 승부욕과 경쟁, 그에 따른 부담으로 평균보다 수명이 단축된 것입니다. 잠깐은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패배하는 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출처: 임준형,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11월호), 219쪽.
우리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둘째로, 우리는 속히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11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내가 속히 오리라”는 약속은 시간 적인 신속함을 나타내기 보다는 사건의 갑작스러움과 확실성을 나타냅니다(김한원,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4년 11월호, 215).
우리 주님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확실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기다림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드러내줍니다. 우리의 인내는 적극적 인내이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았던 제자들의 인내는 곧 책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진 소망을 굳게 잡는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
what’s then?
저는 지난 주간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묵상했습니다.
오늘 새벽, 성도들과 함께 빌라델비아 교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말을 지키며 그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입니다. 실제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성도 수도 적고, 재정도 약하고, 그럴싸한 건물도 가지고 있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우리 교회와 닮아있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작다고 사랑까지 작지는 않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행복을 덜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큰 교회에 비교해서 아쉬운 부분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은 얼마든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성도들이 인내하고 기다려주고 함께 하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8절)”
주께서는 빌라데비아 교회에 가능성의 문을 열어 두셨습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주께서는 열린 문을 두셨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주님은 큰 것을 맡기실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설교 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공유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나름 큰 도전입니다. 설교하는 일에 자신감도 없고, 무엇보다 영상을 찍어 올릴만한 장비와 인력과 기술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 일은 무모하게 느껴졌습니다.
주변에서 설교 영상을 공유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고, 일단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음향 전용 마이크도 없어서 스피커 소리를 받아 영상을 찍었습니다. 물론 음향이 알아듣기 어렵게 녹화되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무선 마이크를 하나 구입해서 녹음하니 예전보다 음향 문제가 개선되었습니다. 서투른 영상 편집으로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잘라내고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서툴고 부족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다 보면 조금씩 좋아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이 고만고만하다 보니, 대단한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작은 능력이라도 감당하고자 합니다. 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잘하는 것에 박수쳐 주고, 내가 못하는 것 부끄러워하지 않고 감당하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합니다.
우리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를 닮고 싶습니다. 다른 것은 못 해도 작은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싶습니다. 분명 우리 앞에 열린 문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열린 문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습니다.
-출처: 김규태, 2024년 11월 24일(주일)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인내와 소망을 굳게 잡을 때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기는 사람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12절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가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예수님은 그 기둥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기록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4주간, 우리는 기다림의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는 소극적 기다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기다림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인내와 소망을 통해 우리가 가진 것을 굳게 잡은 적극적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교회,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길 소원합니다. 이번 대림절 기간이 우리의 인내와 소망을 발효하는 복된 기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