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양동 네 거리, 정확히 말하면 어린이대공원에서 구의동 네 거리를 지나고 동부경찰서를 지나 자양동 네 거리가 나오면, 코너에 있는 주유소에서 횡단 도로를 건너 10 여 미터 가다 보면 길옆에 어떤 아주머니 사진이 간판처럼 걸린 집이 나온다. 자세히 보면 길옆에 '영남(英男)보신탕'이라는 간판이 서 있다.
지하철을 2호선을 타고 가다 보아도 자양동 네거리 근방에서 한강 쪽을 바라보면 지하철 밑으로 그 아주머니의 사진이 보인다.
"어허! 저 아주머니가?"
가던 길을 멈추고 지하철 자양 역에서 내려, 자양동 네 거리 쪽으로 걸어와 횡단 보도를 건너면 10 여 미터에 지점에 주차장 공간이 확보된 영남보신탕 집이 있다.
식탁에 숨은 여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편 맞은 편에 있는 주방 앞의 조그마한 식탁 앞에 앉아 고기와 뼈를 다듬고 있는 사진에 보이던 아주머니의 실물(實物)이 보인다. 키가 작은데다가 마루바닥에 앉아서 일을 하고 계시므로, 어떤 때는 식탁에 가리어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르나, 그 아주머니가 바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가장 많은 개를 삶아내는 유명한 영남보신탕의 아주머니이다.
인생에는 곡절(曲折)이 있고 굴곡(屈曲)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영남보신탕 아주머니의 그 많은 인생 곡절과 굴곡을 다 탐험할 수 없다. 그래서 이야기는 두 딸 중에 큰 아이는 대구에 있던 친정 집에 맡기고, 작은아이는 남동생한테 맡긴 채 서울로 홀로 와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던 대목부터 시작한다.
먹고 살 곳을 찾아 서울에 와서 신문을 보니 직업 소개소 광고가 나와 있었다. 찢어서 손에 들고 찾아갔다. 용산 역 앞에 있는 커다란 건물의 지하실이었다. 어찌나 어두컴컴하고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던지, 처음에는 무서워서 들어갈 염두도 나지 않았다. 일 자리를 찾으려고 온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인간(人間) 시장(市場)'이었다.
아이들이 보고싶어
식당에 가서 허드렛일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얼마 후에 어떤 여인이 찾아왔다. 여의도에서 한식집을 하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에게 선택되어 여의도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일을 해야 하는 식당이었다. 밤 열 시에 끝나 버스를 타고 거처(居處)에 오면 열 두 시가 넘을 때가 많았다. 곤한 잠을 자고 새벽 다섯 시에는 일어나서 여의도로 가야했다. 점심과 저녁에 손님이 많은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잠시도 쉰 일이 없다. 무슨 일이던지 손에 잡고 노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이 아주머니의 생활 철학이었고, 그 때까지 살아온 인생 그 자체였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해도 일은 어렵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아이들만은 친정이나 남동생 집에 맡기지 않고, 엄마 품안에서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났다.
"칼국수 장사라도 하며 아이들과 같이 살려고 합니다."
그 집에 간 지 두 달이 되던 날,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을 담은 자신의 뜻을 식당 주인에게 말했으나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더 있으라는 말을 어렵게 뿌리치자, 그 때서야 주인은 아주머니가 정말 떠난다는 사실을 실감한 모양이었다. 새로 만드는 식당에서 쓸 식기나 도구들은 하나도 사지 말라며, 자기 집에서 쓰던 것들을 용달차에 한 차 실어주었다.
장안평에 손바닥만한 가게를 얻었다. 코딱지 만한 주방 앞에 식탁 두 세 개 놓으면 그만인 작은 공간이었다. 주방을 만들고 식탁 몇 개를 놓았다. 아이들과 함께 잘 자리가 없었다. 천장에 마루를 놓고 사다리로 연결하여, 아이들은 식당 천장 방에 있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 둘을 품고 잠자리에 누우면 못난 자신이지만 어미로서의 도리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술은 정말 못 팔아
처음에는 간판도 없이 칼국수 장사를 했다. 밀가루를 사다가 반죽을 하고, 방망이로 밀고, 칼로 채를 썰 듯 반듯하게 국수를 만들고, 국물을 맛있게 해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내놓았다. 한 사람 두 사람 단골 손님이 생기더니, 어느 날 갑자기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달라는 음식의 가지 수도 늘어갔다. 어떤 사람은 떡라면을 달라하고, 어떤 사람은 백반을 달라하고, 저녁에 오는 손님은 술을 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떡라면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라면에 가래떡 썬 것을 넣으면 떡라면이 되는 것을 알고 시장에 갔다.
