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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화일치로 미영 격멸 “고이소 내각과 아베 총독을 환영함”(권두언)
7월 18일 일 도조(東條)내각의 총사직이 결행되자 3일 만에 후계 내각으로서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육군대장과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해군대장에게 조각(組閣)의 대명이 강하되어 대화일치(大和一致)의 협성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번 도조내각의 사임은 -초비상시에 처하여 난국 중의 난국을 돌파함에는 넓게 인재를 구하여 강력한 내각을 출현하게 하고 인심을 더욱 일신(一新)하여 거국전쟁완수에 매진하려는 그 이유가 있다.
회고하면 도조내각이 대명을 배수한 이래 만 2년 10개월 동안 전시내각으로서 미증유의 비상시국을 담당하여 대본영(大本營)114)과 긴밀 일체 하에 전쟁완수상 최선을 다하여 절대 불패의 태세를 확립하였고 내정(內政)으로는 전시행정특별안을 시행하여 전쟁지도의 일원성 확립, 생산행정의 일원적 강화 등의 대책으로서 중대 시국에 대처해 왔다. 외정(外政)으로는 일(日)·만(滿)·중(中)의 체맹(締盟), 또는 수상이 친히 지나, 만주, 필리필 제도(比島) 등 각국을 방문하여 공영권 제국과 친선을 공고하게 하는 동시, 공영권건설을 위한 공약을 단행하였고, 일방(一方) 일본·독일·이탈리아 추축(樞軸)의 강인(强靭)한 태세 하에 세계 신질서의 화근인 미영(米英)을 격멸함에 전력을 기울이려 끝까지 발전적이고 건설적이고 적극 비약적이며 전력의 저하를 지체를 초래하지 않음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 연립내각은 보다 더 강력할 것은 물론이고, 제국의 부동한 결의를 더욱 더 강화할 것은 확신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이제 바야흐로 사이판 섬(島) 침구(侵寇)와 함께 적 공세는 한층 가중하여 전국은 중대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때에 1억 국민은 신 강력내각에 대해서 절대의 신뢰를 가지고 필승의 신념으로 전력의 확충 추진에 매일 전사의 결의로 사투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고이소(小磯) 신 수상은 그 처음 성명에 있어서 이 미증유한 국난을 돌파함에는 다만 국민이 대화일치(大和一致)하여 총력을 당하여서 적 미영의 반공을 격쇄(擊碎)하는 것 뿐이라고 단언하였다.
대화일치라는 것은 말로써 내각이 벌써 인화(人和)를 말하는 것인데 이번의 고이소, 요나이(米內)협력내각이 벌써 인적 화합을 의미하거니와 앞으로 이 화협(和協)내각의 지도 밑에서 전 국민이 화합하여 총력전의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여야 하겠다.
이번 고이소 내각이 성립되는데 따라서 후임 조선총독에는 아베(阿部) 육군대장으로 결정되고 오랫동안 조선의 조선인에 친해온 다나까(田中) 정무총감은 내각 서기관장으로 부임하고 그 후임에는 역시 우리 조선과 인연이 깊은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씨가 친임 되었다. 이 비상한 결전 하에 있어서 조선의 군사, 정치, 경제, 문화상 지위는 자못 중요성을 가하고 있는 이때에 총독, 총감의 경질(更迭)을 보게 된 것은 그것이 제국의 더 중대한 정치적 요청에 의한 것으로 군정 양면에 장로(長老)인 아베 신총독과 중앙정계의 중진(重鎭)이며 외지행정에도 다년간 경험이 풍부한 엔도 정무총감을 맞이한 조선은 참으로 안도와 기대가 커진 것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 새삼스럽게 신총독과 신총감의 열력(閱歷)과 인품을
114) 태평양 전쟁 때에, 일본 천황의 직속으로 군대를 통솔하던 최고 통수부(統帥部).
운운할 것은 아니고 오직 총독정치 이래 처음으로 맞이한 원(元) 수상의 신 총독 시정에 전 노력을 경주(傾注)하여 전쟁을 완수하는데 우리의 책무가 있고 신구(新舊) 총독을 영송(迎送)하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
아베 신총독은 그 제1성(聲)에서 ‘인(人)’을 말하고 다음으로 ‘성(誠)’을 들었다. 그리고 노력과 인내를 요청하였다.
그렇다. 무슨 일이고 모든 것은 사람이 한다.
사람이 첫째다. 그리고 성(誠)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성을 가진 사람이 노력하고 인내하면 못할 일이 없다. 고서(古書)에도 ‘성자천지도야(誠者天之道也) 성지자인지도야(誠之者人之道也)’라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다. 국민 된 각자가 다 성실히 노력하고 인내한다면 대동아전쟁의 중대 시국을 무난히 돌파하여 미영(米英)의 침공을 넉넉히 배제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아베 신총독이 앞으로 실시할 여러 가지 당면시책을 신뢰하고 실행하기 위해서 2천6백만 조선민중은 하나 빠짐없이 개심(開心)·세심향성(洗心向誠)을 보이기를 바라는바이다.
<출전 : 「大和一致로 米英擊滅 “小磯內閣과 阿部總督을 歡迎함”(卷頭言)」,'春秋' 제5권 4호, 1944년 8월, 12~13쪽>
8. '동양지광'의 선전 취지
1) 박희도, 창간에 즈음하여
천지가 한번 돌아 세월이 이에 바뀌어, 길조 넘치는 황기(皇紀) 2,599년의 신춘을 맞이하여, '동양지광' 창간호를 제공하기에 즈음해서, 삼가 성수무강(聖壽無疆)과 황실이 더욱 번창하시기 경하드리며, 정전(征戰) 전후 3년, 만리 적지에 간 군대를 육해공 삼도(三道)를 제압하여, 혁혁한 무훈을 이룩해가고 있다.
‘황군’장병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념하여 그 노고에 대해 만강의 감사를 바치며, 아울러 목숨을 버리고 군국을 위해 순직한 호국의 충혼영령에 대해 새삼 심후한 경조(敬弔)의 뜻을 표합니다.
되돌아보면 제국이 지나대륙에 병사를 움직이고 나서 이미 1년 남짓, 지금은 존엄한 위세 하 ‘황군’의 무위는 저 중원(中原)을 제압하고, 후방의 결속 또한 나날이 공고(鞏固)를 더하여, 동아신질서의 재건,장기건설의 대 사명을 향하여 순조롭고 당당한 보무(步武)를 진행하고 있고, 동양인의 동양을 현현(顯現)하는 역사적 신단계에 오르는 날도 또한, 멀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특히 우리 조선인에게는 사변 진전에 따라, 한층 더 그 중요성을 배가함과 동시에 반도 동포에 의해 발휘된 애국의 언동과 정열은, 예전 우리들의 지도자에 의해 제창된 소위 ‘내선일체’의 영역을 초월하여, 내선일체의 결실을 구현화해 가고 있는 것은 우리들도 감명하여 마지않는 바입니다.
차제에 반도 2천만 동포의 심흉(心胸)에 일본정신을 투철히 하고, ‘황도’ 정신을 앙양하며, 폐하의 젖먹이로서, ‘황국’ 일본의 공민으로서, 예외 없이 국체의 존엄을 체득하고, ‘황국’ 일본의 대사명을 운봉(運逢)하며, ‘황도’의 선포, 국위 선양에 정진하고, 그럼으로써 동양의 평화는 원래 소위 팔굉일우의 일대사상을 펼쳐, 세계인류문화의 발달과 그 강녕 복지증진에 공헌하는 것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생각건대 이 대의(大義)를 이해하고, 이 이념을 체득할 때, 몇 사람인가 일본국민으로서의 영광과 긍지를 느껴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 의미에 있어서 예전에 사용되지 않았던 내선일체라는 일 표어가, 이미 진부한 과거의 유물 취급을 하는 것처럼, 현재 빈번히 제창되어져 가고 있는 ‘내선일체’의 슬로건도 또한, 마찬가지로 진부한 표어의 잔해로써 취급당하는 영역에까지 강행되어, ‘내선인’의 뇌리로부터 두 개의 대립된 민족의 존재를 연상시키는 것 같은 관념을 불식해버리고, 단적으로 ‘내선’의 차별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 ‘일본정신’의 네 자에 의해 표현될 때까지 이르게 해야 하고, 현재의 ‘내지인’, ‘조선인’이라고 칭하는 말을 단순한 지방적 칭호로써만 존재할 때까지 도달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조선인 스스로 자진해서 진심으로 일본 국민이 될 수 있는 것이 가장 필요하며, ‘내지인’ 측은 그렇게 되도록 조선인의 유도(誘導)를 맡지 않으면 안 되고, 서로에게의 이 자각이 하루라도 신속해지면, 반도인은 하루라도 빨리 일본국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사변에 즈음해서 조선 동포가 발휘한 애국의 적성(赤誠)과 정열을 가장 유의의하고 가장 의의있고 성숙시키도록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며, ‘내선융화’ 내지 ‘내선일체’라고 하는 듯한 표어를 하루라도 신속히 초월하도록 수양 정진함과 동시에, 선각 식자는 다같이 이 유도의 대임(大任)에 협력 매진해야 됩니다. 더구나 이것은 초조해 하지 말고, 허둥대지 말고 미리 장기 건설의 각오로써 목적의 피안까지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재능이 없고 힘이 미약하다는 것을 뒤돌아보지 않고, 충충한 근심·걱정을 억누룰 수가 없어서, 이번에 동지와 함께 단연코 일어나 ‘동양지광사’를 세우고, 기관지로서 월간 '동양지광'지를 발간하기에 이른 것도, 필경 내선일체 구현에 대한 일본정신 앙양의 한 수양도장을 제공한 것에 불과합니다.
바라건대 우리들의 미의(微意)를 헤아려, 고처대국(高處大局)에 서서 본지의 건전한 성장과 우리들의 사명 달성에 만복의 지지를 부여해주시를.
1939년 1월 원단
동양지광사 박희도
<출전 : 朴熙道(東洋之光 社長), 「創刊に際して(卷頭言)」, '東洋之光' 창간호, 1939년 1월, 2~3쪽>
2) 윤치호 최린 김시권 이범익 등, 본지 창간에 대하여
■ 본사 고문 윤치호(尹致昊)
인류는 유사이래, 6천여 년의 문화를 갖고, 그것을 자랑하고 있다. 최근 수백 년간에 있어서의 과학적 발명과 기계적 진화는, 옛 사람이 몽상조차 할 수 없었던 최고도에 달하여, 우주신비의 열쇠는 인간의 손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반면 정신적 방면에서는 도의적 관념과 미풍양속의 현저한 진보는 볼 수가 없고, 오히려 옛날에 뒤쳐져 있다. 봐라, 인간사회 도처에 증오와 시의(猜疑),쟁투가 널리 가득 차 있다. 그와 같은 정신계의 암흑상태를 타개하지 못하면 인류의 진정한 행복은 기대할 수 없다.
이때를 맞이하여 우선 내선일체의 실천 강화를 지향해서 월간 '동양지광'이 발족한 것은 생간건대 의의 있는 기획이라고 믿는다.
이 잡지가 이윽고 조선의 사상계를 풍미하여 일본정신 향상의 일단에 이바지할 것을 기념(祈念)하며,그 만전의 발달을 바라는 바다.
■ 매일일보 사장 본사 고문 최린(崔鱗)
시대는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일시의 망설임도 의심하여 주저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급 템포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관념도, 사상도, 신념도, 시대와 함께 걷고, 시대와 함께 진보 즉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야흐로 ‘대일본제국’이 일세일대의 성업으로써 동아 영원의 화평을 확립하기 위해서, 정의의 말을 전지나의 들판에 달려 이에 1년 남짓― 이 동안 수많은 충용무쌍의 존경스러운 희생자를 내었다고 할지라도 목적은 혁혁한 성과로서 이루어졌고, 더욱 신단계에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들 국민은 이곳에 유연한 조국주의로 일치협력의 진(眞) 정신을 고양함과 동시에, 씩씩하게 총을 들지 않은 전사의 한 명으로서, 더욱 더 최후의 목적달성으로 매진하기 위해서 온 몸을 떨고 있는 것이다.
즉 시대와 함께 걷고, 시대와 함께 진보해 가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고, 영예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열혈의 무사 박(朴)군이 유연한 일본정신으로 되돌아가서, 여기에 실질적 내선일체 실천운동에 몸을 던져 반도 대업의 지도자임을 지향한 것은 실로 의의 심원한 바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들은 시대의 종소리의 아픔에 기원하며 당당히 정의의 진군보(進軍譜)를 연주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행히 여러분이 보다 좋은 반주자가 되어, 우리들 동지의 이상달성으로 일비지력(一臂之力)115)을 빌려주신다면 다행히 더할 나위 없는 바이다.
■ 경상남도 지사 우에 하야세(上瀧基)
팔굉일우의 황도정신을 널리 아세아에 빛을 씌우게 하여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는 것은, 이번 성전 종국의 목적에 있고, 한 마디로 상징하면 ꡔ동양지광ꡕ이라 할 수 있고, 사장님 귀하의 열의로써 찬연히 빛날 것입니다.
115) 한 팔의 힘이란 뜻으로 보잘것없게나마 남을 도와주는 조그마한 힘을 이르는 말.
■ 강원도 지사 김시권(金時權)
우리 제국이 동양평화건설을 위해 응징의 군대가 나아간 것이 불과 1년 남짓으로, 세계전 사상 비유할 데 없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어, 바야흐로 신무(神武) 조국의 이상인 팔굉일우의 도의정신을 동아 천지에 선양하고, 황도(皇道) 신질서 건설을 보이는 것은 일억 동포의 감격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능위가 그렇게 시킨 바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먼곳에 보낸 군대 빈틈없는 요새에서 혹서와 험준한 상황을 극복하고, 용맹 과감한 ‘황군’장병의 절대적인 노력과 넘치는 후방국민의 참된 정성의 결정이고, 이 위대한 단결과 ‘황군’의 무위는 점점 더 중외로 선양되어 세계열강으로 하여금 다같이 경탄시키고, 특히 노골적으로 장정권(蔣政權)을 지지하는 제삼국으로 하여금 망연하게 한 것은 실로 통쾌해마지 않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에 참가한 용사의 용기와 노고를 생각하면, 만강의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바쳐마지 않고, 불행히 적진에 쓰러지고 창과 화살에 부상당한 장병에 대해서는 충심으로 애도의 아픔을 금치못하는 바입이다.
돌이켜 전국의 대세를 달관해보면 장정권은 무한삼진(武漢三鎭)116)의 공략에 의해 한 지방정권의 여천(餘喘)117)으로 몰락에 이르렀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으로써 즉시 사변의 종결이라고 사유하는 것 같은 경우는 대단히 경솔한 생각입니다. 항일 잔당이 존재하는 한 끝까지 이를 단속 격멸하기 위해, 또한 장정권의 잔해를 파악하여 배후의 제삼국의 책모(策謀)를 절대 배격함은 물론이고, 더욱이 신흥 지나의 장기 건설을 완수하고 동양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는 것은 우리들 일본 국민에게 부하된 일대 책무임과 동시에 일대 영예라고 믿습니다. 즉 시국은 장기 건설의 신단계에 들어가, 일본국민은 새로운 책임이 가중한다.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히 우리 반도는 제국의 대륙정책에 있어서의 전진병참기지로서, 획기적이고 새로운 의의의 중대한 사명을 부하하기에 이르러, 이 구현에 관해서는 금후 한층 더 언론기관의 활동과 협력에 의지하는 바 간절합니다. 이에 반도 2천만 민중의 ‘황도’ 정신을 앙양하고 내선일체 실천을 기하는 대 이상 하에, 잡지 '동양지광'을 발간하기에 이른 것은 국가를 위해 진정으로 경하해마지 않는 바입니다.
금후 본지가 그 중요한 사명의 수행에 따라 점점 더 내선일체의 심화에 기여하고, 나아가서는 반도의 개발에, 또한 문화 향상을 초래하는 효과가 많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경영의 임무를 맡은 각위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함과 동시에 더욱 사(社)의 초석의 융창을 도모하여 문장보국의 사명달성에 매진하실 것을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경성철도주식회사 사장 우시지마(牛島省三)
제국 미증유의 의의를 갖는 성전은, 무한삼진의 함락을 계기로 더욱 신 단계에 들어간다.
이때를 맞이하여 보다 강한 내선일체의 실천을 강조하고, 그 지도 언론기관으로서 '동양지광'이 태어난 것은 실
116) 중국 호북성 남동부에 위치한 양자강과 한수(寒水)가 만나는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陽)을 지칭한다.
117)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아직 죽지 않고 겨우 부지하고 있는 목숨.
로 시의에 적합한 의의있는 계획이라고 믿는다.
다행히 그 역할을 담당하는 여러분이 각자 전선에 있는 각오로 불요불굴(不撓不屈), 소기의 목적달성을 위해 용왕매진(勇往邁進)할 것을 열망하고, 한마디 발족의 기쁨으로 삼는 바이다.
■연길(延吉) 만주국간도성장(滿洲國間島省長) 이범익(李範益)
동아협동체 신질서건설의 성업을 수행 중인 오늘, 본지의 탄생을 보는 것은 실로 다행스럽고 기뻐해마지 않는 바로서, 박사장 이하 동인 여러분의 분투와 사운(社運)의 진전을 기원하며 축사로 대신한다.
■중추원 참의(中樞院 參議) 장직상(張稷相)
정신총동원의 일원으로 가담하기 위해 빛나는 탄생을 본 것은, 봄맞이와 함께 축하할만하다.
'동양지광'이 실로 오리엔탈 라이트로서의 효과를 보이고, 나아가서는 서구에까지 그 빛을 미치고, 특히 영국의 암영(暗影)을 거둬버릴 때까지 강력한 신장(伸長)을 기원해 둔다.
■경기도 참여관 윤태빈(尹泰彬)
건곤일전(乾坤一轉) 이에 전첩에 빛나는 1939년의 신춘을 맞이하여, 삼가 성수의 무궁과 ‘황도’의 융창을 빌어드리는 것은 저의 최고의 광영이라고 하는 바입니다.
바야흐로 지나사변은 이에 제삼국을 관여시켰습니다, 그 동안 ‘황군’의 무위는 질풍신뢰(疾風迅雷)의 대륙을 석권하여, 중요지역은 거의 이를 공략하고, 절대적인 전과를 거두어 세계를 아연케 하고, 갱생신 지나의 건설에 일 신기원을 계획하여 국위를 온 세계에 선양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감격해마지 않는 바이고, 이것은 물론 대원수 폐하의 능위가 그렇게 하게 한 것은 물론입니다만, 또한 우리의 충용(忠勇)하기 비할 데 없는 ‘황군’의 정예가 일억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참된 정성에 불타올라, 모든 곤고결핍(困苦缺乏)에 견디고, 육지에서 바다에서 또한 하늘에서 분전역투할 수 있었던 덕택으로 그 노고에 대해서는 충심으로 감사의 정성을 바치고, 또한 군국을 위해 순열하신 존경스러운 당국의 영령에 대해서는 경건하게 경도(敬悼)의 뜻을 표하고,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 바입니다.
한편 반도에서의 후방의 활동을 보면, 사변 발생을 계기로 하여 동포는 갑자기 ‘황국신민’인 자각에 철저해지고, 열렬한 애국의 참된 정성으로 타올라, 일체의 정폐(情弊)를 일소하고 모든 상극(相剋)을 해소하고, 2,300만의 동포 숙연하게, 내선일체의 강한 대 시행 하에 대동단결하여, ‘황군’의 환송영은 물론 국방헌금, 군수 기재(機材)의 헌납 등을 시작으로 하여 출정군인가족의 위문, 상병(傷病)군인의 위안 등에 지성을 피력하고, 자진해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참가하며, 정신력의 경장진작(更張振作)과 함께 각자 생업(生業)보국에 매진하여, 생산 확충·소비절약·자원의 양호(養護)·저축의 장려 등 적어도 시국 난 극복에 관한 모든 활동은 국책에 순응하여 일상생활 구현에 힘쓰는 등 물심 양 방면에 걸쳐 그 활동이 실로 왕성하고, 미담이 도처에 나타나 일일이 거론할 수 없고, 특히 통치 사상에 일 신기원을 계획하는 교육령의 개정과, 지원병제도의 실시에 아울러, ‘황국’신민의 자각과 애국 정성은 한층 고조되고 실로 내선일체가 되어서 대륙으로의 전진기지인 반도의 중대사명의 수행에 매진해가고 있는 것은 실로 감격해마지 않는 바입니다.
사변은 무한삼진의 공략과 장정권의 함락에 따라 새로운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만, 그는 연패의 고배에 지금 더욱 폭력을 악화시키고, ☐☐의 고경(苦境)에 신음하면서 헛되이 믿기 어려운 제삼국에 의존하여 장기항전에 광분하고 있으며, 한편 단말마(斷末魔)의 지나를 에워싼 국제간의 동향 작위(作爲) 또한 복잡 미묘하고 시국의 전도 또한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신 단계에 대처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어서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 실로 ‘황도’ 아시아의 장기건설을 이루어, 만민공영의 국시(國是)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제국은 금후 또한 수많은 시련과 난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맞이하여 경성에서의 「동양지광사」는 반도 2,300여 만 동포의 심흉(心胸)에 일본정신을 투철하게 하여,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내선일체의 실천을 위해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야 할 마음의 양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이번에 동지가 서로 도모하여 빛나는 1939년의 신춘를 기하여 월간 국문잡지 '동양지광'을 창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정신을 앙양하고 시국 난 극복에 매진하는 기의를 얻은 계획으로서, 국가를 위해 경하해마지 않음과 동시에 삼가 그 융창을 기원해마지 않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해마다 꽃 모양은 닮았다고 할지라도, 신춘의 감회는 각자 달라야 하고, 우리 국운의 진전은 순간이라도 정돈(停頓)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현하 우리나라는 미증유의 중대시국에 직면해 있습니다만, 내외의 정세는 이상과 같고, 더구나 신춘과 함께 더욱 언제까지나 오랫동안 발랄한 것이 있는 것은 실로 환희해마지 않는 바입니다.
저는 광휘 있는 신춘 벽두에서, 여기에 삼가 ‘황운(皇運)’의 ☐영을 빌어드림과 동시에, 시국의 추이와 책무의 중대함을 감안하여 성지(聖志)를 받들고, 국책 선을 따라 일로성전(一路聖戰)의 목적관철에 매진하고, 따라서 팔굉일우의 천업(天業)을 부익(扶翼)하며, 국운의 흥륭에 공헌할 것을 기하는 바입니다.
이에 조금 연두 소감을 피력하고, 귀사의 번영을 충심으로 축복드리는 바입니다.
■함경북도 참여관 이성근(李聖根)
신 동아건설, 장기 성전 하에서 ‘황도’ 정신을 앙양하고, 내선일체의 실천을 사명으로 하는 귀지의 창간을 맞이하는 것은 극히 시의에 적합하고, 국가 사회를 위해 실로 경축해마지 않으며, 바라건대 사장선생님을 비롯하여, 동인 여러분 점점 더 결속을 굳히시어, 귀지 대 사명달성에 매진하실 것을 한 마디무사(蕪辭)118)를 진술하며, 만강의 축의를 표한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조선청년단 단장 김대우(金大羽)
바야흐로 새로운 동아의 건설을 담당할 일본은, 그 국민생활의 전 분야에서 새로운 창조의 시대에 들어가, 이 의미에서 진정한 전쟁이 지금 시작되었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조선의 민중이 이 성업의 반을 지고, 그 사명을 체득하여, 힘을 다해서 ‘황국신민’으로서의 중책에 임해야 할 식견, 실력을 쌓는 것
118) 겸사말로 난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말을 의미.
