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가선대부병조참판(贈嘉善大夫兵曹參判)
운암(耘庵) 최봉천(崔奉天)장군의 충의생애(忠義生涯)
김영호(金泳豪)*
Ⅰ. 들어가는 말
『천자문(千字文)』에 보면 충(忠)과 효(孝)의 차이점을 ‘효당갈력(孝當竭力) 충즉진
명(忠則盡命)’이라 하여 효(孝)는 힘을 다하는 것이요, 충(忠)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 하였다. 효는 가족의 윤리로서 자식이 어버이에게 드리는 정성으로 종
적(縱的) 성격을 갖는다. 어버이에 드리는 정성을 효라고 할 때, 이때 섬기는 대상의
어버이는 남의 어버이가 아니라 나의 어버이이며 나의 어버이를 섬기는 것을 효라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혈족집단의 혈연공동체의 결합과 옹호를 전제로 하는 조상숭배
사상이라 하겠다. 그러나 충은 국가의 윤리로서 그 자의(字意)에서 보면 ‘중(中)’과 ‘심
(心)’의 결합어로서 ‘속마음’, ‘거짓 없는 성실한 마음’을 가리킨다. 즉, 나라를 위하여
거짓 없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충이라는 것이다. 귀중한 목숨을 나라를 위하여 바치는
충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는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
며, 그와 같은 헌신(獻身)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인가. 자문(自問)해 진다.
목숨을 바친다는 것에는 생을 마감한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현실적 삶인
생물적 생명보다는 더 큰 가치를 지니는 사회적 생명의 영원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판단이 정립 되었을 때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충은 반드시 군주나 국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참되고 바른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충(忠)은 중(中)을 뜻한다. 그래서 충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것이라고 정의되
기도 한다. 그러므로 충은 ‘흥어신(興於身)하고 저어가(著於家)하며 성어국(成於國)이라’
하여, 먼저 내 자신으로부터 일어나서 집안에서 들어나고 나라에 봉사하는 과정에서
* 金泳豪 / 교육학박사, 새화랑유치원 이사장, 사) 경주사회연구소장, 사)경주지역통합발전협의회 상임자문의원, 경주김씨영분공
파대종회 부회장, 사)淡水會 본부 이사, 전) 서라벌대학교 교수 교무처장·울산대학교 보육교사 교육원 교수·동원과학기술대학
교 교수, 전)新羅 崇惠殿 제142대 殿叅奉 등.
- 14 -
완성되는 것이므로 그 실행 면에 있어서 차원은 같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 실천 이치는
같다고 하겠다. 그래서 충의 시초는 자신으로부터 추구되어야 하며 그 중간과정은 가
정과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충의 종결(終結)은 국가에 봉사한다는 차원에서 매듭지어지
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 전해오고 있는 충신열사(忠臣烈士)의 희생적 이야기는 많은 감동
을 주고 있으며 재조명(再照明)이 요청되고 있다. 그것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 위기로부터 나라와 겨레를 구출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명을 홍모(鴻毛)와 같이
가볍게 산화(散華)시켜 보국(輔國)의 충정(忠貞)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 소중한 목숨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이며, 영원이 간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충신열사들은 그 소중
한 목숨을 개인의 이기적인 독점물로 여기지 않고 간직함에 있어서 대의(大義)를 먼저
생각하였다.
