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追憶)
葉路足下薄悲鳴(엽로족하박비명)-낙엽길 발밑에서 가날픈 비명소리
紅柿樹上眞鵲忙(홍시수상진작망)-빨간 감나무위에 까치가 바쁘다
九節草華寒風猛(구절초화한풍맹)-구절초 피어 있어도 바람은 매섭고
仁壽頭頂天空寒(인수두정천공한)-인수봉 머리위의 하늘도 차갑다
遠處冠岳線群雁(원처관악선군안)-멀리 관악산 위로 줄지은 기러기 떼
雲後遮蔽再脱出(운후차폐재탈출)-구름에 가렸다 다시 벗어나네
突然想起故追憶(돌연상기고추억)-문득 떠오르는 옛 사진 같은 추억
慾去回頭消白雲(욕거회두소백운)-가고파 뒤돌아보면 사라진 흰 구름
농월(弄月)
젊은 날의 추억 화순 적벽(赤壁)을 회상하며 !
아래 내용은 필자가 전남 광주에 있을 때 1979년 3월 17일에
“조선 10경(景) 중 하나”로 불릴 만큼 예부터 널리 알려진 절경(絶景)인 전남
“화순 동복 적벽(赤壁)”을 답사한 내용이 사진과 일기에 있어 소개한다.
특히 이 무렵 광주를 비롯한 인근 도시의 식수난 해결책으로 대규모 동복 댐을 건설할 계획이 발표되었다.
동복 댐을 건설하면 이 적벽(赤壁) 명승지가 수몰(水沒)의 비운을 맞게 되므로 이
절경을 다시 볼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미리 사진 한장 남기기 위해서 이곳을 찾은 것이다.
이 사진들이다.
화순군에 있는 이름 없는 바위 절벽을 “적벽(赤壁)”이라 이름 짓고 세상에 알린
사람은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돼 전남 화순 동복면(同福面)으로 유배(流配) 온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1536)이라 기록되어 있다.
최산두(崔山斗)는 유배 생활의 고단함을 적벽(赤壁) 강변을 산책하며 달랬다고 한다.
그는 이 바위절벽이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赤壁)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적벽(赤壁)”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는 적벽(赤壁)이름을 붙이면서 적벽(赤壁)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도
있다고 했다.
적벽(赤壁)은 깎아지른 병풍같은 바위 절벽이 검붉은 색으로 마치 붉은 벽 같아서
“적벽(赤壁)”이라 하였다.
중국에는 적벽(赤壁)이 두 군데 있다고 한다.
모두 양자강(楊子江)이 흐르는 호북성(湖北省) 황주(杭州)시에 있는데
하나는 소설 삼국지 중에서 제갈량의 계획으로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치렀던
적벽(赤壁)이고,
또 하나는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赤壁賦)” 시(詩)를 읊조렸던 적벽(赤壁)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소설 삼국지의 적벽(赤壁)을 “무적벽(武赤壁)”이라 이름하고
소동파의 적벽(赤壁)을 “문적벽(文赤壁)”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화순 적벽은 최산두(崔山斗)의 한(恨)이 서린 “한적벽(恨赤壁)”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최산두(崔山斗)는 유배가 끝난 뒤에도 고향인 광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복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 주변은 적벽(赤壁) 8경(景)이 있다.
①강선명월(降仙明月)-강선대에서 바라본 적벽산위에서 솟아오른 밝은 달
②환학청풍(喚鶴淸豊)-환학정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③금사어화(金沙漁火)-밤에 횃불을 들고 고기 잡을 때 모래밭에 비친 아름다운 모래 빛
④한암효종(寒庵曉鐘)-한산암에서 울려 퍼지는 새벽 종소리
⑤한산폭포(寒山瀑布)-한산암 바위위에서 내려 떨어지는 폭포
⑥화표귀운(華表歸雲)-화표봉 허리를 감고 도는 아침안개의 황홀감
⑦고소락조(姑蘇落照)-고소대에서 바라보는 해지는 풍경
⑧황니설셩(黃泥雪景)-황토밭위에 눈 덮인 광경
위와 같이 빼어난 절경과 어울리는 선비들이 있어야 격(格)을 이룬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등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이 아름다운 화순 적벽의 경승(景勝)을 아껴 글을 쓰고 시를 노래하여 적벽(赤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동복 적벽(赤壁)은 물길의 위치에 따라 네 곳으로 명칭이 있다.
