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광개토왕 및 장수왕 시기의 고구려가 강력한 제국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북연을 거론하는 경우가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또한 종족(의 禮)을 베풀었다. 且敘宗族" 는 문구를 두고, 고구려가 북연을 속국화했다는 것이 그 기본적인 골자이다. 과연 북연은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을까?
※ 담기양의 역사지도집 중 북연 지도 (부흥 카페의 thwmunba님의 글에서 퍼옴)
북연에서 풍발 일족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모용보의 양자이자 고구려 출신인 고운(高雲)을 왕으로 추대한 것이 407년 7월의 일이다.
고운은 고화(高和)의 손자인데, 이 고화는 342년에 모용황이 고구려를 털어버렸을 때 잡혀온 고구려인이다. 이때부터 대대로 연의
신하가 되었다고 한다.
고운은 모용보가 태자였던 시절부터 뛰어난 무예실력을 인정받아 호위대장을 맡았으며 모용보가
황제에 즉위한 뒤에도 계속 그를 시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때는 397년, 모용보가 북위의 공격을 받아 수도 업을 버리고 요서로
피난을 가던 무렵이었다. 당시 후연 왕실은 완전 콩가루집안이어서 모용보는 피난을 가는 와중에도 아들 모용회와 내전을 치러야
했다.(전체적인 내용은 이 링크를
참조) 모반을 일으켰던 모용회는 기세좋게 용성을 공격했다가 패배했는데, 그래도 세력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운이 밤을 틈타
100인의 결사대를 이끌고 습격하여 이를 궤멸시켜버렸다. 모용보는 이런 고운의 공적을 높이 사서 그를 건위장군에
임명하고 석양공에 책봉하였으며, 심지어 양자로 삼기까지 했다. 어지간히도 고마웠나보다. 여하튼 이렇게 모용보의 양자가 되면서 그는
모용씨로 성을 고치게 된다.
쿠데타를 일으킨 실권자가 꼭두각시로 명망을 갖춘 사람을 왕위에 올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고운의 즉위 역시 같은 경우였지만, 여기에 대해서 추가적인 요인이 더 거론되기도 한다. 400년부터 시작된 고구려와의 적대 관계가 그것이다.
고구려와 후연의 전쟁은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후연 측에서 고구려를 공격하여 700여 리를 점령한 400년, 그리고
고구려 측에서 반격을 개시하여 요동 일대를 정복한 402~404년, 마지막으로 후연 측에서 다시 반격에 나서 요동 일대를
공격하지만 삽질만 하다가 흐지부지된 405~406년이다. 406년을 끝으로 고구려와 후연의 전쟁은 기록 속에 나타나지 않지만,
분명 407년 당시에도 고구려와의 적대 관계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고구려 출신의 고운을 왕위에 옹립한데는 이러한
고구려와의 관계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고구려는 고운의 즉위에 대하여 "종족의 예"를 베풀며 오랜 적대
관계를 끝맺고 화친을 청하였다. 풍발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사건, 고운의 즉위와 광개토왕이 종족을 베푼 사건을 두고 고구려가 북연을 속국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나타난다. 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이 나올 수 있을까?
이
웃한 소국에 대하여 친밀한 관계의 국왕을 옹립시켜 속국화하는 경우는 역사 속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유명한
사례로는 로마제국과 아르메니아의 사례가 있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 의하면 로마와 파르티아는 중간에 낀 아르메니아를 두고
티격태격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친로마파 왕과 친파르티아파 왕이 교체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원간섭기의 고려 역시 역대 국왕이
모두 원에서 인질 생활을 하였고 종종 원의 입김에 국왕이 교체되기도 했다.
그런데.....
고운의
즉위에는 이런 "일반적인 속국"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고운을 옹립한 것은 풍발이며, 기록 어디에도 풍발의 쿠데타 자체에
고구려가 손을 썼다는 내용은 없다. 고운의 즉위가 고구려의 눈치를 보기 위함이라는 추측은 "개연성"이 있지만, 고구려가 손을
써서, 혹은 고구려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서 고운을 즉위시켰다는 추측은 "개연성"이 낮다.
