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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말씀 3,6-10.16-18
6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지시합니다.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누구든지 멀리하십시오.
7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8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9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0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16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온갖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17 이 인사말은 나 바오로가 직접 씁니다.
이것이 내 모든 편지의 표지입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편지를 씁니다.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위선을 주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오늘 복음도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 생명의 본성을 뿜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냄새를 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 때문에 무덤을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은 그들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마태 23,27-28)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 곧 '선으로 꾸며진 위선'입니다.
마치 자신이 '선'인양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위선’ 중에서도 ‘종교적 위선’은 악취가 더 심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나 자선이나 단식, 혹은 미사나 전례나 성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나아가서, ‘위선’(ùποκρισισ)은 단지 못된 속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올가미에 씌우기도 합니다(예레 18,18).
실제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그러했습니다(마태 22,18).
또한 ‘위선’은 자신을 완고하게 하고 자신의 탐욕과 방종을 위해 하느님을 도구로 삼고,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기도 합니다.’(루카 18,9; 20,20)
그래서 ‘눈 먼 길잡이’(마태 15,3-14)가 되어 잘못 가르치는 ‘나쁜 누룩’(루카 12,1)이 되기도 합니다.
혹 우리가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잘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지만 실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아무리 진실을 가리려 해도, 진리는 가리고 있는 허울을 어김없이 벗기고 말 뿐입니다.
어둠이 드러난 진실마저 덮고 조작하려 할지라도,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막을 태우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더러운 속을 감추고, 겉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은폐하고 기만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하는 우리의 위선을 주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당신이 담아주신 마음 속 진리를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마태 23,31)
주님!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제 손바닥을 치우게 하시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내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시고,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 착각 또는 착각 행복>
제 생각에 진짜 불행은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는 불행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거나, 더 나아가 행복한 줄 알고 계속 그렇게 살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불행을 키워왔음을 알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세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고 호의호식에 떵떵거리던 권력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지만,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불행한 줄 모르고 살면 불행합니다.
저는 불행한 줄 모르고 행복한 줄 아는, 이런 행복을 '행복 착각' 또는 '착각 행복'이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인생이 이런 착각을 하며 삽니다.
이런 착각이라도 없으면 살기가 힘드니까 착각을 하는 것이요, 불행하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하는 소박한 행복을 살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불행은 불행일지라도 소박한 불행일 것입니다.
속으며 살고 속아서 산다는 사람에게는 인생이란 어차피 이런 소박한 행복과 불행을 살다가 가는 거지 뭐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런 불행에 대해서는 오늘 바리사이에게처럼 그렇게 거창한 불행 선언을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만일 그러신다면 소 잡는 칼로 파리 잡으시겠다는 식이 될 테니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불행 선언을 하시는 것은 소박한 불행이 아니라 남을 불행에 빠트리고 예언자를 죽이는 어마어마한 죄악의 불행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비판하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조상들이 죽였던 예언자들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며 자기들은 조상들과 다르다고 착각하지만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오늘 주님의 말씀인데, 사실 옛 예언자가 아니라 지금의 예언자, 그것도 나에게 예언을 퍼부어대는 예언자를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래 예언자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하느님의 사람인데,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왜 파견하시겠습니까?
하느님 계명을 잘 따른다면 왜 파견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언자는 하느님 계명을 어기는 자들, 특히 종교 사회 지도자들에게 파견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잘못을 꼬집으니 좋아할 리 있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사람이라야 즉시 그것을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회개하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개뼉다귀처럼 여기는 예언자들이 하는 개소리라고 여기지요.
사실 우리 삶에도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내가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면 예언자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예언자처럼 거룩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 눈에 그야말로 개뼉다귀같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예언자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고, 그런 사람을 고마워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개뼉다귀같은 사람이 하는 쓴소리가 개소리가 아닌 하느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 곧 예언이 될 것입니다.
저도 머리로는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억지로 그 예언을 받아들이기는 하고, 적어도 예언자를 죽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고마워하는 데까지 아직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바리사이들을 보면 이런 점을 반성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회칠한 무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꾸중을 하였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정화가 필요합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 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이사 29,13) 하였고, 주님께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하신 말씀이 새롭습니다.
아무리 겉이 화려하더라도 소중한 것은 알맹이입니다.