△이서적벽(二西赤壁)-다른 말로 노루목 적벽(赤壁) 이라고도 하는데, 수려한 자연
경관과 웅장함 때문에 동복 적벽(赤壁)의 대표 명소로 꼽혔다.
△창랑적벽(滄浪赤壁)-화순군 이서면 도석리의 뒷산을 넘으면 창랑리에서 보이는
웅장한 적벽이다.
△보산적벽(寶山赤壁)-규모는 작으나 경치가 아름답다.
△물염적벽(勿染赤壁)-규모나 경치가 노루목 적벽에 미치지는 못하나 언덕 위에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세운 물염정(勿染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적벽은 김삿갓 김병연(金炳淵)이 생을 이곳에서 마친 절경지로 유명하다.
물염적벽(勿染赤壁)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1841년(35세) 전라도에 내려와 꿈에도
못 잊어 그리워했던 동복 적벽(赤壁)을 보고,
無等山高松下在(무등산고송하재)-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가지 아래에 있고
赤壁江深沙上流(적벽강신사상유)-적벽(赤壁)강이 깊다더니 모래위에 흐르더라
라는 풍자(風姿)한 시를 남겼다.
또한 김삿갓은 그토록 가보고 싶어하던 동복 적벽(赤壁)을 구경하고 중국시인
소동파(蘇東坡)의 그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를 연상하며 적벽(赤壁)시를 지었다.
이름다운 시이므로 여기에 소개 한다.
적벽(赤壁)
將遊赤壁歎有客無酒 적벽을 유람하려는데 술 없음을 탄식한다
古跡回間簫歌夜(고적회간소가야)-고적을 돌아보는 사이 통소로 노래하는 밤이 되니
雀飛烏去蒼茫洲(작비오거창망주)-참새와 까마귀가 날아가고 없는 창망한 섬이로구나.
秋風岳陽上詩杜(추풍악양상시두)-추풍에 악양에서 시를 짓는 두보 같고
夕陽滁亭歸醉歐(석양저정귀취구)-석양에 저정에서 술취해 돌아가는 구양수 같네.
虛汀八月不見人(허정팔월불견인)-한가한 팔월인데도 사람은 볼 수 없고
露葭蒼蒼江水悠(로가창창강수유)-이슬 맞은 갈대만 창창하고 강물은 아득 하네.
江山何處觀之無(강산하처관지무)-강산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곳이므로
好酒嘉賓方勝遊(호주가빈방승유)-술 좋아하는 사람들과 놀기 좋은 곳이로세.
蕉臯酬句度陵閣(초고수구도능각)-파초 핀 언덕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능각을 건너
竹溪携樽采石舟(죽계휴준채석주)-죽계곡에 술통 들고 들어가 돌을 캐 배에 실었으면
如干知己不相待(여간지기불상대)-여간 나는 알았으니 서로 기다릴 필요 없고
跡盈湖南名勝州(적영호남명승주)-유적으로 가득 찬 호남의 이름 높은 고을 일세.
烟霞倘息問無處(연하당식문무처)-어정거리는 사이 연하에 가려 물을 곳이 없으니
福州丹江各海陬(복주단강각해추)-복주고을 붉은 강물 각 해변의 모퉁이 같구나.
東坡以後北路仙(동파이후북로선)-소동파 이후 처음으로 북에서 내려 온 선비이며
壬戌之餘辛丑秋(임술지여신축추)-임술년(1841)이 얼마 남지 않은 신축년 가을 일세.