신라 화랑 비령자(丕寧子)는 전장에서 “나는 오늘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지기(知己)를 위하여 죽는다(吾今日上爲國家 下爲知己死之)”는 말을 남기고 전진(前進)
으로 돌격하여 목숨 바친 순국정신과 해론(奚論)의 “의(義)없이 사는 것은 의(義)있게
죽는 것만 못하니 그 의(義)가 아니라면 비록 천금의 이(利)라 하드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정의의 정신 및 “장부(丈夫)는 모름지기 병(兵)에 당하여 죽을 것이니 어
찌 병상에 누워 가인(家人)의 손에서 죽으랴?(丈夫固當兵死 豈可臥牀死家人之手乎)”고
말한 소나(素那)의 사명감 등은 모두가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친 충성과 절
의(節義)를 다한 사적(史蹟)이다.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발휘하여 치명(致命)한 신라 화랑 김흠운
(金欽運)은 그의 아들에게 국가의 위기에 처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충과 효를 온전
히 함이라 일렀던 것은 효가 진충(盡忠)함에 완성되는 것으로 가르친 것이다(爲臣 莫若
忠 爲者 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김유신 장군은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무릎을 꿇고 앉아 “저는 평생에 충
효로써 스스로 기약하여 왔습니다. 대저 속 옷깃을 바로 여미어야만 갑옷이 발라지고,
그물의 벼리를 잡아 당겨야만 그물이 펴진다는 것을 소자는 들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 그물의 벼리와 속 옷깃이 되려고 합니다. 싸움에 임해서 어찌 용감하지 않을 수 있
겠습니까?(吾平生以忠孝自期” 蓋問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臨戰不可不
勇)” 소년 화랑 김유신은 필마단기로 목숨을 걸고 고구려 진중에 뛰어 들어 가 용맹을
떨쳤다는 것이며, 병자호란 때 공주영장으로 나라의 부름 받고 69세의 노령인 최진립
(崔震立) 장군은 늙었다고 후방을 지키라는 말에 “내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하나 싸우다
가 죽지는 못하겠는가?”하고 적진을 향해 말을 달려 싸우면서 혼자 많은 수급을 베고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목숨 받친 충절사(忠節死)며, 적의 수급
(首級)을 수없이 베고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면서 “나는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지
못했으니 돌아가 선조를 뵐 면목이 없다. 네가 집으로 돌아가면 선조 무덤 아래 나를
- 15 -
묻지 말아 라고 분명히 전해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殞命)한 최봉천(崔奉天) 장군의
보국충정은 다시금 되새겨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도 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인재들이 진실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왔
다. 거짓 없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하여, 비록 그사이 수 백 년의 세월이 지난 오
늘날이지만 영원히 망각되지 않고 그 대상인을 추원(追遠) 숭모(崇慕)하는 것은 그들의
값진 희생이 국가와 민족을 개인적 삶보다 우선(優先)한 위대한 덕업(德業)으로 생각했
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15세 때 향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25세(1588녀)때 무과별시에
합격하여 임진왜란을 당해서 창의 대공을 세워 절충장군행경상좌도수군우후를 제수 받
은 운암(耘庵) 최봉천(崔奉天)장군에 관한 『耘庵實記』와 『慶州崔氏司成公派譜』 등
을 고찰하여,
첫째, 운암 최봉천장군 가계의 충의정신은 어떠한가?
둘째, 운암 최봉천장군의 생활이념은 어떠한가?
셋째, 운암 최봉천장군의 문무수양은 어떠한가?
넷째, 운암 최봉천 장군의 전술전략은 어떠한가?
다섯째 운암 최봉천장군의 위민보국한 충절은 어떠한가? 등을 밝혀 오늘날 어지러
운 세태에 다소라도 애국충정을 함양하는 데 참고가 될까하여 그 자료를 제시해 보
려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Ⅱ. 운암 최봉천장군의 가계 및 출생
1. 가계
최봉천은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호는 운암(耘庵)이며 시조 고운 최치원선생의 예손
(裔孫)이다. 5대조는 조선 태조 계유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의 종3품 벼
슬인 사성(司成)을 역임한 청백리 휘 예(汭)이며, 고조는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연
습, 병서의 강습을 맡은 훈련원의 정7품 벼슬인 참군(參軍)을 역임한 휘 상정(尙貞)이
며, 증조는 훈련원 참군 휘 우강(祐江)이고, 조고는 용양위 정8품의 군직인 사맹(司猛)
과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한 휘 득하(得河)이다. 아버지
는 순릉 참봉에 추증되고 후에 가선대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증직(贈職)된 휘 삼
택(三宅)이며 어머니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계림김씨(雞林金氏)이다. 그리고 종조는
종3품 벼슬인 중직대부 군기시 첨정(僉正) 휘 득정(得汀), 종숙은 순릉참봉 휘 삼빙(三
聘), 형은 사헌부감찰 휘 경천(擎天), 장질은 남포현감 육의당(六宜堂) 휘 계종(繼宗),
재종형은 진사 최신린(崔臣隣), 재종질은 공조참판 정무공(貞武公) 휘 진립(震立), 장자
휘 계량(繼良)은 군자감 봉사(奉事), 차자는 훈련원봉사 휘 계훈(繼勳), 계자(季子)는 훈
- 16 -
련원봉사 휘 계명(繼明) 등으로 친족이 대를 이어 문무관으로 출사(出仕)하여 운암의
집안은 위민보국한 충의(忠義)의 명문(名門)을 이루었다.