은 목하의 신 단계에서의 최 긴급급무와 같이 여겨진다.
이때에 즈음하여 박희도씨는 동지와 서로 얘기하여 동양지광사를 창설하고, 씨가 몇 해 전부터 포회(包懷)한 시중(時中)정신, 즉 바른 덕은 후생(厚生)의 길을 설득하고, 사회교화의 일각을 담당한다고 하는, 실로 동인(同人)을 위해서 또한 사회일반을 위해 동경(同慶)해마지 않는 바이다. 씨의 넘치는 열성,장한 위력, 비범한 체력으로 반드시 씨로 하여금 소지를 관철시켜, 동양지광으로서 사회의 목탁이 되어, 반도의 여론으로 하여금 ‘황도’정신으로 귀일시킬 것을 확신하고 기대합니다. 이에 약진의 출발에 임하여 귀사의 창설을 축하하고, 귀간의 '동양지광'이 동아와 함께 점점 더 흥륭발전, 크게 사회교화를 위해 공헌하실 것을 바란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간사 현영섭(玄永燮)
반도출신의 신흥 일본청년의 일원으로서 여러 선배에 끼어 한마디 축사를 드립니다.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119)은 동양은 하나라고 했지만, 저는 세계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일본의 이상과 동방의 정신으로써 더욱 서구가 가르친 과학의 힘으로써 백인의 동양에 있어서의 야심을 좌절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로써 동양과 서양과의 필연적 결합을 보는 것입니다.
세계문화의 순화(醇化)를 위해서야말로 우리들은 소비에트나 영미불과 전쟁은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 인류의 광명을 비추기 위해 동방의 이상을 높이 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선전(宣傳)에 속아 타고르옹120)조차도 일본의 이상을 오해하고 있는 이 때, 일본 및 동양의 진정한 정신을 세계에 선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긴급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때 '동양지광'의 발간을 본 것은 하나의 커다란 기쁨이자 희망입니다.
동양의 광원(光源)은 일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바라건대 '동양지광'은 우수한 일본문화와 청명심(淸明心), 넘치는 순수한 일본정신을 동양천지 및 전 세계에 선전하여 해명 받고 싶습니다.
조선은 일본국민이 완전히 됨에 따라 역사적 갱생을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사변에 즈음해서 보여진 그 열정, 더욱이 이를 지속강화하고, 또한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해 의식적으로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지도이론의 구명확립에 대해서도 「동양지광」은 적지 않게 기여 공헌해주실 점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잡지 '동양지광'은 반도를 비추고, 일본을 비추고, 그리고 전 아시아를 비추며, 더욱이 전 세계를 비출 빛이 될 것을 기원해마지 않습니다.
■중앙조선협회 주사 나카지마(中島司)
‘황도정신’의 앙양, ‘내선일체’의 실천이라는 빛나는 목표 하에 '동양지광이 창간된 것을 진심으로 경축드립니다.
조선이 어둡다고 일본이 밝다고 하는 도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힘을 합하여
119) 미술평론가. 동경미술학교 교장 등을 역임.
120) 인도의 시인, 사상가. 동서 문화의 교류에 힘쓰고, 인간의 존엄과 세계 평화를 호소했다.
조선을, 반도를 가장 명랑쾌조의 장소로 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 축하말씀에 불과합니다.
■경성보호관찰소 관찰사 율전☐☐(栗田☐☐)
동양지광의 탄생은 ‘황도’정신을 앙양하고, 동아의 신질서 건설을 위해 실로 경하해마지 않으며, 이 건전한 발전을 빌며 삼가 축의를 표합니다.
■동경 전경기공립중학교장 와다 히데마사(和田英正)
귀사가 더욱 융창하시길 축하드리며, 말씀드리자면, 소생 이번에 퇴관(退官) 후 봉직하던 조선을 떠나 놀고 있는 몸이 되어 있는 동안, 모처럼의 권고가 계셨지만, 다른 기회에 드리고 싶고, 먼저 위 승낙을 얻고 싶습니다.
■청주공립중학교장 泉正次郞
삼가 아룁니다. 군국다사(軍國多事)하고, 국민정신총동원 실천 앙양을 외칠 때, 귀사의 탄생 의의 깊은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에 삼가 전도(前途)를 축하드립니다.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사무이사역 본사 이사 방태영(方台榮)
이번에 귀하가 기획하신 '동양지광' 간행은 그 취지에서, 그 의의에 있어서 때마침 소자의 사전 소회(素懷)와 일치해서 실로 유쾌해마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길 더욱 멀고, 임무 더욱 무거운 이 대사업을 달성하는데 깊이 자중자애(自重自愛)하시고 건투 있으시길 빕니다.
■북만(北滿)호텔에서 김사연(金思演)
멀리서 귀하의 청안(淸安)을 축하하고 아울러 사업의 흥륭을 기원합니다.
■경성 동일은행(東一銀行) 대표이사회장 민규식(閔圭植)
감사에 넘치는 ‘황군’의 고귀한 분투와 희생에 의해서, 전과는 착착 이루어지고, 바야흐로 시국은 동아장기건설에 들어갔지만, 이 대이상을 구현하는 것이 ‘황국’ 일본의 사명이고, 호국영령을 안심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만사를 제쳐두고서라도 우선 국민정신의 귀일(歸一)을 도모하고 억조심(億兆心)을 하나로 하여, 안에서는 인고(忍苦)를 단련하고, 밖에서는 ‘황국’과 함께 하지 않는 열강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때를 맞이하여 귀사가 신춘을 기해서 언론잡지 '동양지광'을 간행하여, 일본정신의 앙양에 임하시는 것은 가장 시의(時宜)에 적합하고, 의식을 깊이하는 것이라 믿으며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부디 제국흥륭을 위해서 또한 동아영원의 평화건설의 선진으로서, 그 계(界)에서 군림하실 것을 빌어마지 않습니다. 무사(蕪辭)로써 축사를 대신합니다.
■대동(大同)광업주식회사 사무이사 이성환(李晟煥)
박사장이 '동양지광'을 주보(週報)로써 발간한 것이 1920년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집필자는 일기당천(一騎當千)121)의 선비였지만 그 논리는 예리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기세로써 이번에는 '동양지광'을 발간하신다고 하길래, 실로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은 시세(時勢)도 크게 변해서 조선은 이미 신동양의 주축을 이루고 있으므로 '동양지광'은 동양 전 지역에 각 민족의 공동운명의 개척을 위해 힘찬 지도자의 반려가 될 수 있도록 세력과 분투를 행해 주십시오. 이것이 귀지 발간에 대한 제 기도입니다.
■본사 이사 한백하(韓百厦)
우리 제국이 미증유의 난국에서 일어나 더욱 공고한 후방의 결속을 필요로 할 때, 실로 내선일여(內線一如)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 웅대한 이상 하에 동양지광이 탄생한 것은, 실로 경하해마지 않는 바다.
동아영원의 평화를 확립하는 것은 물론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민중 각자가 이 대 장거(壯擧)에 진심된 협력과 이해로 함께 대성할 것을 천희만망(千希萬望)하며 축사로 대신한다.
■경성 의학박사 박창훈(朴昌勳)
삼가 동양지광 창간을 축하드린다.
■경성부 원남정(苑南町) 66-31 김예현(金禮顯)
성전 이에 제3년, 뒤돌아보면 우리 ‘황군’은 문자 그대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서 제1년에는 북지(北支), 제2년에는 중남지(中南支)의 요지 대부분을 점거했듯이 세계 전사(戰史)에 미증유의 전적을 거둔 것이다.
그렇지만 장정권(蔣政權)의 개멸(皆滅), 모두 멸하여 전 지역의 치안, 신 지나의 건설 등 사변의 전도는 지금 더욱 요원해지고, 제3년의 오늘부터 드디어 비상시의 본줄기로 들어간 것이다.
이로써 국민, 특히 병역의무에도 참여하지 않은 2,300만의 반도동포는 남보다 갑절 후방의 직책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를 맞이하여 반도동포의 심흉에 일본정신을 사무치게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시키려고 하는 대 사명으로써 '동양지광'을 창간하게 된 것은, 실로 시의에 적합하고, 반도 장래의 일대광명으로 경하해마지 않고, 바라건대 각별한 고안하에, 유종(有終)의 미과(美果)를 거두시기를.
121) 말에 탄 한 병사가 천 명의 적을 상대로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것.
■경성 본사 이사 박창서(朴彰緖)
춘추필법(春秋筆法)122) 개조동양(改造東洋)
■황해도 군수 신익균(申益均)
근축동양지광창간(謹祝東洋之光創刊)
■반도제작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본사이사 최관호(崔觀鎬)
선각지도의 길을 가는 것에는 항상 가시밭 길이 있습니다. 특히 언론으로서 이를 지도하려면 그 임무 더욱 무겁고, 험준한 난관이 있다고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귀하의 건강, 귀하의 정열을 가지고 하면 반드시 이를 극복하여 동양지광 간행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는 것이라 믿고, 여기에 쌍수를 들어 축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경성 유억겸(兪億兼)
도의(道義) 신세계의 건설, 동아 신질서의 국책 시행을 위해 ‘황군’장병이 지나의 해육공(海陸空)에서 전전(轉戰) 분투할 때, 우리 반도에서는 후방의 봉공으로써 일본정신의 철저, ‘황도’정신의 앙양, 내선일체 실천의 3대강령을 사의 방침으로 정하여 박희도씨 외 뜻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도모하여 「동양지광사」를 조직하고, 그 기관지로서 '동양지광'잡지를, 빛나는 1939년의 신춘을 기하여 세상에 공간(公刊)하는 것은 실로 시의를 얻은 기획이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언론은 국가사회의 여론의 어머니라면 항상 공명정대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의 방침을 충실히 지키면서 지(智)·인(仁)·
용(勇)의 삼덕을 궁행(躬行)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어 국가사회에 비익(裨益)을 부여할 것을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모토야마(元山港外) 조선총독부 영흥(永興)학원장
아부성지조(阿部成之助)
내선동포휴직무이(內鮮同胞休職無二)
근기동양지광사융창(謹祈東洋之光社隆昌)
■봉천시 사회교관 주사 조원환(曺元煥)
흥아정책의 기지 대 경성에 박희도씨 주재하에 '동양지광'이 탄생합니다.
우국(憂國)의 열사로서 우
122) 춘추와 같이 비판적이고 엄정한 필법을 이르는 말. 대의명분을 밝히어 세우는 역사 서술방법.
리들이 항상 경모(敬慕)하지 않을 수 없는 북수(北水), 신기루(蜃氣樓) 제형(諸兄)이 들어가 이를 돕는다고 하니, 내선일체의 완성에 공헌한다는 취지에 흔희작약(欣喜雀躍)123)해마지 않습니다. 내선일체는 단지 내선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실로 우리의 숭고한 ‘황도’원리의 구현화로써 우리의 대륙정책의 목적달성도 실로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귀지의 힘센 빛은 반드시 내선일체, 아니 명실상반(名實相伴)의 내선일체를 완성하여, 따라서 신흥만지(新興滿支)에 모범을 보임과 동시에 이리, 여우같은 제국의 사범도장이 되실 것을 확신합니다.
■김포군 관사에서 군수 권갑중(權甲重)
월간국문잡지 '동양지광'이 창간됨에 즈음해서, 축사를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바야흐로 제국은 도의세계건설을 위해서 보무(步武) 당당하게 나아가면서, 동양인의 동양을 현현(顯現)하는 역사적 단계에 오르는 날도 아마도 멀지 않을 것입니다. 요전 날에 우리 반도는 제국의 대륙정책 수행상 한층 그 중요성이 배가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애국제언(愛國諸彦)의 진책(盡策)에 따라「동양지광사」를 조직하시어, 이 땅 2,000여만 동포의 심흉에 일본정신을 투철하게 하고 ‘황도’정신을 앙양함으로써 내선일체를 실천상 구현하게 하기 위해 피와 살의 굳은 신념 하에 빛나는 1939년의 신춘을 기해서, 힘찬 제일보를 내디디는 취지, 국가 장래를 위해 동경(同慶)해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귀사의 왕성한 발전과 동인제언(同人諸彦)의 건투를 빌며 축사를 드립니다.
■마산공립중학교장 사카타(坂田政次郞)
삼가 아룁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도의적 세계건설의 성전하에 있어서, 일본정신 현양(顯揚)을 위해 잡지 '동양지광'발간의 취지, 실로 경하해마지 않고 이에 축의와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중앙불교전문학교장 강전준웅(江田俊雄)
이번에 '동양지광'이 발간되게 된 것은 반도문화 향상 상에서 크게 축하해야 합니다.
“빛은 동방에서”라는 널리 세계에 알려진 말이다. 아세아를 변혁하는 것은 대일본입니다. 그러므로 대일본은 세계를 변혁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책무지위가 중대한 때이므로 동양지광의 출현을 거듭 축복합니다.
■한성(漢城)상업학교장 김주익(金周益)
축창간
123) 너무 좋아서 기뻐 날뛴다는 의미.
■경성보육학교장 독고선(獨孤璇)
동양지광이 나온 귀사의 탄생은 귀하의 열성인 권력에 기대하는 것 많음과 동시에, 잠든 반도동포에 대한 시대의식 각성으로의 경종이자 복음(福音)이기도 합니다. 귀지의 앞 길에 많은 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경성 서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 슈토(首藤胖)
축동양지광창설
동양인의 신 동양건설은 내선일체에 있고, 내선일체의 ☐관은 동양지광사의 발전에 기대합니다.
마땅히 사장 이하 일동의 건투를 빕니다.
■경성도청 촉탁 오오야(大宅義一)
삼가 답장을 올립니다. 빛나는 신춘을 맞이하여 잡지 '동양지광'의 창간의 낭보에 접하여 경하해마지 않음.
따라서 반도동포에게 일본정신을 철저파악하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게 된 취지, 실로 목하의 급무로서 또한 급속히 목적 달성되어야 할 입장의 것은 없습니다. 자칫하면 너무 딱딱한 기사로 충만되어 국어국문에 숙련되지 않은 반도 독자에게 물리기 쉬운 것이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는 바, 노련국전(老練菊田)의 축사를 비롯하여 외우(畏友)124)의 여러분이 편집국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삼가 듣고,적재적소를 얻은 바, 충심으로 성공을 확신하며 장거를 축복하는 바입니다. 삼가말씀올림.
■광주 아사히(旭)고등여학교장 장응진(張膺震)
근축(謹祝) '동양지광' 창간
■동성(東星)상업학교장 장면(張勉)
현재 우리나라는 미증유의 대 사변에 즈음하여, 특히 우리 반도 2,000만 동포에게 시국에 관한 정확한 인식을 부여함과 동시에, 장기전에 대처하는 각오와 결의를 촉구하기 위해 당당한 진용(陣容)으로써 귀지의 출현은 실로 동경(同慶)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더욱 더 발분, 발전하시길 충심으로 기원 드립니다.
■전남강진공립농업학교장 사이토(齋藤茂)
내선일체의 실천 요원의 불꽃으로 우리 전 반도에 넘칠 때, ‘황도’정신 함양에 투철하려고 뜻을 두신 동양지광의 발간을 경축하고 발전을 기원드립니다.
124) 아끼고 존경하는 벗.
■진남포(鎭南浦) 남일여관(南一旅館) 주인
전 조선지방행정 편집원 김봉한(金鳳翰)
만주사변을 계기로 오랫동안 혼돈된 상태를 지속해온 조선의 사상계는 겨우 정돈된 ☐운을 촉성(促成)해가고 있었던 바, 이번 일지사변(日支事變)125)을 구획으로써, 그 계에 일대혁명을 초래하여 번연한 종래의 미몽(迷夢)으로부터 각성하여 나이든 자도 젊은 자도 한결같이 ‘황국신민’으로서 내선일체로의 통제하에 두어지게 된 것은 시국의 부산물로서는 너무나도 커다란 수확입니다.
이와 같이 시국으로부터 온 당연한 귀결로서 우리들 조선민족은 당당한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고개를 숙여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 덕의(德義)와 ☐도를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에 선각자의 책무로써 후진을 위해서 신국면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될 부득이한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귀사의 창립취지서를 본 것만으로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는 우리들이 아직 모두 모르는바이지만, 국민정신총동원의 소리가 시끄러운 오늘날 이때, 특히 우리들 반도인으로서 도의세계의 건설에 매진하기 위해서 '동양지광' 발간이 계획된 것은 시의를 얻은 조치로서 실로 우리들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바입니다.
조금 사적으로 흐르는 두려움이 없지는 않아도 동향(同鄕)의 박희도 사장과는 수십년 전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고, 또한 본지의 편집자 신기루(蜃氣樓)씨와는 경성시절의 친분도 있고, 공사 방면으로 보아 「동양지광사」와 나와는 실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해야 마땅하고,이런 의미에 있어서도 쌍수를 들어 축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단지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노파심에서 간절히 요망하는 점은, 근래 이런 종류의 간행물이 몹시 많고,거의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고도 해야 할 이때, 특히 조선에서의 잡지경영은 난사(難事) 중의 난사라고 듣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사장님 이하 여러 선생님의 건투 분려(奮勵)에 의해 이해(利害)를 안중에 두지 말고 대처고소(大處高所)로부터 달☐하여 오랫동안 간행을 계속하시어, 세상에 동양지광, 아니 세계지광을 발휘하여 일만지 제휴에 참여하고 도의세계 건설에 매진해주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경성 금택우암(金澤愚庵)
일본국체와 몰교섭(沒交涉)126)인 국민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일본과 몰교섭인 세계는 있을 수 없을것입니다.
일본 및 동양의 과거, 현재, 미래에 무관심한 지금의 국제연맹이 일절 인식부족으로 정리된것처럼 목하의 세계는 마치 일본을 모릅니다. 그 피상(皮相)은 보고 있어도 그 정신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황도’ 일본은, (1)적경(積慶)(사물을 베푸는 인덕), (1)중휘(中暉)(일을 해결하는 지덕), (1)양정(養正)(의를 끊는 정의 즉 용기의 덕)인 건국삼대강(建國三大綱)을 근본으로 팔굉일우 정신에 입각하고 있는 성스러운 국가입니다.
앞서 말하면 국체의 자각으로부터 진정한 일본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세계도 다시 시작하여 앞으로 알지 못하면 안됩니다. 세계의 어디에 ‘세계를 위해 세워진 국가’가 있을까?
우선 앞으로 음미하며 착수하는 것입니다.
사변 하에 있어서의 우리들은 우선 이번의 장기전이
125) 중일전쟁.
126) 거래 또는 교섭이 없음을 의미.
라고 하면 오히려 사상전에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세계에 당당하게 ☐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의미에서 '동양지광'의 탄생은 무엇보다 기회를 잡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함흥 매일신보지사장 박금(朴錦)
해가 나오는 쪽을 가리켜 동이라 합니다.
그 빛은 아침 햇빛으로서 그곳은 우리들이 거주하는 땅입니다.
지구상에는 원래부터 동서의 구별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구별을 구획한 것은 인문(人文)의 덕택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하기를, 동양지광이라는 것은 이것 즉 우리들 문화의 빛으로서, 천지창조의 옛날부터 아침 햇빛과 함께 우주를 적절하게 비춰올 수 있는 것 반드시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 한층더 그 광도(光度)를 더하여 그 풍부한 은택(恩澤)을 인류에게 빛을 입히려고 욕심냅니다.
이것 어쩌면 동양지광사의 이상으로서 목표가 될 것입니다. 삼가 귀지의 창간을 축하하고 아울러 똑똑히 살피고 헤아려 꿋꿋한 걸음으로 그 표적을 향하여 용왕전진(勇往前進)해마지 않을 것을 부탁합니다.
■경성 변호사 신태악(辛泰嶽)
동양인의 동양을 건설하고 대동문화를 앙양하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에 우리들의 선배 박희도씨 주재하에 '동양지광'지가 발행되게 된 것은 실로 기뻐해마지 않는다. 장래의 건전한 발전을 축하하고, 삼가 사우제현(社友諸賢)의 건투를 빕니다.
■원산(元山) 이정진(李正鎭)
귀사 동양지광 창간호의 발간을 축하하며, 아침 해가 하늘에 높이 떠오르듯이 점점 더욱 더 발전, 국가사회를 위해 공헌하시기를 빕니다.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홍병☐(洪秉☐)
축창간
‘대동아건설’에 대해, 귀지의 위대한 사명을 기대 합니다.
■황해도 상천(償川)수리조합 이사 김종석(金鍾奭)
귀지의 발간을 축하하며, 병이춘추정필(倂而春秋正筆)을 좌우명으로 하여, 현세의 목탁이 되시기를.
<출전 : 尹致昊 崔麟 金時權 李範益 等, 「本誌の創刊に對する, 諸名士の祝詞」,'東洋之光' 창간호, 1939년, 45~54쪽>
3) 박희도(朴熙道), 희망과 신념을 가지고(권두언)
동양지광사장 박희도
△좋다 그것이 어떠한 성질의, 또한 어떠한 방향의 것이든 간에, 어쨌든 일정의 확고한 신념과 희망이 없는 국민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가장 비참한 운명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전 국민이 일제히 확고한 신념과 희망과 정열로 타오를 때만 그 국민에게는 발전과 번영이 약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반해서 하등의 희망도 신념도 가질 수 없는 국민에게는 단지 비참한 패배와 멸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조선의 민중은 어떨까. 그들은 과연 일정의 확고한 신념과 희망하에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불행히 나는 지금 또한 그것을 전적으로 긍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종래, 조선의 지식계급의 사람들은 자칫하면 민족주의적인, 혹은 사회주의적인 잘못된 경향으로 흐르기 쉬웠다.
그런데 이번의 지나사변을 통해서 위대한 교훈은, 무엇보다도 우선 첫째로, 그들의 그와 같은 잘못된 경향을 철저적으로 분쇄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조선민중의 행복이라는 것은, 단지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만 기대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장 명백히 지시한 것이다.
△마침 이때, 미나미 총독에 의해 제창된 ‘내선일체’의 표어는 그들에게도 또한 새로운 희망을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이미 지원병제도의 실시나 교육령의 개정에 따라 구체화로의 제일보를 내디디고 있지만, 필경 내선일체의 요점은 국민적인 의무와 권리에 있어서 ‘내선’인이 완전하게 일원화하는 것을 의미함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것은 조선인이 오랫동안 그것을 위해서 고민해온 모든 문제― 민족적 차별의 문제나 식민지 문제 등을 일거에 해결하여 조선인의 생활을 ‘내지’인의 그것에까지 고양하게하려고 하는 위대한 역사적 운동의 표어이다.
