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어엿한 여인이 되었을 때까지, 지나 가는 스님과 점쟁이, 그리고 만신들이 그런 말을 했다. 만신이란 신(神)이 가득하게[滿] 든 사람이라는 뜻으로 만신(滿神), 또는 만신(萬神)이라고 쓰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무식(無識)의 탄로이다. 만신이란 본디 한자어도 일본어도 아닌 순수 우리말이고, 신들린 무당(巫堂)을 뜻하며, 무당 중에서도 대개를 여자 무당을 만신이라 하고, 남자 무당의 경우에는 박수 무당이라는 또 다른 순수 우리말을 쓴다.
미인박명
명이 짧다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우리말에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여인은 명이 짧다는 소리이다. 아이가 너무 예뻤다. 처녀가 되면서는 환한 달덩이처럼 예뻤고, 결혼하여 새댁이 된 다음에는 이웃 집 사람들이 담을 넘어 살림하고 있는 새댁의 모습을 엿볼 정도로 미인이었다. 그 아이, 그 처녀, 그 여인을 보고 명이 짧다고 한 것은 오로지 그 아이, 그 처녀, 그 여인이 너무 예뻤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열 여덟 살의 처녀가 되었다. 인근 일대에서 수좁고 아름답고 백옥(白玉) 같은 처녀로 소문이 나서 혼처(婚處)가 많았으나, '단명하다'는 소문 때문에 쉽게 결심할 수가 없다. 그 때에 만수와 박수, 점쟁이와 스님, 그리고 역술인들이 공통적으로 처녀가 오래 살 수 있는 두 가지 처방을 내놓았다.
하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시집을 보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가더라도 '베풀고 살라'는 처방이었다. 이 처방에 따라 전라도 처녀가 경기도 총각과 결혼하여 양평에 새살림을 차렸다.
거지가 왔다. 마구 퍼주었다. 한 거지가 몇 번을 와도 마다 않고 오는대로 많은 밥과 국을 퍼 주며, 많이 드시라고 다소곶이 인사했다. 그 거지가 또 왔다. 이번에는 부엌에 들어가 밥을 다시 짓고, 국을 다시 끓여 한 상을 크게 차려 가지고 밖으로 들고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도망간 거지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미안해서 더 얻어 먹을 수 없습니다. 오래 사세요, 아주머니!"
거지도 낯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올 때마다 풍성한 음식을 주어서 다시 찾아 왔으나, 이 번에는 밥까지 다시 해주는 아주머니가 미안해서 쪽지글을 써놓고 도망을 첬다.
여인을 그렇게 베풀며 살았다. 거지가 와도, 이웃 사람이 와도, 친척이 와도 아낌없이 주는 여인이었다. 그렇다고 집 안이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이 넓어 남들에게 '마구 퍼주고, 마구 먹여 주는' 미덕(美德)의 여인이 된 것이다. 아이들은 배고프게 키울지라도 남들에게는 가난한 내색을 하지 않고 베풀며 사는 여인의 길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러던 여인이 하루는 농약(農藥) 병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마음씨 고운 여인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이 줄행랑을 처서 집 안에 엄청난 타격이 왔다. 빌려 준 돈은 받을 길이 없었다. 삶이 너무 고鑯어졌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약 병을 확! 열어 제꼈을 적에 코에 농약의 독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 지독한 냄새 때문에 여인은 농약 병을 닫았다. 그래서 자살을 면했지만 그래도 살 수가 없었다. 또 농약 병을 열었다. 또 그랬다. 그러기를 꼭 열 번을 했다. 열 번 다 농약 병을 열기는 하였지만, 냄새가 지독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토평리 매운탕 집
여인이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교문리를 거쳐 강변 마을인 토평리에 도착했다. 한 집에 들어갔다. 새댁이 가게와 음식점을 열고 있었다. 여인에게 음식점 일을 해달라고 했다. 잘 되었다. 주저 없이 주방에 들어가 밥을 차려 손님들에게 대접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늘었다. 몇 년을 그렇게 하다 보니,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인이 떠나자 그 집을 찾는 손님들이 없었다.
"아주머니가 와서 장사를 하세요."
손님이 끊어지자 주인 집 새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음식 장사이다. 당시의 교문리밖 토평리의 한강은 뚝도 쌓이지 않고 허허 벌판이었으며, 남편이나 아이들이 그물을 가지고 강에 나가면 피라미 마자 우레기 누치 모래무지 끄리 잉어 쏘가리 자라 거북이 등 없는 물고기 없이 한강 강고기란 모든 강고기를 잡아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백반 장사를 하다가 민물 매운탕 장사를 시작했다.