부정함을 피해가라고 무덤에 회칠을 하였으니 ‘회칠한 무덤’은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회칠한 무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남을 부정하고 더럽다고 비난하지 말고 자신의 속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세상에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정화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자비를 청하게 되고, 인정하지 못하면 내 안의 부정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합니다.
‘회칠한 무덤’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다.
자비를 청하는 가운데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왜 자녀는 미운 부모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여자 주인공 테레자는 어머니를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어머니와 닮은 남자를 사귑니다.
어머니는 외도하는 것을 딸에게 자랑할 정도였고 테레자를 무시하였습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와 비슷한 바람기가 있는 의사 토마시와 사귑니다.
토마시도 자기 내연녀인 사비나에게 테레자를 소개할 정도로 사랑을 가볍게 여깁니다.
어쩌면 테레자가 토마시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둘이 반씩 양보하는 상황이 됩니다.
토마시는 결혼을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테레자는 자신도 외도하면서 토마시에게 미안함을 갖습니다.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습니다.
부모를 원망했지만, 결국 부모를 닮아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부모를 싫어하면서도 부모를 닮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부모와 같은 배우자를 만나는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태도에서는 분명히 부모 중 한 명과 경쟁을 하게 됩니다.
테레자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어머니보다 우월해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에 대해 그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고 믿는 딸은 자신도 술주정뱅이와 결혼해 어머니보다 잘사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누군가를 심판하면 이제 나는 그 누군가와 경쟁 관계가 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 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속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그들이 조상들을 비난하며 여전히 그들의 조상을 자기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조상들을 비난하며 자신들은 조상들처럼 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조상들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를 비난하며 부모처럼 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아예 그 족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족보를 주러 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는 ‘새로 태어남’이 새로운 족보에 들어옴과 같습니다.
영화 <오블리비언>(2013)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지구인을 위해 외계인과 싸운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를 만든 것이 외계인이고 그는 지구인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겉은 지구인이지만 조상은 외계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 안의 조상을 모시고 삽니다.
그리고 그 조상이 산 대로 삽니다.
만약 ‘진화론’을 믿는다면 우리 조상은 누가 되겠습니까?
원숭이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원숭이를 비웃지만, 실상 사는 것은 원숭이와 다름없이 비윤리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개구리가 되고 싶은 전갈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참으로 착했지만, 소풍 가는 날 개울을 건널 때는 자신이 개구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영을 할 수 없는 전갈은 자기를 태우고 가는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개구리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자기 조상이 전갈이라고 믿으면 아무리 자기가 전갈의 조상들을 비난하더라도 그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개구리처럼 온순하여지려면 그냥 개구리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맞서서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그 부모의 수준밖에 안 됩니다.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려면 인간을 비판하며 그 비판하는 인간들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 결심해도 소용없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다른 부족한 면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조상으로 여기면 그들을 비난해도 그들의 습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비뼈로 탄생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면서 신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신이 신처럼 살지 못하는 것만 보이며 인간의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비난하는 것으로는 절대 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위선자들의 업적은 바벨탑일 뿐입니다>
1)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회칠한 무덤 같다.” 라는 말씀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마르 13,1-2)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에 의해서 파괴되었는데(2열왕 25장), 헤로데가 재건축했습니다.
당시에 헤로데가 46년이나 걸려서 재건축한(요한 2,20) 예루살렘 성전은 대단히 아름답고 장엄해서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이었을 뿐입니다(마태 21,13).
겉은 아름답게(거룩하게) 보이지만 속은 온갖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한, 생명력 없는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사실 솔로몬이 처음에 성전을 지어서 하느님께 봉헌할 때에 이미 하느님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나에게서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계명과 규정을 따르지 않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거나 예배하면, 나는 내가 준 땅에서 이스라엘을 잘라버리고, 내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별한 이 집을 내 앞에서 내버리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속담거리와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은 폐허가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몹시 놀라고 휘파람을 불어 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찌하여 주님이 이 땅과 이 집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러면 사람들이 대답할 것이다.
‘자기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 그들의 하느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끌어들여 그 신들을 예배하고 섬겼기 때문이지.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모든 재앙을 그들 위에 내리셨다네.’”
(1열왕 9,6-9)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일에 대해서 ‘예수님의 예언’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수님의 성전 파괴 예언’ 이전에 이미 ‘하느님의 경고’가 있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한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또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경고하신 대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파괴된 채로 있습니다.