2. 출생
운암은 조선 명종(明宗) 19년(1564) 갑자 3월 12일에 경주부 남쪽 황오리에서 출생
하였다. 공이 태어나기 3일전에 봉덕사종이 저절로 울었다고 전한다. 그 울음은 고을
에 상서로움이 있을 징조라 하여 부윤 이중량이 기뻐하였으며, 그 시기에 맞춰서 운암
이 태어나게 되어 마을 사람들이 놀라며 특이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명종은 인종(仁宗)이 승하(昇遐)하고 12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모후(母后) 문정왕후
(文定王后)가 8년간 수렴청청하면서 윤임 일파를 제거하고 윤형원 일파가 정권을 장악
하여 을사사화, 양재역벽서사건 등을 일으켜서 사림세력을 몰아내고 외척세력이 전횡
(專橫)하여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려고 노력하였으
나 불행하게도 재위22년인 34세로 승하하였다.
운암은 비록 나라 사정이 좋지 않은 이러한 시기에 태어났으나 봉덕사종이 자명(自
鳴)하여 위국대현(爲國大賢)의 출사(出仕)를 암시한 것 같다.
운암의 나이 15세(1578년) 되던 해 가을에 향시에 장원으로 뽑혀 부윤으로부터 상
을 받았으며, 17세(1580) 때 경진년 봄에 사인(士人) 김숙정의 딸과 혼인하였고, 23세
때 장자 계량(繼良)려이 태어났으며 25세 때(1588년) 무자년에 차자 계훈(繼勳)이 출
생하였다. 이 해 8월에 무과별시에 합격하였다. 이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
이다. 26세 때 계자(季子) 계명(繼明)이 태어났고, 28세 때 딸이 태어났으며 뒷날 첨정
김충립에게 시집갔다. 그래서 3남 1녀를 두었다.
Ⅲ. 운암 최봉천장군의 학문
운암은 7세 때인 1570년부터 귀계서숙(龜溪書塾)에서 재종형인 진사 귀계(龜溪) 최
신린(崔臣隣)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재주가 영매준특(英邁俊特)하여 문의
(文意)를 쉽게 깨우쳤고, 특히 주의 집중하여 수업에 임하였으며 깊이 사고하여 경전과
사서를 스스로 습득하였다. 그래서 진사공은 “이 아이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빛 낼 인
재가 될 것이다.”라는 것을 예언하였다.
운암의 나이 11세 때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방문하여 운암의 기특한 명성을 듣
고 학업성취의 수준과 몇 권의 책을 통독하였는가를 알기 위하여 물었다. 그 때 운암
은 이미 송나라 강지(江贄)가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바탕으로 편찬한 역사서
인 통사를 비롯하여 사서와 삼경을 통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통사(通史)를 섭렵했
고, 시서(詩書)를 대충 읽었으며 사서(四書)는 저의 배속에 쌓여있습니다.”라고 거침없
- 17 -
이 대답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부윤(府尹)이 문장을 뽑아 질문하니 주저함이 없이 응
답하여 부윤을 놀라게 하였고 ‘하늘이 내린 인재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부윤은 운암의 아버지 최삼택(崔三宅)에게 “힘써 나라의 동량(棟樑)을 만들도록 하
라.”는 당부를 했다고 하니 운암은 매우 총명하고 학업이 탁월하여 비범한 아동이었음
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운암의 나이 13세가 되던 해에 귀계공(龜溪公)에게 “글은 지난 일을 섭렵하는 데 귀
히 여기니 옳은 것이 있으면 스승으로 삼을 뿐입니다. 만약 궁하게 늙으면서 젊은 시
절을 헛되이 보낸다면 효제(孝悌)는 어느 때 행할 것이며, 대장부의 큰 포부를 어느 때
이룰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책을 돌려주고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
다. 대장부가 좁은 서숙에서 글이나 배우며 답답하게 지내는 것은 큰 뜻을 펴는 대는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고 청년기의 귀중한 시간을 가볍게 보낼 수 없다고 여기면서 높
은 이상과 웅지를 가꾸고 펴기 위해 스스로 서숙을 나왔던 것이다.
6년간 수학기간에 익힌 학업성취와 남다른 포부와 기량을 지켜 본 기계공은 “하늘
높이 나는 새는 갇힌 농속에서 길들일 일이 아니고, 깊은 연못의 고기는 비바람을 빌
려 용을 이루는 것이다. 이 아이의 총민한 재주와 뛰어난 기상은 단지 우리 가문에서
처음 볼 뿐 아니라 근래 재주가 뛰어난 사람도 견줄 사람이 없으며, 참으로 가상한 일
이다.”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실기에서 볼 때 운암은 6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수학 기간 이었지만 총명
함이 뛰어나 묘령(妙齡)에 경사자집을 효통하여 학자의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사료된다.