소문이 금방 났다. 이유는 '퍼 먹여 주는 아주머니' 때문이었다. 먹고 살면 그만이지 매운탕 장사를 해서 돈을 번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다. 팔팔 뛰는 강고기들을 요리 조리 요리하여 한 냄비 풍성하게 끓여주는 아주머니의 매운탕은 팔도 강산 어데를 가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양이 많고 맛이 있었다. 소문을 들은 서울 손님들이 진흙탕 길을 마다 않고 토평리 강변 여인의 매운탕 집을 찾아왔다. 여인은 그것이 고마워 더욱 많은 양의 매운탕을 더욱 맛 있게 끓여 대접했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렀다. 몸이 고단해 더 이상할 수가 없었다. 문을 닫았다. 문을 닫아도 찾아오는 손님들의 등살에 계속 문을 닫을 수가 없었고, 그 먼 곳까지 찾아 왔다가 서운한 얼굴로 돌아가는 손님들을 보기가 민망했다.
천지신명이 내리는 개장국 한 그릇
어떻게 할가, 몇 달을 생각한 끝에 이 번에는 개장국 장사를 시작했다. 토평리 일대는 강변 마을이고, 농사를 주로 짓는 외진 동네라 개들을 많이 길렀다. 개를 잡고 그을려서 개장국을 끓였다. 개장국 장사 역시 돈을 번다는 생각이 없었다. 찾아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분들에게 맛 있게 대접하면 그만이고, 자라나는 아이들과 호구지책(糊口之策)만 해결되면 아이들이 굶어 죽지 않으니, 천지신명(天地神明)의 은총(恩寵)으로 생각했다.
토평리 아줌마가 개장국 장사를 시작했다는 소문은 토평리 교문리 일대에 금방 퍼룶고, 잠시 후에 서울 장안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전주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산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손님이 이 집에 와서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가 개장국 한 그릇을 먹고 가는 것은 보통이었다. 그것도 팔다가 준비하였던 개고기가 모자라면 그냥 되돌아 가야했다. 밖에서는 서로 빨리 먹으려고 아우성을 치고 싸우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음식 공양으로 베풀며 사는 여인
왜 그랬을가. 누구나 이 집에 와서 개장국 한 그릇을 먹으면 배가 터질 것 같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고, 이 집 개장국 맛을 본 사람은 1년에 한 번만 먹어도 원(願)이 없을 정도로 개고기를 싫컷 먹었다. 여인의 개장국은 일반적으로 보신탕 집들에서 내놓는 개장국과는 달랐다. 일반 보신탕 집에서는 국물에 개 고기 몇 점 넣고 개장국이라고 팔고 있지만, 여인은 국물보다 더 많은 개고기를 국에 넣어 주었다. 엄청난 개고기가 여인의 개장국 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값은 다른 집의 반 정도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여인의 개장국 집에 손님이 사시사철 미어지자, 저 아주머니는 박리다매(薄利多賣)로 장사를 한다는 말을 했다. 남의 속을 모르는 말이다. 여인의 마음 속에는 박리다매 같은 장사 철학은 없다. 여인의 가슴 속에는 오직 '베풀며 살라, 아끼지 말고 퍼주라'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손님이 너무 많아서 그랬던지, 몸이 너무 고단해서 그랬던지, 중간에 몸이 좋지 않았다. 장사를 더 할 수가 없었다. 문을 닫았다. 또 손님들은 찾아왔다가 그냥 갔고, 장사를 다시 시작해 달라고 사정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웃지 못할 일들이 매일 같이 일어났다.
하는 수가 없었다. 장사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교문리가 발달하여 구리시가 되면서 교문리로 나와서 장사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으나, 그 동안 손님은 많았으나, 교문리로 나와 장사할 집 하나 장만할 돈이 없었다. 여인은 그런 여인이었다. 오는 사람들에게 퍼먹여 준다는 신념으로 장사를 한 여인의 주머니에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소문.... 할머니??? 사철탕!!!