흰떡도 가능하면 좋은 떡을 사고 좋은 김을 골라 사서 구어 부셔놓고, 달걀을 사서 흰자는 흰자대로, 노른자는 노른자대로 지단을 붙여 놓았다. 떡라면을 주문하면 라면에 떡을 넣고 끓인 다음에 김 가루 풍성하게 넣고 달걀 지단을 한 주먹씩 넣어 주었다. 다른 집의 떡라면에 비하여 양도 많고 맛도 있다며 사람들이 몰려왔다.
백반을 달라는 것은 백 미터 선수에게 트랙을 돌아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었다. 평생 부자 집에서 살았으므로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만드는데는 선수였다. 뜨거운 밥과 뜨거운 국, 그리고 간단하게 만든 반찬들이 어찌나 맛이 있는지 금방 백반 장사는 불이 붙었고, 식당 주위에 있던 중소기업체들의 매식 손님이 늘고, 단골 배달 회사가 늘어났다.
그러나 손님 중에 술은 달라는 것만은 질색이었다. 중년 나이에 식당을 한다며 술까지 팔다가 술에 취한 취객(醉客)이 나타나면 감당할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술을 달라고 하여도 한 동안 술만은 팔지 않았다. 그랬더니 어떤 때는 손님들이 가게에서 한 병 두 병 술을 사 가지고 와서 마시는 손님이 있고, 어떤 손님은 한 병을 가지고 와서 마신 다음에 음식 집에 가서 먹으면 한 병 먹고 두 병 값을 낸다며, 팔지도 않은 술 한 병 값을 덤으로 내놓고 가는 손님도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한 손님이 가게에서 소주 두 박스를 가지고 와서 한 박스 값만 내고 팔라고 하였다. 그 때에 마지못해 받아 놓은 소주 한 박스가 이 식당에서 술을 팔게 된 동기가 되었다.
영남(英男)식당
손님이 많아졌다. 하루는 주인 집 아줌마가 와서, 이렇게 손님이 많은데 간판도 없이 어떻게 장사를 하느냐며 간판을 달라고 하였다. 손바닥만한 가게에 간판은 무슨 간판이냐고 거절하였으나, 그래도 고향 이름이나 아이들의 이름을 따서 식당 간판을 다는 것이 좋겠다고 강권(强勸)하였다. 일을 마치고 천장 방에 올라갔더니, 어미를 기다리던 불쌍한 두 딸이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두 아이 중에 큰 딸 영남이의 이름을 따서 '영남식당'이라 하기로 했다.
그 후에 영남식당 간판은 중화동으로, 교문리로, 상봉동으로 이전한다. 가는 곳마다 손님들이 들끓었다. 중화동에서 영남식당을 할 때에는 일하는 아줌마가 무려 여덟 명이나 되었고, 점심때면 식당에 와서 먹는 손님 말고도, 배달하는 식사가 150 그릇이 넘었다. 말이 150 그릇이지, 아침 매식과 저녁 매식 손님을 합하고, 매식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늘 오시는 손님들을 합하면 하루에도 영남식당의 밥을 먹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겨울철이 되면 배추김치를 1000 포기나 담아야 했고, 김포 평야에서 가져오는 쌀은 한 달에 스무 가마니가 넘었다.
"저를 좀 보세요."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사진 속의 아주머니는 자신의 머리와 키를 보라고 했다. 자기 세대들은 태어나면서 시집을 갈 때까지, 그리고 아무리 부잣집에 시집을 가더라도 평생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다녀야 했고, 평생 배가 부르게 먹은 일이 없어, 키는 크지도 못하고 머리의 상수리는 납작하게 가라앉았다고 한다. 고생을 하면서 살지 않은 세대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겠지만, 이것만은 사실이다. 요즘 아이들의 머리를 보면 상수리가 부처님의 머리처럼 동굴 납작하나 아주머니의 세대들은 머리의 상수리가 납작 일색이다.
그 뜨거운 국물이
단체 배달 매식을 하는 회사들에게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반찬과 주메뉴를 늘 바꾸어 순환 시켜야 하게 때문이다. 하루는 큰 회사 직원들이 먹을 엄청나게 많은 양의 칼국수를 끓여 가지고 머리에 이고 갔다. 가다가 보니 머리가 뜨거웠다. 팔팔 끓인 국수 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뜨거운 국물이 흘러도 너무나 많이 이고 가는 길이었으므로 혼자 내릴 수가 없었다. 계속 걸었다. 뜨거운 국물은 이마를 타고 젖가슴까지 내려 흘렀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간신히 길에 내려놓고 보니, 벌써 이마와 얼굴, 심지어 젖가슴까지 벌겋게 화상(火傷)을 입었고, 허옇게 진 물어 부풀어올랐다.