Ⅳ. 운암 최봉천장군의 충의보국(忠義輔國) 행적(行績)
운암이 서숙을 나와 무예를 익히기 시작한 것은 20세부터이다. 그 때는 북쪽 오랑
캐가 변방을 침범하여 향민들이 불안하고 소란스러웠다. 조정에서는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인재 양성이 필요 되어서 무과를 개설하였다. 그래서 공은 붓을 던지고 활을 잡
아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였다. 백이소, 김석견, 이태엽 등의 제현과 함께 춘추로 회합
을 갖고 활 쏘는 무예를 연습하였다. 22세가 되던 해 소백산에 있는 백두(白頭)호랑이
가 사람을 통째로 삼킨다는 말을 듣고 그 호랑을 잡기 위해 무장을 하고 반달 가까이
호랑이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운암은 꾸준히 무예를 익혀서 25세에 무과별시에 합격하는 영광을 가졌다. 27세 때
울산 태화강 상류에서 윤홍명, 박봉수와 무예 시합을 하였고, 28세 때는 이의잠, 이방
린, 손시, 권사악 등 제현과 더불어 형산강 상류에서 회합을 갖고 승마와 활쏘기, 검술
등의 무예를 익혔다.
이때는 1591년 3월에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이 돌아왔다.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일본의 정세를 시급히 보고 하였는데,
- 18 -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서울에 와서) 이윽고 복명할 적에, 임금
께서 불러 보시고 물으시니 윤길은 그전의 말대로 대답하였고, 성일은 “신은 그러한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고는 이어,
“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允吉還泊釜山 馳啓情形 以爲必有兵禍) 旣復命 上人見而問之 允吉對如前 誠一曰 臣不
見其有是因言允吉 搖動人心非宜)*
1592년 운암의 나이 29세 때 대마도주 평의지가 부산에 와서 일본이 장차 변란을 일
으킬 것이라 하여 온 나라가 소란스러웠다. 이 때 운암은 부윤에게 만약의 사태를 대비
하여 성지(城池)를 수선하여 한다고 글을 올렸다(公言于府尹疏 葺城池 以備陰雨之具). 이
와 같이 운암은 왜군의 침범을 예견하고 방어체제를 강화해야 함을 깨닫고 부윤에게 건
의하여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우국충정이 남달랐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 문천회맹에서의 운암의 역할
일본의 풍신수길은 조선과 정명가도(征明假道)의 교섭이 결렬되자 선조25년(1592)에
원정군을 편성하여 육군 15만여 명과 수군 9천명을 몇 진(陣)으로 나누어 조선침략을
개시하였다. 그 해 4월 14일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종의지(宗義智)가 이끄는 일본군
제1진 1만 8,000여 병력은 최초로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당일로 부산성을 겹겹으로
포위 공격해 오는 왜군을 맞아 부산첨사 정발(鄭撥)의 진두지휘 하에 군·관·민은 결사
적인 항전을 벌렸으나 결국 정발이하 모든 성민(城民)들은 성(城)과 운명을 같이하였
다. 부산성을 함함락시킨 일본군은 동래성(東萊城)으로 밀어닥쳤다.
이 때 일본군은 성의 남쪽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는 팻말을 세웠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곧 ‘싸워서 죽기는 쉬운 일이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는
글을 써서 적에게 던져 주었다. 이로서 일본군의 총공격이 개시되었고, 조선 군사들은
선전분투 하였으나 그것은 조총(鳥銃)과 궁시(弓矢)와의 대결이어서 막아낼 수가 없었
다. 결국 전력(戰力)의 부족으로 성의 함락과 함께 송상현 이하 모든 장병들은 장렬하
게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우리 측 군사들을 차례로 격파한 이후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북상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신속한 북상을 위해 경상도 지역 주요 상경로 중에서 일본 사신들
이 경유하던 중로(中路)를 이용하거나, 낙동강 하류를 건너지 않고 북상할 수 있는 경
상좌도의 좌로(左路)를 이용하였다.