그런대로 교문리에 장사터를 잡았다. 옥호(屋號)를 지으러 작명가(作名家)를 찾아 가거나 골돌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사이에 그 여인을 보고 손님들은 '할머니'라 불렀고, 교문리나 토평리에 와서 웬만한 택시 운전사를 붙들고 '소문난' 할머니 집을 가자면 묻지 않고 토평리의 그 여인 집을 안내해 줄 정도였기 때문에 '소문난'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남들은 개고기를 먹으면 정력이 좋아지느니, 보신(補身)이 되느니 하면서 '보신탕'이라는 말을 쓰지만 여인은 그런 생각을 한 일이 없다. 개고기가 몸에 좋다는 말을 옛날부터 들어왔다. 그러나 정력에 좋아서 개고기를 먹는다면 개하고 살지 무엇하러 사람하고 산단 말인가.
설령 개고기가 정력이 좋다고 개고기를 먹었다면 개하고 자는 것이 낫지, 무엇하러 자기 마누라 옆에서 가서 자자고 하는가. 만일 그러다가 분기(憤氣) 충천(衝天) 하지 않으면 제 망신에 개고기 망신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개고기가 정력에 좋다고 개고를 먹고 마누라 곁에 가는 놈은 개같은 놈이고, 자기 마누라를 암캐 취급을 놈들이다.
일일 삼식이 명약
일일(一日) 삼식(三食)이 명약(名藥)이다. 하루 세 끼 밥을 먹으면 그것으로 건강도 족하고, 정력도 족하다. 그걸 모르고 정력 운운하며 개고기 집을 찾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독(冒瀆)이고, 개고기에 대한 모독이다. 개고기도 1일 3식 중의 하나인 음식(飮食)일 뿐이다. 여인은 보신탕(補身湯)이라는 말보다 사시사철 개장국 장사를 한다는 뜻으로 '사철탕'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제 '소문난'이라는 말과 '할머니'라는 말, 그리고 '사철탕'이라는 말을 조합(組合)해 보자. '소문난 할머니 사철탕'이 된다. 이 세 단어로 형성된 여인의 옥호 중에 '소문난'이나, '할머니'는 여인이 지은 말이 아니다. 다 남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소문이 났다는 것은 섭섭하지 않으나, 아직도 백옥처럼 희고 풍만한 젖가슴에 넓은 마음을 자랑하는 멀쩡한 사람을 가지고 할머니라 부르는 세상이 섭섭하다면 섭섭하다. 하지만 섭섭해도 할 수 없다. 남들이 다 그렇게 부르니, 그 여인인들 어떻하란 말인가.
몇 일 전, 유상호 선생의 안내로 명용석 선생과 이기상 선생을 따라 교문리에 있는 '소문난 할머니 사철탕 집'(0346-556-3696)을 찾아갔다. 갈 때에는 속으로 '소문난 잔치집 먹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라 피식! 웃슴이 나왔으나, 가보니! 거기에 정말 소문난 개고기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집은 만석(滿席)에 만장(滿場)이었다.
들어가다가 남들이 먹는 개장국을 보니, 국물은 보이지 않고 온통 개고기 투성이의 똑배기였다. 나 같은 사람은 한 그릇도 제대로 다 먹지 못할만큼 많은 양의 개고기가 든 개장국이었으나, 여기에 1 천원을 더 주면 소위 '특'이라는 개장국을 주는데, 이건 아예 개장국 뚝배기 위로 개고기가 수복하게 쌓일 정도로 퍼 넣어 준 개장국이어었다.
첫 번부터 심상치 않은 집이었다. 메뉴에는 개고기 수육과 개고기 전골, 그리고 개고기 무침이 있었으나, 이 집을 몇 번 다녔다는 유 선생은 우리 네 사람이 먹을 양으로 수육 2인분을 시켰다.
"여보! 이 먼 데를 되리고 와서, 네 사람이 2인분을 시킨다면 인사가 되오?"
"허허, 먹어 보시라니깐! 모자라면 더 시켜 드릴테니까...."
"당연히 모자라지요. 영등포에 어느 소문난 집에 있어서 얼마전에 네 사람이 갔었으나 8인분을 시켜 먹어도 배가 차지 않던데요."
"허허, 먹어 보시라니께! 여긴 영등포가 아니고, 교문리요, 교문리!"