이후 북연의 역사를 살펴 보아도 고구려를 종주로 한 속국으로 보기는 어렵다.
꼭
두각시 국왕이었던 고운은 즉위한지 고작 2년 만인 409년에 죽었으며 뒤이어 실권자였던 풍발이 즉위한다. 광개토왕이 사신을 보낸
것이 408년의 일이었으니, 고운의 퇴장은 그야말로 효용가치가 사라진 직후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기록 상으로는 풍발을
견제하기 위해서 고운이 키운 친위세력이 모반을 일으켜 고운을 죽였고, 이 모반을 풍발이 진압하고 즉위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시기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볼 때 풍발이 고운을 죽였을, 혹은 모반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물론 이런 음모론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연결점이었던 고운이 일찌감치 퇴장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종족의 예를 베푼지 딱 1년만-사실상 직후-에 고운이 퇴장하는 정변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반응은 커녕 종족의 예를 베푼 뒤 거의 30년 가까이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단순한 기록의 누락일까? 혹여 누락이라고 쳐도, 여하튼 양국의 관계를 추론할 증거가 될 기록 자체가 없으니 대체 어떤 추론과 결론이 가능할까?
이후로도 북연은 끊임없이 북위와 적대관계를
유지했으며, 몇차례 북위의 공격으로 떡실신이 되도록 흠씬 두들겨 맞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이 시기에 고구려는 어느 정도 선을 두기는 했어도 대체로
북위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북연이 멸망하기 전까지 북위에 조공을 보낸 것이 3차례나 되며, 그 중 2번이 435년
한 해 동안 보낸 것으로 이때 장수왕은 북위의 책봉을 받고 국휘(國諱)까지 하였다. 그리고 장수왕이 책봉을 받았던 바로 이때
북연은 북위에게 털릴대로 털려 멸망하기 직전이었다. 속국이 신나게 털리고 있는데 속국을 터는 바로 그 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까지 받는 시츄에이션이라니?? 이건 이거대로 흠좀무다.
그리고 마침내 436년, 북위가 북연을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심한 그 해, 북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북연을 공격할테니까 개입하지 말라고 통보해왔다. 고구려에 통보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만약 북연이 고구려의 속국이라면, 북위의 통보는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지금부터 너희 속국을 우리가 접수할테니까 힘없는 너희는 그냥 얌전히 속국 망하는 꼴이나 보고 있어."
그러나 북연이 속국이 아니라면 북위의 통보는 해석이 쉽고 자연스러워진다. 말 그대로 북연이 도와달라고 해도 도와주지 말라는 것, 그리고 더불어 이 전쟁이 고구려를 치려는 것이 아니니까 안심하라는 것.
물론, 고구려는 북연이 망하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그럴거면 털리고 있을 때부터 좀 도와주지
그렇다고 북연의 멸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도 아니다. 이 전쟁에 고구려가 개입한 명분은 어디까지나 북연 측에서 보낸 SOS
신호였기 때문이다. 북위가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전인 435년, 북연왕 풍홍은 멸망할 상황에 대비해서 고구려에 비밀리에 사신을
보냈다. 자기네 일족들의 망명을 신청한 것이다. 고구려는 이 망명 요구를 받아들였고 군대를 보내 북연의 왕족들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이 과정 어디에도 "멸망하는 속국의 친고구려파 왕족을 구출한다"는 뉘앙스는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고구려가 속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였다고 볼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양국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408년에 종족의 연을 베푼 뒤부터 전혀 없다가 435년 북연이 멸망하기 직전에 겨우 다시 시작된다. 그것도 고구려가 능동적으로 개입한 것도 아닌 북연 측에서 망명을 신청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멋진 부분은 바로 이 다음이다. 고구려에서 망명생활을 막 시작하게 된 북연왕 풍홍에게 장수왕의 사신이 찾아왔다. 사신은
풍홍을 "용성왕 풍군(龍城王馮君)"이라 칭하였다. 그런데 풍홍의 공식적인 칭호는 황제와 동급인 천왕(天王)이다. 즉, 천자라는
말씀. 당연히 풍홍은 머리 끝까지 열을 받았고(慚努), 칭제(稱制)를
통해 그를 꾸짖었다. [弘慚怒,稱制讓之。] 칭제란 천자를 대신해서(稱) 제(制)를 내리는 것으로, 섭정 혹은 천자의 부재시
실권자가 다스리는 행위를 말한다. 이것저것 복잡한 이야기를 다 제하고 보면, 결국 풍홍은 비참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제가 상전이라고 생각했다는 의미가 된다.
