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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드라에서(2월 16일 오후 예배)
성 경 : 사도행전 14:8-18(신약 212)
이번 한 주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교사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우리나라 학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가장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할 교육 공간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지켜주어야 할 교사에 의해서 벌어진 잔인한 사건이었습니다.
교육 당국은 위험 요소를 사전에 감지했음에도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으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늘 사고가 나고 나면 항상 안전불감증과 설마 라는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고 무서운 것인가를 늘 실감을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설마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로서 오늘 우리 사회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양 극단에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이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을 체포하려고 할 때 공수처 앞에서 분신자살한 사람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목사였습니다. 목사님으로 부르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서로 극단적으로 갈라지고 있는 가운데 목회자들이 서로를 향해 비난을 하고 그것도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비난하고, 나는 옳고 너는 잘못 됐다고 큰 소리를 외쳐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침묵하는 목회자들에게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기편에 서라고 강요를 합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어느 편이든 성경 구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주장이 맞다고 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필리핀 포스퀘어 총회에서 올린 글을 보았는데 필리핀도 지금 정치적으로 대립적인 상황인 것 같습니다. 총회에서 목회자들에게 공지한 글을 보면 목회자는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말고, 정치적인 일에 참여하지 말라는 경고의 글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양극단의 상황에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성경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치적인 양극단에 서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정말 그분들이 말하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배가 정치에 이용되거나 예배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의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시간 이곳에 성령님이 임하셔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하게 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희망을 갖게 하실 줄 믿습니다. 세상 근심 걱정과 모든 것은 내려 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온전히 예배하는 복된 시간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지난 주에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이고니온에서 사역을 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게 되자 시기심이 가득한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 선교팀의 사역을 방해하고 사도들을 모욕하고 돌로 치려고 함으로 이고니온을 떠나서 루스드라에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루스드라에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
1. 못 걷는 사람을 고쳤습니다.
이고이온에서 핍박을 피해서 루스드라에 도착해서 선교 사역을 할 때 바울 일행이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눈에 이 사람이 들어왔고 고쳐주게 되는데 고쳐주는 과정을 보면
이 사람에 대해서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8절을 보면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루스드라는 루가오니아의 중남부 지방에 위치한 성으로서 이고니온 성에서 약 38km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소수의 로마군이 지배하고 있는 전원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해상을 통한 무역을 할 수 없었으므로 그곳 주민은 주로 농사와 목축에 의존했으며, 약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회당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디모데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가 살았고(16:2,3) 바울 일행은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회당을 중심으로 해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루스드라에는 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회당에서부터 선교를 시작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아마도 거리에서 전도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길거리에서 전도를 하던 중에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 본적이 없는 사람이 길에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인생은 희망이 없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길에 앉아 있었던 것은 구걸을 위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희망이 없던 그 사람을 바울이 보았을 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9절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 자리에 못 걷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을 고쳐주기 전에 먼저 말씀을 전했습니다. 지난 주 오전 예배 때에 예수님이 시몬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기 전에 시몬의 배에서 말씀을 전하셨던 것처럼 바울도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그의 마음에 믿음이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 알 수 없지만 바울의 전도를 들은 그 사람의 마음에 바울이 전한 말씀을 믿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이 그 사람의 마음에 감화 감동을 주어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안에 성령님께서 내가 듣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게 감동을 주십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바울은 그가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전하는 말씀을 믿을 뿐 아니라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에 그런 믿음이 있다는 감동을 바울 사도가 받았기 때문에 그를 향해서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큰 소리를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선포했습니다. 10절을 보면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바울은 못 걷는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있는 것을 알고 담대하게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러자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걸어 본적이 없는 사람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걸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사람이 바울의 말을 듣고 담대하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큰 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내 말을 듣고 담대하게 일어나라고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그 말씀을 듣고 의지해서 행동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어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말씀을 의지해서 도전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앉아 있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일어나고 말씀을 의지해서 일어나 도전해야 합니다.
2. 기적에 대한 반응
바울 사도를 통해서 루스드라에서 못 걷던 사람이 걷게 되자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의 형상으로 찾아온 신들이라고 생각하고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통적인 믿던 우상에 대한 믿음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보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11-12절을 보면
14: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4: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는 믿음은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는 헬라의 신화에서 신들이 인간들과 동일한 생활을 하며 인간들과 같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헬라 신화를 믿는 사람들은 바울이 행한 기적을 보고 이것은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와서 행하는 기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헬라 신화에 최고신인 ‘제우스’(Zeus)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헬라 신화에서 모든 신들의 우두머리로 묘사되어 있으며,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대변자로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루스드라는 제우스 신을 섬기는 도시였고 제우스 신당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제우스 신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제우스가 루스드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려고 사람의 모습으로 루스드라를 방문했는데 빌레몬 영감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남루한 나그네 차림의 제우스를 박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 큰 홍수가 마을을 덮쳤고 빌레몬과 그 아내만 남고 마을은 멸망 당했고 그 제우스가 언젠가 다시 한 번 사람의 모습으로 루스드라를 방문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바울이 나타나서 기적을 행하니까 제우스가 다시 찾아왔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나바는 제우스 신이고 바울이 말씀을 선포하고 한 것으로 보아서 제우스의 대변자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찾아왔다고 하자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와서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13절을 보면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일반적으로 헬라 지역 내의 도시들은 신전을 중심으로 방사선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루스드라의 제우스 신당과 같이 헬라 지역 이외의 신전들은 성 밖에 세워졌던 것 같습니다.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제우스과 헤르메스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왔다는 말을 듣고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준비해 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헬라 문화권에서 선교할 때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온다는 헬라 신화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전할 때 복음을 쉽게 받아드리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신이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을 막으면서 우리는 신이 아니고 당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14-15절을 보면
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하고 제사를 드리려고 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참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기는 것을 버리고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만물의 주인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헬라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참 신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전한 것입니다.
3.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바울은 자신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하고 제사 드리려는 것을 막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했습니다. 이단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온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나면서 걸어 본적이 없는 사람을 고치고도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증거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15절을 다시 보면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사람을 신이라고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과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려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전도관이란 이단이 있었습니다. 박태선 장로라는 사람이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자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했고 많은 사람들이 전도관으로 모여들었고 신앙촌이란 것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집단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박태선이 죽으므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됨으로 신앙촌이 붕괴하게 됐습니다. 통일교나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JMS 등 여러 종류의 이단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이단 즉 인간을 신이라고 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말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16-17절을 보면
14: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4: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6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심하셨다는 것은 지금처럼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벌하지 않으시고 내 버려두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지만 인간들을 모두 멸하시지 않으시고,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어서 만족하게 살아가게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결실하게 하셔서 추수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선한 일을 행하셔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먹거리를 제공해 주셔서 기쁘게 살아가게 하셨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이 만족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은혜를 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지구촌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셔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것을 우리는 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일반(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가 있는데 일반계시는 자연현상을 통해서 즉 해가 뜨고 계절의 변화가 일어나고 하는 것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데 그것을 자연 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 계시란 예수님이 오심과 같은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비를 내리시고 결실하게 하시는 것은 일반 계시에 속한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일반 은총인 것입니다. 은총에도 일반 은총과 특별 은총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일반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모든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셨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일반 은총을 주셔서 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하면서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제사하지 말라고 함으로 제사를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18절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오늘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기적의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복음을 전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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