말이 장사를 잘 하고 손님이 많지, 손님이 많기 위해서는 이런 고생이 매일 같이 일어난다. 그 회사 직원들이 낮에 있었던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좋은 약을 사 가지고 와서 흉도 남지 않고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지금도 그 때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화상으로 몸에 났던 상처는 아물었지만, 그 때에 느꼈던 '이 고생을 언제까지 하면서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마음의 상처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리운 아기 아빠
중화동 식당을 남에게 넘기고 잠시 교문리에 가서 영남식당을 열었다.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시대였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지역이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얼마 후에 상봉동에 와서 다시 영남식당의 문을 열었다. 장안평 칼국수 장사에서 중화동 식당과 교문리 식당을 거치면서 밥장사만은 자신이 있었다. 상봉동 역시 문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아 손님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성업(盛業)이었다.
아이 둘도 상당히 컸다. 갑자기 애 아빠 생각이 났다. 애 아빠는 아들을 보는 것이 소원(所願)이었다. 남편이 개고기를 먹기 때문에 아들이 없다는 생각에 그 좋아하던 개장국과 개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낳은 애가 바로 큰 딸 영남이다.
비록 기다리던 아들이 아닌 딸을 낳았지만, 이 딸은 '아들을 낳을 뿌리가 된다'는 의미로 꽃뿌리 영(英) 자(字)에 사내 남(男) 자(字)를 써서 영남(英男)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영남이가 태어나서 1년이 되어 돌날이 왔다.
아빠는 소 한 마리를 잡고, 그것도 모자라 돼지 두 마리를 더 잡은 다음에, 쌀 세 가마를 쪄서 동네 할머니들이 떡을 하도록 했다. 30 여 년 전에 시골에서 이만한 돌잔치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실제로 그 마음에서도 몇 십 년 내에 없었던 큰 잔치였다. 영남이의 돌잔치는 그렇게 컸고, 성대(盛大)했다.
영남이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상냥하고 귀엽고 샘도 많았다. 옷을 입어도 좋은 것을 입으려 하고, 무엇을 하던지 남한테 지려고 하지 않았다. 고등하교 2학년 때까지는 공부도 열 손가락 다섯 손가락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성격이 활달하고 발랄하여 밴드부 단원이 되기도 했다.
아이 둘을 길러보니, 둘째 아이는 밥만 먹이면 아무 말도 없어 있는지 조차 모르고 키웠으나. 영남이만은 그렇지 않았다. 어렵고 없는 돈에 영남이가 해 달라는 것은 다 해주어야 제 직성(直性)도 풀리고 엄마의 직성도 풀렸다. 국악원을 다니겠다면 국악원에 다니도록 하고, 무용을 배우겠다면 무용 학원에 다니게 하고, 심지어 발레를 배운다면 발레 학원까지 보내주었다. 그런 영남이의 이름을 간판으로 걸고 10 년 장사를 하면서 왜 아니 남편 생각이 났을 것인가.
너무나 양(量)이 적다
애들 아빠 생각을 하다보니, 생전에 그렇게도 먹고 싶어하던 개고기를 잡수지 못하게 한 것이 미안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고, 낳지도 못하는 아들을 낳으려고 그 좋아하시던 개고기를 드시지 못하게 하였으니, 절로 인생의 무상을 느꼈다. 남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아주머니도 어려서 먹던 개고기 생각이 났다.
시장에 갔다. 보신탕 집이 있었다. 옛날에는 개고기로 장국을 끓였다 하여 개장국 집이라 했는데 어느 사이에 이름마저 보신탕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변하여 있었다. 보신탕 한 그릇을 시켰다.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실로 20 여 년만에 먹어보는 보신탕이었다. 맛이 있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금방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양이 형편없이 적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 그릇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여인으로서의 체면도 있고 해서 그냥 나왔다.
다음에 또 다른 집에 갔다. 역시 맛이 있었으나 양이 적었다.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집에 가서 개장국이 아니라 개고기 1인분을 시켜 보았다. 고기도 양이 적었다. 꼭 아이들 손바닥만한 것이 1인분이었다. 그 다음에 가서는 1인분 반을 시켜 보았다. 역시 손바닥보다 적은 양이었다.