△이 운동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은 허용되고 있지 않을 뿐더러, 이 흐름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서만 조선 민중의 최대의 행복은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은 우선 ‘황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의 국민적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정의 확고한 신념과 정열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보다 좋은 일본을 만들고, 보다 좋은 동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전 심신을 진심으로 군국에 바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전 : 朴熙道, 「希望と信念を持て(卷頭言)」, '東洋之光' 1939년 3월호, 1쪽>
4) 박희도(朴熙道), 신동아의 건설과 우리의 사명(권두언)
장기 전쟁이 장기 건설의 신단계로 전입함에 따라, 동아 신질서건설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한다고 하는 것, 즉 동양인을 위한 동양을 동양인 자신의 손에 의해 건설하고, 모든 공리주의적 구미적 제국주의를 우리들 동양사회로부터 결정적으로 배제해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 동양인이 오랫동안 희구해온 가장 숭고한 역사적 사명이다. 백인 제국주의의 동양 침략이 개시되고 이미 1세기 동안 우리들 동양인에게 부과된 이런 역사적 사명은, 적어도 뜻있는 동양인에게는 일시라도 소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이 사명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초적 조건이 우리들 동양사회에는 결여되어 있었다. 과연 우리 제국은 일청(日淸), 일로(日露)의 양 대전 역할을 통해서 당시 청국의 배후를 조종하고 있었던 구미세력이나 러시아의 남진(南進)세력을 실로 완☐ 없을 때까지 구축해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남쪽은 남양제도(南洋諸島)로 확대되고, 서쪽은 중앙아세아에 접해 있는 이 광대한 동아대륙을, 그러는 중에 포함된 각 민족이 공존공영을 원칙으로서, 동아 영원의 평화 이상 하에 재편성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 제국에게
있어서도 결코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지나(支那) 공산당을 앞잡이로써, 깊이 지나 민중의 생활에도 침투해 온 적색 제국주의나 장개석(蔣介石) 정권을 괴뢰로써 지나의 자산계급을 조종해온 영미의 침략세력을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것이 제일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렇다, 그리고 이 제일 중요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번 지나사변이 관철된 것이고, 우리들은 바야흐로 과거 2년간에 걸친 성전의 결과, 지나 중원(中原) 땅 일대를 완전히 평정하여 동아 신질서건설로의 영예로운 임무에 착수한 것이다. 요전에 우리제국이 기울여온 희생은 결코 극히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금후에 부과된 우리들의 임무는 더욱 커다란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승리의 영예에 취하기 전에 금후의 임무의 중대함에 한층 스스로를 편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아신질서의 건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아협동체 조직은 성전의 개선 뒤에 철저적으로 관철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들의 가장 숭고 엄숙한 임무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제국이 유일 절대의 지도자로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제국만이 구미의 제국주의를 배제하고 엄숙히 동아를 지킬 수 있는 유일의 강력적인 선진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국의 지도하에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동아협동체는, 단순한 일, 만, 지 삼국의 경제적 블록의 결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닌가 하면, 우리 제국에 의한 전동아의 식민지적 재편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숭고한 일본정신의 선에 따른 우리 제국의 국책은, 이 경우에도 동아 각 민족의 공존공영만을 절대적인 기조로 삼는 도의적 정신에 입각한다. 일부 소수의 비국민적인 자본가로서, 이 경우 승리의 배후에 개인적인 공리를 탐욕하는 자가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은 우리 국책의 근본사상인 도의적 정신이 이를 단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동아협동체의 이념은 동아 각 민족의 단순한 원자론적인, 혹은 국제연맹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지만 현대 독일에서 보는 것 같은 전체주의적인 동아 통일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원자론적 연합은, 우선 첫째로 각 민족의 분립(分立)을 전제하는 것이고, 이러한 분립적인 민족주의 위에 입각하는 이상, 구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전 동아를 한 덩어리로 하는 협동체를 이룰 수가 없다.
더욱이 혈통의 순수성을 요구하는 전체주의적인 민족주의는, 국내 문제와 달리 전동아를 문제로 삼는 경우, 혈통의 흐름을 달리하는 이민족의 병존을 인정하는 이상, 수많은 곤란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협동체의 이념은 우리 제국의 지도를 전제로 하는 동아 각 민족의 철저적인 협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경우 협동은 단순한 협조도 아닌가 하면, 단순한 결합도 아니다. 협조 또는 결합도 각 민족의 개인주의적 분립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만, 우리들이 의미하는 협동은 동아 전체의 이익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아 이 목표를 위해서 각 민족의 개인주의적 이익을 종속시키려고 하는 이념이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에서의 협동은, 단지 동아문제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국내 문제에서도 금후의 우리나라에 부과된 근본 원리며, 예를 들면 노자(勞資) 문제와 같은 경우도, 진실의 일본정신에 입각한 해결방법은 노자의 협조가 아니고 노자 일체다.
또한 내선(內鮮) 문제와 같은 경우도 “내선의 융화”의 표어는 ‘내선인’의 분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동아협동체의 이념에 입각하는 원리는 “내선의 융화”가 아니라 내선일체다.
이 일체 사상은 일본정신의 도의적 국가원리로부터 출발하였고, 이 이념하에 ‘내선인’의 개인주의적인 이익을 종속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반도의 민중이 금일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받고 있는 내선일체 운동은 실로 도의적 정신에 입각한 동아의 개조― 즉 동아신질서 건설운동의 가장 중요한 일익을 행하는 것이고, 미나미총독도 말씀하신 대로 “동양인을 위한 동양건설의 핵심은, 내선일체의 완벽에 있는” 것임과 동시에, 이 내선일체의 대 조류에 편승하는 우리 반도민중의 근본적 태도는 항상 이러한 협동정신에 입각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확고한 신념 위에 입각하여 ‘내선’ 간에 있어서의 모든 민족적 편견을 철저적으로 분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적 편견을 분쇄하는 방법은 산업, 경제, 문화, 가정 등 인간생활의 모든 장면에서 내선인이 서로 최고의 국가적 이념 하에 한 몸을 희생으로 삼을 각오로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내지’인이 자칫하면 반도인에 대하여 갖기 쉬운 도시국가적 우월감을 차제 나뭇잎이 티끌처럼 분쇄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조선인도 ‘내지’인에 대해 갖기 쉬운 모든 편견도 이번 기회에 결정적으로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또한 이런 내선일체의 근본이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많은 불복을 제창하고 있는 자가 ‘내선’인 사이에 적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가 어떠한 근거 위에 입각하고 있든 우리들은 그들에게 대해 감연한 투쟁을 선언하는 것이다. 반도의 민중이 그 국민적인 의무 및 자격에 있어서 ‘내지’인과 완전히 일원화하려고 하는 이 팽배한 요망은 그들에게 부여된 가장 엄숙한 정치적 사명이고, 이 요망을 충분히 달성해서만이 전 동양인의 역사적 사명인 동아협동체의 이념도 완전히 관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선일체에 불복을 제창하는 어떠한 ‘내지’인도, 또한 어떠한 조선인도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제국의 원대한 이상실현에 장해를 행하는 자는 국가적 견지로부터 보아서 뿐만이아니라 전 동아의 견지로부터 보아도 똑같이 역적이다.
우리들은 잠시라도 이 내선일체운동의 엄숙한 사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것과 동시에 자칫하면 극히 저열한 무리 속에 나타나기 쉬운 정치 브로커― 즉 내선일체를 장사로 삼으려고 하는 더러운 인간들이 함부로 날뛰는 것도 우리들은 단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재차 강조한다. 내선일체운동은 우리들 동양인에게 부과된 가장 숭고한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일익이다. 이 진영을 지켜라, 여기에만 우리 반도 민중이 전진해야 할 정치적 진로가 전개되어 있는 것이다.
<출전 : 朴熙道, 「新東亞の建設と我等の使命(卷頭言)」, '東洋之光' 1939년 4월호, 1~3쪽>
5) 박희도, 혈서의 애국심(권두언)
동양지광사 사장 박희도
▴ 바야흐로 ‘내선일체’의 숭고한 표방은 ‘내선(內鮮)’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상적 문제로부터도 훨씬 심화하여, 실로 훈훈해지는 감정의 화원을 나타내려고 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 이러한 역사적 대전환에 즈음해서, 조선지원병제도를 교육령개정과 함께 동시적으로 실시한 것은 관민 모두 경하해마지 않는 바이다. 반도의 국민도 지원병이 되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간성(干城)이 되어 국방의 제일선에 서려고 하는 그 의기 장하다고 할 만하고, 그 애국열 축하할 만하며, 황공하게도 천문(天聞)127)에까지 상달(上達)되어 실로 공구감격(恐懼感激)의 극치다.
▴ 이 지원병을 둘러싼 아름다운 국민적 에피소드는 하나하나 들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그 타오르는 적성(赤誠)의 마음을 물들여 빛깔을 내어서 혈서의 ‘지원서’를 낸 기특한 얘기에는 머리가 숙여지고 가슴이 조여드는 강한 감명을 받는다.
▴ 금년도의 지원병 지원자 수는 실로 12,000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서 7,000명 정도는 뛰어난 적격자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적격자의 1할미만 밖에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미나미 총독 이하 본부의 간부 얘기를 비추어보면, 징병령은 아직 빠르고, 그 시기는 예정할 수없지만, 이 지원병 성적 여하에 따라 그 시기는 결정되어 갈 것이라고 한다. 이 현실적인 과도기의 사정을 우리들은 완전히 동감하는 바다.
▴ 그렇지만 이러한 발연한 애국열을 본의 아니게 식게 하는 듯한 경우가 너무 많이 있으면 유감이다.
실제의 방법으로써 지원병의 수용 수를 최대한도까지 증대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다.
지원병에게는 연령의 제한도 있어서, 현재 타오르는 듯한 사람들이 2,3년 후에는 연령의 경계선으로 장지(壯志)는 ‘노쇠’하여 어떻게 할 수도 없게 된다. 거듭 말한다, 현재야말로 지원병의 수용 수를 가능한 한 대량 증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혈서의 애국심에 감격하여 소망의 일단(一端)을 표하는 바다.
<출전 : 朴熙道, 「血書の愛國心(卷頭言)」, '東洋之光' 1939년 5월호, 1쪽>
6) 내선일체로의 문화운동(권두언)
◇내선일체의 운동이 전면적으로 전개되고, 그 구체적인 실천이 심화됨에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그것을 위한 국민적인 문화운동이 비상하게 요구되어진다. 내선일체가 단순히 서로 외쳐서는 안 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은 결코 협의의 정치적인 슬로건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아니, 그것이 정치적인 목표이기 때문이야말로 그 의미에 있어서도 그것을 위한 문화운동이 필요한 과제가 되어지는
127) 천자(天子)가 듣는 것, 천청(天聽).
것이다.
◇정치와 문화는, 그것이 하나의 위대한 국가적 이념으로 관철되고, 그 동일한 지도정신 하에 유기적으로 통일 조화되어 발전할만한 것이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필경하는 바, 일본정신의 일본 문화적 발양구현임에 틀림없고, 그 의미에 있어서의 국민적 문화운동은 동양문화의 신건설의 실천이고, 다른한편으로는 그 문화 운동을 통해서 전 민중의 국민적 계몽교화에 호소하는 중대한 사명이 있는 것이다.
◇현재의 조선민중은 지식적으로도, 생활적으로도, 아직도 민도가 낮다고 일컬어지고 있고, 그것은 또한 사실 그렇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교학적(敎學的)으로 평균 수준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이룬 다음에 문화적 활동의 톱니바퀴가 필요하다. 밖에서 우리들은 대중적으로 민중을 계몽하는 문화운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활동은 물론 높은 창조를 위한 노작(勞作)과 다른 한편 낮은 민중으로의 교화적 실천의 두 개의 형태가 있을 테지만, 오늘 우리들이 문화운동에 기대하는 바는 그 후자 쪽에 보다 진력해야할 때라고 믿는 것이다.
◇문화인이라고 해도 그 의미는 광범하지만, 오늘날의 조선의 문화인은 그 질에 있어서도 양에 있어서도 어떻든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최근 그들은 상당한 세력으로써 국가적 문화, 예술의 사도로서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에게 적당한 기회와 기관을 부여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지도 조성해야 한다.
예를 들면 문학·연극·음악·미술 부문을 동원시켜 그들의 기능에 따른 영향력을 직접 대중 속으로 보내는 것이다.
<출전 : 「內鮮一體への文化運動(卷頭言)」, '東洋之光' 1939년 6월호, 1쪽>
7) 사변 2주년에 즈음하여(권두언)
노구교(蘆構橋)128)에 있어서의 지나(支那)병의 불법사격에 의해서 일지(日支) 양국 사이에 병화(兵火)가 벌어지고, 벌써 3년을 맞이했다. 이후 우리의 제국은 불확대방침을 원칙으로 일을 평온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구미 제국주의나 적색 소비에트에 사주된 항일 지나의 폭려(暴戾)하기 짝이 없는 도전적 행위는 결국 사태를 하나의 세계사적 전쟁에까지 확대해 버렸던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제국은 전동아에 걸쳐 하늘에, 육지에, 바다에, 막대한 물질적인 또는 인적인 희생을 치러왔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제국성전의 목적은 일(日), 만(滿), 지(支) 삼국의 공존공영을 전제로하는 동아 신질서의 건설에 있다. 그리고 이 건설 과정은 무한(武漢)129)의 함락 이후 정부 성명에 호응하여 바야흐로 한 걸음 한 걸음 구체화해 가고 있다. 전쟁의 목적이 평화의 달성에 있고 파괴의 목적이 건설에 있는 한, 현 단계의 우리 대륙정책은 바야흐로 그 최후의 가장 긴밀한 목표를 향해서 돌진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 새로운 건설로의 착수는 다른 한편에서의 전쟁의
종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항일 장정권(蔣政權)을 최후까지 쳐부수고 더욱이 그 지주가 되어 있는
128) 중국 베이징이 융딩강 위에 세워진 다리로,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양국 군대의 충돌사건.
129) 1927년에 중국 우한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가 합작하여 세운 임시 정부.
모든 원장세력(援蔣勢力)을 결정적으로 지나로부터 완전히 구축해버릴 때까지는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동아 신질서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임무는 한편으론 전쟁, 한편으론 건설의 이중성을 갖지만, 때문에 그것은 한층 더 곤란과 복잡성을 갖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어떠한 곤란도 극복하여 소기의 성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변 2주년을 맞이하여 더욱 갑절의 용기와 결단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사변 이후 우리 조선의 민중은 후방의 활동에 모든 적성(赤誠)을 다하고 제국의 국책에 충실하게 협동해 왔다.
전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건설의 경우에도 우리들은 황국신민으로서 국가적 임무를 한층더 조직적으로, 그리고 충실하게 다하기 위해서 강고한 신념과 정열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출전 : 「事變二周年に際して(卷頭言)」, '東洋之光' 1939년 7월호, 1쪽>
8) 시국과 청년(권두언)
인생의 청년기는 힘으로 충만하고 희망에 넘치며 계획에 동경하는 아름다운 새벽녘의 각성기이다.
그와 같이 국가에도 청년기가 있고, 시대에도 역사에도 그것이 있을 것이다.
하나의 국가가, 하나의 시대가, 하나의 역사가 커다란 전환을 시도하여 새로운 희망과 계획의 사명을 짊어지고 발전할 때, 우리들은 이러한 본질이나 상태를 청년국가, 청년시대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이다.
청년이 인생의 미래에 대해서 혹은 희망과 계획이 풍부하듯이, 국가나 시대가 역사적으로 비약 전진 할 때, 거기에 커다란 청년적 기백과 특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어느 시대에도 청년이 국가사회의 미래의 주인공이고, 준비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청년시대라고 명명할만한 국가사회의 발전상태 속에서야말로, 청년은 청년다운 ‘행운아’로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청년국가의 중견으로서 청년이 그 무대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명예롭고 당연한 일이 아니면 안 된다. 오늘날은 비상시국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것은 언어의 진실되고 전적인 의미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상시국이란 결코 수동적인 또는 비관적인 그것이 아니라, 실로 주동적이고 건설적인 의미로 그렇게 취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시국의 당위적인 세기성(世紀性)인 것이다.
오늘날의 청년일본의 흥아적(興亞的) 사명은 실로 건설적이고, 영웅적인 것이다. 그 사명을 실질적으로 완수하는 것은 명예로운 과제다.
지금은 때마침 청량한 아름다운 기후를 점쳐서, 대일본청년단이 경성에서 전동아의 청년을 모집시켜 그 청춘의 대행진곡을 연주하며 민족적으로 훈훈해지는 교환(交驩)130) 을 도모하게 되어 있다.
이 기회를 계기로 청년제군은 그 젊은 정열과 희망을 일환으로써 이 시국을 스스로 타개하고 건설하는 위대한 길을 진군해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시국이 청년제군을 부를 것이다. 거기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청년은 그 청년
130) 서로 사귀며 즐거움을 나눔.
적인 생명의 능동으로서, 이러한 역사적인 청년일본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갈 만큼의 교양과 훈련을 체득해야 마땅하다.
<출전 : 「時局と靑年(卷頭言)」, '東洋之光' 1939년 9월호, 1쪽>
9) 대동아성전의 연두에(권두언)
유구 2,602년! 숭고한 영기(霊気) 대동아의 천지에 평온하고 부드럽게 넘쳐 흐르고, 천업의 영광(靈光) 넓고 밝게 팔굉에 널리 빛난다.
이 무궁을 봉축하는 원단(元旦)의 한 때. 보천솔토(普天率土)131)의 국토, 억조인민이 공동 향유하는 것이며 지성지충의 호흡을 하나로 하여 오로지 황공하게, 성수만세(聖壽萬歲)의 수사(壽詞)를 받쳐 올린다.
과연 그렇도다 라는 말이 있다. 일 년의 계획은 원단에 있다고. 참으로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평범한 근하신년의 말을 반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일 년의 계획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오래된 말로서, 이는 너무나도 새로운 신년이 되었는데 말이다.
일 년의 그 뿐만아니라 실로 세기(世紀)의 원단이 되었는데 말이다. 너무나도 깊은 슬픔이 되살아나고, 너무나도 커다
란 기쁨이 솟아나오는데 말이다. 아, 숙연한 느낌 가슴에 있다.
‘대동아성전’의 연두를 맞이한 이 위대한 역사의 원단의 날. 일인 일가의 편안한 신년의 즐거움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되고, 일억 국가의 혹독한 운명의 아침을 기도해야 한다. 더욱이 아세아 십억의 동종생령(同種生靈)의 희망을 보아야 한다. 대체 무엇을 가지고 빌어야 할지, 무엇을 가지고 축하를 해야 할지. 아아, 하늘에 맑게 갠 대답이 있다, 영원히 기념해야 할 두 구절 앞의 저 세계의 진감(震撼)! 저 홍혈의 감격! 저 강철 긴장! 1941년 12월 8일을 새롭게 떠올려라.
그렇지만 깊이 있는 말이 되려나, 일 년의 계획은 원단에 있다고 우주성신(宇宙星辰), 역사인사(歷史人事), 모두 그 최초의 전조, 반드시 최후의 다행을 수복할 것이다. 저 선전의 날의 미명, 황천(荒天)을 뚫는 은은한 태평양의 포성이여. 무적의 바다독수리의 하와이 원정. 항항도도(港港島島)의 과감한 전격. 이미 미영 극동함대를 전멸시키고 무훈혁혁하다. 전례 없는 서전 대첩, 누군가 쾌재를 삼창해주지 않겠는가.
태평양의 고래 떼도 필시 만세의 수연(水煙)을 뿜어 올릴 텐데, 우리의 최후의 승리를 믿어주지 않겠는가.
뒤돌아보면, 우리들 동양인은 앵글로·색슨의 굴욕과 학대를 견딘 세월 오래고, 그 착취와 약탈의 압제에 신음한 것 또한 길다. 뿌린 죄업의 열매는 스스로 수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또한 오랜 사실을 매거(枚擧)하는데 방황하지 말고, 새로운 결의를 외칠 뿐이다. 이미 정의의 백인(白刃)132)은 주홍색 칼집을 떠났다.
이 성스러운 최후의 심판 앞에 어느 귀신이라도 잘 울어주지 않겠는가.
전선의 경(卿)들은 악적(惡敵)을 잘 베어야 하고, 우리들 또한 후방을 굳게 지켜야 한다.
131) 온 천하, 전 세계를 의미.
132) 서슬이 시퍼런 칼.
바야흐로 신세기의 신화는 만들어져 가고 있고, 지상의 우리들 또한 새로운 역사의 창조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이 세계평화로의 노래가 타오르자마자, 인류는 실로 두 개의 정사(正邪)의 진영으로 나뉘어져 일대결전을 이루려고 한다. 실로 장관이며 우리들 지금 그 전사(戰士)인 시대에 생을 향수하니 이광영(光榮) 풍부하고 자랑할 만하지 않은가.
구주웅방(歐洲雄邦)인 독이(獨伊) 굳은 맹엄(盟嚴)으로 지키고, 동아의 태국, 프랑스령 인도네시아 또한 우리들과 손을 잡았다. 싸우는 것, 지키는 것, 그 최대의 사력을 다할 뿐.
그렇지만, 싸움에 극복하여 이기는 것, 또한 교만하지 않고 자신이 주마에 채찍질을 해야 한다.
적에게 이기는 것 더욱 자신의 마음 속 감정에 이겨야 한다. 내우외환과 함께 울 때, 우리들의 진정한 저력과 용기는 효과 백배가 될 것이다. 적어도 소아(小我)의 불만이나 마찰은 차제에 소리 높여 말해서는 안 되며, 일억일심(一億一心)이라는 그 진의의 단결에 철저하지 않겠는가. 싸움은 바야흐로 한창이고, 그렇지만 장기전 각오도 없어서는 안 되고, 어떠한 시련의 폭풍우가 불더라도 단연코 뒤돌아보는 일없어야 한다.
싸움에는 반드시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최후의 승리를 우리들의 머리 위에.
<출전 : 「大東亞聖戰の年頭に(卷頭言)」, '東洋之光' 1942년 1월호, 2~3쪽>
10) 대동아전 1주년(권두언)
오로지 승리의 가도를 매진하면서 ‘대동아전’의 1년은 지나갔다. 우리들은 선전 조서가 환발(渙發)되고, 서전(緖戰)의 승리가 보도되어 잇달아 올리는 ‘황군’의 경이적 전과에 얼마나 경탄하고 감격을 계속한 것인가?
실로 이 1년간은 감격과 흥분의 1년이었다.
그리고 불과 이 일년간이라고 하는 짧은 세월 속에 얼마나 커다란 변화가 초래된 것인가?
저 풍부한 자원의 세계적 보고이자 남방의 제 지역은 우리나라 통치 하에 돌아왔고, 태평양 제공해권(制空海權)도 우리들의 손에 쥐어졌다.
‘황군’이 밖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는 때, 국내에서의 전쟁의 성과도 또한 컸다.
우리들은 생산 확충을 위해 싸웠다. 미영적(米英的) 개인주의의 박멸을 위해 싸웠다.
국토방위를 위해 싸웠다.
결전체제는 급속히 정비강화되고, 국민의 각오와 결의는 1년 전의 그것에 비할 필요도 없다.
전선(前線) 후방을 불문하고 일년간의 성과는 멋지고 큰 것이었다.
성업(聖業)의 제일보는 강하게 내딛어지고, 동아백년의 대계는 그 단서가 이루어졌다. 조국의 대이상을 향해서 매진할만한 발판은 확고히 쌓아진 것이다.
그러나 ‘대동아전’의 1주년을 맞이하는데 즈음해서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승리의 찬탄(讚嘆)이 아니라, 미래의 승리를 위해서 한층 더 높이 서서 결의를 굳게 하는 것이다.
