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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 뒤로 까만 마스크를 쓴 전경들이 보였다.
검은 아가리를 벌린 입이 내 앞에 들이대진 것 같은 공포에 바라보기만 했다.
손에는 묻은 건 분명 붉은 피일텐데, 까맣게 보였다.
"야!!"
"....."
"야, 정신 차려!! 오영주!!"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형태가 보였다. 그런데 형태 얼굴에 묻은 거 저거...저것도 까맣네?
갑자기 주변 풍경이 흔들리며 느리게 돌아간다.
형태가 뭐라고 부르는데 안들린다.... 구역질이 날 것 같다.
그 풍경들에 휩쓸려 안으로 끌려들어갈 것 같자 눈을 질끔 감았다.
"정신 차리라고!! 최 율 명줄 니가 잡고 있단 말야!! 얼른!!"
계속 뭐라고 하던 형태의 목소리가 그제야 잡혔다.
율이 이름 때문인지 갑자기 주파수가 명료해졌다.
그리고 붉은 물방울 역시 선명해진다..
다시 한 번 피가 고인 손을 바라본 나는 핀 손을 꽉 쥔 후 율이의 팔을 잡았다.
축 늘어진 사람은 평소보다 휠씬 무거워진다. 설사 래희 몸무게라하더라도 술 취해 늘어진
사람은 남자 여러명이 거들어야 겨우 들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들었다.
군중에 떠밀리는 힘도 작용했겠지만 거의 끝에서 끌어 올려지는 힘으로 그를 들었다.
짐짝 끌 듯 끄는데 율이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겨우 채플실과 연결된 옆 건물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아이들이 달려들어 문을 닫으려
했다. 아직 남아있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남자아이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측면 문 역시 이미 잠기고 바리케이트가 놓이고 있었다.
.....거의 전쟁을 방불케하는 현장 안에서 뚫고 들어오려는 전경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전경들은 일부러라도 대학생으로 채운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 걸까.
왜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서로의 머리에 몽둥이를 치느라 정신이 없는 걸까.
싸움의 분위기 그 자체에 취한 듯 개념없이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는 그들이
불쌍해 보였고, 동시에 무서웠다.
놀아난다는 건 이런 거겠지.
형태가 다가서자 그와 함께 율이를 부축해 학과 사무실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과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발로 의자를 이리 저리 차서 공간을 확보한 후 긴 쇼파를 가운데
에 놓고 율이를 뉘였다.
머리맡에 얼른 앉아 겉 옷을 벗고 남방까지 벗으려다 얼른 형태를 바라보았다.
"....형태야..."
"응?"
"나 옷 벗을거니까 나가 있어."
"뭐?"
그 애 얼굴에 얼핏 떠오르는 당황기에 평소라면 이노무자식 어디 형을 넘봐! 했겠지만 이
순간, 농담도 안나온다.
"...안에 입은 흰 티셔츠 벗어서 붕대 대신 할라고. 어서 나가 있어."
냉정한 말투 때문이었는지 형태는 나와 율이를 한 번씩 훑어 본 후 얼른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잠시 망설인 뒤, 재빨리 옷을 벗었다.
흰 티셔츠를 벗어 율이 이마에 올려놓고 다시 남방을 입으려는데 율이 신음 소리가 이 번엔
좀 더 크게 들렸다. 순간 옷으로 허겁 지겁 벗은 몸을 감싼 후 율이를 바라보았다.
찡그리는 표정이 곧 깨어날 것 같았다.
이런 젠장! 손이 꼬이네!
단번에 입으려니 되덜 않는다. 세번째 단추를 잠그고나서야 잘못 채웠다는 걸 알았다.
이런 ab,C! 1234567,8!
"....You know what?! Then..."
웁스- 근데 이 자식은 잠꼬대를 영어로 하네 그려.. 아니 헛소린가?
음...내가 헛소리를 무의식중에 영어로 내뱉을 확률은 얼마나 되려나..
딴 생각을 하느라 단추를 느리게 채우는데 율이의 고차원적 못 알아들을 잠꼬대가 이어졌다.
"Did we fight in order for a coward to lead us into defeat?! Do we.."
뭐라는 거야...비겁함과 싸울 수 있겠냐고? 웬 비겁함..
꿈에서 연설이라도 하나.
티셔츠에 물을 적신 후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그 애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근데 물 배분을 잘못했나보다.
흥건한 물이 기냥 율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옆에 계셨으면 또 기집애가!!! 하셨겠지.
피가 묻어 지저분해진 티셔츠를 다시 들어 쭉 짜버린 후 이마에 막 올려놓으려는데.
"....영주야..."
"..어?"
갸날픈 율이 음성이 들렸다.
깨어났다는 안도감에 재빨리 옆에 다가가 율이 얼굴을 살펴보았다.
"깼어?"
"......."
"괜찮아? 머리 안 아퍼?"
"......."
율이는 조용히 머리를 까딱했다.
.....후.... 한 숨 놨다...
다시 머리 맡에 앉아서 흰티셔츠로 계속 그 애 이마를 매만져주었다.
..............
..............
짧은 침묵 속에서 잠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밖은 여전히 농성중인 아이들과 대치한 전경으로 까맣게 보였다.
