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사 가을바람
김 선 구
단풍이 자태를 뽐내는 계절이다. 날씨마저 창연하니 가을 색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지금쯤은 팔공산 단풍이 절정기이다. 이 좋은 날 교외로 나가 바람이나 쏘이고 오자고 제안이 왔다. 어디로 갈까? 대구 동화사 주변은 자주 갔었으니 이번에는 영천 은해사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절 입구에 이르니 벚나무들이 단풍으로 곱게 단장하여 우리를 맞이했다. 아직도 푸른색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연초록 잎에서 부터 노란색, 자주색, 분홍색, 황색 등 온갖 색깔로 단장한 잎들이 소담스럽게 미소를 보내는 것 같았다. 마치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얼굴을 하고 있는 보살상과 같다. 아내가 한소리 거든다. “나뭇잎들이 천수천안 관자재보살의 모습을 연상케 하네?” “절집 앞이라 단풍들도 보살의 모습을 흉내 내보는 것이겠지!”
은해사는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구름이 은물결 같고, 그 풍광이 은빛바다가 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은해사 법당 극락보전에는 아미타 부처가 좌측에 관음보살, 우측에는 대세지보살을 협시불로 하여 좌정하고 있다. 서방정토에 머물면서 모든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해 주는 부처이다. 아미타불이 관장하는 정토의 세계가 바로 여기임을 상정하는 것 같다.
어떻게 이곳에 절터를 마련하게 되었을까? 은해사는 신라 41대 헌덕왕 원년 왕실의 후원으로 혜철국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헌덕왕은 조카인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른 왕이다. 왕위쟁탈 과정에서 희생된 원혼들과 선왕에 대한 죄책감을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죄를 짓고는 못 사는 법이다. 왕위에 오른 후에 이들 원혼들을 달래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빌기 위하여 절을 지었다 한다. 자신이 지은 죄업을 속죄하기 위하여 창건한 절이 천년 사찰이 되었으니 인간사의 아이러니인지 불보살의 자비 원력인지 분간할 수 없다. 여하튼 억울하게 죽어 간 원혼들의 안식처로 정착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원래 은해사는 말사인 운부암 쪽 해안평에 창건하여 해안사라 했었으나 조선조 명종 때 지금 자리로 옮기면서 은해사로 개명했다 한다. 조선시대에 왕족들은 후손들의 태가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믿어서 전국에 명당을 찾아 안치했다. 명종은 이곳에 설치되어 있는 선왕 인종의 태실을 장엄하게 장식하면서 은해사를 수호 사찰로 삼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은해사가 지금처럼 커나가게 되지 않았을까?
은해사의 가람(伽藍)을 지나 산길을 가다보면 ‘신일지’라는 조그만 못에 이른다. 못 뒤쪽으로 여인의 젖무덤처럼 봉긋이 솟아있는 산봉우리가 태실봉이다. 이곳 능선 위에 인종의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은해사를 대찰로 키워낸 이면에는 인종의 존재가 주효한 셈이다. 제왕 시절에는 문정왕후의 등살 때문에 국정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갔지만, 죽어서나마 족적을 남기고 있으니 이 또한 인연의 공덕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은해사를 찾은 것은 퍽이나 오래 만이다. 동화사나 갓 바위는 자주 갔었지만 왠지 은해사 쪽으로는 발길이 비켜 지나갔었다. 은해사가 팔공산 외곽 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방문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어 왔었기 때문이다. 발길을 멈춘 동안 주변 환경이 많이 바뀌었음을 느끼게 했다. 절로 들어가는 길가에 즐비하게 펼쳐져있던 논밭들이 지금은 광장으로 변하여 주차장과 상가들을 품고 있었다. 절 입구로 이어지는 진입로도 번듯하여 접근이 더 쉽게 만들어놓았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 중생계의 삶의 모습이다. 그러나 은해사 입구 주변에 늘어서 있는 소나무 숲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일주문 주변 수천 평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푸른 숲은 승계(僧界)와 속계(俗界)를 가르는 경계처럼 보였다. 조선 숙종 때 왕가에서 절 주변 일대의 땅을 매입하여 소나무 숲을 크게 조성하고, 숲 일대에서는 일체의 살생을 금하였다 한다.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실천하고, 왕실의 자애로움을 펴기 위한 방편이었을까? “금포정(禁捕町)”이라는 패목이 지난날의 자취를 더듬어보게 했다. 왕가의 특별한 관심이 지금에 이르러 높이 10m, 수령 300년 이상 된 나무들로 사천왕문에서 법당에 이르는 길 주변을 덮고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니 노송들이 청정한 기상을 뽐내고 있었다. 금포정 숲길에 부는 가을바람이 상긋한 기운을 선사했다. 숲길이 주는 호젓한 느낌은 자연이 주는 신선함이다. 주변 개천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결이 주는 미묘한 숨결이 길 걷는 나그네의 마음을 살갑게 어루만져준다. 나도 모르게 사색의 심연을 거닐며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 보게 하였다.
