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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9일 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 창세 14,18-20
제2독서 : 1코린 11,23-26
복 음 : 루카 9,11ㄴ-17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1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성체 – 미사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 성체성혈대축일을 맞아,
우리는 예수님께서 빵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당신 자신을 빵이라고 하시면서 그 빵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말다툼까지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빵이라며, 먹으라니,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느냐며 서로 말다툼을 합니다.
자기 살을 먹으라니, 우리가 식인종이냐고 말다툼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식인종이 맛 투정할 때,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요?
답: 아, 살맛 안 나.
여러분들, 빵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빠리 바께트입니까? 빵? 고소한 내음. 빵, 맛있어요?
유럽에 가면, 빵이 그리 맛있을 수가 없어요.
빵이라고 들으면, 즉시 성체가 떠오르는 분?
그렇다면, 아주 대단한 신자입니다.
한편 우리는 루가복음이 전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클레오파스와 다른 한 제자, 두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 두 제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지요.
오랜 시간 함께 이야기하며 길을 같이 걸어갔어도 그분을 몰라뵈었는데,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들려줍니다.(루카 24, 35)
미사는 그분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신 대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함께 머무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따라서 미사는 우리 가톨릭 신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사람에서 가장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소중한 시간인 것입니다.
오늘 성체성혈 대축일을 맞으며,
저는 성체에 대해 진실한 신심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소박한 사랑을 통해 성체의 소중함을 잘 보여 준 두 분을 떠올렸습니다.
한 분은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와 <나를 이끄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예수회원, 취제크 신부님이고,
또 다른 한 분은 <지금 이순간을 살며>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베트남의 성자, 반 투엔 추기경님입니다.
월터 취제크 신부님은 미국에서 태어나 예수회에 들어왔고,
구소련으로의 비밀 선교를 위해 폴란드에서 활동하다가
구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바티칸 스파이라는 혐의로 구소련으로 끌려가
감옥과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무려 23년을 보냈습니다.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간 이후 아무 소식을 접할 수 없었던 미국 예수회에서는
취제크 신부님이 결국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생각하고
사망자 명단에 넣어 위령미사를 드렸었지요.
(나중에 취제크 신부님은 그 사실을 알고,
약간은 해학적으로 아마 자기가 그 위령미사의 덕으로 살아남았나보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미국 정부의 노력으로 구소련의 스파이 두 사람과 교환되어,
죽었다고 생각한 그가 고국 미국으로 송환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먼저 자기의 체험을 생생하게 전하는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을 쓰고, 그 책이 출간된 이후에
자기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담지 못했다고 느끼며
다시 자기 체험을 더 깊이 묵상해서 책을 쓰지요.
그것이 <나를 이끄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하게 취제크 신부님에게 혹독한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
보통 사람들은 불과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가는 곳에서
신부님은 어떻게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집니다.
취제크 신부님의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매일 매일 몰래 드리던 미사를 통한 힘이었다고.
그는 <나를 이끄시는 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거나 미사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미사가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가를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북극의 지루한 여름철이 오면 작업할 낮시간은 최고로 길어지고
그 대신 수면시간은 대단히 짧아지는데,
이때가 되면 죄수들은 한숨이라도 더 눈을 붙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사제들과 신자들은 육체에 필요한 수면시간마저 희생한 채,
기상 종이 울리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한 막사 안에서 몰래 미사를 드렸다.
미사를 드리다 발각되는 날이면 우리는 심한 벌을 받아야 했고,
게다가 밀고자들은 사방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험과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만큼 미사는 우리에게 소중했다.
우리는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거의 무슨 짓이나 다했다.
우리에게 있어 성체성사는 중대한 실존의 근원이었다.
성체성사가 우리 마음과 정신, 우리 하루의 삶에 주는 영향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제가 몇 년 전 번역했던 '모든 것 안에서 그분과 함께'가 그분의 책입니다.