사실 한국 음식점에 가서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이 놀라는 일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호주와 같은 곳에 가서 식당에서 무엇이든 1인분을 시키면 한 사람이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온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은 식당에 가서 두 사람이 시키면 2인분이 아니라, 3인분은 시켜야 두 사람이 겨우 먹을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식당 주인들은 사기꾼들이다!"
한국과 일본을 자주 오가는 내 외국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맞는 말이다. 양만 적은 것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의 음식은 몇몇 대중 음식을 제외하면 양에 비하여 값은 형편없이 비쌌다. 개고기 보신탕은 더욱 그렇다. 1인 분에 당시 8천 원을 받고 있었으니, 1인 분 반(半)이면 1만 2천 원이었고, 적은 돈도 아니었으나 아주머니에게는 식성이 차지 않았다.
"왜 이리 양이 적을까?"
개고기 삶아 놓고 한 점도 못 먹어
그 다음에는 아예 청량리 시장에 나가 열 근을 사 가지고 와서 집에서 삶았다. 개고기 한 번 실컷 먹어보자는 심사(心事)였다. 그러나 삶고 보니 양이 상식 이하로 줄었다. 알고 보니 물을 먹인 개고기였다. 물 먹인 개고기는 개를 잡기 전에 혈관에 주사기로 물을 넣어 근 수를 늘렸으므로, 끓는 물에 넣어 삶으면 물이 빠져 형편없이 고기가 줄고 맛도 줄어든다.
거리에서 파는 불량 개고기는 전문가가 보면 금방 안다. 칼로 개고기를 썬 다음에 휴지 조각을 붙여 보면, 물을 먹이지 않은 개고기에 붙은 휴지는 아무리 떼어내려고 하여도 잘 떨어져 나오지 않으나, 물을 먹인 개고기에 붙은 휴지는 금방 떨어진다.
그 나마 다 삶아 놓고 일이 끝난 다음에 먹으려고 하였더니, 용케도 한 손님이 개고기 냄새가 난다면 달라고 해서 한 점도 먹지 못하고 다 내주었다. 또 개고기 열 근을 사다가 삶았다. 그 날 따라 단골로 다니던 중소기업의 사장 한 분이 사원들과 저녁에 고기와 소주를 곁들이며 식사를 하러 왔다. 점잖은 분이었다. 그런데 그 점잖은 사장님이 부엌에 들어와 개고기 삶은 냄새가 난다면 개고기를 내놓으라고 데를 썼다.
부엌 옆에는 아이들과 쓰는 허드레 방이 있었다. 삶아 놓은 개고기를 양념과 함께 소반 채 내 놓았다. 사장님은 염치도 없이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그 다음에도 둘째 아이가 개고기 생각이 난다해서 또 사다 삶았으나, 그 때도 또 다른 손님이 개고기를 내놓으라고 해서 다 빼앗기고 말았다.
영남이 엄마가 하면 잘 할 터인데....
이유는 한 가지였다. 영남이 엄마가 삶은 개고기는 다른 보신탕 집의 개고기와는 맛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었다. 소문이 금방 났다. 소문이 나자 개고기가 없다면 다른 고기는 먹지 않겠다면 개 값을 선불(先拂)로 주며 제발 개고기 좀 사다가 삶아 달라고 사정하는 사람도 있었고, 개고기가 없다면 다른 음식을 들지 않는다며 없는 보신탕을 당장 해내라고 떼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식당을 하면서 조금씩 보신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날이 지남에 따라 밥 찾은 손님보다 보신탕을 찾은 손님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 때에 건물주인 집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아니야, 영남이 엄마!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야. 옛날엔 고기를 파는 육간(肉間)을 사람을 백정(白丁)이라고 쳐다보지도 않고, 상놈 중의 상놈으로 천대(賤待)하였지만, 요즘 세상은 어데 그럽니까? 소고기면 어떻고 돼지고기면 어떻고 개고기면 어때! 이왕에 장사를 하려면 돈을 버는 장사를 해야 해. 한 번 해 봐. 내가 건물의 옹벽을 털게 하고, 뒤뜰도 식당으로 다 쓸 수 있게 해 줄게...."
신화(神話) 창조(創造)
고마운 분이었다. 셋집을 사는 사람이 건물의 옹벽을 턴다면 팔팔 뛰어야 할 주인 아줌마가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옹벽을 털고, 거기다가 넓은 뒤뜰까지 준다며 보신탕 장사를 해 보라고 권했다. 언젠가 남동생도 식당을 그만두고 아예 보신탕 장사를 하라고 말하였다가 애들 시집 못 보내게 할 셈이냐고 역정(逆情)을 내어 다시는 보신탕 장사를 하라는 말을 꺼내지 못한 터였다.