서전에서 쌓아진 발판에 서서 우리들은 이 승리를 최후의 선에 연결할 때까지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규모, 구상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이 대전은 장기전의 성격을 분명히 갖추고 우리들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이 대 국난을 타개하여 이 대 전쟁을 이겨내어 최후의 승리 획득을 지향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결속하고, 어떻게 결의하며, 어떻게 싸워야 할까는 어중간한 상상은 할 필요도 없다.
1년간의 비참한 패전에 의해 적은 일본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바꿨다.
그들은 방대한 군확(軍擴) 계획을 새롭게 세우고 엄청난 군비를 가지고 우리들을 위압하려고 한다.
양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질로 싸우고 있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아무리 적이 군비를 확대한들 문제는 아니지만, 적의 양의 확대 이상으로 우리들은 질의 강화를 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적의 만(万)을 우리는 일(一)로써 부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가능성은 과거 수많은 전쟁에서, 또한 작년 일년간의 싸움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우리들은 단언한다. 금후도 승리는 우리들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억 국민의 결의와 각오가 뒷받침이 되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뒷받침하자.
일사순국(一死殉國)의 결의를 굳히고 완승의 날까지 싸워내야 하는 것을.
이미 이 결의 강하고 이 각오 견고하면, 우리들은 10년전쟁도 100년전쟁도 아무런 걱정도 없다. 적이 아무리 방대한 전비(戰備)를 가지고 달려들어도 우리들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일천억불의 군확비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 싸우면 이겼던 것처럼 금후도 승리를 우리들에게 있게 할 것이다.
‘대동아전’ 제1년은 감격과 흥분 속에서 보냈다. 제2년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적을 응시하며, 우리들의자세를 굳건히 하여 필승을 기해 나아가자.
<출전 : 「大東亞戰一週年(卷頭言)」, '東洋之光' 1942년 12월호, 4~5쪽>
11) 교문을 나서는 학도에게
이 봄도 또한 많은 생도가 오랫동안 정든 교사를 떠나 사회로 나갈 테지만, 진중한 인적자원으로서 제군의 사회로의 보충은 국가로서는 새로운 힘의 증강이고, 개인으로서는 생의 전야(戰野)로의 출정이다.
오랫동안 학창에 틀어박혀 형설지공을 쌓은 것은 오늘을 위한 준비였고, 내일의 활동을 이루기 위한 수련이었다.
바야흐로 제군은 다년간 닦고 기른 힘을 실지로 시험하기 위해서 새로운 제일보를 내딛는 것이다.
사회는 물론 학원의 연장이지만, 그것은 학창시절과 같은 무풍지대도 아닌가 하면, 특별히 어떤 울타리를 둘러친 온돌도 아니다. 거기에는 살기 위한 싸움이 있고 번민이 있다. 많은 폭풍우가 있으며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다.
이것을 잘 헤쳐 나가 밟고 넘어서 가는 자만이 인생에 승리하고 행복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제군이 항상 잊으면 안 되는 것은 눈을 목전만으로 향하여 먼 곳을 바라보지 않고,항상 자신 개인을 위한 것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사회는 하나의 공동생활체이다.
모두가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는 거기에 있는 것은 항상 충돌이고 투쟁일 것이며, 형제가 체내에서서로 싸우는 중에 사회라고 하는 하나의 커다란 몸은 침식되고 망가져 쓰러지고 궁극에는 자신을 파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눈을 항상 높은 곳에 두고 전체를 바라보며 국가사회의 공영의 목표를 향해서 자신의 방향을 정하도록 끊임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비판과 행위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날카롭게 방황을 판별하고, 용기로써 그 타성에서 뛰어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낡은 사회에는 여러 잔재가 편만해 있고 그것은 또한 집요하게 약한 신병(新兵)을 에워싸는 것이다. 좋은 전통은 받아들이고, 낡은 허물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한층 더 필요하다.
이에 따라 새로운 사회는 건설되고, 행복의 증대는 오는 것이다.
바야흐로 국가는 어떤 숭고한 목표를 향해서 매진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공영을 가져올 유일한 길이다.
이 길의 달성에는 제군의 힘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제군은 정열을 여기에 쏟고,정의감을 여기에 불태우며, 그리고 그 선을 따라 돌진하도록 각오를 굳혀야 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직장, 어떠한 입장에 처하더라도, 이 커다란 목표에 자신을 관련시켜, 그 추진에 자신의 힘을 쏟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작은 움직임, 작은 각오의 여하, 그것은 즉시 국가의 흥망과 관련되어 있다. 국민의 진정한 이익은 항상 국가의 이익과 일치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사회로 진출하는 자는 항상 이 높은 곳에 눈을 향하여, 국가와 함께 살아가는 것만이 바른 삶의 방식이라고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출전 : 「校門を出づる學徒に」, '東洋之光' 1943년 4월호, 2~3쪽>
12) 고이소 총독, 승패의 귀추가 분명해진다(연두소감)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대동아전쟁’ 제3의 신춘을 맞이하여, 우리들 1억 국민은 전선도 후방도 한결같이 ‘대어능위(大御稜威)’133)를 받들어, 점점 더 필승의 신념을 새롭게 하고 훌륭히 적을 격쇄하여, 결전에 최후의 대승리를 얻음으로써 황조황종(皇祖皇宗)134)의 신령에 응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대동아 제 민족 국민으로서 각각 그 곳을 얻게 하려고 하는 팔굉일우의 대의명분은, 바야흐로 아침해와 함께 찬란히 세계사 전환의 광휘를 띠며 편만(遍滿)과 농락(籠絡)으로써, 세계제패의 비망(非望)을 꿈꾸는 물력만능의 적의 깃발 색은 그러므로 점점 더 빛이 어둡고, 덧붙이면 태평양전선상에 매우 초조하여 저돌해오는 적의 대함거포(大艦巨砲)는, 선모용전(善謀勇戰)하는 ‘황군’의 감투(敢鬪)에 의해 추하게도 잇달아 사라져가고 있지만, 이것만을 보더라도 승패의 귀결은 이미 분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적측은 기회만 있으면 일본의 물력이 최고조에 달하기에 앞서 전승(戰勝)을 획득하려고 하여, 올해도 반드시 초조, 무모한 결전으로 저돌 폭진해 올 것이라는 것,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만방에 이 유례없는, 일본 혼이 이미 자신에게 있고 그리고 정도탁발(精到卓拔)한 용병(用兵)의 묘술은 본디부터 ‘황군’의 독특한 장점이다. 만일 그 작전 자재(資材)에서 필적할만한 물력을 손에 넣으면, 도리에 어긋난 미영과 같이 오히려 개수일촉(鎧袖一觸)135)이다.
133) ‘천황’의 거룩한 위덕, 위광을 일컫는 말.
134) ‘천황’ 역대의 선조.
한편 다시 우리 조선반도를 뒤돌아보면, 물력자원이 풍부한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리고 이것이 개발증산에 종사할만한 노동력이 과다한 또한 ‘황국’ 영토 중 실로 첫째다.
뿐만 아니라 최근 반도 민심의 심오(深奧)에는 전승파악의식이 갑작스럽게 팽배하게 발흥하기 시작했다.
전력증강의 구현 또한 기다려야 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되돌아보면 올해는 국운을 좌우할만한 결전의 해이다. 우리들은 후방 전승의 동인(動因)은 실로 조선으로부터 라는 각오로써 올해야 말로 혼자서 두 몫, 세 몫의 노력을 한 마음으로 생산증강에 기울여서 완벽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전 : 朝鮮總督 小磯國昭, 「勝敗の歸趨明かなり(年頭所感)」, '東洋之光' 1944년 1월호, 2~3쪽>
9. '반도의빛(半島の光)'의 권두언
1) 권두언
[1-1]
국제정세는 점점 더 긴박의 일로를 더듬어 가고 있고, 혹은 머지않아 더욱 절박한 사태에 직면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여겨지는 형세다. 이 비상시국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개인, 단체 할 것 없이 모두 이미 과거의 습관이라든가, 입장이라든가, 전통이라든가 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신속하게 이것들의 모든 집착을 말끔히 털어버리고, 자진해서 국책에 순응하여 이른바 신체제의 확립을 향해서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본회(本會)의 보급사업에서도 언론의 통제, 인쇄용지의 절약 등의 중요국책에 즉응하여 실로 시국 하에 어울리는 문화보국에 매진하기 위해서, 간행물의 폐합(廢合)을 단행하게 되었다.
즉 조선문잡지 '금융조합(金融組合)'을 폐간하고 '조합과 생활(組合と生活)' 및 '가정의 벗(家庭の友)'으로 통합하고, 새롭게 '반도의 광' 국문판 및 조선판을 개제(改題)하게 된 바다.
본지(本誌)는 실로 전시 하에 있어서 조합원의 연성교양(鍊成敎養)뿐만 아니라, 가정부인의 계도(啓導)라는 중대사명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본지의 간행에 즈음해서는 그 내용의 충실, 쇄신(刷新)에 부단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금후 독자제현의 절대적인 애고(愛顧)와 후원을 희망해마지 않는다. 또한 본지에 대해서 특히 조선총독부로부터 제자(題字)의 휘호(揮毫)를 내려주신 것은 본지의 가장 광영으로 삼는 바이고, 이 책무가 점점 중하고 또한 크다는 것을 깨닫는 바이다.
<출전 : 卷頭言, '半島の光' 1941년 4월호, 1쪽>
135) 갑옷 소매로 한 번 건드린다는 뜻으로, 약한 상대편을 간단히 물리침을 이르는 말.
[1-2]
원전달웅☐(遠田達雄☐)
시국하에 있어서의 반도 민중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그 목표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극히 간단명료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들 반도 민중의 정열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각오가 필요하다. 환언하면 반도 민중생활의 쇄신과 대어심(大御心)136)에 봉공하여 모신다고 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의 쇄신에는 타오르는 듯한 정열이 필요하고, 멸사봉공에는 각자 그 직역(職域)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우리들은 직역봉공이라고 하는 것을 지금 한 번 더 깊이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역봉공이란 각자 각각의 부서 부서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며 그 직에 힘쓴다고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대어심을 명심하여 지키며, 국가적 행동을 한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적 행동이라고 하는 무엇인가. 어쩐지 확실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극히 확실한 것이다. 즉 국가적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직역봉공을 단지 그 부서 부서에서 힘쓴다고하는 것만으로 해석할 수가 없고, 그 행동이 황국신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직역에 충실☐☐해도 황국신민으로서 있을 수 없는 사고방식을 하고 있으면 결코 봉공을 드린다고는 할수 없다. 즉 개인으로서의 활동이 모두 국가적인 것, 전체적인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대륙병참기지라는 커다란 성업을 짊어진 반도 민중은 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실로 황국신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국민이 되는 노력과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전 : 遠田達雄☐, 卷頭言, '半島の光' 1941년 5월호, 1쪽>
2) 모략에 걸리지 마라
지금의 전쟁이 총력전이라고 일컬어지지만, 그 의미는 후방의 국민이 가장 잘 인식하고, 또한 명심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다. 무력전 외에 경제전, 사상전, 모략전 등이라고 가지각색으로 일컬어지듯이 전쟁이 커지고, 길어지면 질수록 저 수단 이 수단 모든 수단방법으로 상대를 해치우러 달려드는 것이다.
그래서 적이 어떤 방면에서 어떤 방법으로 공격해오더라도 거기에 지지 않을 정도의 주의와 결의가 필요하다.
그것이 총력전이다.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선전(宣傳) 능란한 적 미영(米英)의 모략인, 상대의 배후에 손을 써서, 가장 중요한 국민의 마음을 교란시켜 결속을 흩뜨려서 이른바 후방의 전력을 무너뜨리러 달려드는 것이다. 전 해에 이탈리아가 완전히 걸려들었다.
이것을 생각하면 서로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이 혹독한 전시생활에 대한 불평 등이 조금이라도 마음 한 구석에 있다고 하면, 이윽고 거기가 적의 모략 입구가 되는 것이다. 이것에 이겨내기 위해서는 뭐라고 해도 빈틈없는 일본국민으로서,
136) 천황의 마음.
필승의 신념에서 생기는 부동의 철벽심으로써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전 : 「謀略にかゝるな(卷頭言)」, '半島の光' 1944년 7월호, 1쪽>
3) 증산포진(增産布陣)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에 무럭무럭 자라는 짙은 초록의 벼, 상쾌하게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지금은 전선(前線)에 울려 퍼지는 폭음, 함성의 메아리도 들려온다. 개인 날이나 굳은 날이나 오로지 한결같이 한 알이라도 많이, 하고 기도하는 마음은 그대로 증오하는 적 미영을 때려눕히고 쳐부수는 전쟁으로의 마음이다.
여기도 실로 적전(敵前)이다. 아무리 불길이 혹독하더라도 또한 어떤 재난이 닥쳐오더라도 단호히 싸워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겨내야 한다.
하늘을 상대로 하고 흙과 싸우는 농사의 고귀함은 천은(天恩), 지은(地恩)을 사람의 힘으로 두 배 세배로 하는 점에 있다. 기후가 아무리 적당하고 순조로워도 농지가 아무리 상토(上土)라고 해도 근로(勤勞)가 없는 곳에 무슨 천혜(天惠)가 있을까.
자신의 전력을 다하고 다해서 또한 부족한 곳을 묻는 경지야말로 진정한 증산이 있고, 승리가 있다.
바야흐로 전국(戰局)은 중대 이상으로 중대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결실을 맺을 벼농사에도 거국적으로 필승필기(必勝必期)의 희념(希念)이 깃든다.
<출전 : 「增産布陣(卷頭言)」, '半島の光' 1944년 8월호, 1쪽>
4) 비상의 힘
일본국민은 황실을 중심으로 우러러 맺는 두 개의 가족이다. 1억 모두 혈연으로 맺여져 있는 신의 자식이다.
그 관계는 무한(無限)의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평소는 마음이 떠나 있던 사람도, 유사시에는 마음을 협력하고 힘을 합하여 난국에 임한다. 이것은 혈연이 갖는 그윽한 힘이다.
평소 들어올리지 못한 듯한 무거운 물건도, 여차해서 화재 등의 경우에는 정신없이 밖으로 들어내오며, 나중에 깨닫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나 하고 여겨질 때가 있다. 그것이 인간이 소유한 힘의 신비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국민 전체에도 적용된다.
우리들의 조국이 지금 흥망의 기로에 서서 1억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평소의 마음가짐으로, 평소의 힘을 내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바야흐로 적은 우리 본토를 향해서 육박해 왔다.
더구나 그 기세는 강하다. 우리들은 지금이야말로 국난(國難)이 더하면 더할수록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서로 도와
철석(鐵石)같이 굳게 단결하여 적에 부딪쳐 이를 때려 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소 할 수 없는 것도 지금은 해치울 수 있는 것이다. 적을 격멸한 후, 뒤돌아보아 “어떻게 그 때는 그런 힘이 나왔을까” 하고 서로 이야기할, 힘을 지금 내자.
<출전 : 「非常の力(卷頭言)」, '半島の光' 1944년 9월호, 1쪽>
10. '라디오 강연강좌' 사례
1) 오다케 주로(大竹十郞), 지원병제도의 시행에 즈음하여
조선총독부 내무국장 오다케 주로(大竹十郎)
오늘은 진무‘천황’(神武天皇)137)제의 가절(佳節)입니다만, 더욱이 우리 조선에서는 반도주민이 오랫동안 대망하고 있었던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오늘부터 시행된 것이고, 실로 의의 깊은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그런고로 이 지원병제도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제일 먼저 이 제도는 어떻게 시행되어지기에 이른 것인가 말씀드리면, 조선에 대한 취급을 순차적으로 ‘내지(內地)’138)와 똑같이 한다는 것은 ‘한일합방’ 당시부터의 이상이고, 소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는 다이쇼‘천황’(大正天皇)139)의 조서(調書) 중에 명백히 제시된 황모(皇謨)140)입니다.
따라서 역대 당국은 이 근본방침에 입각해서 예의경륜(銳意經倫)에 힘쓰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 민족은 원래 동종동근(同種同根)이라고는 하면서 언어, 풍속, 습관 등을 전혀 달리 하는 것이므로, 모든
방면에서 이 이상을 실현한다고 하는 것은 일석일조로는 도저히 허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병역에 관한 제도와 같은 경우는, 직접 국가의 존망에 관한 중대한 사항이므로, 신영토의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이에 관여시킨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경우는 진정 민족 동화의 결실을 거두어 조선사람들이 ‘국어’도 말하는가 하면, 신사에도 참배하고, 교육도 보급하며 완전히 일본인이 된 후에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는 바라서 결코 일부 인사의 요망이나, 일반 민중이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서 가볍게 허용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 반도는 합병 이래 바야흐로 20년 하고도 또 8년이어서 이동안 역대의 능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선현의 노력과 반도민의 자각 수양의 효과는 이번 사변에 즈음해서 출정군대의 송영, 위문에, 국방헌금이나 비행기 헌납에, 신사에서의 전첩(戰捷) 기원이나 봉고제(奉告祭)에 열렬한 애국심이 되어 샘물이 솟아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런 형태로 아무 때나 도처에 뿜어나와서 이에 그 결과로서 지원병 제도의 탄생을 보게 된 것입니다. 즉 본 제도는 반도민의 지성이 하늘
137) 일본의 초대 ‘천황’.
138) 구 일본제국의 지역개념으로 홋카이도나 오키나와 등 변방을 제외한 일본 본토.
139) 일본의 제123대 ‘천황’(1879~1926).
140) ‘천황’이 국가를 통치하는 계획.
에 통한 결과로서 태어난 것이라고 말씀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럼 다음에 이 제도의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만, 우선 채용되어야 할 인원 및 입영부대입니다만, 이것은 매년 조선군 사령관이 의견서를 제출하여, 육군대신이 상주재가(上奏裁可)를 거쳐 이를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이번 최초의 채용 수는 400명이고 그 중 200명은 보병으로서 12월에 입영하고, 100명은 치중병(輜重兵)141) 특무병으로 하고, 100명은 고사포병 보충병으로서 모두 다음 해 6월에 입영 또는 소집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재영(在營) 기간은 보병은 약 2개년입니다만, 치중병 특무병 및 고사포병 보충병은 4개월 내지 2개월의 단기입니다.
또 지원자에 대해 어떠한 병종(兵種)에 편입되는 지는 군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이 제도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내선(內鮮)’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려(聖慮)’에 입각하는 것이므로 그 채용된 지원병의 취급은 완전히 ‘내지인’과 똑같습니다. 즉 조선인 지원병만 특별한 부대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고, 징병에 따라 입영하는 ‘내지인’과 서로 같이 완전 동일한 부대에 편입되어져서 완전 동일한 교육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진급에 대해서도 또한 그 급여에 대해서도 결코 차별은 없고, 동일 대우를 받습니다. 그리고 재복무를 지원할 수 있는 것도 동일하고, 하사관 혹은 장병으로 진급하는 길도 열려 있습니다.
이렇게 일단 유사시에는 ‘내지’의 장병과 함께 국토방위에, 혹은 공성야전(攻城野戰)의 중임에 종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입대한 후는 완전 ‘내지인’과 동일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므로, 지원병의 요건은 징병에 따라 입영하는 ‘내지인’을 표준으로서 결정되게 됩니다.
즉 그 요건에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연령 17세 이상의 남자인 사항입니다. 17세 이상이라는 제한이 있습니다만, 특별히 제한은 없습니다.
몇 살이든 괜찮습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징병에 따른 ‘내지인’과 서로 같이 단체훈련을 받는 것이고, 그 ‘내지인’은 대체로 만 20세이므로 우선 20세 전후의 연령이 적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둘째로 체격 등위 갑종(甲種)인 사항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신체강건 이라는 사항으로, 가장 가까운 공의(公醫)든지 관공립 병원의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면 대개 판명이 됩니다.
셋째로 신장 160미터 이상인 사항으로, 그 이하의 신장이 작은 자는 자격이 없습니다.
넷째는 총독부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과정을 수료한 자인 사항입니다.
이 훈련소는 이번에 새롭게 경성에 신설되었고, 지원병으로서 채용될만한 예정자를 수용하여, 입영전 대개 6개월간에 걸쳐 그 심신을 단련하고 복역 상 필요한 훈련을 시행합니다.
이상 네 가지 요건을 요합니다만, 마지막 요건인 훈련소의 사항에 관해서 지금 조금 말씀드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훈련소는 올해 6월부터 경성에 개설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입소할 수 있는 자는 연령, 체격, 신장에 대해 방금 말씀드린 지원병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만, 더욱이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추어 본적지 도지사의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우선 첫째로 학력에 대해 수업연한 6년의소학교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자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이는 ‘내지’에서 의무교육이 행해지고 있어 당연한 결과입니다.
다음에 가정 자산에 대해 본인이 없는 동안 일가의 생계 및 가사에 지장이 없는 자가 아니
141) 탄약, 식량 따위의 병참 물자의 운반·보급을 담당한 구 육군의 병과.
면 안 됩니다. 물론 본인에 대해서는 입영 후는 물론, 훈련소에 입소하면 훈련소 내에 숙박하게 되고 식량은 지급되며 모자, 양복, 구두 등은 대여되므로 특별히 대단한 비용을 요하지는 않습니다. 다
음에 사상 견고로써 정신에 이상 없는 자일 것을 요합니다. 군인 생활은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생사를 울타리로 자주 곤고결핍(困苦缺乏)에 견뎌야 하므로 상당한 맹훈련이 행해집니다만, 이를 극복할 정도의 굳센 자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 밖에 범죄를 범해서 중형에 처해졌거나, 본인 또는 친권자가 파산자로 복권을 얻지 못한 자 등은 자격이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이상과 같고, 방금 마침 제1회에 채용될만한 400명에 대해서 원서를 접수하고 있습니다.
지망자는 오는 4월 10일까지 본적지 소할(所轄) 경찰서에 원서를 제출하면 됩니다.
본적지 외에 거주하는자 예를 들면 다른 도에 있다든가, ‘내지’ 또는 만주, ‘북지(北支)’142)에 있다든가 하는 사람도 물론 출원 할 수 있습니다만, 모두 원서는 본적지 소할 경찰서에 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본 제도 발표 이후 훈련소에 관한 규칙에 따르지 않고 총독부라든가, 혹은 육군이라든가, 헌병대, 경찰서 등에 원서를 내신 분도 모두 이번 규칙에 따라 다시 재 출원할 필요가 있으므로 주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출원자에 대해서는 본적지 또는 주소지 소할 도지사가 신체검사, 구두시험 및 소학교 졸업 정도에 따라 국어, 국
사 및 산술 세 과목에 대해 학과시험을 행하고, 그 전형에 합격한 자에 대해 6월에 입소하는 전기생과,12월에 입소하는 후기생으로 구분하여 소요 수를 훈련소장에게 추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각 도지사로부터 전기생으로서 추천되어진 자에 대해서는 훈련소장은 6월 초순 신체검사를행하여 채용자 200명을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위 채용자는 6월 15일에 훈련소에 입소하여,11월까지 훈련을 받으면 그 졸업 전에 조선군 사령관은 거듭 신체검사 및 학과시험을 행하여 병적 편입처분을 행하고, 이에 비로소 지원병으로서 보병 현역병에 편입되는 것으로 결정하면, 12월 10일에 소정의 연대에 입영하게 됩니다. 또한 후기생 200명은 동일 수속에 의해 12월 1일에 훈련소에 들어가, 다음해 5월까지 훈련을 받고 6월 1일에 입영 또는 소집됩니다.