그다음은 반 투엔 추기경입니다.
그는 딘 디엠 전(前) 남베트남 대통령의 조카이기도 하지요.
반 투안 추기경은 1928년 베트남 후에 지역에서 태어나 1953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1967년 나트랑의 주교로 임명됐었습니다.
당시 그의 주교 임명은 베트남 공산당에 의해 거부됐고,
1975년 성모승천 대축일에 체포된 그는
이후 13년간 투옥과 수감생활을 하다가 1988년 풀려난 분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는 풀려났지만, 사랑하는 조국에서 추방되어 로마로 망명하였고,
끝내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반 투안 주교는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2001년, 추기경으로 서임되고
불과 1년 후인 2002년 9월 16일 암 투병 중 향년 74세의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감옥에 있던 어느 날 투안 주교는 ‘공동체에 편지를 쓰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답니다.
그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그는 폐지인 달력 뒷면에 편지를 쓰게 했고,
소년들은 그것을 가져다 읽고 베껴 쓰고 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망각하는 일 없이 ‘지금 이순간을 살며’
모든 이에게 사랑과 웃음, 희망을 전해 주고자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이 바로 미사, 성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빵을 잘게 부수어 성체성사를,
손바닥에 포도주 세 방울과 물 한 방울을 떨어뜨려 미사를 거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도 취제크 신부님처럼 미사야말로 그의 생명을 지탱해 준 양식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기다리지 않으리라. 지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며 살리라.”
그의 글 중에서 미사에 관한 감동적인 대목 하나 옮깁니다.
“한때 저는 금으로 된 성반과 성작으로 미사를 봉헌하였으나
이제 당신의 성혈은 제 손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한때 저는 대회와 회의를 위해 세계 각지를 여행하곤 했으나
이제 저는 창문도 없는 좁은 감방에 갇혀 있습니다.
한때 저는 감실에 모신 당신을 조배하곤 했습니다만,
이제 저는 당신을 제 호주머니 속에 밤낮으로 지니고 다닙니다.
한때 저는 수 천 명의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봉헌하곤 했습니다만,
이제 밤의 암흑 속에서 모기장 밑으로 성체를 전하고 있습니다.
매트 위에서 흰 버섯이 자라는 이 감방, 여기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당신께서는 제가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생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많은 말을 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이제는 당신께서 제게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오늘 성체성혈대축일을 맞으며,
다시 한번 미사의 소중함, 성체를 통해
깊이 예수님과 만나는 신비를 묵상하며, 감사를 드립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 코넬 대학 인간행동연구소의 신디아 하잔 교수팀이
인간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연구했습니다.
즉,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가는지를 본 것입니다.
결론은 길어봐야 30개월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꼭 두근거리는 감정을 가져야만 사랑이 있는 것일까요?
어느 영화에서 “나를 보면 아직도 심장이 뛰어?”라고 묻는 부인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연애 4년에 결혼 3년이야. 아직도 심장이 뛰면 그건 심장병 같은데?”
사랑은 처음에 분명히 떨리고 설렙니다.
그 단계를 거치면 공기처럼 소중하고 없으면 못 살지만,
늘 숨 쉬고 있어서 익숙해지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주님과의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처음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마냥 기쁘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님과의 사랑 관계가 익숙해집니다.
그때 많은 이가 자기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 합니다.
예전의 기쁨을 또 설렘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사랑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만약 설렘이 없어졌다면 지금 익숙해지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이제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공기처럼 소중하고 없으면 못 살 주님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던 주님이십니다.
그 일회적 사건으로 당신 사랑을 끝내지 않고,
성체와 성혈을 주심으로 인해 계속해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계속되는 사랑입니다.
미사 때마다 이루어지는 그 사랑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처음 주님을 모실 때 느꼈던 설렘과 기쁨도 사라진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공기와 같이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꼭 필요한 우리의 양식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습니다.
그리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광주리나 됩니다.