장수왕도 이런 풍홍의 헛짓거리에 질렸는지 풍홍을 지방에 머물게
했으며, 그나마도 다시 옮기게 했다. 명백히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셈인데, 그 상황에서도 풍홍은 고구려인들을 업신여기고 마치
자기 나라에 있는 양 설쳐대면서 정형상벌(政刑賞罰)을 제멋대로 했다. 풍홍이 이렇게 깽판을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수왕은 풍홍을
죽이지 못했다. 비록 시중드는 인원을 몰수하고 태자 풍왕인을 인질로 잡아가긴 했지만 그것도 깽판을 치고 난 다음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멸망한 나라의 왕족이 망명해 온다면 그들은 일종의 임시정부 혹은 부흥군을 구성하여 자국의 유민들을 이끌게 마련이다. 보장왕의 사례가 대표적이겠다. 풍홍에게 어느 정도 세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세력을 믿고 깽판을 치는데도 불구하고 장수왕은 그를 쉽사리 제거하지 못했다. 풍홍이 제거되게 된 것은 독자적으로 남조의 유송에 접촉하여 몸값이 떨어진 뒤의 일이다. 게다가 장수왕은 풍홍을 살해한 뒤에도 그에게
시호를 올려 예우해주었다. 그 시호라는 것이 무려 소성황제(昭成皇帝)... 황제다.
과연 이런 풍홍의 행적들이 속국,
그것도 멸망한 뒤 망명한 속국의 왕이 할 수 있는 것들일까? 누가 보아도 풍홍은 고구려의 상전으로 행세했고 고구려 역시 은근히
조롱하기는 했을 지언정 그것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했다.
북연은 소국이었다. 소국의 운명이라는 것이 강대국의 비위를 맞춰가며 살아가는 것이라지만, 북연은 그것을 거부(?)했다. 압도적인 거인을 상대로 북연은 항상 으르렁대고 있었고, 수시로 얻어맞아 떡실신당했다.
이런 벼랑끝 외교의 배경에는 북연, 아니 그 전신인 후연과 전연이 가지는 엄청난 권위가 있었을 것이다.
한때 관동의 패권을 장악하였던 연나라. 비록 연나라가 선비족라는 오랑캐에 의해 건설된 국가라 할지라도 그 뒤에는 중국식의 법제를
받아들였고 다른 이민족 국가, 고구려와 같은 국가에 대해서도 기존 중국의 정책을 그대로 적용했다. 그것은 그대로 의미를 가지게
되고 무시 못할 권위가 된다.
고구려에 대해 북연이 현실적으로 약소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자세를 유지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고구려 또한 명분이라는 측면에서 감히 그런 고자세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북연이 막 건국되었을 당시, 고구려는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이 왕이 된 것을 축하하며 화친을 맺었다. 그 전까지 으르렁대며
싸워댔지만 그래도 그 시대의 외교라는 것이 "중국"에 대해서 무조건 으르렁대기만 한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생략되었지만, 《자치통감》의 해당 기사에는 고구려가 북연에 사신을 보내는 것을 가리켜 "聘"이라 적고 있다. 내
얄팍한 상식으로 보건대, 저 글자는 조빙(朝聘)을 말하는 것이다.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꿀꺽 삼켰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후연-북연에 대해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간 것이다.