주인 집 아줌마의 말이 하도 고맙고, 보신탕을 찾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 결국은 '영남식당'이라는 간판을 '영남보신탕'이라는 간판으로 바꾸어 달고 본격적으로 보신탕 장사를 했다. 그리하여 몇 년만에 서울 경기 일대에서 가장 많은 개를 삶아 내는 유명한 '영남보신탕'이 되었다. 복(伏) 날이면 하루에 1천 그릇 이상을 팔았다는 신화(神話) 아닌 신화를 낳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화를 낳은 이면(裏面)에는 아주머니가 특별히 생각하여 특별히 창조해 내는 영남보신탕 집의 특별한 보신탕의 맛에 있다. 특별한 생각은 많았지만 그 중의 하나가 왜 보신탕은 여름에만 먹고, 남자들만 먹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보신탕을 먹는 사람들은 여름에만 먹는 음식으로 알고 있고, 전국에 있는 많은 보신탕 집들은 여름 한 철은 성업을 하고 있으나, 가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손님이 줄고, 겨울철이면 손님이 없어 고기 집으로 변했다가 다음 해 봄이 가고 초여름이 되면 다시 보신탕을 해서 파는 집이 많다. 아주머니는 그것은 맛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름에 먹으면 맛이 있으나 봄과 가을, 그리고 겨울에 먹으면 여름과 같은 맛이 나지 않는 것이 보통 보신탕이다. 아주머니는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四季節)을 먹어도 똑 같이 맛이 있는 보신탕을 만들 수 없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래서 아주머니가 창안(創案)해 낸 오늘의 영남보신탕이고, 이 집만은 다른 집은 다 문을 닫아도 춘하추동(春夏秋冬) 손님이 떨어지는 날이 없고, 보신탕 이외는 팔 틈이 없는 집이 되었다.
춘하추동(春夏秋冬) 남녀노소(男女老少) 가릴 것 없어
또 하나 있다. 보신탕이라면 흔히 남자들이 먹은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아주머니는 왜 보신탕이 남자들만 먹고 여자들은 먹지 않으며, 그것도 나이 든 남자들은 먹어도 어린아이들은 먹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그것도 보신탕 맛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주머니는 남녀노소가 다 같이 한 자리에 앉아서 즐길 수 있는 보신탕을 개발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보신탕은 남자들만 먹는 음식이라는 통념이 영남보신탕 집에서만은 통하지 않는 말이 되었다. 영남보신탕 집에 가면 언제나 남녀노소(男女老少)가 따로 없다. 중년 부인들과 새파란 아배크 젊은 청춘들이 오고,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어린아이들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잘도 따라와 잘도 먹고 맛 있다며 돌아간다. 이런 풍경(風景)은 영남보신탕 집 이외에서는 볼 수 없는 영남보신탕 집만의 진풍경(珍風景)이다.
이 유명한 상봉동 보신탕 집을 남에게 넘겨주고, 지난 해, 그러니까 1999년 가을에 이곳 자양동 네 거리에 '영남보신탕' 집을 새로 내었다. 첫날은 오는 손님들에게는 공짜로 보신탕을 대접하는 것이 영남보신탕 집의 관례이다. 영남보신탕이 자양동에 생긴다는, 그것도 사진 속의 아주머니가 직접 하는 보신탕 집이라는 소문이 나자, 어찌나 많은 손님들이 몰려 왔던지, 개 값과 술값, 그리고 밥값으로 2000 여 만 원 어치는 족히 공짜로 나갔다는 것이 개업(開業) 첫날의 후문(後聞)이고, 초저녁에 개고기가 다 떨어져 중간에 온 사람들은 문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는 일화(逸話)를 남겼다.
개고기 부자유친(父子有親)
내가 이 집의 소문을 듣기는 둘째 놈 별이 때문이었다. 큰 녀석 바위라는 놈은 전에 교문리의 소문난할머니집으로 보신탕을 먹으려고 데리고 갔다가, 보신탕 냄새를 맡고 도망을 친 놈이나, 둘째는 친구들과 모란 시장에 가서 개를 사서 보신탕을 끓여 먹고 올 정도로 보신탕을 좋아하고 보신탕 친구들이 있는 녀석이다. 그 녀석이 자양동 영남보신탕 개업식을 지나칠 리가 없고, 자양동 영남보신탕 집이 개업하던 날, 공짜 보신탕을 얻어먹으려고 개고기 동지(同志)들과 저녁에 갔다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은 많고 줄을 서 있는데 개고기가 떨어졌다는 소리에 얻어먹지도 못하고 돌아왔다고 투털대는 소리를 들었다.