우선 대체로 이상과 같습니다만, 금년은 생도모집 공시와 원서 마감 날짜 사이에 여유 날짜가 없으므로 지망자는 신속하게 경찰서에 문의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번 조선에 본 제도가 시행되어진 것에 관해서는, 완전히 획기적 일대 영단(英斷)이 됨으로써, 내외 식자 사이에서는 이상한 관심을 가지고 이 실적 여하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금일 조선신궁을 비롯해서 각 신사의 대전(大前)에서 엄숙하게 봉고제가 거행되었고, 도처에서 축하 모임이 아주 성대하게 개최되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현재와 같은 사변 하에서는 지망자는 극히 근소할 거라는 예상을 하는 자도 꽤 있습니다.
단 저는 어디까지나 반도민 다년의 요망했던 점을 돌아보고 또한 이번에 발로된 애국열을 헤아려서, 오히려 본 제도 시행이 늦어진 것을 증명할만한 사실이 잇달아 나타나본 제도의 실시를 계기로 다른 중요한 수많은 숙제가 순차적으로 해결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본 강연을 끝마치겠습니다. (4월 3일 DK에서 방송)
<출전 : 朝鮮總督府內務局長 大竹十郞, 「志願兵制度の施行に際して」,'ラヂオ 講演講座' 제3집, 1938년 5월, 2~6쪽>
142) 일제시대 중국 북부를 차별하여 쓴 말.
2)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綠一郞), 후방보국강조주간에 즈음해서
-후방보국의 대임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1
오늘 경사스러운 ‘천장절(天長節)’143)을 중심으로 해서 국민정신총동원, 후방보국 강조기간이 행해지고 ‘전선(全鮮)’
144)에 걸쳐 각종 민간단체의 자발적 참가 하에 이 운동이 행해지고 있음에 즈음해서 저도 한 마디 그 취지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사변(支那事変)’145) 이 일어나고 어느덧 10개월을 경과했습니다. 요전 날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황군’은 육지에, 바다에, 하늘에, 본래의 면목을 발휘하여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위대한 전과를 획득한 것입니다.
필경 이 전선 장사(將士)의 용맹과감, 유악(帷幄)146)에 있어서의 작전 우수, 후방을 맡은 국민의 단결―그들 요소가 딱 일치한 결과에 의한 것이어서 그 커다란 힘의 원천이 하나로 ‘천황폐하’의 능위로 발하는 까닭을 헤아리곤 새삼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받았습니다.
바야흐로 ‘황군’의 점거지역은 ‘북지’ 오성(五省) 외에 ‘중지(中支)’의 삼성(三省)에 걸쳐 일본 전국에 더욱이 홋카이도를 합쳤을 정도의 넓이라고 하는 그 지역에는 일본과 손을 잡고 만주국과 사이좋게 지내며 동시에 동양 평화를 도모하는 것을 취지로 하는 세 개의 정권이 조직되어, 우리나라의 협력 하에 건전한 발육을 시작했습니다.
실로 동양의 역사가 여기에 일변하려고 하는 엄숙한 사실을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이고, 진무 조국의 대 이상으로 보였습니다. 「팔굉(八紘)을 덮어서 우(宇)로 삼고 싶구나」 라는 말이 동아시아에서 생생히 실현하고 있는 것을 이 또한 커다란 감격으로써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의미를 갖는 바의 사변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직 진행 중도에 있는 것이고 이미 일단락 지어진 것도 아닌가 하면, 종국이 보이기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이를 전선에 관해 바라 본다면 ‘황군’은 황하 선과 진포(津浦) 철도를 진압함에 따라서 무한(武漢)147) 압박의 형태를 갖추고 전사(戰事)는 여기에 제1단에서 제2단으로 이행을 보이는 정세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또한 상대방의 지나군은 이제까지의 전투로 도처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고는 말씀드리지만, 더 상당한 병력을 거느리고 항전 태세를 계속하고 있으며, 장정권(蔣政權)의 재정 상태도 악화의 일도(一途)를 겪으면서도, 필사의 힘으로써 더욱 결사적인 항전을 계속해 가는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지나에 관계있는 제 삼국의 동향에 있어서도 유럽 정세의 변화에 따라, 과거의 어느 시기에 있어서 보다도 표면 완화를 본 느낌은 있지만 2·3 방면으로부터 하는 무기 제공과 같은 경우 여전히 장정권 응
143)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의 ‘천황’의 탄생일을 일컬음.
144) 전 조선의 의미.
145) 중일전쟁.
146) 작전을 짜는 본영, 또는 참모.
147) 중국 양쯔(陽子) 강과 한수이(漢水) 강이 합쳐지는 곳에 있는 도시.
원 의도 하에 계속되어지고, 국가에 따라서는 장기전에 의해 일본 국력이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점차 감모(減耗)해 질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조차 엿볼 수 있는 것이어서, 이 표면적인 면도 있는가 하면 이면적인 면도 있는 복잡한 국제적 동향에 대해, 우리들은 조금의 방심도 있어서는 안 될 시기입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서 이러한 것들의 사정을 판단하여 국면은 바야흐로 완전히 장기전, 지구전으로 옮겨갔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고, 이 시국의 단계에 임하여 우리들 국민이 다 같이이 현실을 인식하여, 한층 커다란 각오로써 사태의 발전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자명한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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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기에 말씀드리는 커다란 각오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가짐을 의미하는가 라는 것이 됩니다만, 그것은 밖에서 싸우는 ‘황군장병’으로 하여금 실로 후고의 염려가 없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이와 같은 상태를 후방 국민 전체의 책무로서 유지하는 것을 완전히 달성해야 됩니다.
이미 세상 일반이 아시는 바와 같이, 근대의 전쟁은 매우 거액의 비용을 요합니다. 비용을 요한다고 하는 것은 물자를 요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무기탄약 종류뿐 만이 아니라 아마추어에게는 좀 상상하기 어려운 듯한 종류와 양에 걸쳐 물품이 준비되고 또한 소비되는 것이어서, 사변이 한(限)한다든가, 스테이플파이버148)를 목면이나 모직물 속에 혼합시킨다든가, 철 그 밖의 중요 금속류나 가솔린 소비를 제한한다든가, 잇달아 통제가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 만일 국민 대중이 그와 같은 입법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각 종류의 물자에 걸쳐 수입이 있음을 믿고 방종, 무반성한 소비로 흐른다고 하는 듯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것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한 대로 물가의 등귀를 초래하고, 국가 재정·국민 경제에 대해서 무척 유해한 결과를 미치는 것이어서, 그 심한 경우는 대전 후에 유럽 제국이 힘들어했던 소위 악성 인플레이션이 되어 국민 생활이 내부에서 붕괴하는 듯한 위험한 경우에 이른 사실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독일은 구주대전 때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졌다”고 일컬어졌습니다. 전선에서는 항상 승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물자 결핍, 물가 등귀 때문에 국내의 사상이 동요하여 국력전에 지는 원인을 만들었던 것 입니다.
오늘날 우리 국민이 전선에서 싸우는 장사(將士)에게 후고의 염려를 없게 하고, 빈틈없이 안을 보호하는 임무는 주로 이런 의미에 관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경우 전 국민이 마음을 합해, 수입품이나 군수품 관계물자를 중심으로 소비 절약에 힘쓰고, 그리하여 군수 조달의 원활을 도모하고, 물가 등귀를 방지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일반 상식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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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이것을 금전 방면에서 생각해 보면, 정부는 금년 1년 동안에 대충 50억 엔의 공채를 내었고,1개월 당 4억 엔이라는 현금이 여러 형태로 민간에게 흘러나오게 됩니다만, 국민소득이 되어야 할 그
148) 인조섬유를 짧게 잘라 양털이나 솜과 같은 모양으로 정제(精製), 방사(紡絲)한 섬유.
적지 않은 부분이 저축으로 향하지 않고 구매력이 되는 경우는, 거기에 물가 등귀와 공채 불소화를 함께 초래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지금은 군수품 관계의 산업을 중심으로 그 영향을 받는 부분의 경제계에는 활발한 경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어서, 그 일면에는 염려해야 할 벼락부자 같은 풍조까지 발생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시국에 의해 급격하게 소득 증가한 사람들이 호운(好運)을 만나게 된 듯한 기분으로 점점 돈을 물 쓰듯이 쓴다고 하는 따위의 경박한 풍습이 생기면, 국가사회는 극심한 악영향을 받습니다.
우리 조선에서는 군수산업의 인기인 중공업이나 기계공업의 발달이 뒤쳐지고 있기 때문에 소위 전시경기 현상은 ‘내지’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그러나 지하자원 개발이 낳은 광산경기를 비롯하여,총독부 예산의 팽창, 조선군 하에 있어서의 군수 조달 등 각 ☐의 사정에 따라서 시국의 호(好) 영향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시국 관계로 새롭게 소득이 증가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증가한 부분에 대해 국민으로서의 진중한 고려가 바람직한 것입니다. 즉 내가 번 돈이니까 내가 마음대로 쓴다고 하는 듯한 개인 본위의 생각이 아니라, 만일 그와 같은 태도로 국민 누구나가 사치스러운 소비에 빠진다면 어떠한 결과가 국가사회에 이르고 나아가서는 전국(戰局)에 어떠한 작용을 미치겠는가를 숙려하여, 그 부분을 가능한 한 저축으로 향하는 것이 후방 국민의 마음, 해야 할 임무인 까닭을 알아 주기 바랍니다.
또한 사람의 습관으로서, 한 번 높이 끌어올려진 생활수준은 훗날 그 부득이한 필요에 의해서라도 좀처럼 갑자기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주대전 후 불경기가 내습했을 때, 전쟁 벼락부자 일행이 하루아침에 몰락하여, 그 중에는 생활의 길을 발견하지 못해서 자살을 행한 사람까지 몇 사람인가 있었던 것을 저는 기억합니다.
지금 시국에 혜택을 받고 있는 산업이 전후에 갑자기 위축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부문(部門)의 여하에 따라서는 부진에 빠지는 것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시국 하에서 호경기를 구가해 가고 있는 방면의 사람들에게는, 깊이 장래도 생각하여 사치스러운 풍습으로 흐르는 것을 피하고, 그 생활수준을 무턱대고 끌어올리지 않게 유념하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봉급생활자를 비롯하여 시국에 의해서 조금도 소득을 증가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물가 등귀 때문에 사실 상 감수(減收)된 사람들도 적지않게 존재하고, 이 사람들은 절약저축 따위는 아마도 인연이 멀다고 하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을 거라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그 경우에도 더욱 한 걸음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겠죠.
지금은 어떠한 시국인가, 그것은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국을 보아도 국제관계를 보더라도 더욱 보다 중대한 사태를 대비해서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때입니다. 평시가 아니고 전시입니다.
전장에서는 밤낮으로 우리 장병은 위험에 몸을 드러내어 일사보국(一死報國)의 분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안에 있는 국민만이 평시의 소비생활 그대로를 지속하며 충분하다든가 부족하다든가 하고 있을 수 있는 시기가 아닙니다. 마땅히 전장의 장병과 함께 난고(難苦)를 나누어, 이 성전종국(聖戰終局)의 승리를 제패하는 결의 하에 후방 국민의 당연한 임무인 소비절약과 저축에 힘써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물며 이런 것들은 국민된 의무를 완수함과 동시에 그 사람 자신의 생활은 방만(放漫)을 정리하여 견실해지고, 불시의 경우에 처해 동요하지 않는 근저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시국 이후 국민의 애국심을 증명하는 바의 수많은 미담가화(美談佳話)가 우리들의 귓불을 자극시켰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빈자(貧子)의 일등(一燈)’149)이라고 일컬어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행한 것이야말로 귀하고도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설사 얼마 안 되는 것을 절약해서라도 저축을 명심함이 애국의 길을 필적한다는 것을 일반이 이해하지 못했다면 반드시 이상(異常)의 성적이 보여 지기를 저는 믿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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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소득의 증가 부분이나, 소비의 절약에 따라 저축된 것이, 혹은 은행이나 금융 조합의 예금이 되고, 우편저금·간이 생명보험 등이 되고, 그것이 모여서 공채 소화의 원천을 형성하게 되어, 그것이 혹은 병기탄약의 제조능력, 그 밖에 군수 관계의 생산력 확충 자금으로 변해서 전시 경제가 순조롭게 조달되게 되는 것이어서, 대장성(大蔵省)150)에서는 1년에 80억 엔을 목표로 국민저금의 장려에 착수하게 된 상황입니다.
이 중 공채 소화에 약 50억 엔, 생산자금에 약 30억 엔이 돌려지게 되는 것이고, 이와같이 정부에서 방출된 거액의 돈이 한 번 국민의 품에 들어가서 그 대부분이 종래 이상의 구매력이 되지 않고, 저축의 형태로 중앙은행으로 환원되어 공채 소화에 향해진다고 하는 상태가 반복되어지는 한,현재 정도 즉 1년에 5·60억 엔 정도의 전비(戰費) 지출은 그것이 몇 년 계속되더라도 우리 국방이 축날 걱정은 없습니다.
지나 측 또는 제 삼국은 우리나라 재정 경제의 평시에서의 상태로부터 관찰하여, 일본이 전쟁을 일년간 계속할 수 있는지 어떤지의 여부를 의심하여, 전국을 장기 소모전으로 유혹함에 따라 일본을 경제적인 고경(苦境)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 같습니다. 즉 일본에서의 국민정신총동원으로써 하는 재정경제의 전시체제가 어떠한 위력을 발휘하는가를 완전히 계량할 수 없었던 점에 커다란 착오가 있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우리 국민이 진정으로 거국일치, 정부 소정의 방침에 따라 절약 저축으로써 물건의 양질을 경계하고, 전에 말씀드린 것 같은 태도를 일관한다면, 장기 지구전은 우리나라에는 아무런 통양(痛痒)을 느끼지 못하고 곤란한 것은 지나 측이고 점점 더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에 반하여, 국민이 비상시 재정경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치·낭비의 풍습에 빠져 저축을 게을리 하는 경우는 물가 등귀를 초래하고, 해외 수출의 조건을 악화시키므로 국제 신용이 저하하여 현재의 환시세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중요 수입물자의 매입가격이 높아지는 결과, 국내에서의 노동 임금의 등귀와 함께 생산비가 높아 진다. 그것이 또한 과장된 물자 등귀의 원인이 되는것입니다.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서로 순환적이 되어, 소위 악성 인플레이션을 이끌어오는 사정이어서,지나 측이나 그 밖의 남을 해치려는 제삼국이 생각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요컨대 우리국민은 지금 신중히 분별해야 할 시기에 임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일개 년 5·60억 엔의 전비(戰費) 지출은 몇 개년 계속되어도 아무런 두려워 할 바는 없지만, 단지 전국민이 마음을 다잡아, 절약과 저축을 힘쓰지 아니하면, 생각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습니다.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국민 경제라고 하는 것은 주로 국민 각 가정의 단위로 성립되고 있는 이상, 이를 실행하는 것은 우선 가정이 아니면 안 됩니다. 다른 많은 가정에서 실행되는 것이므로 자신의 가정 한집 정도가 무엇을 하더라도 대국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하는 식으로 무례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
149) 가난한 자의 정성어린 하나의 등은 부자의 허영에 찬 만의 등보다 낫다는 말.
150) 국가예산의 편성, 재무, 통화, 금융, 증권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 국가의 행정기관.
는 사람들이 많은 때에는, 애써 국가를 안전하게 하는 취지를 달성함이 곤란해지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전 국민이 애국의 정성으로써 결부되어, 함께 마음을 합하여 어떤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그런 영세(零細)한 것이 모여서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되는 까닭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이번 후방 보국운동으로 지도자가 되고 또한 실행자가 되신 각 단체 분들의 노력에 감사하는 바입니다.
그와 같은 것은 관청이 일편의 명령을 내어 장려하는 것보다도 민간 식자 여러분들이 민중의 선두에 스셔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유의의하고 동시에 유효한가는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더구나 이들 실행 요목은 결코 일시의 것으로 한정되지 않고, 이 주간으로써 기를 수 있는 생각습관을 시국이 계속되는 한, 영구히 지속되지 않으면 안 될 성질의 것이므로, 지도적 입장에 계시는 각단체의 분들에게 있어서도, 금후에 일관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당국이라고 하더라도 혹은 입법 수단, 혹은 교화적 수단에 의해서, 반도에서의 경제태세의 만전을 기하는 것입니다만, 관민 단결하여 중대한 후방의 내용을 정하는 의재(意在)에 있어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점차 민간 측 단체를 중심으로 해서, 추상적 제목보다 구체적 제목으로 이동하여 강조하고 계속되기를 바람직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제1 착수로서의 본 주간의 행사가 전조선에 걸쳐, 현저한 성적을 보일 것을 바라며, 또한 믿는 바입니다.
(4월 29일 관저로부터 중계)
<출전 : 政務總監 大野綠一郞, 「銃後報國の大任」, 'ラヂオ講演講座' 제4집, 1938년 6월, 2~8쪽>
3)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역사상으로 본 내선(內鮮) 관계
문학박사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1
이번에 총독부의 의뢰로 반도 각지를 순회강연하며, 어제 이쪽에 도착했습니다만, 총독부로부터 부여받은 강연제목은 「역사상으로 본 내선 관계」라는 것이었는데 전 이 제목을 받았을 때, 의문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전에 재선(在鮮) 15년에 이르고, 이쪽에 있었을 때, 선배나 동료와도 서로 얘기하며 내선일체라고 하는 것이나, 내선융화라고 하는 것은 이미 제창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한결같이 나아가야 한다고 한 적이 있고. 더구나 지금 또한 새롭게 이런 문제가 나에게 부여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렇게도 여겨집니다만, 깊이 생각하면 바야흐로 우리나라는 유례없는 사변에 조우하여, 동아 신 건설에 노력해 가고 있기 때문에 한층 내면적 결속을 필요강화하지않으면 안 됩니다.
총독부는 이러한 준비 하에 위와 같은 제목을 나에게 부여하셨을 것입니다.
즉 융화 한 후에도 한층 더 융화하고, 일체가 된 후에도 더욱 일체의 강화발달을 구하려고 하는 공작임에 틀림없다고 이렇게도 생각한 것입니다만, 더욱 걱정이 된 것은 이쪽 반도의 역사교육의 현상, 즉 내선관계 역사에 대해서의 인식이 어떨까 입니다. 이것이 과연 제대로 진전되고 있는 건가, 당국의 요구에 부합하는 것인가, 사변은 바야흐로 신 단계에 들어가고, 우리 일본의 지위는 한층 더 앙양해가고 있는 동시에 역사교육 또한 신 전개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번 본 부(府)의 계획 중에 이와 같은 의미가 동반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여쭙지 않겠습니다만, 저는 이 한 가지 사항을 특히 우려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관찰 하에 부여된 바의 제목의 강연을 해온 것이므로, 내용은 극히 평범하고, 또한 새로운 학문상의 문제와 같은 경우는 한 가지도 문제 삼아 보려고는 하지 않고, 문제 삼은 것은 현 신단계에 따라야 할 각오라고도 해야 할 방면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즉 제가 서술한 바의 재료는 학교의 학생 등이 교문을 떠나서 재학 중의 ‘노트’를 꺼내어 복습한다고 하는 정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복습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논어의 서두에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고도 되어 있고, 대성(大聖) 공자(孔子)까지도 시습(時習) 즉 때때로의 복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잠시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2
대개 오랫동안 다른 ‘코스’를 취한 바의 민족사회 융화라고 하는 것은, 문화교류를 필요로 하고, 그 교류의 정도에 따라 결과는 측도(測度) 되어집니다. 그러나 문화교류는 일방적이어서는 안 되고, 쌍방이 갖는 바의 문화 포합(抱合)입니다. 한쪽 편으로부터만 흐르고, 다른 한쪽 편으로부터 이에 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교류가 아니라 오히려 역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왕왕이 인식됩니다.
‘내선’의 문화교류는 어떠한 현상인가?, 그리고 그와 같은 역 효과적 불안은 없는 것인가?
저는 이런 점에 대해 반도 사회에는 상당한 걱정이 있는 것은 아닌지, 분명히 그것은 걱정 소위 오해입니다만, 그러한 현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은 어떤 작용에 의해서 생겼는지, 저로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입니다.
저는 이번 순회 중, 마침 총독부 당국에 의해 발표된 민사령 개정 건, 즉 조선의 성씨 개칭에 관한 ‘뉴스’를 읽고, 또한 그것이 어떤 형태로써 반도사회에 받아들이게 한 것인가를 주시했습니다만, 이 개정이라고 하는 것은 총독부의 진심의 배려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많은 사람들 중에는, 지금의 일본인은 황당하다, 뭐든 스스로를 좋다고 보고 타인을 나쁘다고 본다, 반도에 성이 있는 것은 고유하다.
오늘날 일본 씨명으로 따라 고유의 성을 상실한다고 하는 것은 불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본의 ‘황도(皇道)’라고 하는 것은 그런 편협한 것이 아니라고 듣고 있다는 이런 견해를 내리는 사람도 보였습니다. 물론 이 견해의 근거가 없는 것은, 이어서 진술하겠지만, 그러나 이 개정령 공표 당시의 당국 담(談)이라는 것을 신문에서 배견하자, 혹은 이런 오해, 제가 얘기하는 역 효과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여겨졌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본 부 당국은 조선 성씨는 고유의 것이 아니다, 지나(支那)의 모방임에 틀림없다, 이번 개정은 개정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환원 즉 반도 사회인이 갖는 바의 고유의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고, 그것은 마침 일본인의 씨명과 동일의 것이다, 일본인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기꺼이 개정을 강구(强求)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듯한 의미가 가해져도 괜찮은 것이 아닐까, 그런 해석이 당국 담으로서 부적당하면, 학자들을 동원해서 선전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인가? 반도의 사회에는, 역사적 착각이 다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단지 오늘날의 성씨 상만의 경우는 아니지만, 우리들 일본인은 이 착각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가 없으면 자칫하면 불필요한 역 작용을 일으킬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은 강연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상세하게 이 성씨 환원 얘기는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반도에는 뛰어난 지지(地誌)가 있습니다, 즉 본국흥지승람(本國興地勝覽)151)이라고 하여, 현재로는 몇 개 정도의 복제품도 생겼습니다. 어느 분의 서재에도 갖추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펼쳐 읽어보면, 반도의 지명에 고유의 것과 개칭의 것 두 종류가 있고, 그것은 전 반도적이라는 것으로 주의되어 있고, 그러나 이 고유의 것과 개칭 그것과의 사이에는 전혀 별개의 표현이 있는 것에는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례를 들면 이 경성에 가까운 곳에 수원(水原)이 있다. ‘스이겐’ ‘스이온’이라고 읽혀지고 있지만, 이 「승람」에 의하면, 수원은 원래 고구려의 ‘매홀(買忽)’ 즉 ‘마이고홀(マイゴホル)’이었다.
이것을 의역하면 ‘수촌(水村)’과 ‘수역(水域)’이라든가 하는 것이고, 그들 한식(漢式)의 수원으로 개칭한 것입니다.
함경북도에 경성(鏡城)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것도 「승람」은 고유명으로서 ‘수즉고(水卽古)’라고 하고 있고, ‘수즉고’는 즉 여진어(女眞語)의 ‘경(鏡)’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중에 ‘경성’인 한식문자로 개작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저 한 예입니다. 이렇듯이 반도에는 도처에 이런 고유명이 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개칭하고, 오로지 한토(漢土) 즉 지나(支那) 식의 명칭을 채용한 것은 어떤 정세였던 것인가?