나는 권력과 돈에는 욕심이 없는 푼수때기이지만, 술 탐과 식탐(食貪)이 있는 미련한 사람이다. 식탐자의 입장에서 보면 네 명이 가서 2인분만 주문하는 유 선생의 말과 태도가 이상하기는 했으나, 먹어본 선각자(先覺者) 유 선생의 엄명(嚴命)이라 우리는 처분만 보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시킨 것은 수육이었다. 그런데 종업원 아주머니가 들고 나온 것은 뜻밖에도 냄비였다. 아마도 아주머니가 주문을 잘못 들었던 모양이다. 성질 급한 내가 입을 열었다.
"아줌마! 우리는 수욕을 시켰는데, 왜 개고기 전골을 가져 오세요?"
"이건 전골이 아니에요. 손님들게게 돈 받지 않고 그냥 드리는 공짜 개장국 국물이에요."
"???"
눈이 휘둘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집 같으면 족히 3-4만원은 받음직한 공짜로 주는 개고기와 개뼉다귀와 야채를 가득 넣은 냄비였다. 범상(凡常)치 않는 집임을 금방 알게 되었다. 명 선생과 이 선생은 한 모금을 먹어 보더니, 옛날 충남 홍성 청양 서산 일대에서 먹던 톱톱하고 얼큰 살짝하고, 개고기 진 냄새가 나지 않는 고향의 개장국 국물 맛과 똑 같다고 환성을 질렀다.
다시 보자, 삼각산아
그 다음에 우리가 시킨 수육 2인분이 나왔다. 수육이란 원래 물이 펑퍼짐하게 고일 정도로 고기와 물이 범벅이 된 음식이다. 설렁탕 집과 곰탕 집의 수육이 다 그렇고, 다른 개고기 집의 수욕이 다 그렇다. 그런데, 이 집의 수육은 그렇지 않았다. 흔히 백숙이라고 파는 개고치처럼 물기가 제거된 개고기 수육이었다. 그것도 접시 위에 삼각산(三角山)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정성들여 수북하게 쌓아 올린 개고기 수육 덤이였다. 물기를 빼면 개고기의 양이 적어 보이고, 그렇다고 비싼 개고기를 많이 줄 수도 없고 해서, 일부 고급 개고기 전문점에서는 도마 위에 개고기 백숙이라는 것을 간질나게 펼쳐 놓고 비싼 값에 판다.
한 접시에 1인 분씩, 두 접시가 2인 분이었다. 1인분은 명 선생과 이 선생 사이에 놓고, 다른 한 접시는 유 선생과 나 사이에 놓았다. 먹어도 먹어도 개고기 삼각산 우육은 바닥이 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공짜 진국이 공짜로 가운데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으니, 수육 먹으랴, 공짜 먹으랴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장사가 되는가 싶어 여인을 만났다. 장사는 잘 되나 자기는 자기 철학대로 장사를 하니, 아이들은 '퍼준다'고 투덜 거려도 '너희들은 나중에 너희들 식으로 장사하라, 내가 살아 생전에는 내 식대로 장사를 한다'며 더 퍼준다고한다. 하루에 소비하는 개고기는 무려 평균 500 여 근, 그것도 비게가 있는 개고기는 절대로 사지 않는다. 남편 아들 딸 며느리들과 일부 종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나, 너 나 할 것 없이 월급은 몽땅 1 백원 균일(均一)이다. 아들이라고 더 주고, 딸이라고 덜 주거나, 남이라고 적게 주는 일이나, 자기라고 더 갖은 일이 없다.
손님이 많고 규모가 커져서 세무서에서 많은 세금을 내도록 종용(?)하였을 때에 '남는 것 없이 퍼먹여 준다'는 실상(實像)을 설명해 주고, 그래도 많은 세금을 내게 하려 하자 문을 닫을 작정을 했다. 세무서에서도 '이런 집이 우리나라에 하나 쯤은 있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과대한 세금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내가 지금까지 서울 장안과 팔도강산의 개고집을 많이 다녀 보았지만 양은 다른 곳의 배를 주고, 돈은 다른 집의 반 정도 받는 것만은 확실했다. 우리 네 사람은 2인분을 시켜 놓고도 다 먹지 못했다. 밤 열 시가 되어도 손님은 자리의 3분의 2 정도가 차 있었다. 정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소문난 할머니 사철탕' 집이었다. 단명하리라고 소문났던 여인은 일생을 남들에게 퍼주며 베풀고 산 공덕(功德)으로 지금까지 건강한 몸으로 주방에서 열심히 퍼주고 베풀며 살고 있다.
첫댓글 이글도 넘 길다...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