3)
그 일은 성전이라는 ‘건물’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는(나는) 어떤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로 우리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올리브 나무에서 몇몇 가지가 잘려 나가고,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인 그대가 그 가지들 자리에 접붙여져 그 올리브 나무 뿌리의 기름진 수액을 같이 받게 되었다면,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로마 11,17-22)
이 경고는 교회 전체를 향한 것이기도 하고, 신앙인들 각 개인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위선’의 바탕에는 ‘교만’과 ‘자만심’이 있습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 라는 착각과 자만심이 ‘위선’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전체든지, 각 개인이든지 간에 자만심에 빠지면 곧바로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아름다고 거룩한 성전’은 ‘강도들의 소굴’로 전락하고, ‘회칠한 무덤’이라는 꾸중을 듣게 됩니다.
4)
우리는 신앙생활을 무슨 업적을 쌓는 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만 대단한 업적을 쌓는 것은 ‘바벨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업적만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에 합당하게 살았느냐를 보십니다.
‘진실하고 충실한 삶’ 자체가 신앙인의 업적입니다.
위선자들은 “우리는 정말로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업적을 쌓았다.” 라고 내세우지만,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7,22-23).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하여라 - “무지의 불행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시편 128,1)
오늘 화답송 시편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선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국민 절반이 울분상태 ‘30대 심각’”, 새벽 인터넷 뉴스를 일별하는 순간 들어온 말마디입니다.
어제 유투브에서 본 70대 이후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도록 준비하라는 10가지 지침도 일부 공감이 갔고 유익했습니다.
“1.저축, 2.배우자, 3.건강, 4.친구, 5.취미, 6.배움, 7.연금, 8.도전, 9.일기(기록), 10.대화(자녀간)”로 아주 현실적인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볼 때,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하나가 빠졌음을 봅니다.
삶의 목표이자 방향, 삶의 중심이자 의미인 하느님이 빠졌습니다.
이어 제가 주장해온 노년의 품위있는 삶을 위한 3대 우선 순위,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도 생각이 났습니다.
더불어 오랫동안 강조해온 “물보다 진한 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 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 게 하느님 믿음이다.”란 말마디도 생각이 났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할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무지의 탐욕에,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 길을 잃은, 희망과 꿈을, 빛을 잃은 중생들입니다.
그러니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이요, 국민 절반이 울분상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과 쉼의 선택과 훈련이 참으로 절박한 시점입니다.
‘살 줄 알면 행복인데 살 줄 몰라 불행’인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어제에 이은 마지막 둘의 불행 선언으로 마태복음 13장 7개의 불행 선언은 모두 끝납니다.
마태복음 5장 서두의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참행복 선언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저주’가 아니라 깊은 좌절감의 반영인 ‘깊은 아픔’이자 ‘분노’입니다.
인간의 위선적 무지의 병이 너무 깊습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에 대해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참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참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중독되어 눈멀면, 광신과 맹신의 무지에 눈멀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래서 참으로 살기를 바란다면 적극적 자발적 회개의 선택과 훈련이 필수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회개의 촉구입니다.
회개의 은총을 입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받아들이는 회개의 선택과 실천이, 그리고 계속된 회개의 여정을 사는 것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회개의 여정은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자아초월의 겸손과 지혜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회개 없이는 자기를 아는 겸손도 지혜도 없습니다.
참된 회개를 통한 하느님 중심의 진실과 겸손, 지혜의 삶만이 표리부동의 위선적 무지의 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회심의 대가이자 달인이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인 바오로 사도요,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 학자입니다.
어제 성인의 모친 모니카에 이어 아드님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인이 제 나이와 같은 76세에 선종하셨다는 사실이 더욱 분발하게 합니다.
17년 동안 모니카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주효하여 마침내 아드님을 결정적 회심으로 이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사건은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회심의 열매는 하느님 중심의 질서와 전통의 강조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바로 바오로의 이런 모범적 삶과 더불어 다음 성도들에 대한 평화의 축복이 회개의 열매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온갖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언제나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한번의 결정적 회심에 이은 부단한 회심의 여정을 통해 주님의 ‘축복의 통로’가 된 사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진리의 연인’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극적 회심 사건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밀라노 정원에서 앉아있을 때 보이지는 않지만 소년의 “Tolle, lege(집어 읽어라)”소리가 노래처럼 들려왔고 되는 대로 성서를 펼쳤을 때 한눈에 들어온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로마13,12-14)
이어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나오는 두 대표적 아름다운 고백을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과 저녁성무일도에 나오는 내용으로, 최민순 신부 번역입니다.