태실봉 위쪽에 자리잡은 운부암이 떠올랐다.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오르는 암자라는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한 때는 금강산 마하연과 더불어 국내 최고의 수행처로 알려졌었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선지식들이 그곳을 거쳐 갔다. 경허, 해월, 만공, 한암을 비롯하여 용성, 운봉, 동산, 경봉, 향곡, 청담, 성철스님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의 고승대덕들이 그곳에서 수행정진했다고 한다. 그 당시 스님들도 운수납자(雲水衲子)의 심경으로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청량한 바람 살이 선지식들이 남긴 발자취를 품어 안고 있는 듯했다.
선객이라도 된 듯 허허로운 마음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니 “사랑나무”란 안내문 앞에 이르렀다. 100년생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연리지(連理枝)를 형성했다. 어깨동무라도 하듯이 참나무가 다정하게 느티나무 위에 가지를 걸친 모습이었다. 수종이 다른 나무끼리 연리지를 형성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한다. 청정한 선비 같은 소나무들 무리 속에서 참나무와 느티나무가 대담하게 연애라도 펼친 것일까? 부처의 자비심이 나무들의 사랑 행위를 묵인하고 수용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부부의 애정을 상징하는 나무’라 하면 족할 것을, ‘왼쪽으로 돌면 아들을, 오른쪽으로 돌면 딸을 낳는다.’는 해설이 오히려 진부한 감을 주었다. 청정한 도량에서 무속신이라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의 해설일까? 근엄하게만 보이는 부처가 중생들에게 던져보는 한마디인 농담이라고 애써 해석해보았지만 마음에 걸림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어쨌거나 맑은 공기가 전신을 감싸 주니 절로 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했던 금포정의 계율, 운수납자 선지식들이 남기고 간 선풍의 여운, 그리고 명당 지맥 은해사에 흐르는 기류가 어우러져 가을 정취를 더욱 짙게 했다. 역사의 질곡 속에 묻어있던 향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찾은 은해사 숲길에서 맑은 가을바람을 담뿍 쏘이고 왔다. 앞으로 은해사를 자주 들려보라는 지침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첫댓글 직장 생활 할 때 단체로 주요명소를 자주 갔었는데, 은퇴하고 오히려 뜸 해집니다. 많은 식견을 가진 문우님들과 명소탐방을 자주했으면 합니다.
학창시절 틈날때마다 벗들과 자전거를 타고 놀러다니던 길 고향이 반추됩니다. 오늘날 은해사는 무언가 음침한 기운이 감돌아 가급적 찾지 않고 있습니다. 뒷편 소나무밑에는 수목장이 많아서 청정도량으로 아쉬움도 있으며 잘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주지스님인 돈광스님은 앞으로 종단을 이끌 큰 스님으로 우뚝설 스님이 될것 같습니다. 우리집 옆에있는 불광사가 스님의 사찰이라 마음은 향하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은해사에 가본적은 있지만 그냥 둘러보고 왔는데 절에대한 상세한 해설과 느낀바를 기술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