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복음서 여러 곳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아래와,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던 여인이며(마태 27,56.61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1-18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우리 시대의 교회가 여성의 존엄과 새 복음화와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신비를 더욱 깊이 성찰하도록 부름받았으며,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가 그 본보기로 합당하다고 보시어,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예식이 기념일에서 축일 등급으로 로마 보편 전례력에 들어가도록 제정하셨다(교황청 경신성사성, 2016년 6월 3일 교령 참조).
본기도
하느님,
외아드님께서 가장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의 기쁨을 전하라 하셨으니
그의 전구로 저희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광 속에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뵈옵게 하소서.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3,1-4ㄴ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1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열정은 있는데, 스승이 없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텅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습니다. 그녀의 세상이 무너졌습니다. 삶의 모든 의미를 걸었던 스승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납니다. 동산지기인 줄 알았던 그가 자신의 이름, “마리아야.” 하고 부르는 순간, 그녀의 세상은 다시 창조됩니다. 그녀는 뒤돌아서서 외칩니다. “라뿌니!” ‘나의 스승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한마디는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따를 유일한 분을 다시 만났을 때 터져 나오는, 존재의 외침입니다.
이 “라뿌니!”라는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내 삶에서 진정 누구를 스승으로 찾고 있는가? 그리고 그 스승을 찾는 나의 자세는 어떠한가? 어쩌면 내가 간절히 찾는 스승의 모습이야말로, 내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울일지 모릅니다.
드라마 ‘미생(未生)’의 주인공 장그래의 삶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평생을 바둑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바둑 스승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그에게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스승은 말했습니다. “바둑판 위에 의미 없는 돌은 없어.” “틀에 박힌 사고로는 더 나아갈 수 없어. 틀을 깨야 해.” 또 바둑에서 졌다고 세상에서 진 것은 아니라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장그래는 바둑이라는 세상에 ‘열심’이었기에, 그 길을 이끌어 줄 스승을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프로 입단에 실패하고, 아무 연고도 없이 냉혹한 종합상사에 인턴으로 던져집니다. 그곳에서 그는 ‘미생’, 즉 아직 온전히 살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그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스승이 절실했습니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오상식 과장입니다.
오상식 과장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칠고, 때로는 무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그래에게 단순히 업무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장그래가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일에만 집중하려고 할 때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혼자라고 느낄 때는 ‘우리’라는 소속감을 알려주었습니다. 장그래는 그를 통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던 세상의 파도를 함께 넘어갈 힘을 얻습니다. 장그래가 그토록 간절히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기에, 오상식 과장이라는 스승을 알아보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삶에 열심인 사람은 스승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간절함으로 스승을 찾는 사람은, 결국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막달레나가 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는지 설명해줍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정말 ‘열심’이라면, 우리는 스승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주말에 한 시간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을 넘어, 내 삶의 모든 순간, 모든 관계, 모든 선택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길을 묻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게는 오상식 과장보다 더 근본적인 스승이, 바둑 스승보다 더 궁극적인 길을 알려줄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그분을 ‘라뿌니’로 모셨던 것은 아닙니다. 삶의 스승으로 그리스도를 따른 게 아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등지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곁에서 함께 걸으며 말씀을 풀어주셨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하여’ 이야기했지만, 그분을 ‘나의 스승님’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언제 그들의 눈이 뜨였습니까? 식탁에 앉아,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였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아, 이분이 우리의 스승님이셨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예수님에 ‘관하여’ 생각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스승님’을 만나는 체험으로 이어지려면, 내 삶의 가장 구체적인 자리, 장그래가 상사에게서 삶의 지혜를 구했듯, 우리도 예수님께 내 삶의 길을 묻고 그분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는 열심이 필요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여우 중 한 마리가 ‘나의 여우’가 되고, 수많은 소년 중 한 명이 ‘나의 어린 왕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살고 싶은 열정은 스승을 만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역사 속 수많은 위인 중 한 분입니까, 아니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스승님’이십니까? 그분을 ‘나의 스승님’으로 길들이는 열심, 곧 그분의 말씀에 내 삶을 비추고, 그분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고 애쓰는 열심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삶에 열정이 있는데, 어떻게 삶의 스승인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할 수 있을까요? 잘 살고 싶다는 열정을 가집시다. 그러면 그분이 갑자기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분만큼 완전한 삶을 사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그분을 부를 것입니다.
“라뿌니! 나의 스승님!”
<성 막달라 마리아를 위한 소네트>
사람들은 그대를 가볍다 여겨 무거운 짐으로 내리 눌렀네
그들 자신이 범했던 죄의 무게로
한 여인은 모든 사람이 짐지운 일곱 악마를
몸에 안아 감추어야 했네
한 사람 있어 그대를 자유롭게 하고 그대 편에 있었네
한 사람 있어 그대를 알고 사랑했네, 마음 깊은 데까지
부서진 석고상 같았던 그대의 심장이
그 한 사람에게만 감춰진 문처럼 열렸네
닫힌 샘물이 있던 정원으로 통하는 문,
이제 그대의 눈물로 그 샘이 흐르게 되었나니
그 한 사람이 보여준 또 다른 정원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사랑이 그대의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었네
그대를 이끌어 사랑으로 사뿐히 흔들렸나니
그대가 전해준 환하고 사랑스러운 소식으로.
원시: Malcolm Guite, Sonnet for Saint Mary Magdalene
번역: 주낙현 성공회 신부 (2019)
그림: Albert Edelfelt, Mary Magdalene Kneeling (1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