“주여, 당신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하시나이다.
당신 안에 쉬게 될 때 까지는 우리 마음이 평온치 못하리이다.”
(즈가리야의 노래 후렴)
“옛 것이나 항상 새로운 주님의 아름다움이여, 늦게서야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주님은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게 하셨나이다.”
(성모의 노래 후렴)
바오로 사도 이후 최고의 신학자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요 천주교, 개신교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두 성인입니다.
두 분의 생애를 보면 결정적 회심 후에도 죽을 때까지 회심의 여정에 항구했음을 보며, 회심의 여정은 동시에 보속의 여정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구원 은총에 감사하며 보속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던 두 성인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심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의 숲>
며칠 전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일 더하기 일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너무 힘듦’이랍니다.
일이 많아지면 힘들기 마련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1달간 한국으로 휴가를 갔을 때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듯이 일정이 생겼습니다.
오기로 한 미국 신부님이 못 오신다고 해서 영어미사를 했고, 대건회 모임, 사목회의, 구역모임을 다녀왔습니다.
구역장 회의, 세례식, 미사가 있었습니다.
장례미사, 병원 방문, 포트워스 한인 성당 미사가 있었습니다.
냉탕과 열탕을 오가듯이 실내는 에어컨의 힘으로 서늘한데, 바깥은 따가운 햇볕이 강해서 목감기도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 더하기 일’의 정답을 ‘너무 신남’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일을 통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즐겁고, 아픈 사람이 위로를 받고, 힘든 사람이 용기를 얻는 것을 보는 것도 기쁨이고, 이렇게 일 할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일 더하기 일’은 ‘너무 감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사람 만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원고 교정하고, 신문 홍보 다니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도 팬데믹 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 더하기 일’의 정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적당한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 긍정적인 생각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 사람, 이웃을 위한 봉사와 나눔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삶이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웃을 도우며 살아갑니다.
반면에 불규칙적인 식사와 지나친 음주를 하는 사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 게임과 노름에 빠진 사람, 자신만 알고 나눔에 인색한 사람은 삶이 고달프고, 불행합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은 물론 이웃에게도 걱정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늘 감사하는 사람, 언제나 기뻐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신앙생활에도 사랑의 꽃이 피고, 믿음이 열매 맺습니다.
시련 중에도 희망의 등불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영적인 독서를 자주하고, 미사참례를 꾸준히 하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단체 활동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사람, 본당의 피정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 단체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시련과 고통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아서 유혹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멀어집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많은 책을 남겨 주었습니다.
‘고백록, 신국론, 삼위일체론’은 초기 가톨릭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분명 시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핸드폰에 일정표가 있고,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 가지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의 시간, 위선의 시간, 탐욕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텅텅 비어 있는 사람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평가하고,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는 시간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나무는 독립적으로 서 있어도 하나의 숲을 이루는데 왜 우리는 하나의 숲을 이루지 못하나!"
우리 안에 있는 시기, 갈등, 질투, 욕망, 원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의 숲을 이루어야 합니다.
희망의 시간, 믿음의 시간, 사랑의 시간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숲을 만들 수 있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따로 있을까요?
따로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굳이 나눈다면 행복이라 여기는 사람과 불행이라 여기는 사람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것, 또 형체를 확인할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각자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행복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불행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지만 불행이라는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불행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은데도 행복이라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행복은 자기만 꺼낼 수가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라면서 사람과 환경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하지만, 외적인 것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은 내가 마음 안에 만들고 보관해서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그게 행복이다.”
행복을 멀리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또 세상의 것에서만 찾는 것도 안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우리는 행복을 자기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으며, 이로써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부르면서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입으로 하느님을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만, 실상 하느님의 것을 찾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지만, 실상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했습니다.
위선과 불법은 하느님의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다.”라고 꾸짖으십니다.
무덤의 겉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된 것 같지만, 무덤 속은 시신이 부패하면서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마음이 더럽고 추한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위선의 끝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마음에 품고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또 받아주시기에 더 큰 행복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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