"별아! 가 보자."
개고기에 관한 한 큰놈과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아니어도, 둘째 놈과는 부자유친이다. 별이와 함께 자양동 네 거리의 영남보신탕 집을 찾아갔다. 개업한지 두어 달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개업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는 집이고, 계절은 초겨울에 접어들고 있는데, 넓은 홀 안에는 3분의 2 이상의 좌석에 손님들이 앉아 있었고, 여기 저기에 중년 부인들과 젊은애인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다른 보신탕 집처럼 보신탕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써 붙인 삼계탕 메뉴도 없었다. 첫 눈에 이 집은 보신탕 집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중년 부인 젊은 부인을 비롯하여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끼여들어 '개고기 먹기 대회'를 벌이고 있는 개고기 먹기 대회장(大會場)과 같았다.
다른 보신탕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다른 보신탕 집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이 우선 두 가지가 눈에 보였다. 하나는 보신탕 국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고기 갈비였다. 보신탕 국물을 잘 끓인 설렁탕 국물보다는 진하고, 잘 끓인 진 곰탕 국물보다는 엷었으며, 개기름이 한 방울도 뜨지 않은 하얀 보신탕 국물이었다.
"이게 개고기 국물이요?"
"그렇습니다."
"개고기 국물에 왜 개고기 기름이 뜨지 않고, 색깔이 하얍니까?"
"???"
내가 항의(抗議) 하는 조(條)로 이상해서 묻자, 주인은 오히려 그렇게 묻고 있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인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전혀 한 번도 본 일조차 없는 보신탕 국물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은 역시 다른 보신탕 집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개갈비'라는 것을 먹고 있었다. 내가 이상해서 또 물었다.
"저건 뭐요?"
"수육입니다."
"저게 무슨 개고기 수육이란 말이요? 개고기 갈비 아니요? 다른 집에서는 개고기 갈비 정도는 개뼉다귀라고 해서 공짜로 주던데, 이 집은 용가리 통뼈인가, 어찌해서 개갈비까지 돈을 받고 판단 말이요?."
"먹어 보시면 압니다. 저희 집은 개고기 수육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저것은 개고기 갈비 수육이고, 저기 보이는 것은 개고기 목살 수육이고, 또 저기 보이는 것은 개고기 배바지 수육입니다. 손님들의 취향에 따라 준비해 드리고 있습니다. 어느 것을 드시겠습니까?"
손톱이 세 번이나 빠져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집이었다. 수육을 내놓는 방식이 생전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2인분을 시키면 덩어리로 2인분을 가지고 나와서 손님상에 앉아 가위로 크막하게 깍뚝깍뚝 썰어 접시 위에 3분의 2가 덮이도록 올려놓고, 나머지 3분의 1에는 옆에서 끓고 있는 보신탕 국물에 넣어 살짝 데친 부추를 옹골지게 한 줌씩 집어 풍성하게 내어주고 있었다.
특히 외모로 보아 감탄한 것은 개갈비 수육이었다. 2인분을 시키면 개갈비 덩어리와 갈비 껍질 덩어리 두 토막을 크막하게 가지고 나온다. 우선 긴 갈비를 세로로 가르고, 긴뼈에 붙은 살을 길이로 3분의 2즘 발라 밑 덩어리 살에 붙여 놓고, 덩어리 갈비 껍질은 임절미처럼 잘둑잘둑 가위로 잘라 옆에 놓고, 그 다음에는 예의 부추를 풍성하게 접시 한 쪽에 담아낸다.
"개고기 갈비를 수육이라 팔고, 이렇게 가위로 희한하게 요리해 내는 무슨 내역이 있습니까?"
"예! 이 방법을 개발하기까지에는 어머님 손톱이 세 번이나 빠지셨다고 합니다."
"손톱이 빠져?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영남보신탕 주인 아주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청년은 알고 보니 큰 사위였다. 처음에 아주머니가 상봉동에서 보신탕 장사를 시작할 때에 개고기를 덩어리로 내주기 시작한 것은 아주머니가 다른 집에 가서 아무리 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머니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는 개고기를 덩어리로 많지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다른 집 보다 많은 양을 주니까 손님들 중에는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고 고양이고기를 파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거나 빈정대는 사람이 있었다. 잘 해 주어도 잘 해 주는 정성을 모르는 날라리 손님이었다. 하도 듣기가 가소(可笑)로워, '엣따, 이거다. 보아라, 이게 고양이 고기냐'고 보여 주기 위하여 개고기 덩어리를 들고 나와 직접 손님 앞에서 찢어 주기 시작하였다.