* 류 진(2001). 국역 징비록. 서울 : 사단법인 서애선생기념사업회. p.16
- 19 -
일본군 제1진은 부산, 동래 함락 후 거의 저항을 받음 없이 밀양 · 대구를 거쳐 조
령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제2진 2만 2000여 병력은 가등정정(加藤淸正)과 과도직무(鍋
島直茂) 등의 인솔 하에 부산 · 경주를 거쳐 신령방면으로 향하였고, 제3진은 흑전장정
(黑田長政)과 대우의통(大友義統) 지휘하의 1만 1000여 병력은 뒤이어 도착한 모리길
성(毛利吉成)과 도진의홍(島津義弘) 휘하의 1만 4000여 병력과 합류하여 창원·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경주부윤 윤인함은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 문천 가에서 여러 의사들과 회맹을 갖
자고 하였다. 운암은 이 회맹에 달려갔다. 이때 경주의 여러 고을 가운데 장기현감
이수일 만 홀로 이르렀다.
부윤이 여러 의사들에게 요청하기를 “군사를 동과 서 두 부대로 나누어 판관은 서부
군을 거느리고 성 박에서 지키고, 장기현감 이수일은 동부군을 거느리고 성안을 지키
도록 하라. 그리고 여러 의사는 군대를 나누어 이들을 후원하는 것이 어떠하겠소?”라
고 하니, 수백 명의 회원들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말하지 않았다.
운암은 “지금 왜구가 승승장구하는 형세가 곧 우리 고을에 이를 것이다. 그러니 이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다가 적에게 죽는 것이 요충지를 삼고 있다가 적을 불의에 기습
하고 쳐들어오는 적을 막으며 계책을 세우는 것만 못한데, 늙은 문관은 어쩌면 그렇게
도 겁이 많은가?”라고 하였다. 모두가 “최의사의 말이 옳다.”고는 했으나 자원하여 변
방을 지키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운암은 “이곳에서 큰 길로 나가면 바로 부산
과 동래를 통하는데 이것은 진(秦)나라의 백 둘의 형세와 같다고 할 것이다. 한 군대
를 스스로 분담하여 작은 군사로 많은 왜구를 요격해야 하는 데, 나와 함께 뜻을 같이
할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청했다. 이애 재종질 최진립(崔震立)은 열박 고개를 방비하
고자 원했고, 봉사(奉事) 김호(金虎)는 계연 입구를 막기로 청했다.
(府尹尹仁涵發關鎭下諸郡 會盟諸義士于汶上 公往赴焉 鎭下郡 獨長鬐縣監李守一至 尹要
公及諸義士 議曰 分東西二部 判官領西部軍 巡備城外 縣監率東部軍 守城中 而諸義士 分
隊後援 如何 數百會員 雖曰 義合 而面面相視 莫有先一言者 公諗于衆曰 今敵勢長驅 朝
暮且至 而守此孤城 待敵送死 不如扼其要害 擊其不虞 以遏犯境 爲得計公 文官老人 何㥘
也 僉曰 崔義士說 得是 而無一 人自願備邊者 公曰 此去南大路 直通釜萊 而有秦得百二
之勢 請自當一隊 以小擊衆 同我者誰 再從姪震立 願備咽薄嶺 奉事金虎 請塞鷄淵口)
이상과 같이 운암은 적이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신속하게 경주로 입성할 것을 예견하
고 효과적인 방어 책략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운암은 전술전략이 뛰어났음이 발견된다.
* 柳永烈 외(1978). 韓國史大系. 朝鮮前期. 서울:圖書出版 三珍社, pp.137-138
- 20 -
2. 잉보(仍甫)전투
1592년 4월 25일에 언양을 거쳐 올라온 왜군을 잉보의 봉화곡에서 크게 격파했다.
운암은 적의 머리 이 백 급을 관에 바치자 부윤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그 공을 나라
에 보고했다(二十五日 大破賊于仍甫烽火谷 獻馘二百級于官 尹大奇之上功行朝).
왜적이 언양에서 여유를 보이며 느릿느릿 쳐들어 왔는데 이는 야간에 경주를 습격하
려는 꾀였다. 운암이 모집한 군사는 삼 백 명이었는데 모두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
다. 운암은 이들을 몰래 길가에 매복시켜 놓고 말을 잘 타는 군사 10명을 뽑아 양산과
언양 경계에서 망을 보며 저들이 해가 저문 시간에 이곳에 도착하기를 기다리게 하였
다. 그리고 척로(斥路)에서 왜적의 수십 급을 베게 하고 잠복해 있도록 하였다. 얼마
후 적들이 과연 고기를 꿰듯 달려왔다. 그 선두를 풀어서 적의 가운데를 습격하고 사
방에서 비 오듯 화살을 쏘니 함성은 산골짜기를 진동시켰다. 앞서 가던 적들은 빨리
달아 났고, 뒤의 적은 도로 도망가면서 어두운 산골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운암은
40근 팔 척의 장검을 가지고 그 후미를 공격하며 쫓아가니 서릿발 같은 칼날이 닿은
곳마다 5, 6명의 적 머리가 바람결에 나뭇잎 떨어지듯 잘렸다. 열박고개까지 추격하여
두 군사가 협공하니 한 사람의 적도 살아서 돌아간 일이 없고 마침내 왜적 삼백 급을
베었다. 전멸시켜 대승을 거둔 것은 운암의 탁월한 지략과 용맹에 의한 업적이었다.