영적 양식은 이렇게 차고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성체와 성혈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은 계속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주님께서 주셨던 사랑을
나의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기만 하는 사랑을 넘어서 주는 사랑이 되어야,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잘 따르는 것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사의 신비를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이 신비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 주는 신비임과 동시에
그분의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신비이기도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정체를 묻는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라는 헤로데의 질문과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고백 사이에 위치 하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 신원을 밝혀줍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신원과 성체성사와 관련하여
제자인 우리가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날이 저물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군중을 돌려보내시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이에 그들을 위하는 마음이 없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고 있는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오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자리 잡게 하시고, 하
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촉복 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루카 9,16)
오늘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은 '제자들의 사명'을 보고자 합니다.
아라비아의 신비가 사디가 전한 우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은 숲속을 걷던 한 수행자가 네 다리가 전부 없는 여우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 여우가 어떻게 먹고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우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서 호랑이 한 마리가 포획물을 입에 물고 와 자기 배를 채우고 나더니,
나머지를 여우를 위해 남겨 놓았습니다.
다음 날도 신은 같은 방식으로 여우가 굶주리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수행자는 깨달았다는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나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신의 사랑만 믿으면 내게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시겠지?”
그는 그대로 몇 날 며칠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 죽어갈 지경이 되었을 때, 그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 그릇된 길로 들어선 자여, 진실을 향해 눈을 떠라!
내가 너를 이 자리로 이끈 것은 하릴없는 여우 흉내나 내라는 것이 아니라
호랑이를 본받으라는 것이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호랑이에게 포획물을 얻을 힘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이미 그러할 힘을 주셨습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는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다.
“내가 아무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생명의 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리 없는 여우를 보내주셨고, 굶주린 소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시고, 또 빵을 떼어주시며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은 인간관계를,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로 당신의 생명을 주시어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원입니다.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신원입니다.
이 사랑은 오늘 제2독서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시면서 하신 말씀,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1코린 11,24)라는 말씀에서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이 표현은 마태오(26,28), 마르코(14,24), 루카복음(22,20)의
‘성찬례 제정’ 장면에서 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표현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후에
빵을 들고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몸”이라고,
또 잔을 들고서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라고 축성할 것입니다.
그러니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현존’의 신비를 재생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시킵니다.
그렇습니다.
'형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체 성혈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어줌', '떼어 나누어줌', 이는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눈물겨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역시 자신을 '떼어줌'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이 아닌, 우리 자신을 ‘떼어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하지 말게 하시고,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릴 때 의미도 잘 모르지만 따라 부르던 성가가 있습니다.
“하늘에 별수가 얼마인지 아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강변에 모래알 헤아릴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바다에 물방울 누가 셀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논밭에 이삭 수 누가 알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나무에 잎사귀 헤아릴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영원과 무궁을 깨달을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매일 축성되는 성체의 수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31년 동안 제가 미사를 통하여 축성한 성체의 수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성체가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최인호 선생은
투병 중에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부님, 저 지금 성체가 몹시 고픕니다. 성체를 주십시오.’
본당 신부님은 기꺼이 봉성체를 해 드렸다고 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성체는 사제가 미사 중에 제병을 축성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몸을 내어주신 주님의 성체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혈은 사제가 미사 중에 물이 섞인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주님의 성혈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미사에 참례하여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감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광야에서 지치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배부르게 하는 ‘만나’ 보다는
영혼을 살리는 ‘성체와 성혈’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해집니다.
어릴 때, 물을 퍼 올리던 펌프가 생각납니다.
펌프에는 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부어주고
펌프질을 하면 수백 수천 배의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어린 저에게는 참으로 큰 체험이었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이지만 기꺼이 내어주니,
모든 사람이 마시고도 남는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낌없이 마중물이 되어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꽃동네, 마더 데레사의 사랑의 선교회, 이태석 신부님은
모두 한 바가지의 마중물 정신을 사신 분들입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마중물’이 되시어
수많은 신자의 가슴에 용기와 생기를 주고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축복을 받았으면 나누시기 바랍니다. 엄청난 은총이 되돌아올 것입니다.