어쨌거나 중국은 중국이고 고구려는 이민족이다. 완벽하게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동방의 모든 국가들은 중국과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중국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았다. 전쟁이 나면 모든 외교 관계가 단절된다던가, 한쪽이 완전히 나가 떨어질 때까지 서로 모든 걸 포기하면서 싸우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괴상하고 우스워 보일지 몰라도 그 시대에는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었다. 중국이라는 거인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힘과 권위를 주는 존재였다.
고작 명분에 불과할지 몰라도 북연은 고구려보다 상국이었다.
고구려가 제아무리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다고 해도 북연이 가지는 권위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물론, 실질적인 의미에서 북연은 북위와
고구려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외교라는 것이 겉으로 보여지는 명분도 있지만, 실질적인 이해관계도 있게 마련. 이런
게 명분과 실리가 아니었을까.
첫댓글 북연이 어째서 중국이라는 것인가요? 당시 중국이란 개념이 있었을까요? 중국이란 권위 그것은 우리가 상상해낸 것이 아닐까요. 도대체 북연이란 약한 나라가 무슨 권위를 갖고 있을까요. 우리가 아니면 나머지는 다 중국인가요? 후연은 어디까지나 선비족의 국가였고, 그들은 오랑캐의 나라였습니다. 북연은 어디까지나 당시 중국에서도 변방이고 오랑캐의 나라입니다. 이 점을 다시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북연사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해 놓은 책도 보셨으면 합니다. 추천합니다. 지배선, [중세 중국사 연구 - 모용연과 북연사], 연세대출판부, 1998년.
모용연이 선비족이 세운 나라라는 점은 별로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전연이나 후연의 책봉을 받았으며, 조공을 한 기록도 분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자면 북위도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북위는 분명하게 중국식 책봉 체제를 고구려에 대해서 적용하였고(심지어 북연이 아직 남아 있는 상황에서도), 전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욱한 제가 생각하기에, 선생님께서 모용연이 오랑캐이며 중국식 권위를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시려면 먼저 북위가 선보인 조공책봉체제부터 해결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전연이나 후연이 아닌 북연의 권위에 대한 부분은 저도 한 번 추측해 본 것일 뿐이라 약소국에 불과한 북연에게 무슨 권위가 있느냐고 반론하신다면 저로써는 따로 드릴 말은 없습니다. 다른 의견이시라면 겸허하게 말씀을 듣겠습니다. 하지만 북연이 보인 명백한 독자 행동이나, 심지어 상전으로 스스로를 인식했던 부분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먼저 해결해 주시지 않는 한, 저는 최소한 명분 상이라도 북연이 상국이었다는 생각을 바꿀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추천하신 책은 일독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춘추필법을 아시지요? 중국인들이 무조건 자신들의 역사는 높이고 이민족의 역사는 낮춰서 기록하는 일종의 역사왜곡이지요. 그리고 북연이나 후연, 북위 모두 범 선비족들이 세운 나라인데, 마치 중국(한족)의 나라로 생각하는 그들의 태도도 우습군요.
그런 춘추필법은 모릅니다. 제가 아는 춘추필법은 미언대의, 술이부작 등과 같은 원칙을 가진, 공자에게서 비롯된 지극히 명분을 중시하는 역사관입니다. 아스카 님이 말씀하신 그런 역사서술은 그냥 중국중심사관일 뿐입니다. 엉뚱한 것에 춘추필법을 가져다 붙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런 중국중심사관이 존재하는 것과 이 글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조공기록은 그저 주관적인 사료에 의거한 것들이 대다수라 고구려의 조공 기록은 주관적인 중국 사료에 의거한게 많기 때문에 객관적인 신빙성은 담보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리고 북연이 상전이라고 생각했다는 인식은 풍홍의 정신 나간 장수왕 책망 사실을 부풀려서 확대해석한 것에 불과한 터라 객관적인 사실에서 북연이 고구려에 공식적인 상전외교를 했다는 근거는 없는 상태이지요 요녕성 의현의 대고구려국 불상유물을 409년이 유력한 설을 고려하면 북연의 상전 인식설은 근거가 박약한 것으로 볼수밖에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