3. 불국사 잔적 소탕
왜적 200명이 동해에서 토함산을 넘어 불국사를 소굴로 삼고 사방으로 다니며 노략
질을 하고 있어서 운암은 5월에 불국사에 남아있던 적을 의사들과 더불어 공격하여
20여급을 베니 남은 잔당은 도로 동해로 달아났다. 그래서 불국사는 왜적으로부터 보
호되었던 것이다.
4. 울산전투
운암은 6월에 여러 의사 및 군관들과 함께 울산에 남아 있던 적을 격파하고 울산성
을 되찾았다. 적들은 기장에 쳐들어와 울산을 점거하고 흩어져 다니며 온 마을 을 노
략질했다. 울산의병장 윤홍명, 장희춘이 운암에게 와서 구원을 요청했다. 운암이 부
윤에게 말하니 부윤이 관군 500명을 정해주고 운암과 더불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소
를 잡고 술을 내리며 위로하였다. 운암은 2000명을 통솔하고 박봉수, 윤희영, 황희철
에게 500명을 거느리게 했다. 그리고 숨어서 산골짜기를 지나서 부(府) 서쪽에 이르
렀다. 이 때 운암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저들은 내가 달아는 것을 보면 성벽을 비우
- 21 -
고 나를 추격할 것이다. 그대들은 바로 성안으로 들어가서 남은 적을 섬멸한 후에 성
문을 굳게 지키며 한 명의 적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고 하였다. 이에 스스로
1000명을 거느리고 태화강 연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운홍명, 장희춘을 선봉장으로
삼고 김석견, 백이소, 전응충에게 500명을 거느리고 동북 산골짜기에 노궁(弩弓)을 가
지고 매복하도록 했다.
운암은 스스로 깃발을 휘두르고 말을 채찍질하며 적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거짓으로
패해 달아났다. 싸우면서 도주하다가 해가 저물 무렵에 병기를 버리고 산길을 따라 들
어갔다. 적들이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추격했는데 갑자기 숨었던 노궁을 일제히 발
사하자 시석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적들은 배와 등에 화살을 맞고 탈출하려 온갖
애를 쓰면서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운암은 장검을 휘두르며 제 빨리 추격하니 몸
은 하늘에 나는 듯 가벼웠다. 적진으로 들어가자 장검을 가진 것에 겁을 먹고 궁지서
벗어나 도망치는 것을 이롭다고 여기고 적들은 감히 시환을 쏘지 못하였다. 마침내
수백 급을 베고 병기를 모두 거두어 공을 바치니 부윤이 찬탄하며 상을 내리며 “공의
장검은 관운장의 청룡검에 못하지 않다”고 하였다. 부윤이 크게 찬탄하며 상을 내리고
공을 조정에 올렸다.* 이상과 같이 운암 최봉천은 여러 의사와 더불어 주도면밀한 전
략으로 적을 무찔러 대승을 거두었다.
5. 영천성 수복 전투
4월 21일에 경주부에서 무혈 입성한 가토 군은 80여리를 이틀 만에 행군하여 영천
에 도착하였다. 그 때 원사용(元士容)의 후임군수로 부임한 김윤국(金潤國)은 새로 쌓
은 영천읍성을 활용한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그저 풍문만 듣고 놀라서 성을 버리고
높이 900m의 기룡산에 있는 묘각사로 도주하였다. 이에 관군과 백성도 흩어지고 말았
다. 그래서 읍성은 적에게 쉽게 함락되었다. 가토는 영천성에 약 1000여명을 남겨 놓
고** 신령, 의흥을 거쳐 북상하였다. 영천에 주둔한 적군은 읍성을 거점으로 삼아 사방
으로 다니면서 약탈과 살육, 파괴를 일삼았다. 심지어 묘를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르기
까지 했다.*** 또 영천군의 인리(人吏)와 관속(官屬) 등으로 이루어진 200여 명이 결당
하여 도적이 되어서, 낮에는 일본군과 내통하고 밤에는 도적질을 일삼으며 횡포를 부
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인해 5월초부터 영천의 여러 지역에서 의병들이
거병하기 시작하였다.