저는 이런 추세는 신라 통일 전후 즉 진(陳) 수(隋)로부터 당(唐)에 이르는 동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대충 1,200년 이전이래의 일입니다만,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지나 의존의 외교방침이 위에서 결정하여, 사회인의 사상도 일반적으로 이런 공기로 은밀하게 녹아들어 바꾸어 말하면, 한문화의 완전 포로가 된 결과인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지금 이 성씨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현상은 반드시 반도만으로는 한정할 수 없습니다.
반도의 북방, 지나에 인접한 민족에게는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즉 지나의 이십일사(二十日史) 중에 「위서(魏書)」152)가 있습니다.
이것은 북방민족의 선비(鮮卑)153)의 건국인, 이 위(魏)의 역사입니다만, 이 사서 속에는 ‘관씨지(官氏志)’라는 일편이 수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씨지에는 선비 고유의 씨명과, 개칭된 한식의 성과의 대조가 신중하게 기록되어 있고, 더구나 그 개칭 연호까지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만, 조선의 오늘날의 성이라는 것도, 대개는 ‘관씨’였습니다. 단지 이쪽 문헌에는 아직 ‘관씨지’에 상당하는 것은 눈에 띠지 않습니다만, 어쩌면 그것은 신라의 경덕왕(景德王) 대 무렵부터 토인활복(土人活服)으로 우선 행해지고, 나아가서 전 반도에 행해지기에 이른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의 하나로서, 저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사를 들 수가 있습니다. 즉 고구려의 명재상 천개선문(泉蓋鮮文)의 읽는 법입니다만, 천개선문 즉 ‘가이소분’ 또는 ‘가이소문’은 이름이고, ‘천(泉)’은 성인 것, 말할 필요도 없지만, 「서기」는 천(泉)을 ‘센’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리’라고 읽고 있습니다.
‘이리’는 당시의 고구려의 국어 천(泉)에 해당합니다. 이 예로써 추찰하자면, 오늘날 반도의 사회에 가장 많은 김(金) 성과 같은 ‘금(クン)’이라든가 ‘김(キン)’이라든가의 한음으로 불려진 것은 나중 세상의
151)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오기임. 조선 성종 때, 조선 전도의 지리, 풍속과 기타사항을 기록한 책이다.
152) 중국의 정사의 하나로, 북위(北魏)에 관한 사서.
153) 중국의 이민족인 오호(五胡) 가운데 고대 북아시아에 살던, 몽골 족과 퉁구수 족의 피가 섞인 유목민족.
일이고, 당시는 ‘시라(シラ)’라고 읽은 것이었습니다. ‘기리산(キリサン)’이 아니라 시라이(白井)라든가 하는 씨명과 서로 통한다고 보아 조금도 부적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씨에 대한 것을 서술하는 것이 너무 길어졌습니다만, 제가 말씀드리며 주의 드리고 싶은 점은, 오늘날의 성씨 개정은 곧 환원이다, 개정 즉 ‘내지’와 같이 고유의 것으로 고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반도의 옛날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관한 일석(一石)은 우선 가지고 반도사회에 던져둘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 이 번 제 여행 중 지방 사람들을 만나 이런 종류의 담화를 교환할 기회도 있었습니다만,
제 견해는 쉽게 받아들여졌고, 받아준 쪽도 다수 있었던 것처럼 판단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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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문화 환원입니다만, 제가 보는 바로는, 목하 반도 정세를 배견하여, 문화상의 융화, 정신적 일체 강화라고 하는 것은 원래부터 선진인 ‘내지’ 사람들의 지도 유액에 기대해야 마땅하지만, 문화 환원의 제공을 충분히 터득시키는 것이 가장 유효 적당한 것이 아닐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종교 즉 불교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옛날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은 불교를 일본에 보내셨습니다.
이후 천 년 남짓의 오랜 이 동전(東傳)은 중단되지 않고 일본 불교는 오늘날과 같은 내용 외관을 쌓아 올렸습니다.
이 사실(史實)은 여러분이 숙지하시는 바이고, 반도 불교의 쇠태(衰態)를 일으키는 길은 단지 이 ‘내지’ 불교의 내용 지도를 전해야 하는 것도 또한 숙지할 바입니다만, 저는 이 여러분의 각오 위에 주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지’ 불교의 이입이식이라고는 해석하지 말고, 조선 불교의 환원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번에 지방순회 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은행, 저는 이것을 일본은행이라고 말해 두었습니다만, 이 은행에 예금했습니다. 그것은 얼마 안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맡긴 쪽도 완전히 잊어 버렸던 형태입니다만, 받은 은행으로서는 이자에 이자가 쌓여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의 거액에 달했습니다.
조선의 문화가 예전에 일본으로 이입된 것이 그렇습니다. 현재 ‘내선인’의 사회에 어떤 사양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자진해서 이 예금을 인출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일본은행의 점장은 빈틈없고 친절합니다.
그리고 원리금을 전부 갖춰가도 인출인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을 듣게 되어 사람들에게 왠지 모르게 쾌활한 기분이 품게 되는 것처럼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4
이쪽 반도의 역사교육은 이러한 기조 상에 놓여져야 하지 않을까요? 문화 환원입니다. 반도인은 ‘환원’에 의해서만 전도에 광명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환원’의 내용은 극히 광범하고, 물심양면하고, ‘내선만(內鮮滿)’을 통틀은 광대한 영토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저는 ‘내선문화의 환원’은 보다 한층 확대성을 갖는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14년 11월 21일 DK로부터 방송)
<출전 : 稻葉岩吉, 「歷史上より見たろ內鮮關係」, 'ラヂオ講演講座' 제15집, 1940년 8월, 2~6쪽>
4) 미나미 지로(南次郞), 시정30주년을 환영하며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금일 총독 정치를 조선에 개시한 만 3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였기 때문에 라디오를 통해 전국 여러분에게 제 감상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바야흐로 세계대전의 폭풍이 마구 포효하고 있습니다. 조선으로서도 또한 전시체제 하의 국민으로서, 여러 영향을 받으면서 작년의 대 한발(旱魃)의 고통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금년의 결실의 가을에 안심하고, 반도 2천 3백만 민중의 평정한 생활 속에서 이 기쁨의 기념일을 맞이한 것은 진심으로 감격해 마지않습니다.
금일 조선총독부에 있어서도, 엄숙한 시정기념 식전을 거행하고, 돌아가신 공로자나, 직장에서 쓰러진 사람들의 초혼제를 개최하고, 조선 개발의 공로자를 표창하는 등, 각종 의의 있는 행사를 행했습니다만, 전조선 2천 3백만 동포는 모두 상당한 감격으로써 이 날을 맞이한 바입니다.
‘일지사변(日支事變)154) 격발 이래, 반도 동포는 ‘내지’의 여러분과 함께 ‘황국신민’으로서의 마음을 같이 하고, 그것이 아름다운 애국 행위가 되어 나타난 결과, 혹은 지원병 제도, 혹은 교육 상 ‘내선’의 불차별제도 철폐, 또는 오랫동안 지나 식이었던 씨명을 ‘내지인’ 식으로 고칠 수 있는 제도 등, 여러 제도가 실현되어서, 내선일체의 관념이나 관습이 현저하게 발전해온 것은 지나간 옛날을 되돌아보고 실로 감개를 금하기 어려운 바입니다.
합병 이후, 일반 민중 사이에 자주 오해가 있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30년으로서, 현금과 같은 온화한 내선일체의 상태에 달한 원인은 무엇인가 말씀드리면, 아마도 다음 세가지 점을 주요한 것으로 들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천황폐하’의 능위입니다. 역대 정치 국(局)을 담당한 사람들, 아울러 ‘내선’인중의 선각자,지도자들의 열성적인 노력에 의한 것은 물론입니다만, 요약한 바, 조선동포에 대해서 ‘일시동인(一時同仁)’155)의 뜻으로써 임하게 하시는 ‘천황폐하’의 대 능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백인(白人)의 나라들이 그 외지의 이민족에 대한 정치 방침이, 단지 본국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을 쥐어 짜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토착민중의 지식이나 능력을 가능한 한 낮은 정도로 고정시켜 둔다는 듯한 방식과,조선의 정치는 전혀 근본을 달리 하여, 반도 동포의 지능과 행복을 하루라도 빨리 ‘내지인’과 동일의 높이로 끌어올려야 된다고 하는, 힘차고 아름다운 정신으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례를 말씀드리면, 구미인(歐美人)이 토착민을 토인(土人)이라고 부르며 자민국과 판연히 차별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일본은 조선인에 대해 우리들 동포라고 부르며 무차별로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30년 동안에 총독은 수차례 바뀌었습니다만, 통치 정신은 시종일관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입니다.
둘째는 반도 동포의 이를 받아들이는 밑바탕이 좋았던 점입니다. 아무리 정치의 정신이 선량하다고
154) 중일전쟁.
155) 한유의 「원인(原人)」에 나오는 말로, 성인이 누구나 평등하게 똑같이 사랑함을 이르는 말.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밑바탕이 좋지 않았다면 나쁜 토지에 좋은 종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내선일체는 실현되지 않을 테지만, 다행히도 반도 동포의 대다수가 순량(純良)하므로, ‘폐하’의 뜻으로 나오는 정치 정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자진해서 ‘황국신민’이라고 하는 생각이 해마다 번성해지는 것이 유력한 이유의 하나입니다. 이 경우 조선민족이 야마토(大和)민족156)과, 옛날부터 혈통의 흐름과 문화의 흐름을 같이 하고 있는 역사의 밀접한 관계가 이 기세를 도운 것은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셋째로는 만주사변에 이어서 지나사변, 그리고 이를 에워싼 세계정세에 대해 ‘내선인’과 함께 공동운명과 공동 이상을 분명히 서로 인식한 점입니다. 반도의 동포가 ‘내지’ 동포에 대해서 다른 행동을 취하는 듯한 것은, 앞으로 세계를 살아나갈 방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만, 내선일체로서 극복하고 통합만 하면, 동양에서도, 세계에서도, 일본 국민으로서 함께 커다란 이상을 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실제로 깊이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은 과거에 있어서 내선일체를 깊이 할 수 있었던 원인일 뿐만 아니라, 금후에 더욱 와야 할 40주년, 50주년을 지향해서 내선일체를 더욱 더 강행해 가는 소임을 맡아, 우리들의 노력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선에 거주하는 ‘내지인’의 수는 약 65만 명입니다만, 반도인이 ‘내지’에 거주하는 자는 약100만, 만주에 있는 자가 약 120만 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만, 이들 ‘내선인’이 섞이는 곳에는 언어나 풍속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오해 등도 일어나기 쉽고, 또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서로 감화나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일본국민이 일억일체(一億一體)가 되어 대동아를 건설해야 할 때라는 것을 자각하여,‘내선인’ 다같이 함께 깊이 스스로를 반성하고, 적어도 이 일체 관계를 오해하는 듯한 언동을 삼가며,일시동인의 성지(聖旨)에 따라 드릴 수 있듯이, 실로 일가족 내의 형제 동포로서 서로 손을 잡고 ‘황국신민’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특히 이 기회에 내·외 여러분에게 유의를 부탁드려 두고 싶은 점입니다.
합병 시에 태어난 조선의 아기는 오늘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국가의 봉공에 힘쓰고있습니다.
이 늠름한 청년 조선의 면목을 상상하시기 바라며 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10월 1일 총독부 관저로부터 전국중계)
<출전 : 朝鮮總督 南次郞, 「始政三十周年を迎ヘて」, ꡔラヂオ講演講座ꡕ 제16집, 1941년 1월, 2~4쪽>
156) 이름의 유래는 일본에서 4세기에 존재했던 야마토 시대에서 따왔으며, 일본인을 구성하는 주된 민족을 일컬음.
11. 기타
1) 홍양명(洪陽明),157) 동경기행 -조고자대회(操觚者大會) 보고로서
[1-1]
동경기행 -도중견문기(途中見聞記)
조고자대회 보고로서
(1) 동경(東京)에서
홍양명
☐☐ 동인제형(同人諸兄)! 6일 사명에 따라 동아조고자간담회(東亞操觚者懇談會)158)에 출석하기 위하여 만주국내 각 신문잡지대표 30여 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신경을 떠나 동경(東京)에 오게 된 것은 나 혼자서 일에 억매이지 않고 상당한 장시간 전시하 내지(內地)159)의 풍물에 접하게 되는 기회를 독점하는 것이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물론 나는 이미 3년간이나 동경 생활을 경험한 사람이지만 동경을 마지막 떠난 지가 벌써 12년이나 되었음으로 이미 기억조차 희미하였던 것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있으나 그 전과 상모(相貌)160)를 전혀 달리한 대(大)동경에 대하여 10여 년 간에 전변된 그 전과 아주 다른 별개의 현재의 나의 인간 척도(尺度)를 가지고 지금의 동경을 본다는 것은 호랑이 담배 먹는 식의 관찰이 될 터이나 기왕 온 ☐☐☐와 아울러 과거의 사람의 현재의 동도견문기(東都見聞記)를 약간 써 볼까 합니다.
다분히 고색창연한 회고적인 보고가 될지 모르지만……
애애(皚皚)한161) 빙설(氷雪)이 자욱한 남만평야(南滿平野)를 지나 어둠속에 반도(半島)의 강산을 스쳐 지나고 한 길로 동경까지 온 길은 자고 먹고 단원들끼리 떠들고 하여 문자 그대로 엄벙덤벙 여행이었으므로 특히 느낀 것은 없다. 부산에 도착하기 전 몇 시간의 낮에 본 철도연선의 풍물은 상상하듯이 참담한 것이 아니었음은 다행한 일이었다.
작년 가뭄피해가 가장……(판독불가)……도(道)의 철도연☐☐☐☐는 수해 상습지로서도 유명한 곳으로 낙동강의 치수(治水)공사(工事)는 조선 내 치산치수사업 가운데의 백미(白眉)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해와 가뭄 재해가 빈번한 곳이건만 빈민구제를 겸한토목(土木)과 사방공사(砂防工事)의 ☐☐적 진행으로 연선(沿線)의 도로는 완벽에 가깝게 되고 헐벗었
157) 홍순기의 필명.
158) 조고자(操觚者) : 문필에 종사하는 사람 즉, 신문․잡지의 기자, 편집자, 평론가, 문필가들을 일컫는 말.
159) 일본을 뜻함. 이하 일본으로 고침.
160) 얼굴의 생김새, 용모.
161) (서리나 눈 따위가)희고 흰 모양.
던 산야는 어디나 거의 나무가 심어져 수해에 대한 영구적인 방지책은 힘 있게 집요하게 기반을 세운듯 하며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생활고에 시달린듯하면서도 부지런히 작업하고 힘 있게 살아 가려는 사정이 역연히 있는 ☐☐☐☐☐☐☐☐☐☐☐☐ 초라한 흰 저고리 검은 치마에 장을 보려고 연선(沿線)으로 나온 듯한 농촌모녀가 열차가 지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죄 없이 순수한 얼굴을 볼 때 가뭄재해(旱害) 지대의 농촌 광경이 생각되어 나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부산 잔교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에 한두 번 늦어지지 않는 것은 오히려 예외가 되듯이 승객홍수로 두통을 앓고 있는 중이다.
만지대륙(滿支大陸) 왕래가 엄청나게 대량적으로 증대된데 더하여 조선인의 노동 이민(勞動移民) 내(內) ☐☐☐☐☐☐☐☐☐☐☐☐ 정원의 ☐☐환(☐☐丸)이 3천 명을 태우건만 그래도 타지 못하여 한 선편(船便) 두 선편을 돌연히 배타기 위하여 기다린다는 현실은 대륙발전의 방향을 가리키는 기뻐할 지표이며 생장하던 고민(苦閔)이라고 할 것이다.
국체(國體) 여행(旅行)이라는 호위(虎威)162)를 빌려 용이하게 발☐(發☐)한 나는 오랜만에 한계를 대해(大海)의 ☐☐한 정신에 살리고자 시모노세키(下關)까지 8시간을 거의 갑판(甲板)위에서 보내었다.
반내륙(半內陸)인 만주국내의 끝없는 대지에서는 감상할 수도 없는 ☐☐의 큰 바다의 광파만경(廣波萬頃)은 우주(宇宙)의 새 정기를 머릿속에 주입☐☐☐☐☐☐☐☐☐☐☐☐ 수조(水鳥)들이 유유히 놀고 있는 하얀 대파(大波)의 포말(泡沫)
사이를 용솟음쳐 뛰어오르는 비어(飛魚)의 도약(跳躍)은 문자 그대로 생명의 약동(躍動)을 상징함과도 같이 바다의 자연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풍물시(風物詩)이다.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차를 타고 밤사이에 동해길(東海道)을 거쳐 아침에 후지산의 설봉(雪峰)을 멀리 쳐다보면서 정원(庭園)과 같이 아름답게 규모 있게 잘 경작되고 잘 정리된 연선의 ☐있고 푸른 배추까지 있는 초춘(初春)의 정원 풍경을흠뻑 만끽(滿喫)하면서 8일 오후 동경역에 도착하였다.
<출전 : 洪陽明, 「東京紀行 -途中見聞記」, '滿鮮日報', 1940년 02년 16일>
[1-2]
동경기행 -긴자풍물첩(銀座風物帖)
조고자대회 보고로서
(2) 동경에서
홍양명
문화인의 대부분은 농촌과 ☐☐☐☐☐☐ ☐☐의 성과에 기생하는 소비군(消費群)이라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문화재의 생산요소로서의 존귀한 가치도 없이 약간의 기계적인 정신노동을하고는 어떻게 인생을 빠르게 살찌게 지낼까하는 ☐☐한 꿈을 꾸고 다시는 인간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 대도회(大都會)이다. 대도회의 규모가 5면을 ☐뜩☐리한 회색(灰色)의 꿈도 크다. 그러므로 말하
162) 권세있는 사람의 위력.
길 지금 580만 동양 제일의 메트로폴리스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클로즈업된 대동경(大東京)이 홀로이 예에서 빠질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부허(浮虛)한 소비(消費) 문화의 대표적 전시장이 긴자(銀座)163)이다.
나는 대동경(大東京)의 생산측면을 먼저 보는 것이 본질적인 관찰인 줄을 알면서도 역시 소비적 요소(要素)의 하나의 분자에 지나지 못한 나의 발은 동경에 도착하자마자 제1착으로 소비 전시전으로 첫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구제할 수 없는 창백(蒼白)한 약점이지만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정직한 고백이다.
소위 ‘오피스타임(office time)’이거나 ‘러시아워(rush hour)’가 된 후 어깨와 어깨를 마주치고 긴자(銀座)로 몰려나오는 남녀대군의 각양각색(各樣各色)의 복장과 그 걸음걸이와 용모를 보면 ‘몸빼’를 입고 일을 하고 있는 농촌부인 국민복을 입고 굳건한 국민체조(國民體操)에 시국인식을 머리에 가득 담은 농촌중견청년의 그것과는 정확히 180도의 방향에 있는 듯하다. 그들의 복장 대부분은 남녀를 불구하고 양장(洋裝)인 것은 물론 될 수 있는 대로 첨단(尖端)적이라는 것이 ☐☐의 ☐☐이 되어 있는 듯하다.
아메리카적인 것, 파리적인 것 또는 남미적인 것 모든 것 가운데의 최고의 것이 고☐(考☐)될 것이다.
여자들은 대담한 메이크-업으로 뽐내고 있다. 그들 가운데 또는 일부 소수의 걸음걸이는 건국체조(建國體操)적인 것보다도 ‘탱고’의 스텝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물론 빛과 음향(音響)과 사람의 옷과 ☐작(☐作)이 운연(運然)한 어조(語調)를 이루어 도시의 미관을 더하는 것은 저주(咀呪)할 일이라기보다도 바랄 일이다.
그러나 내가 본 긴자(銀座)의 풍경은 이 중대 시국 하에 있어서는 조화되지 않는 듯하다.
특히 중성화적 경향이 눈에 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포-즈’를 한 사람들이 간간히 보인다.
물론 나의 관찰은 ☐☐이 있을지 모른다. 오랫동안 대도회에서 떨어져 있던 반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긴자 소비문명이 주는 인상은 침정(沈靜)하고 사색(思索)적이고 윤리적인 동양적인 것에서 광☐(狂☐)하고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서양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모던 남녀의 구매욕을 도발시키는 ‘대파트’164)의 모든 ☐☐스러운 것들의 진열의 미(美)-! ☐화(☐化)한 콘크리트 고층건물들의 역학적 선과 면과 대조의 미(美)! 네온 간판에 써있는 영(英), 불(佛), 독(獨) 각국어의 첨단적인 칭호! 이곳에는 좋게 말하면 세계문화가 즐펀히 혼선교통(混線交通)되고 있다. 물론 ☐거주의(☐居主義)에서 이문화도입주의(異文化導入主義)로 전환한지 한 세기도 못 되어서 서양물질문명을 완전히 흡수(吸收) 저작(咀嚼)165)하여 이제 이르러서는 불순한 서양문화의 정신적인 부분은 공제(控除)되고 있는 ☐☐한 일본문명의 척도에서 볼 때 이러한 도회의 회색(灰色)의 감(堪)이 부허(浮虛)한 것이든 서양 모방(摸倣)이든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뿐 아니라 대도회에 이러한 회색의 감이 세기적인 광고(曠古)166)의 성전하(聖戰下)임에도 불구하고 의연히 명랑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은 일본제국의 국민생활의 풍속(風俗) 정정(緽緽)한 것을 가리키는 바로미터로써 기뻐할 일이라고도 한 것이다.
그뿐이랴? 이러한 완전히 서구화한 듯 한 거리의 생활풍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일본적이 것이 국민생활의 일
체의 위에 확고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더욱 미덥고 경복(敬服)할 일이라 할 것이다.
163) 일본 도쿄(東京) 주오구(中央區) 남서부에 있는 고급상가이며 유흥가. 일본 도쿄 주오구 남서부.
164) 백화점을 뜻함.
165) 음식물을 씹음.
166) 전례가 없음. 만고에 없음. 미증유(未曾有). 공전(空前). 전대 미문(前代未聞).
☐☐을 하고 ‘아이-샤도우’를 하고 눈썹을 다 뽑아버린 ‘맷드리히’식(式)으로 그린 양장 모던 걸과 중성화한 첨단남아(尖端男兒)들의 일단이 머리를 숙여 이중교(二重橋)167) 앞에서 경건한 태도로 유구(悠久) 2천6백 년 연면(連綿)168)한 기원가절(紀元佳節)을 축하하고자 머리를 수그리고 황거(皇居)를 통과하는 광경을 나는 11일 날 이중교 앞에서 배견(拜見)하였다. 아마 ‘대파트’의 점원들인 모양!이들 선남선녀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단원이나 ‘하찌마끼’169)를 한 소방원에 비하여 경조경신의 관념이 더 강한지 약한지 이것은 아마 영원의 수수께끼가 되겠지만 어느 쪽이나 집에 돌아가면 똑같은 가미다나(神棚)170)가 있고 황국신민이라는 자만심과 기대가 있는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특수한 프롬나드(散步)로(路)인 긴자(銀座)의 피상적인 소비면만 보고서 지금의 동경문명을 운운하는 것은 돌☐다고도 생각된다. 일본의 근대문명을 체☐(體☐)한 ‘헤른’씨가 O[ADOPT의O-심택(深擇)], A[ADAPT의 A-적응(適應)], E[ADEPT의 E-숙달(熟達)] 문명이라는 약자(略字)로써 세계문화를 널리 채택 도입(導入)하여, 일본적 성격에 적응시키고 다시 숙달된 신문명이 일본문명의 특질이라고 한 말은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수긍된다. 밤이 되면 긴자(銀座)도 죽은 듯이 자숙자계(自肅自戒)171)의 규율이 엄수되고 물자부족의 소리가 높으나 조금도 전시하의 제도(帝都)같지 않게 긴장(緊張)하게 너무나 명랑하게 만족하게 시민생활이 시작되는 대동경의 자태에 접하여 도학자(道學者)도 못되면서 쓸데없이 큰 문제도 아닌 긴자풍경(銀座風景)만을 비방(誹謗)한 것은 나의 13년만의 동경 제1보가
너무나 감상이상의 만족한 상황이었으므로 생긴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논제 탈선한 것을 밝히고 다음부터 조고자간담회(操觚者懇談會) 중심의 견문기를 쓰고자 한다.