아주머니의 손이 남아 날 리가 없었다. 펄펄 끓는 국물에서 개고기를 꺼내어 손님 앞에 가지고 가서 개고기인 것을 확인해 주고, 그 자리에서 손님들이 먹기 좋게 썰어 내놓다 보니, 뜨거운 개고기에 견디다 못한 아주머니의 손톱이 세 번이나 빠졌다고 한다. 손톱이 빠진 것도 나중에는 유명해져서 어떤 손님은 아주머니가 진짜 아주머니냐며 자꾸 손톱을 보자 하고, 보여 주면 '진짜 아주머니'라고 희희낙락하며 보신탕을 시켜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어허, 개고기 냄새가 전혀 나지 않네!
남들이 하지 않는 방법으로 보신탕 장사를 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방법으로 덩어리 고기를 주다보니, 손톱이 세 번이나 빠진 여인(女人), 그 여인이 바로 옛날 상봉동 영남보신탕 집주인 아줌마이고, 오늘의 자양동 네 거리 영남보신탕 주인 아줌마이다.
별이와 나는 처음 와서 먹어보는 집이라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 턱이 없었다. 속는 셈치고, 순전히 보기가 좋아서 수육 중에 갈비 수육을 시켰다.
"어! 이거 개고기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네요?"
별이의 말이었다. 내가 먹어도 보기에는 분명히 개고기 갈비인데 개고기 특유의 노린내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국물도 그랬다. 개고기 국물 특유의 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이 희한한 개고기 수육을 먹다 보니, 별이와 나는 소주 반병씩을 마셨다. 별이나 나나 운전을 하면 안 되는 상태가 되었다. 개고기라면 진저리를 내고 도망을 치는 큰놈 바위를 대리 운전시키기 위하여 영남보신탕 집으로 불렀다.
"바위야! 이거 한 점 먹어봐. 저기 여자들과 아이들도 먹지 않아? 전혀 개고기 같지 않아. 소고기보다 맛이 있다."
바위가 개고기 갈비 수육 한 개를 들고 입에 넣었다. 바위로서는 생전 처음이었다.
"어? 아빠! 이거 개고기 갈비 맞아요?"
"그래, 개고기 갈비 수육이래."
그 날은 그렇게 끝났다. 그 후에 나는 홀로 영남보신탕 집에 가서 보신탕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소주 한 병을 다 먹을 때까지 보신탕 투가리 속에서 개고기가 계속 나왔다. 그렇게 개고기를 많이 넣어 파는 보신탕이었다. 보신탕 속에 든 개고기 건더기로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나서, 식은 국물에 밥을 넣어 끓였더니, 보신탕 한 그릇 가지고 술 실컷 먹고, 배부르게 밥까지 먹었다. 그 때서야 이 집 보신탕의 진미(珍味)를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설구 춘구 하구 추구
작년 1월 3일이었다. 눈이 많이 왔다. 경희중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있는 친구 용태가 왔다. 정초(正初)에 만났으니,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는 중에 용태는 뜻밖에 개고기를 먹자고 했다. 정초에 개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나 하는 짓인 것 같았으나, 불원천리(不遠千里) 찾아온 친구의 제의(提議)라 뿌리칠 수 없었다. 내가 정초에 개고기를 먹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금년도 1월 1일은 어김없이 왔고, 이틀이 지나 3일이 되었다.
"용태냐?"
"응, 나야."
"너 설구 먹으러 갈례?"
"설구가 뭐야?"
선생을 평생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설구란 알기 어려운 말이다. 설구란 내가 지난해에 용태와 함께 보신탕을 먹으면서 생각해 낸 눈 설(雪) 자(字), 개 구(狗) 자, 겨울에 눈을 맞은 개라는 신조어(新造語)이다. 겨울철에 함박눈이 내리면 제일 먼저 밖으로 뛰어나가 뛰노는 놈이 개다. 나는 이 개를 설구(雪狗)라 이름하였고, 봄 개는 춘구(春狗), 여름 개는 하구(夏狗), 가을 개는 추구(秋狗)라고 이름하였다.
"선생이 설구도 몰라? 모르면 와 봐!"
용태가 오자마자 영남보신탕 집으로 데리고 갔고, 설구의 유래를 설명해 주며, 이번에는 개 목살 수육을 시켰다. 나는 돼지 목살 구이는 엄청나게 먹어 보았어도 개 목살 수육을 먹어보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엄청나게 맛이 있었다. 둘이 먹기에는 양도 많아, 흔히 다른 집에서 수육을 먹고 나서 다시 시키는 보신탕이나 볶은밥은 시키지도 못했다.