바다의 물이 마른 적이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모두 아낌없이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제1독서의 멜키체덱은 성경에서 언급된 최초의 제사장입니다.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던 그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멜키체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여겨지며,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시편 110[109],4)라는
메시아적 신탁은 마침내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실현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당신의 몸과 피를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대사제이시며, 새 계약의 중개자가 되십니다.
제2독서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성찬 제정문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몸소 성체성사를 세우신 내용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기억’(ἀνάμνησιζς, 아남네시스)이라는 말은
이천 년 전의 사건을 그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사제를 통하여 봉헌되는 미사에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거행된 완전하고도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라는 표현은
성체 거양 다음에 “신앙의 신비여!”라는 사제의 선창과 함께 바치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현재, 예수님의 죽음을 전하는 과거,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미래,
곧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이
지금 이순간에 공존하며 천상 잔치의 영원한 기쁨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앞서 헤로데는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하며
예수님에 관해서 질문하였는데,
우리는 오늘 복음을 읽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참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복음의 내용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동작들,
다시 말해서 빵을 ‘들고’, ‘축복하시며’, ‘떼어’, ‘나누어 주셨다’라는 네 동사가
예수님의 성찬 제정문과 엠마오 발현 이야기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동작의 연속성’을 통해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성찬례를 제정하시고, 부활하신 다음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식탁에 앉아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분께서 바로 같은 예수님이심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사제를 통해서 거행되는 미사 안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주님’(요한 6,51 참조)께서
우리 안에 찾아오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이 놀라운 신비로 우리를
당신 생명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또한 주님과 더욱 깊이 일치하며 우리도
누군가에게 생명의 주님을 나누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빵’이 되도록 합시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렇게 말한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
즉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생명을 주는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S.Th., III, q. 65, a.1 ad 1)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종합일 뿐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근원적인 힘이요, 표현 양식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졌다고 표현한다.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 현존의 신비뿐 아니라, 십자가의 신비,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두 번씩이나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25)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순간 행하신 것을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이 반복해서 행해야 한다는 그분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의 행위를 반복하는 일이 단순히 회상하는 행위가 아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기념(anamnesis)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성체성사적 행위를
그분이 부여하셨던 충만한 의미와 더불어 현재에 재생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식탁을 주관하고 말씀을 반복하시는 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 제사를 거행하는 사제는 다만 그분의 투영에 불과하다.
파스카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십자가의 봉헌과 부활로 이루어진 시기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그 먼 과거가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6)
여기서 전한다는 말의 시제가 현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체성사의 거행은 충만한 사랑으로 역사 전체를 뒤덮는 죽음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사는 사랑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죽기까지
온전히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한다.
성체성사가 이렇게 거행되지 못하고 우리에게서 먼 이야기로 되고 만다면
그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에 불과하고,
새롭고 신선한 분위기를 창조해주는 기념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고, 기억인 동시에 예언이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마지막 표현이 아니다.
그 사랑의 마지막 표현은 오로지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임하게 될
하느님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마르 14,2 참조)를 마시게 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은 성체성사에 대한 직접적인 의미는 없다.
그러나 복음사가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때 행하실 바로 그 행동들을 그분께 돌려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16절)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통해 마련하신 음식을
사도들이 군중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오늘날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람들, 사제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이다.
우리 가운데서 성체성사를 재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말씀뿐이다.
여기서 사도들의 행위는 외적 행위뿐 아니라, 자신도 성체가 되어야 한다.