<출전 : 洪陽明, 「東京紀行 -銀座風物帖」, '滿鮮日報', 1940년 2월 17일>
[1-3]
동경기행 -동문(同文)의 득실(得失)
조고자대회 보고로서
(3) 동경에서
홍양명
☐☐동인(☐☐同人)제형(諸兄)! 우선 신상(身上)의 고장으로 ☐☐하여 통신(通信) 올리지 못한 태만(怠慢)을 관용하여주시고 좀 늦어진 감이 있으나 이하(以下) 이곳은 ☐건(☐件)인 조고자간담회(操觚者懇談會)의 경과를 보고하는 자유를 주시기 바랍니다.
167) 니주바시(二重橋). 일본 도쿄 황거 앞에 놓인 다리를 말함.
168) 혈통, 역사, 산맥 따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잇닿아 있음.
169) 일본어로 머리띠. 옛날, 무장할 때 머리를 천으로 감고 그 위에 투구를 씀.
170) 일본에서 집 안에 신위(神位)를 모셔 두고 제사 지내는 선반.
171) 스스로 삼가고 경계함.
간담회(懇談會)는 예정대로 광휘(光輝)있는 2천6백 년 기원절의 가절(佳節)에 일만지(日滿支)의 유력한 언론기관 관계 및 재외 방☐ 신문 관계자 대표 합(合) 2백여 명의 출석으로 흥아(興亞)의 의기(意氣)와 희망에 궁성부 대회장에서 반☐(反☐)되는 천황폐하만세의 우렁찬 백만 인의 소리와 호응(呼應) 제1일 개회의 막(幕)을 열었다.
이에 앞서 오전 9시에 간담회 참가자 일동은 일제히 궁성 이중교 앞에 참집하여 삼가 황거(皇居)를 봉배(奉拜)하고, 다음 일동은 동경에서 제공한 자동차에 분승(分乘)하여 메이지신궁(明治神宮)을 참배하고 이어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이르러 신동아건설의 인주(人柱)가 된 황군장사(將士)의 영령(英靈)에 대하여 경건한 태도로 묵도(黙禱)를 올렸다. 오후 1시 30분 동경회관에서 열린 개회식의 경우를 약기(略記)하면 식사(式辭)는 ☐☐목(☐☐木) 동경시장이 병중이므로 대리로 오쿠보(大久保) 조역(助役)이 ‘동아시국이 현재 신질서 확립의 단계에 들어선 바 선린우호의 실(實)을 거둠에는 여론의 지도자인 언론기관의 공정한 봉사가 일층 더 요망된다’는 의미의 요강이 있고 힘찬 격려로 개시되어 외상, 내상, 대만(對滿)사무국, 흥아원(興亞院) 총무장관, 만주국 대사 등의 축사가 있었고 다음 각지대표의 축사가 있었는데 총괄적으로 말하면 흥아운동에 대한 조고자(操觚者)의 임무의 중대성을 재론삼론한 것이다. 개회식이 끝난 후 일본저널리즘의 한편의 권위이며 임내각(林內閣)때인가 문부대신 물망에 올랐다가 자유주의(自由主義)란 이유로 군부의 반대를 만나 이중에 동경 조일(朝日)☐사장자리만 내놓고 쾌쾌(快快) 불락(不樂)하다가 심기일전 다시 문장보국진(文章報國陣)의 선두에 나선 시모무라 히로시(下村宏)전사와 특색 있는 문명비평가 무로부세 고신(室伏高信)씨(현 일본평론사 편집장)의 특별연설이 있었다. 시모무라 박사의 연제(演題)는 ‘동문(同文)의 득실(得失)’이라는 것인데 요지는 일본과 지나는 한문(漢文)을 사용하는 동문관계에 있으나 발음방법과 의미를 달리하는 점이 많기때문에 대체로는 서로 이해를 증진함에 편리한 점이 있는 반면 엉뚱한 착각도 생겨 ☐실(☐失)되는 경우도 있는 즉 동문인 이상 발음도 통일하고 의미도 공통되도록 함이 동아신질서 확립상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 예로써 문부성 국어심사위원(文部省國語審査委員)의 한 사람이며 언어에 대한 연구가 깊은 노박사(老博士)는 여러 가지 경우를 방인(傍引)☐어(☐語)하여 지나대표들을 위하여 통역하는 통역군의 ☐☐으로는 도저히 전체의미를 완역할 수 없는 곤경(困境)에 함입(陷入)케 하여 만장(滿場)을 실소(失笑)하게 하는 유쾌(愉快)한 장면도 있었다. 박사의 예증은 도도(滔滔) 수백 건에 일일이 소개할 수 없으나 현저한 것만을 보면 ‘동서’는 일본어에서는 동편서편(東便西便)이지만 지나어의 의미로는‘물건’이니 동문의 의미가 없고 모처럼 써붙인 ‘장병님 고맙습니다(兵隊さん有難う)’의 포스터를 지나인은 ‘병대(兵隊)가 난(難)이 있다’고 해석하니 의미통일의 필요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또 지나의 지명의 일본식용법(日本式用法)은 북경(北京)-‘뻬킹(ペーキン)’ 상해(上海)-‘상하이(シヤンハイ)’ 청도(靑島)-‘칭타우(チンタゥ)’식의 지나음 그대로의 용법도 있으나 중경(重慶)을 ‘츄우케이(チユゥケイ)’ 항주(抗州)를 ‘코우슈우(コゥシゥ)’라고 읽는 방법도 있으니 상해를 ‘죠우카이(ジヤゥカイ)’ 청도를 ‘세이토우(セイトゥ)’라고 읽어서 혼동된다면 동문(同文)의 실(失)이라는 것이다.
장개석(蔣介石)을 외국인들은 영불독어 어느 언어로나 지나어 그대로 ‘창카이식(CHANG-KAI-SITK)’172)이라고 쓰고 중경 역시 모두 지나음(支那音) 그대로 ‘CHUNG-KING(충킹)’이라고 쓰는데 일본에서는 ‘쇼우카이세키(シヤゥカイセキ)’ ‘츄우케이
172) ‘CHANG-KAI-SIK’의 오타로 다음호에 수정하였다.
(チユゥケイ)’라고 읽는 사람이 많으니 말만 동문(同文)이고 실제상으로는 외인(外人)보다도 괴리되는 점이 있으니 지명 인명의 고유명사부터라도 지나 지인명(地人名)을 지나음 대로 통일하여야 동문의 득이 되겠다는 것을 역설한다. 다음 일본어는 지나인이 배우기 쉬운 듯 하면서도 동일한 자(字)의 독법(讀法)이 경우(境遇)마다 달라지는 예가 많아서 착각하게 되니 이것도 단연 통일해야 된다는 것이다.
특히 본래의 일본어를 한자로 추후(追後)로 ‘아테지(アテジ)’173)한 것은 이 예가 심하다는 것을 예증한후 해(海)-우미(ウミ)라는 자(字)는 카이(カイ)의 음이 ☐준(☐準)인데 해삼(海鼠)일 때는 ‘나마고(ナマゴ)’가 되고 해담(海膽)174)인 경우는 ‘우니(ウニ)’가 되고 해돈(海豚)175)일 때는 ‘이루카(イルカ)’ 해표(海豹)176)의 시는 ‘아자라시(アザラシ)’가 되는 등 약 70종의 변화가 있으니 동문의 득을 획득하려면 카이(カイ)177)의 음독법으로 하여 해돈(海豚)-‘카이돈(カイトン)’ 해표(海豹)-‘카이헤우(カイへウ)’로 통일해야된다는 것이다.
선일(先日)-‘센지츠(センジツ)’의 ‘일(日)’자 음독만 아는 지나인이 일본을 ‘지츠뽄(ジツポン)’이라고 하는 데도 할 말이 없으니 적어도 일자일음(一字一音)으로 변화해야 된다는 등등 수백의 예증은 실로만장을 도연(陶然)178)케 하여 경청할 바 있었으나 너무 길어지므로 그만 소개하거니와 요컨대 결론으로 동문의 실(實)을 더하기 위하여 조고자들의 언어에 대한 단일독법촉성운동(單一讀法促成運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출전 : 洪陽明, 「東京紀行 -同文의 得失」, '滿鮮日報', 1940년 2월 27일>
[1-4]
동경기행 -언어와 개념
조고자대회 보고로서
(4) 동경에서
홍양명
다음에 무로부세 고신(室伏高信) 씨의 '일본과 동아신질서'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씨(氏)는 단상에 저돌적인 거구를 나타내자마자 연제(演題)는 주최자가 맘대로 붙인 것이라고 하면서 동아신문잡 지대표대회라고 하여 나를 잡지 대표격으로 한마디 연설을 하라고 하는 것이나 현대에 있어서 잡지의사명이야말로 건설적 창조적인 점에 있어서 너무나 평범(平凡) 속화(俗化)한 신문(新聞)보다는 훨씬 중
173) ‘당자(当字)’, 일본식 발음으로 같은 한자를 혼용하는 것.
174) 성게.
175) 돌고래.
176) 바다표범.
177) ‘海’의 음독은 ‘카이(カイ)’, 훈독은 ‘우미(ウミ)’이므로 음독으로만 읽자는 주장.
178) 도연하다 : 감흥따위가 북받쳐 누를 길이 없다.
대하므로 요다음에 이런 대회에는 잡지신문대표대회로 한 것이라고 개구일번(開口一番) 주최측을 비유하면서 대잡지기자로서의 품위 및 잡지 그것의 존재의 의의 큼을 강조하면서 완전히 청중을 리드(lead)하였다.
슈펭글러의 '서양의 몰락'을 처음으로 일본에 소개하여 '빛은 동방에서부터'를 저작하는 등분방(奔放)자유(自由)한 필치로 동양문명의 재건을 고조하고 있는 특색있는 이 문명비평가의 도도(滔滔) 수천 언(言)의 연설은 그 필치가 반☐(反☐)의 묘(妙)를 회득(會得)179)하고 있음과 같이 설왕설래 ☐환자재(☐幻自在)로 듣는 자를 황홀(恍惚)케 하였으나 요약하자면 그 복잡한 내용은 아니다.
대체로 명론☐설(名論☐說)이나 명문장이 진실로 그 표시하는 내용보다도 교묘한 문구나열의 기☐(機☐)가 인심을 파악(把握)하여 이유없이 도연(陶然)하게 하는 바 있음과 같이 언어표현기술의 대숙수(大熟手)라고도 할 무로부세(室伏) 씨의 연설은 그 방인(傍引)하는 바 널리 동서양에 대하여 일본의 고사기(古史記)를 예증하다가는 별안간 동반구(東半球)를 펄쩍 뛰어 넘어 ‘에로스신’이야기로 비약하는 등 재기종횡(才氣縱橫) 두뇌명석(頭腦明晰)치 못한 필자로는 충분히 전후관계를 연결하여 이해하려면 건우환(健腢丸)쯤이나 먹어가면서 들어야 될 지경이었으나 주의 깊게 대체의 개념을 파악하기에 노력하였다.
언어 자체는 개념의 표현형식이나 언어가 너무 발☐된 결과 언어의 교묘한 결합은 개념 그것을 뛰어넘고 무시하게까지 되어 개념 없이도 무내용한 언어와 언어가 의미있는 듯이 비약(飛躍)한다는 것은 독(獨)180)의 총명(聰明)한 대시인 괴테가 그 대작 '파우스트'속에서 ☐☐ ‘메이피스로필레스’의 입을 빌어서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있는 것이다.
개념없는 말이 제 멋대로 뛰어다니는 사회화(社會禍)는 지나친 지혜(智慧)의 인과응보가 아니냐”고 말한 말이 생각난다. 물론 무로부세 씨의 기교적인 다기다종 천☐만홍의 표현법은 언어의 자유로운 구사(驅使)에서 오는 감탄할 정도의 명연설이었으며 요약되는 내용도 지당한 말이었다.
오직 기교적인 표현법이 좀 지나친 듯한 감이 있어서 이와 같이 나의 한쪽 머리는 언어와 ☐☐만의 방향에 탈선하면서 들었기 때문에 글로 쓰는데도 이와 같이 나는 ☐☐으로 ☐☐케 된 것이다. ☐☐☐☐☐설 무로부세 씨의 이야기는 최소한도로 요약하면 “동아질서의 확립이 아시아 여러민족의 세계사적 사명이나 아직 함축이 빈약한 듯한 그 내용을 충실하고 진정한 동양평화의 대궤도(大軌道)로 지나 민중을 유인하는 사명은 정치가도 아니오 실업가도 아니오 오직 저널리스트였을 뿐이나 저널리즘은 ☐후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현대의 신문이 너무 속화(俗化) 타락(墮落)한 때문이다.
그러나 저널리즘은 역사에 선행하는 것이다. 저널리스트는 예언자가 되어야 된다. 민중의 나갈 길을 계시하는 저널리스트의 사명은 신의 섭리에서 선택된 최상급의 직업등이다.”하는 의사를 강조한 것으로 현재의 저널리즘의 실정에 불합(不合)한 이상론이었으나 적어도 조고자(操觚者)의 ☐☐을 진작하는데 커다란 자극이 될 만한 이야기라고 감명을 바 있다.
씨(氏)의 광범 착잡한 어조를 이해키 어려워 일일이 해석할 수가 없는 지나어 통역군(通譯君)이 가끔 이하는 세불상(說不上) (‘쉬부상’-말할 수 없다)이라고 비명(悲鳴)을 울리는 것은 분명히 모르는 말을 어름어름 해석하는 것 보다는 유쾌(愉快)한 인상을주었다.
간담회 제1일 일정은 이로써 마치고 밤에 동경 시장의 초연(招宴)이 있는 외에 특기할 것은 없다. 다
179) 마음속으로 깨달아서 알아차림.
180) 독일
음에 회의 제2일부터 종료(終了)일까지의 경과를 약설(略說)하기로 한다.
27일 부로 석간 1면 홍양명(洪陽明)씨의 동경기행문중 제5단 제1행 ‘쾌쾌불락(快快不樂)’은 ‘앙앙불락(怏怏不樂)’ 제6절 제12행 ‘유☐(有☐ゥ)’은 ‘유난(有難ゥ)’, 제7절 제5행 ‘SITK’는 ‘SIK’, 동 제12행 ☐리(☐離)는 괴리(乖離)의 오식(誤植)이기에 정정함
<출전 : 洪陽明, 「東京紀行 -言語와 槪念」, '滿鮮日報', 1940년 2월 28일>
[1-5]
동경기행 -요나이(米內) 수상의 인상
조고자대회 보고로서
(5) 동경에서
홍양명
조고자간담회(操觚者懇談會) 제2일 개회에 앞서 오전 9시 참가자 일동은 수상관저를 방문하여 요나이(米內) 수상과 접견하였다. 의회개회중 촌☐(村☐)가 없는 수상의 몸으로 우리들 조고자 일동을 인견(引見)하여 주신 의의는 감탄할 일이었다.
요나이 수상은 사진에서는 해군복을 입으신 것을 많이 뵈었는데 통상제복을 입으신 것을 뵈니까 국한(局限)된 군정(軍政)에서 이제는 일본제국의 대재상이 되어서 정말 사면육☐(四面六☐)로 일을 많이 하시지 않으면 안 되실 몸이 되었구나 라는 감명(感銘)을 받았다.
6척 가까이 되어 보이는 위엄에 직립불이(直立不弛) 반석과 같이 튼튼하고 믿음직한 인상을 주는 요나이 수상은, 제자들을 대하는 스승과 같은 ☐독(☐篤)하고도 엄격한 태도로 “일본의 희망하는 바는 항구한 평화상태이다. 우리들은 지금의 목적을 위하여 동아질서의 건설에 노력하고 있는데 이 이상달성에는 만지(滿支) 각국민의 협력이 필요한 바 이를 위하여는 제군 고조자 각위의 임무가 중대하다.
분려(奮勵)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힘찬 격려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 측 대표 삼명실(森名室)신문사장은 “우리 언론계대표자는 당국을 지대☐☐하여 나갈 터인데 수상이 얼마 안 가서 그만두시면 안 되겠으니 적어도 3년이나 5년은 수약(受若)하여 주셔야겠습니다” 한 즉 요나이 수상은 머리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호호(好好)☐ 같은 ☐진(☐眞)하신 얼굴로 ☐☐한 미소(微笑)를 띄신다. ☐☐☐☐ 해 보이는 바 ☐☐☐☐의 억새이면서도 ☐☐의 ☐☐이 있는듯한 일언일구는 진실로 국민의 존경을 받을만한 ☐☐과 같은 ☐☐있었다.
세계에 ☐☐한 강국대일본의 수상이라면 얼른 ☐☐과 ☐력을 ☐☐케 될 것이나 요나이수상의 ☐☐ 그렇지 않음을 느꼈다.
물론 천만인의 장 같은 당당한 감격이었다는 점에서 요나이 수상은 역대수상 중에서도 ☐☐라는 ☐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힘차게 받는 인상은 ☐☐하고 자비심있고 믿음직한 분이라는 ☐☐한 감이었다. 요나이 수상은 의회☐☐이 있더라는 등 ☐☐가가 아니시라는 말을 들으나 그 외 신념과 인격은 천만인의 ☐☐보다는 나을 듯한 친화력을 가진 듯 하였다.
본 궤도(軌道)로 돌아가 간담회 제2일의 총회는 고☐동맹통신사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간담제목으로 하나, 동아질서에 대한 협력방식에 대하여, 둘, 일만지(日滿支) 조고자의 친화연맹강화에 대하여2건 제안 설명이 있은 후 긴급동의로써 왕정위씨에 대한 ☐☐지지와 격려의 통☐을 결의하고 다음에 만주신문 주간 입신(笠神) 씨는 만주국의 언론통제가 완벽에 가까운 현상을 설명하여 동아신질서 건설에 협력하는 신신문도덕 확립의 필요를 주장하여 만주국 대표로써의 면목을 ☐☐케 하였다. 또 유신정부 선전국 비서 ☐임수(☐任壽) 씨는 교묘한 일본어로 일지국교(日支國交) 회복에 대한 소신을 피력하여 특히 일본조고계에 대하여 지나에 대한 정당한 ☐☐을 요청하였다. ☐씨의 표현은 약 천간 흥분된 포즈로 지나 현세를 소개함에 있어 정당치 못한 태도 또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일일이 예를 들어 이러한 예가 일지친선을 저해하는 점이 많다고 통론하여 과연 그렇구나 하는 감명을 주었다.
최후에 중지대표 남경중국공론사(南京中國公論社) 주필 호한☐(湖漢☐)씨의 제안으로 동아신질서 건설의 성대(聖代)에 확고히 된 일만지(日滿支)군장병 및 보도(報道)전선에서 쓰러진 동지를 위하여 전원기립 1분간의 묵념을 바쳐 경의를 표한 다음 총원은 신문부회, 잡지부회로 나누어 오후 6시까지 신문잡지계의 제문제를 토의하였는데 일반에게는 별로 흥미없는 문제이므로 그 경과는 생략하기로 한다.
총회 제2일은 왕정위씨의 ☐관지중화일보사 대표 장건지(章建之) 씨의 연설이 있은 후 전일 신문부회에서 ☐원부탁이 된 ‘동아신문통신☐연맹 결성 및 남경, 신경에서 대회 개최의 건’에 관하여 보고가 있었다.
즉 동아신문통신☐연맹 결성의 건은 중요사항이므로 차기대회까지 연기함, 단 그때까지 ☐원회에서 ☐☐심의함. 또 남경, 신경에서의 대회개최는 모두 정식소청을 받은 후에 개최키로 함.
이와 같은 보고를 승인하고 다음에 몽강대표 정☐☐씨로부터 동아신질서와 몽강신문계에 대한 연설이 있고 북지대표 청도신민보(靑島新民報)의 조작인(姚作寅) 씨의 ‘구미의존의 폐풍 타파’에 대한 연설, 이리하여 전 일정을 마치고 오후 1시에 간담회는 고야(古野) 동맹통신(同盟通信) 사장의 “대륙의 일부에는 현재 전쟁중임에 불구하고 본 간담회가 이렇게 성대하게 일지대표 2백여 명의 출석으로 개최되어 유종의 미를 얻은 것은 감사할 일이다”고 하는 의미의 폐회사로써 폐회되었다.
이 외에 야간에 각대표의 강연회 또 다음날은 동경 각 기관의 시찰견학 등 인망(忍忙)한 시찰 일정이 있었으나 동아조고자간담회에 관한 보고기(報告記)로는 이만쯤하고 돌아간 후에 귀로의 여중(旅中) 습유(拾遺)181)나 조금 써볼까 한다.
<출전 : 洪陽明, 「東京紀行 -米內首相의 印象」, '滿鮮日報', 1940년 02월 29일>
2) 노창성(盧昌成), 라디오의 사명
아직까지도 국어182)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조선 인구의 약 9할을 점하고 있는 우리 이 사회에 있어서 조선어방송에 의한 대중교육이 반도문화의 수준향상에 얼마나 중대의의를 가지고 있느냐 함은 새삼
181) 남이 잃어버린 것을 주움.
182) 일본어를 뜻함.
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오. 그 만큼 제2방송국을 담당한 우리로서는 절대적인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대한 책임이 있는 곳에 반드시 다대(多大)한 고심(苦心)이 수반(隨伴)함이 원칙일진대 현대 라디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방송의 국(局)을 담당한 우리들의 고심도 그만큼 큰 것이다.
우리들의 고심을 열거하면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별(大別)하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니 하나는 ‘프로그램’ 편성의 고심이오. 다른 하나는 연주(演奏)에 대한 고심이다. 이 가운데 후자는 주로 강연하는 당사자와 연예에 출연하는 본인 등에 속한 것이라 하겠지만, 전자는 순연히 방송의 국(局)을 담당한 자에 속한 것으로서 방송의 내용을 어떻게 하면 ‘바리에테’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가.
