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올챙이 028 저수지
아버지는 누우신 채로 빛고을 광주를 한바퀴 돌고 계신다.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조선대학교 아래 서석동 집을 떠나 병원으로 가셔서 눕기 전까지 열성으로 다니시던 두암동 종친회를 거쳐 무등산 아래 뚫린 외곽순환고속도로를 따라 고향으로 향하고 있다.
"아야, 운전기사님 더러 저기 각화 저수지 밑에 잠시 세워달라고 하렴."
"이 겨울에 날씨도 추운디 저수지 밑에서 노제를 또 지내시게요?"
"아니다. 잠시만 쉬었다 가자."
아버지는 해방될 무렵 전남도청 농정과에 근무하고 계셨고 각화 저수지를 만들면서 현장 책임자로 일했다. 당시 시공을 맏았던 건설회사 사장이 어머니의 아버지요 아버지의 장인이요 나의 외할아버지시다. 그러니까 장성 남면 분향리의 아버지가 대전공업전문대를 졸업하고 도청에서 공무원을 하실 때 이 저수지로 인하여 이웃한 담양 수북면 대치리의 외할아버지와 인연이 돼서 두 분이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감. 각화저수지 막는다고 기운이 펄펄하던 때가 엊그젠데 이제 먼 길 가시는 구랴.'
어머니는 저수지 봇물 터지듯 울음을 터뜨리며 한없이 눈물을 보이신다. 반년을 병상에서 투병하시던 아버지는 겨울의 한가운데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4형제는 말없이 눈시울만 적시고 있다. 다시 못 올 아버님이 먼 길 떠나시던 우리 인생에 가장 슬픈 날.
"아야, 여기 활터도 잠시 쉬었다 가자."
아버지가 은퇴 후 화살을 쏘셨던 운암동 나들목의 중외공원 동쪽 국궁장에 이르자 어머니는 눈물을 훔쳐내며 아버지를 부르신다.
"영감, 화살이 어쩐지 잘 맞아 화두의 체면이 섰다고 자랑할 때가 언젠디."
1929년 음력 5월 11일 일제시대 때 태어나신 아버지는 1999년 12월 10일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지금 무등산을 바라보면 누워 계시는 유택은 호남고속도로 광주 톨게이트 오른쪽 마을 앞산으로 태어나신 곳이자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이며 평생 그곳의 논과 밭이 우리 가족의 터전이 되었을 터다.
아버지는 전남도청에서 토목 전문가로 입사한 이래 전라남도 곳곳의 저수지를 기초하고 닦다가 국가에서 만든 조합이나 공사로 자리를 옮기셨으니 뚝 막는 나랏일에 일생을 보내셨다. 이 일이 당시로는 막중해 정부는 농지개량조합 수리조합연합회 농업진흥공사 농업기반공사로 기구를 독립시켜 불려 나갔다.
한마디로 저수지와 농지정리 사업 간척 개간 등 농민들이 물 걱정 없이 농사짓는 기반 사업을 하는 데 한평생을 바치셨다.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전라남도내 저수지를 막는 곳이라면 섬이든 산골이든 어디든 갔다. 때론 공사 기한에 쫒기거나 해서 한달의 절반이 출장을 가실 때도 있었고, 아예 현장 주재 공사감독소장으로 집을 비우시기도 했다.
때문인지 어머니는 동네에서 사납기로 유명했다. 사형제를 거의 혼자 기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에 오실 때마다 어머니보다 훨씬 더 엄하게 우리를 대하셨다. 그래도 네 명의 아들들은 늘 사고뭉치였다. 사건이 생길 때마다 밤새도록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거나 밤새 손들고 무릎 꿇고 반성하기 곳간에 갇혀 참회하기 등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즈음, 나는 아버지를 따라 강진군 작천면 저수지로 따라 나섰다. 차가 그렇게 타 보고 싶었고 친구들에게 자랑 하고 싶어서였다. 길은 멀었고, 울퉁불퉁했다. 지프차가 비포장도로에서 널 뛸 때마다 엉덩이도 아프고 숨도 끊어질 것 같았다.
"아부지 아직 멀었어요?"
"궁둥이가 아프냐? 조금만 참아라. 이제 거의 다 왔다."
그 후론 아버지 따라 나선다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지금같이 포장이 잘 돼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공직에서 물러나신 아버지는 그 때부터는 손자 손주 9명을 데리고 경상도 진주까지 가시기도 했다.
"뿌리를 알아야하는 거라. 뿌리를..."
"너희 선조는 이곳 진주에서 태어나신 '이'자 '식'자 할아버지니라. 그래서 여기 진주에 사당을 짓고 그 위업을 기린단다."
"중시조는 강감찬 장군 박사공파 강희안 강항 할아버지 영광에서 너희 6대조 할아버지가 우리 고향으로 옮겨오셨다."
이렇게 귀에 뿌리가 박히도록 뿌리 찾기에 열렬하셨던 할아버지가 곁을 떠난 지 9년. 우리는 커버린 신세대 손자 손녀 9명의 요구에 따라 유세차 모년모일로 시작되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알기 쉽게 우리말 제사를 지낸다.
"5년 전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우리 곁을 떠나신 할아버지. 손자 중 종손은 전경으로 나주에서 근무하다 요새는 만날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 반대나 새만금 간척지 반대 시위 막으러 가고 전방에서 근무하던 진짜 군인 손자는 얼마 전 제대해 복학하고 그 밑에 가짜군인 공익도 엊그제 해제되고... 모두들 할아버지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술과 음식을 정성껏 마련했사오니 많이 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