만일 성체성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기념이라고 한다면,
그 성체성사의 거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연 어느 정도로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베풀어 주신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생활한 것이 못 되는 기념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체성사가 오직 우리의 존재 그대로의 봉사와 참여와 형제애가 봉헌될 때만 참되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렇게 할 때만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왕국의 결정적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그분의 죽음에 대한 참된 기념과 선포가 될 것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이렇게 지내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바치신 그 사랑의 행위가
지금의 나를 통하여 계속 선포되고 전해질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사랑과 나눔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이다.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을 때에
우리 자신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나를 봉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를 구체적으로 살아가며 그 신비를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성체와 성혈의 신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
1. 전례적 의미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 전례적 취지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룩하기 위한 실천적 지혜가
바로 자신과 세상의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성사적 변화를 거행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임을 일깨우고자 함입니다.
2. 카파르나움 평원에서의 엇갈린 반응, 열광하거나 의심하거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 평원에서 오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 앞에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이때 배고팠던 군중은 많아진 빵에 열광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광하는 군중을 떠나 근처의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좀 더 차분하게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빵을 구하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빵을 구하라.”(요한 6,27)고
그분이 말씀하시자 말귀를 못 알아들은 군중이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였고,
그분이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35.41.51).
빵에만 열광하던 군중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거나,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하며 떠나갔습니다.
빵을 배불리 먹을 때에는 열광하던 군중이 이렇게 의심하거나 반문하며 떠나버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결단을 재촉하셨습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67).
믿든지 떠나든지 하라는 매우 단호한 어조였습니다.
그러자 망설이며 눈치만 보면서 선뜻 대답하지 못하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나서서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68).
그다음, 생명의 물에 관해서는 예루살렘에서 초막절 축제 마지막 날에,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요한 7,37-38)이라고 군중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도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예언자나 메시아로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분이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2.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2003년에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는 제목의 회칙을 반포하여
성체성사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확정하였습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성체성사에 관해
공식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기점은 트리엔트 공의회입니다.
이 회칙에 따르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 안에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어
성체와 성혈로 거룩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표명했는데,
이는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성체성사에 관한 계시적 언급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해석해 놓은 성전(聖傳) 즉 거룩한 전통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거룩한 변화를
중세 유럽의 철학적 사유로 엄정하게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변화에 대한 이 세 가지 형용부사,
즉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라는 트리엔트식 표명은
중세에 특유한 형이상학적 용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한다 해도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성서적 형용부사 이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체성사의 질료인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개입 없이도,
즉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전제하지 않고도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세와 근세에 성체성사를 둘러싼 해프닝이 두 가지 일어났는데,
트리엔트식 성체 교리 설명의 한계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3. 성체성사를 둘러싼 현실 하나 : 루터는 뛰쳐나가고…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베드로 대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던
교황청 관료들의 부패와 과도한 모금 행위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1517년에 독일 비텐부르크 성당 문에 내걸었습니다.
이 항의에 대해 레오 10세는 파문으로 응수했고
결국 이 파문장을 찢어버린 루터는
성체성사를 비롯한 성사의 효력 모두를 폐기한 채로 가톨릭교회를 뛰쳐 나갔습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직무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제정된 것인데,
과도한 모금 행위와 이로 말미암은 부패한 사제상은
파스카의 역사적 정신에 대한 섬김과 함께 상호 섬김과
그것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섬김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성체성사의 거룩한 변화를 인효적(人效的)으로 – 사효적(事效的)으로가 아니라 -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의 항의는 정당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이를 종교적 관용으로 수용하고
부패상과 과도한 모금 행위를 중단했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문으로 응수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서방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필요조건인 사제직의 섬김 윤리가 관철되지 못하는 바람에 생겨난
역사상의 해프닝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를 뛰쳐나간 루터와 그에 동조한 개혁가들이 세운 공동체들
역시 성사적 효력 자체를 부인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성사 없는 공동체로 남아 있습니다.