21 세기 한국 고유 전통 음식
영남보신탕 집은 그런 집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에 밴드부 의장대(儀仗隊) 단원(團員)이었고, 국악에 무용에 발레까지 하고, 겨울이면 용평으로 스키를 타러 다니고, 여름이면 팔당으로 수상 스키를 타러 다니던 미모(美貌)의 큰 딸 영남이는 어느 사이에 부인이 되어, 어머니의 뒤를 이어 주방과 홀을 다니며 손님들에게 서브하고 있다. 내가 영남보신탕 집 아줌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그런 사연을 알 턱이 없는 어떤 손님이 초간장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큰 딸 영남(英男) 여인(女人)에게 부탁했다.
영남 여인이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초간장을 만들어 드렸더니, 고맙다며 팁 2000원을 주고 있었다. 영남 여인은 그 팁을 받아 가지고 어머님 앞에 와서, 어제도 어떤 손님이 10.000원을 주어 종업원들과 나누어 가졌다며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비록 지난날에는 남모르는 고생이 많았지만, 지금은 행복한 모녀(母女)가 되었다.
세계인(世界人)이 몰려온다
20세기는 갔다. 21 세기가 되었다. 지난 20 세기를 돌이켜 볼 때에 한국인은 세계 애완(愛玩) 동물(動物) 애호가(愛好家)들로부터 야만인(野蠻人)이라는 지탄(指彈)을 받고 살아왔다. 개고기를 먹기 때문이었다. 복(伏)날이 되면 세계 몇 몇 나라에서는 한국대사관 앞에 애완 동물 애호가들이 몰려와서 개고기 먹는 나라 한국인을 규탄하는 데모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그렇게 개고기 먹는 것을 규탄하는 사람들의 나라에서 한국에 온 천주교 신부(神父)치고 개고기를 안 먹어본 사람이 없고, 그들 나라에서 한국에 관광을 온 사람들 중에 개고기 보신탕을 먹고 가는 사람들이 날로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일부 일본인들은 일부러 개고기를 먹으로 한국에 오기도 한다. 그들이 자기 나라에 가서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고 왔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개고기를 먹고 난 다음에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내게 하는 말을 다음과 같다.
"굿! 굿! 베리 굿! 코리안 도구 스테이크 이즈 넘버 원 스테이크 인 더 월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에서 개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개고기는 5천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방의 등불인 한국인이 사랑해온 세계(世界) 유일(唯一) 한국(韓國) 고유(固有) 전통(傳統) 음식(飮食)이다. 20 세기는 착각(錯覺)의 시대(時代)였다. 세계의 애완 동물 애호가들은 한국인들이 먹는 개고기를 자기들이 귀엽게 키우는 치와와 같은 애완 동물인 개인줄 알았다.
그러나 21 세기에는 그들이 한국인들이 먹는 개고기는 애완견(愛玩犬)이 아닌 식용견(食用犬)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 때가 되면 한국에는 세계에서 개고기 먹으려고 오는 사람들이 금강산을 보려고 오는 사람들보다 많을 것이다. 금강산(金剛山)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말이 있다. 외국 관광객들이 떼를 지어 금강산을 보기 전에 보신탕을 먹고 나서 금강산을 구경할 시대가 바로 21 세기이다.
희망(希望)의 메세이지
나는 진심으로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고, 또 그런 날은 분명히 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이지를 21 세기 초야(初夜)에 남긴다. 그 때를 위해서라도 우리 나라에는 자양동 영남보신탕 집처럼 개고기 냄새가 나지 않고, 춘하추동(春夏秋冬)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리지 않고 찾는 자랑스런 한국의 보신탕 집이 많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보신탕 장사를 하더라도 영남보신탕 집 아주머니처럼 손톱이 세 번이 아니라 열 번이 빠지더라도 전혀 남들이 하지 않는 방법으로, 다시 말하여 세계인인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보신탕의 개발과 보신탕 문화의 만개(滿開)가 절실하다. 그 날은 온다. 분명히 온다. 그 날을 위하여 한국 보신탕 집주인들의 분발(奮發)을 부탁한다. (서울 자양동 네 거리 영남보신탕 집 전화 번호/02-452-3331, 사위/김태중)
첫댓글 너무 길다 흐흐
여기 선제형,행수형 처음 신달자 들어왔을때 같이 갔던곳~ㅋㅋㅋ개고기로 엮어진 끈끈한 동지애~..ㅠㅠ
가고싶다 ㅋㅋ 가죠~~!
어떻게 올 여름은 개타령이야.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