*『國譯耘庵實記』 p. 73-74
**『宣祖實錄』 권30, 50년 9월 壬申
***『崔孝植』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pp.63-64.
**** 權應銖, 『白雲齋實紀』 권2, 啓.
- 22 -
자양의 정세아, 명산 대전마을의 정대임, 신령의 권응수 등은 각각 해당 거주 지역의
사족들과 연대해 의병을 일으켰다. 권응수는 1584년(선조17년) 별시무과에 급제한 무
신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어모장군으로 경상좌수사 박홍의 막하에 있었다. 그러나
박홍이 겁을 먹고 달아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신녕 화산에 돌아와 동생 응전(應
銓), 이온수(李蘊秀) 등과 노복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신녕 동편에 위치
한 한천에서 노략질하던 왜병을 격살하였다.*
운암은 7월에 여러 의병장과 함께 영천에 남아있던 적을 격파하고 영천성을 수복하
였다. 왜적 수만 명이 영천성을 완강히 점령하고 있었다. 의병장 권응수가 정담(鄭
湛), 전삼달(全三達)을 시켜서 말하기를 “적의 형세가 매우 강성이지만 섬멸시켜야 한
다. 그러나 성은 외롭고 군사가 적기 때문에 힘을 모아 함께 격파할 수 있도록 구원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운암은 여러 의사들과 함께 용맹스러운 군사 300명과
좋은 궁수 200명을 거느리고 달려갔다. 이에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200백 급을 베니
남은 적들이 달성으로 도망갔다.
8월에 영천의 남은 적들이 창암(倉巖)에 주둔하여 온 이웃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략
질을 했다. 운암은 여러 의사와 함께 험한 지세를 끼고 5,6일간 싸웠다. 적들은 군량미
통로가 끊어지자 마침내 밤을 틈타 기물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다.
(七月同諸義將 破永川留賊 復永川城 賊數萬 頑據永川 義兵將權應銖 使鄭湛 全三達來言
賊勢鴟張 勦滅乃已 而城孤軍小 要與共破 公與諸義士 率勇士三百 良弓二百人以赴之 劈
破城門 暫二百頭 餘賊奔達城)
이상에서 볼 때 운암은 용맹하고 무술이 탁월하였음이 발견된다.
6. 명활산 적 소탕
8월 20일에 명활산 아래에서 적을 격파하고 성을 수복했다. 그 날짜를 각 고을 의
사들에게 포고했다.
“적들이 청도에서 밤에 몰래 들어와 성을 습격하고 성안으로 들어와 점거하고 돌아
다니며 마을을 노략질했다. 운암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 수십 대를 명활산 아래
에서 격살하고 글을 지어서 각 고을 의사들에게 사실을 몰래 알렸다.
7. 경주성(慶州城) 수복 전투
영천성 수복과 박연 전투의 승리에 이어 8월 2일 경주지역 의병대장 김호(金虎) 소
모관(召募官) 주사호(朱士豪) 소모유사 최진립(崔震立)이 이끄는 부대가 언양에서 경주
*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2012). 『壬亂義兵史의 再照明』. p.74.
- 23 -
로 북상하는 일본군을 경주 노곡 부근에서 맞닥뜨려, 일본군 50여명을 참살하고 격퇴
하는 승전고를 올렸다.* 이 승전에 고무된 경상좌병사 박진(朴晋)은 안강에서 경주성
수복 작전을 계획하였다. 8월 20일 안강에서 군병을 총소집하여 검열을 하고, 바로 군
병을 출발하여 이튼 날 경주에서 전투를 벌렸다. 이때에는 경주, 영천, 울산, 영일, 장
기, 흥해, 양산, 자인 등 문천회맹에 참여했던 지역의 의병부대와 관군이 주축을 이루
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참여한 군병 수는 대략 37,000명 정도로 추산 되었다. 8월 21일 경주성을 사이에
두고 피아간 치열한 혈투가 전개 되던 중에, 경주 동쪽에서 나타난 또 다른 왜군의 협
공을 당해 패주 하게 되었고, 이 와중에 영천 의병장 정세아의 아들인 정이번이 전사
하였다. 주력군만 600여명이 전사 하는 등 실패로 그치자 경상좌병사 박진은 안강으
로 물러나 재차 경주성 탈환을 위한 작전을 계획하였다.***
25일에는 부윤 윤인함이 안강에서 돌아왔고 병사 박진이 돌아왔다. 각 병사들이 격
문을 받고 도착하니 군사는 6,7000명에 이르렀다. 부윤이 “판관은 서부군을 거느리고
성 서문을 공격하고 현감 이수일은 동부군을 거느리고 성 동문으로 들어가면 적들이
앞과 뒤에서 군사를 맞서게 되니 가히 적들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하니 병사도 또
한 그렇게 생각하였다.