성사 없이는 교회성도 담보할 수 없기에, 가톨릭교회 공식 문헌에서는,
‘개신교 공동체들’이라고만 쓰지 ‘개신교 교회’라고 부르지 않으며
교회 일치 운동에 있어서도 그들 개신교 공동체가 성체성사에로 돌아오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당시까지 이단으로 단죄했던
개신교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일치 교령’을 반포함으로써 재일치(在一致)를 향한 담대한 도정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만
재일치로 향한 여정에서 가장 큰 관건은
이 갈라진 형제들이 성체성사에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4. 성체성사를 둘러싼 현실 둘 : 브루노는 화형당하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설명은
이미 그전부터 행해져 오던 성체성사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반발한 인물이 있습니다.
당시 교회가 이 거룩한 변화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차원에서
실체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식으로까지 과도하고 무지하게
성체성사의 거룩함을 가르쳤던 관행에 반발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 브루노(1548-1600)는
자연과학의 이론을 인용하여 모든 물질에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고 있으며,
성체성사 중에 빵과 포도주가 물질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가 아니라 마법사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학술적으로 반박하였습니다.
브루노의 이 같은 주장은 빵과 포도주의 실체적 변화를 과도하게 주장했던
당시 교회 교도권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 그 은총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성체성사의 신학적 본질에 비추어 보면
역시 초점이 빗나간 반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책임은 애초에 성체성사 교리의 프레임을 잘못 짜 놓은 교회 당국에 돌아가는 것이지,
문제를 제기한 브루노에게 돌아갈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교권 당국은 끔찍하게도 그를 화형시켜 버렸습니다(1600년).
이는 성체성사의 충분조건인 성령의 개입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데서 생겨난 역사적 해프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분위기의 일단을 잘 말해줍니다.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브루노를 화형시킨 사건에 대한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에 브루노에 대한 사형 선고가 부당하다는 재심 판결을 내렸고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였습니다.
5. 성체와 성혈 신심의 실천을 향하여
오늘 전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성체와 성혈의 성사에 참여하여 삶과 세상일에서 거룩한 변화를 이룩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아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세우셨는데,
교회는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성찬례를 성체성사로만 좁혀서 기념하는 관행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우리 영혼을 양육하는 생명의 빵이라면,
그리스도의 피인 성혈은 우리가 사랑의 희생을 각오하고 다짐하는 생명의 물인데,
성체와 성혈의 신심은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하느님 나라로 이끌기 위하여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기운도 얻어야 하지만 우리가 바칠 희생도 각오해야 하는데,
희생을 아끼려는 오래된 관행은 성혈 신심을 망각한 데에서 기인한 듯합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 대축일인 오늘, 생각해 볼 주제는 균형의 회복입니다.
첫째, 성령의 개입 및 그리스도 현존에 대한 믿음이라는 성찬례의 충분조건과
섬김으로 나타나야 할 사제직의 윤리라는 필요조건 사이의 균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둘째, 이를 위해 우리가 거룩한 기운을 얻기 위한 성체 신심과
우리의 희생을 다짐하는 성혈 신심도 균형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성찬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나타나야 할
인격의 거룩한 변화와 세상의 거룩한 변화 사이의 균형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이는 믿지 못하면 떠나야 할 만큼 너무도 중요한 계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온 군중들에게
"말씀"도 주시고 "치유"도 해주시며 돌보시다가 어느덧 날이 저뭅니다.
이제 군중에게 육신의 양식도 절실해질 만한 시간이 된 것입니다.
"군중을 돌려 보내시어 ...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루카 9,12)
놀랍게도 제자들이 군중의 필요를 알아채네요. 그리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그 말투가 정보 전달이나 청원의 성격보다 어째 명령에 가깝게 들립니다.
흔히 사람은 은총을 통해 영의 세계를 접촉하고 맛보기 전까지는
직관이나 영감, 믿음보다 데이터와 논리, 합리성에 더 의존하기 마련이고,
타인에게도 그걸 당당히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경험한 세계까지는 그것이 우위를 차지하니 그게 전부라 여기는 겁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예수님의 말씀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담백합니다.