中央宛在好箇人(중앙완재호개인)-가운데가 굽어있어 사람들이 샅샅이 보기 좋고
庶哉良宵同唱酬(서재양소동창수)-서민 양반 밤에 함께 노래를 주고받기 좋네.
虛舟欲解滿江月(허주욕해만강월)-욕심을 버리니 빈 배에 강에 달이 가득하고
寂寞無人水渡頭(적막무인수도두)-사람 없어 적막하니 물머리로 건너가세 .
漁鹽囂市往來者(어염효시왕래자)-어염전에는 왕래자들로 시장이 왁자지껄 하고
樵牧荒村生長儔(초목황촌생장주)-황촌에는 초동모수가 짝지어 오래 사네.
文章浪遊視餘事(문장낭유시여사)-글 짓고 낭유하는 사람 여사로 가볍게 보고
與誰吾歸江自流(여수오귀강자류)-강물은 스스로 흘러가니 나는 누구와 같이 돌아갈가?
蘭槳己斷望美歌(난장기단망미가)-난장과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이미 끊어 졌고
斗酒全空歸婦謀(두주전공귀부모)-술통은 다 비었으니 돌아가 부녀자나 꾀해보세.
江亭勿染亦無聯(강정물염역무연)-강변 물염정은 역시 연관이 없으니
主去多年花木幽(주거다년화목유)-주인 떠난 다년 동안 꽃나무만 그윽하네.
浮雲萬里浪跡通(부운만리낭적통)-뜬구름 만리에 물결 자취만 두루 미치니
明月千年虛影留(명월천년허영류)-명월은 천년 동안 빈 그림자 만 머무르네.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김삿갓 김병연(金炳淵)은 1841년(35세) 전라도에 내려와서 화순 지방에서 인심좋기로 소문이 난 동복면 구암(龜巖)마을 창원 정씨(丁氏)댁 사랑채에서 머물면서
강원도 평창, 경상도 안동, 전라도 익산 등지를 유랑하면서 김삿갓을 찾으러 오는 아들 김익균을 세 차례나 따돌리고 방랑생활을 계속하다가 1850년경 다시 고향 집 같은 동복으로 내려왔다.
창원 정씨(丁氏) 사랑채에 머물다가 1863년(57세) 3월 29일 57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 동복 구암 마을 동편 동뫼(洞山)에 임시로 묘를 썼다가 3년 뒤(1866년)
아들 익균에 의해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와석리(노루목골)로 옮겨 안장되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도 17세 때(1776년) 화순(和順) 현감(縣監)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서 형 정약전(丁若銓)과 동복 적벽 물염정(勿染亭)을
유람하고 아래와 같이 시(詩)를 썼다.
유적벽정자(遊赤壁亭子)
歷歷秋沙細逕分(역력추사세경분)-해맑은 가을 모래 위에 오솔길이 뻗었는데
洞門靑翠欲生雲(동문청취욕생운)-동문의 푸른 산은 구름이 피어날 듯
溪潭曉浸臙脂色(계담효침연지색)-새벽녘 시냇물엔 연지빛이 잠기었고
石壁晴搖錦繡文(석벽청요금수문)-깨끗한 돌벼랑 비단문늬 어른거리네.
刺史燕游誰得趣(자사연유수득취)-수령의 한가한 놀이 누가 흥취 즐기나
野人耕釣自成群(야인경조자성군)-야인의 농사와 낚시 절로 무리를 짓는데
獨憐山水安孤僻(독련산수안고벽)-어여쁘게 고운 산수 외진 곳 자리 잡아
不放名聲與世聞(부방명성여세문)-명성 흘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광주를 떠난 후로 적벽(赤壁)이 수몰된 동복수원지를 찾은 적은 없지만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마을은 간곳없고 적벽(赤壁)만 푸른 호수 속에 일부만 보인다.
인터넷 사진에도 댐이 생기기전의 사진은 보이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김삿갓도 가고 적벽(赤壁)도 물에 잠기고 세월이 흘러 필자도 늙었다.
턱을 고이고 가만히 생각하면 적벽(赤壁)을 찾을 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