어떻게 하면 실질적이며 취미적이며 시대적이며 기절적(期節的)이며 주지적(周知的)이며 순화적(醇化的)이며 향상적일 것이냐 등 방송의 ‘프로그램’ 편성은 참으로 세심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그램’ 편성에 있어서 가장 주요할 것은 무엇보다도 편성자의 주관적인 방면, 즉 편성자의 기호적 경향으로 ‘프로그램’이 편성되어서는 그것은 ‘라디오’의 사회적 성격을 멸각(滅却)한다는 그것이다. 물론 ‘프로그램’이 편성자의
두뇌의 산물인 이상 거기에 편성자의 주관적 방면이 전연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도리어 사회적 실리를 재래(齎來)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편성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주관적 기호 경향을 배제하는 동시에 청취자의 객관적 기호경향을 널리 또 깊이 통찰해서 대중이 절실하게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적절하게 알려주고 간절히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을 취미 있게 느끼게 하여 ‘라디오’로 하여금 명실공히 청취자의 ‘라디오’화 하도록 ‘프로그램’의 내용을 편성해야 한다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말함은 결코 방송의 국을 담당한 자가 함부로 무비판적으로 대중의 기호에 아유(阿諛)183)하며 영합(迎合)하기만 치사(置事)한다는 것이 아니다. 대중의 기호가 아무리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악질의 기호요, 저급의 기호라면 그러한 것은 단연배제하고 보다 더 양질의 보다 더 고급의 것으로 대치하여서 사회를 순화(純化) 향상(向上)하는 것이 ‘라디오’의 사명의 뚜렷한 일면인 것이나, 그렇지 않은 한에 있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대중의 객관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방송의 존재 이유이므로 종래에 강연이며 강연에 대한 청취자의 객관적 취향을 여러 각도로 조사하여 진상탐지(眞狀探知)에 용력(用力)도 하여 보았으나 아직 만족한 결과를 얻어 본적이 없음은 방송국을 위하기보다도 청취자를 위하여 유감천만(遺憾千萬)인 일이다.
듣건대 영국(英國)에서는 청취자로부터 방송국에 항서(降書) 혹은 답서(答書)를 보내는 수가 1년에 백 만 통 이상에 달하므로 대중의 기호가 어느 방면으로 기울어져 있느냐 하는 것을 고찰하는데 다대한 편리를 준다고 한다. 조선에 있어서도 청취자 제위(諸位)가 방송에 대한 희망과 용구며 방송국의 문의에 가림 없이 그 생각하는 바를 말씀해주신다면 이는 다만 방송국을 편달(鞭撻)하여 방송으로 하여금 청취자의 방송화할 뿐만 아니라 연(延)하여는 반도의 교화향상에 다대한 공헌을 흥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감히 강호(江湖)의 청취자 제위(諸位)에게 일언(一言)을 붙이는 바이다.
(필자는 제2 방송부장)
<출전 : 盧昌成, 「라듸오의 使命」, '매일신보', 1940년 3월 23일>
183) 아첨함.
3) 이상협, 시국과 보도기관의 사명
참사 이상협(李相協)
때의 전시와 평시에 관계없이 보도기관에 항상 부여되어 있는 뭔가 일반적인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때 그 때의 사건을 신속하게 일반민중 앞에 공보하여 그 사태를 해명해 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성과 새로움이란 항상 보도의 제일의적인 중요 면이다. 특히 뭐든지 스피드와 신기하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는 현대 저널리즘에 가세된 오늘날의 보도 가치는 하나에 걸어서 이 현재성과 새로움에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 현재성과 새로움을 극도로까지 발휘하기 위해서 현대 보도에는 절대 속보주의가 강조되고 있다.
그 날에 일어난 사건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인쇄하여 그것을 가능한 한 빠르고 널리 전국 또는 전세계에 반포하는 것이 보도의 생명이고, 이 보도의 신속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모든 희생을 기울여 있는만큼의 통신교통 기간과 속도성이 이용되고 있다.
이 속보주의와 함께 현대의 보도에 재차 기사에 절대 정확함을 기하는 것이다. 전에는 보도기사를 가능한 한 과장하여 함부로 민중을 자극하는 것을 일삼은 시대도 있었고 7분의 거짓에 3분의 이치라는 말도 있지만, 오늘날의 보도기사는 그러면 안 된다. 오늘날의 보도는 무엇보다도 그 사건의 사실에 철저한 보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은 민중에게 필요 이상의 자극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내외의 산지식을 정확하게 부여해주는 것이다.
불과 한 토막의 신문기사가 때에 따라서는 얼마나 큰 영향을 민중에게 미치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일행(一行) 일구(一句)의 기사에 그만큼의 책임을 느끼며 한 자도 경솔하게 써내려갈 수는 없다.
가능한한 사실을 치밀하게 조사하여 절대 정확함을 보증한 다음에 비로소 민중 앞에 보도하는 것이 우리 보도기관의 양심이자 임무다.
이상으로 서술한 것이 현대 보도의 일반적 사명이라고도 해야 할 것이지만,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과 같은 전시 하에서 일단 그 의미가 강화되어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전시 하에서는 저 전장에 서는 병사들이 민속한 행동을 명령받고 있듯이 우리들에게도 절대로 민속한 행동이 요구된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지나사변에서 동아에 새로운 질서가 오는 건설적인 전환기의 특징으로서 전국(戰局)과 사태가 매일 비약적으로 진행하고 있을 때에 우리들은 가장 민첩한 행동에 의해 그날그날의 뉴스를 모집하고 민중 앞에 보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전에 윌슨씨 등은 “그 날의 뉴스는 의견의 양식이다”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오늘날의 뉴스는 완전히 민중의 그날그날의 양식 그 자체이고, 매일 새로운 뉴스를 갈망하고 있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보답하는 것이 시국에 보답하는 우리들의 사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내외 제 정세의 움직임에 가장 예민한 주의를 향함과
동시에 개개의 사건에 하나하나 정확한 주의를 살펴 가야한다. 그 신속성과 정확성을 바탕으로 보도를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만을 논하고 말면, 언뜻 보기에 전시와 평시에서의 보도의 사명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이러한 것들 위에 서서 하나의 새로운 중요한 사명을 전시 하에 있는 보도기관의 사명으로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이상 서술한 것을 전적으로 통일해서 행하는 하나의 국민적 사명이다.
이것은 이 시국에 있어서 특히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보도기관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문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의미에서 사회의 거울이라고 일컬어지고, 보도의 순 객관성이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피상적인 견해이며 사실에 있어서는 보도는 결코 단지 뉴스를 기계적으로 보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 뉴스의 의의를 명백히 하며 우리들의 의견을 공표한다.
이것은 우리들이 어디까지나 공정과 진실 위에 서면서 항상 그 보도에 관해 그 책임과 방법을 분명히 하는 형태이며, 또한 여기에 보도의 도덕적인 의미와 우리들의 국민적 입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그런 것처럼 우리 보도기관도 국가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에 속해서 국가의 정책에 순응하며 협력하는 기관이다.
저 제1차대전 당시에 영국 정부가 특히 보도대신을 두고 모든 보도의 통일을 도모하게 하려고 했을때, 신문은 국가와 독립적 존재라고 하는 반대론이 나와서 상당히 서로 논의한 것을 들었는데, 우리들 입장에서 보면 그 논의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보도기관은 처음부터 국민적인 기관이면 그것이 국가에 속하는 것은 새삼 논할 여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목적은 일반 국민 앞에 그것을 공보하고 그 상태를 분명히 함에 따라, 국가가 행하는 공선(公善)184)을 민중 앞에 증명하는 것이고, 우리들은 항상 국가의 정책에 응하여,총체 운행을 위해서 가장 굳은 협력을 기하는 것이다. 특히 전시 하에 있어서는 이것이 더욱 강화되어 우리들은 그때그때의 국책에 대해서 신속하게 그 의미를 파악해서 충실하게 순응하여, 효과적으로 보도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평시의 보도자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 사변에 참가하여 협력하고 있는 한 사람의 병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총력에서는 단순히 무력만의 전쟁이 아니고, 군사와 경제와 선전전의 협조 일치를 가져야 비로소 승리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로, 제1차 구주대전185) 시 저 독일이 무력에 이기고 선전에 졌다고 하는 것도 그 사실을 의미한 것이다.
이 선전전에 참가하는 자격으로서 우리 보도기관은 분명히 하나의 중요한 부대다. 물론 진실한 의미에서 보도와 선전은 일단 구별되어져야만 한다. 예를 들면 보도는 가능한 한 일반적이고 시의적(時宜的)인 것을 기하는데, 선전은 조직된 특수한 사성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등…… 그러나 이 전시 하에서는 모든 것이 조직화되고 통일된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보도와 선전은 서로 일치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번 구주대전에서 독일은 전철(前轍)을 감안해선지 처음부터 전 선전기관을 조직적으로 통일해 가는 중에 보도기관에 대해서도 강력히 그것을 통제하고 뉴스의 모집과 배합에 있어서 선전성(宣傳省)보도부 지도하에 D·N·B와 트랜스 오체안 2대통신사를 통해 대외선전을 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식으로 전시 하에서는 국가가 통신사 신문기관 등을 통일 지도해 가는 것은 당연한 국책이다.
또한 우
184) 공중을 위한 선(善).
185) 제1차 세계대전.
리들이 그 국책에 민감하게 응해서 하나의 전사로서 사변에 대응하는 것이 시국에 대한 우리들의 유일한 사명이다.
사변에 참가하고 협력하는 유력한 부대로서 우리들의 보도기관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한명 한명이 병사로서 확고한 발판을 디디어 제삼 전선에 섬과 동시에 제일선의 전장에서 병사들이 포탄 하나하나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은 항상 내외의 제 정세의 움직임에 민속하게 응하면서 일행 일구의 기사도 신중하게 취급해야 된다. 아니 한 개의 포탄은 적진지의 일 지점을 파괴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들의 보도기사의 일행은 족히 전국 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면, 이때에 우리들에게 부여된 사명은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들의 사명이 지난(至難)하다고 해도 전선에 있어서의 우리 ‘무적황군’의 상승적(常勝的)인 전적(戰績)을 생각해서 우리들도 그에 지지 않는 결의와 용기를 가지고 이 시국에 대응하면,이 지난한 사명을 어느 정도까지 완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시국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가 실현된 새로운 시대에 이르는 도정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역할인 것이다.
<출전 : 李相協, 「時局と報道機關の使命」, '總動員' 제2권 6호, 1940년>
4) 매일신보 현황(1943)
【연혁과 사황(社況)】 매일신보는 그 기원을 조선 최초의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에 두고 1905년 7월에 창간되어, 1910년 8월 29일 일한합병이 공포되자 ‘매일신보(每日申報)’로 개제(改題), 이듬해인 1911년 4월에는 경성일보와 합병하여 경성일보와 함께 조선 통치의 대 정신을 지키면서 창간 이래 30여년에 걸쳐 반도 언론계의 영웅으로 인정받아 왔는데, 지나사변을 계기로 대륙 정책의 전진 기지로서 빛나는 장래를 가진 반도의 비약 시대에 즉응하여 더욱 언론보국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1938년 4월에는 경성일보사와의 복합 조직을 개편하였다. 자본금 100만 엔의 주식 조직으로 경영기구를 독립함과 동시에, ‘매일신보(每日申報)’를 ‘매일신보(每日新報)’로 개제하고, 독립 신생의 의기로써 그 본래의 사명인 내선일체의 이상 하에 조선 통치의 익찬에 매진하여, 이듬 해 1939년 3월에는 신축 중인 공장 및 사옥의 일부가 준공되어 현재의 사옥으로 이전하고, 알버트식 윤전기 4대, 알호식 1대 등 최신 공장 설비를 갖추고, 지방판을 7판제로 확충함과 동시에 지면에 일대 쇄신을 가하여 동년 5월에는 조선 내 12개 도 지사에서 지방 호외 현지 발행의 특별 인가를 얻어 수시로 지방 호외를 내는 등, 동사의 보도 기능은 모든 각도로부터 유감없이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1940년에 들어와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국책에 순응하여 폐간되자마자 그 영업 지반을 계승함과 동시에 자본금을 150만 엔으로 증자함으로써 역사적 전환기를 지도하는 반도 유일한 언문신문으로서 사운의 경이적 약진을 이루고, 1942년에는 기금 40만 엔을 투자하여 동사 방계단체로서 재단법인 매일신보사 후생사업단을 설립하여, 한편으로는 반도 민중의 교화 지도의 일익으로서 각종 사회사업에 착착 손을 대고 있는 중이며, 또 지면의 향상에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1942년 말에는 본지는 4판제로, 지방판은 12판제로 확충되었다.
◎ 지방 호외 발행지
△매일신보 충북 호외(발행지 청주) △동 충남 호외(동 대전) △동 전북 호외(동 전주) △동 전남 호외(동 광주) △동 경북 호외(동 대구) △동 경남 호외(동 부산) △동 황해 호외(동 해주) △동 평남 호외(동 평양) △동 평북 호외(동 신의주) △동 강원 호외(동 춘천) △동 함남 호외(동 함흥) △동 함북 호외(동 나남)(이상 12 지방 호외는 모두 현지 지사에서 수시 발행)
◎ 정기 간행물
매신사진순보
◎ 1942년도의 주요 사업
〇육군병원 위문 연주, 제1차 전첩 축하 기념으로 2월 26일 용산 육군병원을 방문하여 위문 연주
〇시국강연과 영화회, 전첩 제2차 축하일을 기념하여 3월 12일 부민관(府民館)에서 개최
〇미영 격멸·필승 축원, 성지 부여 조선신궁 역전경주대회, 정전(征戰) 하 반도 청년으로 하여금 숭고한 조국(肇國)의 신정(神情)을 체득하게 하고 필승 불패의 신념을 공고히 하여 적국인 미영의 격멸에 매진해야 할 국민의 지기(志氣) 앙양과 체력 연성에 이바지하도록 전선 각도 청년단 대표를 모아 기점을 성지 부여로,종착점을 조선신궁으로 하여 4월 26일부터 동 29일의 4구간을 개최, 본 사업은 매년 계속사업으로 하고 금년은 그 제1회로 한다
〇징병제 실시 기념 대강연회, 반도 동포의 오랫동안의 대망이며 광영인 징병
제 실시가 결정되어 5월 16일 경성 부민관에서 징병제 실시 대강연회를 개최
〇전선 도시대항 축구대회, 5월 16일부터 4일간 조선체육진흥회와 공동주최로 경성운동장에서 개최 〇징병제 실시 축하회, 5월23일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
〇해군 포스터 전람회, 5월 27일의 해군기념일에 남녀 중등학교 생도 작품을 모아 초지야(丁子屋)에서 개최
〇제3회 전조선 종합씨름대회, 6월 6일부터 2일간 경성운동장에서 개최
〇문화음악 대연주회, 6월 11일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
〇제16회 전조선 남녀 궁도대회, 6월 13일부터2일간 경성운동장에서 개최
〇바다 기념일 저녁, 7월 19일 부민관에서 개최
〇국민무용 강습회, 건전하고 명랑한 국민무용과 국민율동을 보급하기 위해 7월 21일부터 5일간 경성 부민관에서 강습회를 개최
〇금강산 등행 연성회, 국민 체위 향상과 건강보국을 목표로 금강산 등행단을 모집하여 8월 14일부터3일간 금강산에 파견 연성
〇만주 개척 위문 연예, 대륙 식량 증산에 개척의 괭이를 휘두르는 재만 동포 흙의 용사를 격려하기 위해 연주반을 2대로 편성하여 8월 20일부터 1개월간 만주 각지에 파견
〇만주 건국 10주년 경축 시찰단, 우방 만주국의 빛나는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의미에서 조선 내 각층의 유력자를 9월 4일부터 3개대로 나누어 만주에 파견
〇지방 부로(父老) 부인 병영 견학단, 징병제에 대한 반도 부모들의 인식을 심화시키기 위해 각도로부터 지방 부로 30명, 중견부인 100 명씩을 경성에 불러 모아 군문의 감격을 체득하게 한다. 본 사업은 9월 20일부터 착수하여 이듬해인 1943년 5월까지 계속된다
〇징병제 취지 보급 야만담부대 파견, 농민 대중에게 징병제의 인식을 심화시키기 위해 일류야담 만담가를 동원하여 전선 각지에 파견한다. 본 사업은 10월부터 이듬해 1943년 3월까지 반년에 걸쳐 전선 방방곡곡에서 실시한다
〇남방전선 노획 병기 전람회, 야스쿠니(靖國)신사 임시대제를 중심으로 10월 14일부터 8일간 경성 초지야에서 개최
〇우량 다자(多子)가정 표창, 인구 증가의 국책선(國策線)에 따르는 우량 다자가정에 대해 육아보국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전조선에서 선발하여 11월 3일의 명치절(明治節)을 택하여 표창 〇대동아전쟁 1주년 기념사진 전람회, 12월 3부터 열흘간 경성 초지야에서 개최
〇모범 지원병 가정 표창, 12월 8일의 대동아 1주년 기념일에 금치훈장을 받은 지원병가정과 2명 이상의 자제를 솔선해서 지원병으로 보낸 모범 가정을 전조선에서 선발하여 표창
〇매신(每新) 교화 선전차 완성, 전시 하 후방 반도 민중의 계몽운동에 기여할 목적으로 다액의 비용을 투자하여 ‘매신 교화 선전차’를 제작했다. 본 교화 선전차는 영화 장치, 확성 장치를 비롯하여 자가발전 장치,절첩(折疊)무대 장치 등의 극히 정교한 장치를 갖춘 근대과학의 정수를 모은 ‘움직이는 무대’를 가진 호화차로, 내지에서는 그와 같은 것을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인데, 조선에서는 동사가 처음으로 하는 계획이다. 그 이용은 전기 설비가 없는
☐☐한 농산어촌을 순회하고 강연 또는 영화를 주로하면서 이에 시국적인 만담, 야담, 가요, 촌극 등을 연출한다. 본 사업에 대해서는 조선군도 절대적으로 원조를 하는 중이며 최근에는 제2호차의 출현을 보기에 이르렀다
〇나가이 류타로(永井柳太郞)씨 강연회, 12월 18일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 ‘세계에 선구하는 청년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반도청년의 분기를 촉구했다
〇세민 구제 서화전, 동사 항례에 따른 ‘세말 세민 구제 서화 직매회’로 12월18일부터 6일간 경성 초지야에서 개최
〇히노마루(日の丸) 부채 헌납운동, 남방 전선에서 활약하는 황군 장병에 대한 감사 선물로 30만개를 목표로 동사가 제창한 ‘히노마루 부채 헌납운동’은 연말에 벌써30만 7백 개를 돌파 예상외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현세일반(現勢一斑)▣
사 명 매일신보사
소 재 지 경성부 태평통 1정목 31번지의 3
창 간 1905년 7월 18일
조 직 주식회사
자 본 금 150만 엔
조직 변경 1938년 4월 15일
【간부 성명】
취체역사장 금천성(金川聖), 전무취체역 오노 도시유키(小野利幸), 동 금본동진(金本東進), 취체역 서춘(徐椿), 동 정인익(鄭寅翼), 동 최창학(崔昌學), 동 마루야마(丸山隆準), 동 방의석(方義錫), 동 안성기(安城基),186) 동 히라후미 다다오(平文忠男), 동 박기효(朴基孝), 감사역 이시카와(石川淸深), 동 이협(李協), 동 마쓰모토 마고토(松本誠), 동 박흥식(朴興植), 동 서병조(徐丙朝) (총무국) 국장(겸) 오노 도시유키, 서무부장 나카자토(中里文治), 경리부장 나가시마(長島龜喜), 사업부장 김달진(金達鎭), 출판주임 양재☐(梁在☐), 공장장 아메야먀(天山☐進) (편집국) 주필 서춘, 국장 정인익, 고문 이노우에(井上收), 동심우섭(沈友燮), 논설위원 전임 미야무라(宮村允鐘), 정리부장(겸) 정인익, 사회부장 홍종인(洪鐘仁), 정
186) 이기찬(李基燦)의 창씨명.
경부장 겸 논설부원 이원영(李元榮), 지방부장 히로타(廣田運一), 조사부장 겸 논설위원 구니모토(國本昌洙), 학예부장 겸 논설위원 조용만(趙容萬), 체육부장(겸) 홍종인, 교열부장 히로세 시로(廣瀨四郞),사진순보 주임 다마미네 도시오(玉峰利夫), (영업국) 국장(겸) 가네모토 도신, 판매부장 마쓰나가 시게루(松永茂), 광고부장 윤병은(尹炳殷)(이상 본사 관계)
【주요 설비】
외국제 알버트식 윤전기 4대, 외국제 알호식 윤전기 1대, 평반인쇄기 내국제 3대, 사용 활자 6포인트3, 자모설비 정비, 활자 주조기 12대, 사진 제판기 1대, 롤링 1대, 복사기 1대, 연판주입기 3대, 연판 마무리기 2대.
【발행 회수】
조간 4쪽, 석간 2쪽(연중 무휴간)
【지면 체제】
1행 글자 채워서 15자, 1단 행수 175행, 1쪽 단수 15단.
【각종 요금】
구독료 1개월 1엔, 외지용 1개월 1엔 20전, 광고료 보통면 1행 1엔 50전, 특별면 1행 3엔 △[기사난내 광고(1회 요금)] 제자(題字) 하(13행) 금 25엔, 30행 1틀 금 75엔, 50행 돌출 1틀 금 100엔△[지정 요금(5호 1행 요금)] 게재일 지정 요금 20전, 조석간 1면 지정 요금 20전, 동 사회면 지정 요금 30전, 기사직하 지정 요금 10전, 시간외 조체(組替)요금 50전.
(매신 사진순보) 순간(월 3회 발행) 구독료 1개월 60전.
【각지 지사 지국】
지사
도쿄(東京)지사 도쿄도 교바시(京橋)구 긴자(銀座) 8의 2 전화 긴자6658 지사장 가네야마(金山箕範),오사카(大阪)지사 오사카시 기타(北)구 다카가키(高垣)정 16 전화 도요사키(豊崎)1046 동 박윤석(朴尹錫), 충북지사 충북 청주읍 전화 340 동 마스야마(益山謙☐), 충남지사 충남 대전부 전화 926 동 스에나가(末永岡熙), 전북지사 전북 전주부 전화 740 동 최홍렬(崔鴻烈), 전남지사 전남 광주부 전화 867 동국기열(鞠錡烈), 경북지사 경북 대구부 전화 1718 동 갑☐(甲☐), 경남지사 경남 부산부 전화 5009 동김정일(金正一), 황해지사 황해 해주부 전화 370 동 가네다(金田基秀), 평남지사 평남 평양부 전화 4038동 다카미네(高峰暉), 평북지사 평북 신의주부 전화 293 동 가사마 기미오(笠間公男), 강원지사 강원 춘천읍 전화 231 동 리노하라(李原漢復), 함남지사 함남 함흥부 전화 3134 동 니시카와(西川林), 함북지사함북 청진부 나남본정 전화 540 동 가네야마(金山韶能), 신경지사 신경시 조일통 전화 (2)3929 동 도쿠야마(德山海男), 봉천지사 봉천시 대화구 전화 (2)5751 동 이시카와 요시오(石川吉夫), 간도지사 간도시신안로 전화 909 동 마쓰야마(松山兼治), 북경지사 북경 동성 정은호 동 17호 전화 동4752 동 시라야(白矢世哲) (지국) 전선, 내지, 전만, 북지, 중지 등에 지국 353개소, 분국 686개소.
본사
사 서 함 경성 100
대 체 경성 636
본국 전화 8, 1108, 111
8, 1128, 113
8, 1148, 115
8, 1168, 117
8, 1188, 119
8, 7858, 786
6, 9725, 331
(대표 전화 (2)8111)
<출전 : '昭和十八年新聞總覽', 1943년 12월 20일, 160~1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