제자들의 형편과 현실적 사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던지시는 이 말씀은,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입니다.
"저희에게는 ...밖에 없습니다."(루카 9,13)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정해 주시고 발휘하도록 틈을 내어주시는 데 반해,
제자들은 이성적으로 자기들의 한계를 파악하고 거기에 스스로를 묶어둡니다.
하느님의 시선이 인간의 "최대치"를 바라보시는 반면,
인간의 시선은 자기들의 "최소치"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축소 시키는 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제자들이 "...밖에"라고 지칭한 보잘것없는 소량의 음식을 가지고
예수님은 그것들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풍부한 봉헌물이라도 되는 듯
정성을 다해 하느님께 바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지요.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국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게 된 것입니다.
빵과 물고기의 양이 늘어난 이 기적이 예수님의 기도 중에 일어났는지,
제자들이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 9,17)는 말씀으로
그들과 함께 영육의 풍요와 기쁨, 기대감과 희망을 누릴 뿐입니다.
논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경계를 넘어서면 숫자든 수치든 타이밍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제1독서는 살렘의 임금 멜키체덱이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빵과 포도주로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창세 14,18)가 마련한 빵과 포도주는
세상을 구원하신, 영원한 사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미리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 아브람이 멜키체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은 십일조 전통의 시초가 됩니다.
이는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레위 27,30)라는
계명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러면 너희 성안에서 너희와 함께 받을 몫도 상속 재산도 없는
레위인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배불리 먹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실 것이다."(신명 14,29)라는
규정에 잘 나타나 있듯 "나눔"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마지막 만찬의 장면이
사도 바오로의 입으로 전해집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1코린 11,24)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1코린 11,25)
예수님이 당신 몸을 베어내고 헐어내고 쪼개어 내주시는 살과 피는
오로지 "너희를 위한", 즉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사랑, 사랑, 흔히 말들은 많이 하지만 이처럼 어마어마한 사랑을 흉내 낼 수 있는 은총은
(아쉽게도, 다행스럽게도) 아무에게나 주어지진 않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나눔의 보람과 기쁨이 넘실대니 더 이상 이 현장은
제자들이 말했듯 "황량한 곳"(루카 9,12)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주시기보다 제자들의 손을 통해 나누어 주신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무언가를 나눌 수 있도록, 줄 수 있도록 마련하시는 분이 주님이시고,
인간에게는 순명하는 분배자의 역할이 맡겨졌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손에 쥐어 주시는 모든 것에는
이처럼 당신의 뜻에 따라 나누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물리적으로 살과 피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와 내 가족이 독식하여 우리의 살과 피가 될 것을 나누어
그것이 필요한 이웃의 살과 피가 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실상 나눔은 죽음의 경험입니다.
물리적으로 나와 내 식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려는 욕구의 중단이고
내 생명에 더해질 양분의 포기이기에 일차적으로 볼 때 죽음의 체험이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의 인연에서 죽음을 고한 그 양식과 재화가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나누어지고 베풀어질 때
그에게 새로운 생명이 됩니다.
나의 죽음이 타인에게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대부분의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명을 내놓으라는 요구 앞에 서지는 않지만, 예수님처럼 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손에 쥐어주신 모든 것을
나와 내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 이웃을 위해 나눌 때,
그 유대와 연대의 연결 고리를 통해 생명이 이어집니다.
실제로 목숨을 바쳐 생명을 주신 예수님보다,
열 달을 품어 생명을 주는 여느 엄마들보다,
훨씬 쉽고 덜 고통스러우면서도 보람과 기쁨은 그에 못지않은 생명의 나눔이
오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는 우리를 재촉합니다.
아무리 작은 나눔이라도 그 안에는 죽음과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나누고 축복하는 우리는 모두 멜키체덱과 같은, 예수님과 같은 사제입니다.
이 사제직에 참여하는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