...천천히 오늘 있었던 일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인영이의 전화를 받았던 일, 그리고 학교로 와 손 매운 아저씨에게 뺨따구 맞은 일,
또 또.... 율이까지.
...일의 끝이 어떻게 되는 걸까.
두려운 마음으로 끝없이 창 밖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인영이가 한 말이 생각났다.
걔..뭐랬지? 오늘 학교 가지 말라고 그랬었나?
알고 한 말인가..
..가만. 오늘 이렇게 될 걸 걔가 어떻게 알아서 가지 말라는 거였지..
"..영주야.."
"응? 으응?"
가늘게 흩어지는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떨어트리고 율이를 바라보았다.
".....오늘 일....."
"........"
"....뺨.. 많이 아파?"
저도 모르게 손으로 뺨을 만지며 피식 웃었다.
"....지금은 안 아픈데, 아까는 진짜 너무 아프더라."
"....미안해...."
맑은 눈을 내리깐 채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자니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겠네란 생각만
들었다.
"..니가 왜 미안해."
"...내 탓이니까."
"..참- 탓은 무슨. 야- 아까 나 맞고 있을 때 구호외치며 애들 선동한 게 너지?"
"........."
침묵은 곧 긍정이다.
그럴 줄 알았다. 여튼 짜식이 흑기사의 피를 물려받았나, 아주 잘 구해준단 말이지.
"..고맙다."
"........"
하지만 율인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얘기 정말 왜 이러냐.. 머리를 많이 다쳤나. 정말은 안 괜찮은 거 아냐?
그런데 공 같이 튀던 생각이 다시 인영이에게로 미쳤다.
"저, 율아."
"........"
"너네 아버지, 외교관으로 꽤 높은 데 까지 있지 않으셨니?"
".......응..."
"그럼 혹시 이인영, 전에 본 적 없어?"
".....아니."
"그래..."
아닌가? 그 이준영이란 사람, 이인영 형이나 동생 쯤 되는 것 같은데.
그럼 그 날 본 사람이 인영인 걸까?
스스로 도달한 결론에 깜짝 놀란 나는 다시 얼굴을 떨어트렸다.
사선으로 빗나간 시선들을 한 데 모아 율이에게 물었다.
"그럼 이현균씨는? 혹시 몰라?"
율이가 놀랐는지 갑자기 고개를 돌렸고, 티셔츠가 떨어질락한다.
얼른 티셔츠를 붙잡고 티브이에서 본데로 율이 이마를 찍어댔다.
"아! 아퍼.."
"응? 헤...미안."
"..찍지 마. 왜 찍어."
"아 저기 난.."
아까는 물조절, 이 번엔 힘 조절에 실패했다.
아씨구리..
"..이현균씨는 왜 물어-"
좀 차갑다싶게 들리는 목소리가 내 과민함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현균씨를 알긴 아나보다.
".. 저기 며칠 전에 래희.."
순간 이 얘기를 율이에게 해도 되는가 싶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나만 알고 있으라는 뜻이었나? 어쩔까...
머뭇거리는데 율이가 입을 뗀다.
"..영주야..."
"응?"
"....나 할 얘기가 있다."
몸이 흠칫 떨린다. 오아...이제 고백은 그만 들었으면 하는데..
고백 한 번 잘못 들었다, 지금 뒷감당이 안되는데....
하지만 싫어 소리를 쉽게 내뱉기엔 율이를 내가 너무 아낀다.
벌써, 저 피투성이 머리만 봐도 마음이 욱신 욱신 쑤셔올란 그런다.
"....뭔데."
".....너 저번엔 나 살 뺀 거... 그 거 알고 싶다 그랬지."
오잉. 갑자기 웬 다이어트 특강으로 과목이 넘어가냐.
하던 거 마저 해.
"...그랬지..."
"............."
눈을 한 번 거하게 맞춰 준 율이가 다시 고개를 창 쪽으로 향했다.
"...빼려고, 노력한 건 절대 아니야."
아씨... 지금 뭐하자는건데.
학력고사 1등이 교과서만 열심히 봤어요 하고 뭐가 틀려.
얘도 가만 보면 은근히 잘난 척 잘한단 말이지...
"..그래...? 그럼?"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배고프고 돈 없어서... 그래서 빠진 거다."
"..뭐?"
놀랬다. 정말 놀랬다.
율이가 왜...
".....나."
"......"
웬 뜸은 들이시나아.
".......사실은 교환학생 아니다."
"........뭐?"
다이어트 얘기하다 갑자기 튄 얘기에 율이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뭐야. 우리 학교 다닌다는 것도 뻥이야?"
갑자기 신성일 주연의 옛날 한국영화가 생각나네.
(신분이 낮은 두 남녀가 각자의 상황을 숨기고 만나며 서로를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하려 하
지만 정말로 좋아하게 된 뒤 거짓말이 들통난다는 영화.- 제목은 기억이 안나요..)
"..아니 그 건 맞아."
"...뭐야아~ 그러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건데."
".........작년에."
말을 하다 만 율이는 약간 뻘개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답답했지만 얼굴을 찌푸린 채 기다렸다.
"......한국에 돌아와서........검정고시 치르고 시험 봐서.... 대학 온 거야."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 장편 ]
1994년 어느 늦은 밤 27
송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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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10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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