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정(訂正)한 흥선 대원군의 사주명조이다 이하응(李昰應). 자(字)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癸 壬 己 庚
卯 戌 丑 辰
정정(訂正)
壬 癸 己 庚
戌 卯 丑 辰
나쁜 방면으로 조명(照明)해본다면
동일 명조는 많지만 대원군 입장으로는 서는 사직(社稷)의 문(門)을 닫는 다는 의미이다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다 합거(合去) 시켜 버리고 월간 몸 기자(己字)[대원군이라 하는 의미] 하나만 남는다 진중(辰中) 을무계(乙戊癸)는 을경화금(乙庚化金) 시켜가고 무계합화(戊癸合火) 시키고 월지(月支)축(丑)은 日干 계록재자(癸祿在子) 하여선 자축합(子丑合)하고 임술(壬戌)은 지간(支干) 정임합목(丁壬合木)하고 묘술합(卯戌合)목(木) 시켜 버리고 축진파(丑辰破) 에다간 축술(丑戌) 형살(刑殺)에다간 파(破)가 진(辰)을 유도(誘導)한 모습이나 진술(辰戌)충이 되려하는데 파(破)가 되선 충(沖)은 못하고 합이 우선(優先)이라 묘술(卯戌)합거(合去) 시키니 충파하진 못하는 것 비겁(比劫) 임(壬)이 외세침략 왜넘이지 뭐- 좌지(坐支) 식신(食神)이 시지(時支)관살(官殺)을 합화(合火) 시켜선 비겁(比劫)의 재물(財物) 터전 땅을 삼는 것 국권(國權)을 잃고 나라를 탈취 당하는 모습 정관(正官)은 아들인데 아들 위에 비겁(比劫)임간(壬干) 앉았으면서 자신은 관살(官殺)을 제거(除去)하는 식상(食傷)위에 앉아선 대원군(大院君)이라 하는 위상(位相)의 벼슬 관직 기(己)를 해먹겟다고 한 모습인데 그것도 정인(正印) 경(庚) 년간(年干)한테 기운이 설기 당하는 것 비겁(比劫) 할아버지한테 살관(殺官)의 기운이 설기 당하는 상태가 된다 할것인데 그렇게 기운을 탈루(脫漏)시켜선 비겁을 도우는 행위를 한 것 일수도... 소이 나라가 망하는 모습이다 이런 뜻 술중(戌中) 무토(戊土)가 고종황제 보단 ... 축중(丑中)기토(己土)가 살관(殺官)으로 고종황제가 되기 쉽고 좌지 묘중(卯中)을목(乙木)이 손자 융희 황제가 된다 할거다 살관(殺官)으로 아들을 삼는 거거든 ...
비겁(比劫)이 달은 술중(戌中) 무토(戊土)관(官)이 좌지(坐支) 손자를 합거(合去)해선 처성(妻性) 재물 땅을 삼은 것 ,
일본천황
다이쇼 천황(일본어: 大正天皇, 1879년 8월 31일 ~ 1926년 12월 25일)은 일본의 제123대 천황이다. 본명은 요시히토(嘉仁よしひと), 어릴 적 칭호는 하루노미야(明宮はるのみや)이다.
이 사람이 된다 할거다
정관(正官)보다 살관(殺官)이 더큰 벼슬이된다 할거다
그러니깐 왜넘한테는 술중(戌中)무토(戊土)가 살관(殺官)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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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 백과 날짜로 자시(子時)명조를 세움 아래처럼 나와선 윗 사주가 아니다
木 金 火 金
時 日 月 年 胎
壬 癸 己 庚 庚 (乾命 204세)
子 卯 丑 辰 辰 (공망:辰巳,申酉)
대정수 : 1911 게둔유질이라 하여선 양기 달아날적 대사(大事)는 않좋고 그저 자식 건사 신첩(臣妾)이나 양육하는 데는 길하다 하는 것
73 63 53 43 33 23 13 3
丁 丙 乙 甲 癸 壬 辛 庚
酉 申 未 午 巳 辰 卯 寅
1821년2월12일에 가야지 임술(壬戌)일진(日辰)이므로 위 임술(壬戌) 명조(命條)는 가짜 명조다
어떤 사람들이 계묘(癸卯)일 임술(壬戌)일 출생을 아마도 임술일 계묘시로한 것 같다 그런걸 가짜 명조를 갖고선 이렇궁 저렇쿵 하게 한 것이다 그래도 맨 비겁한테 합거 당하는 것은 매일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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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위키리 백과 문헌을 참고하여 본다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년 1월 24일(1820년 음력 12월 21일)[1] ~ 1898년 2월 22일(음력 2월 2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추존왕이다.
본명은 이하응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부친이다. 영향력이 있었던 풍양 조씨 세도 집안과 양주 조씨 고급 관료 집안, 신 안동 김씨 세도 집안에게 각기 서예(붓글씨)를 써서 바치고 서화(그림) 등을 그려다가 바쳐 보신책을 강구한 그는 1864년 1월 21일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유교의 위민정치를 내세워 전제왕권의 재확립을 위한 정책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였고[2] :343, 밖으로는 개항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자세에 대하여 척왜강경정책으로 대응하였다.[2] :343
또한 서원을 철폐하고 정리해 양반·기득권 토호들의 민폐와 노론의 일당 독재를 타도하고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였으며, 동학과 천주교를 탄압, 박해하였다.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조선의 국정을 이끌었다. 직접 며느리 명성 황후를 간택하였으나[3], 도리어 명성황후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1873년 11월 명성황후와 유학자 및 (신)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등에 의해 축출된 이후 명성 황후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일본인과 결탁하여 며느리 명성황후의 암살을 기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길준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차라리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부탁했다고 한다.[4][5]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및 고종을 폐출하고 완흥군, 이재선 등을 조선 군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여러 번 정변을 기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을미사변을 주도한 조선인 주요 협력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천주교도 대량 학살, 무리한 경복궁 중건, 일본에 명성황후의 제거를 청탁한 점 등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성 출신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해동거사(海東居士)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907년 10월 1일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고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