운암이 나아가서 말하기를 “굴속에 있는 여우를 잡는 것은 들녘에 있는 토끼를 잡는
것과 다르다. 지금 적들은 소굴을 이미 완벽하게 해 두고 있다. 우리의 훈련되지 않는
병사를 이끌고 견고한 성 아래에서 싸우는 것은 좋은 꾀가 될 수 없고, 또한 강한 적
들을 쉽게 굴복시킬 수 없다. 오히려 지혜로써 격파해야 한다. 지금 판관은 5000명을
거느리고 백률산 아래 숲 속에 매복하고 현감은 2000명을 거느리고 읍성의 북문을 격
파하면 적들은 우리 군사가 쳐들어 온 것을 보고 모든 병사를 이끌고 나와 싸울 것이
다. 싸우다 도망가곤 하면 우리 의병들이 남문으로 들어가 그 괴수를 죽이고 마침내
일거에 성을 수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두들 “의장(義將)의 말이 매우 깊은 꾀다.”라고 하였고, 부윤도 “최 의사의
지금전략에 다른 의의가 없다.”고 마침내 대책으로 정하고 진군하니 해가 이미 저물었
다. 북문을 지키고 있던 적이 우리 군사가 오는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나왔다. 아군
은 싸우다 달아나면서 백률산 아래에 이르렀다. 이 때 노궁(弩弓)을 일제히 쏘고 크게
싸우며 한 밤중에 이르렀다. 의사 군사가 남문을 부수고 들어가 활을 쏘고 칼을 휘두
르며 적들을 남김없이 죽였다. 이 때 큰 사나이 한 명이 손에 칼을 잡고 좌충우돌하니
* 趙慶男. 亂中雜錄 2, 壬辰年 8월 4일
**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2012). 전게서. p.81
*** 『國譯耘庵實記』 pp. 73-74
- 24 -
군사들이 모두 쓰러졌다. 운암은 장검을 가지고 그의 오른쪽 어깨를 내려치자 칼이 땅
에 떨어졌다. 적은 마침내 풍월루(風月樓)를 뛰어넘고 왼쪽 손으로 기왓장을 거둬 던졌
다. 운암은 그의 뒤를 따라 뛰어 올라 그의 머리를 내려치자 적은 공중으로 몇 발이나
올라갔다가 땅에 떨어졌는데, 바로 그들의 두목이었다. 드디어 모든 무리들이 동문과
북문으로 달아났다. 마침내 경주성을 수복하고 노획한 왜적 괴수의 칼을 부윤에게 바
쳤다. 부윤이 아주 기특하게 여기고 군공(軍功)을 나라에 보고했다.*
이때는 새롭게 개발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것을 효
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경주판관 박의장에게 주간에는 기병을 동원해 성 아래에서 무
력시위를 하게 하고, 밤에는 성 주변 산봉우리에 횃불을 늘어뜨려 일본군이 성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9월 7일 해가 진 뒤에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경주성을 포위하고 미리 준비했던 비
격진천뢰를 성안에 쏘아 넣었다. 비격진천뢰가 날아들자 그 성능을 몰랐던 일본군들은
서로 모여들어 만지거나 살펴보았고, 그 때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폭발
하여 쇳조각이 사방으로 튀고, 이에 맞아 즉사하는 자가 한 번에 2,30명이나 되었다.
이에 놀란 왜군은 혼비백산하였고, 삽시간에 성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왜군은 이튼
날 경주성을 포기하고 서생포 쪽으로 후퇴하였다.**
8. 형산(兄山)의 적 소탕
1593년 정월에 형산 아래에서 적을 크게 격파했다. 왜적 수천 명이 포항에서 안
강으로 쳐 들어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했다. 운암은 여러 의사들과 함께 의
논하며 말하기를 “ 저 놈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놓아두었더니 마땅히 섬멸하고야 말 것
이다. 북쪽에 있는 의사는 군사를 형산 남·북산에 숨겨 두었다가 적의 전면을 공격하고
나는 그 후미에 따라가며 모두 섬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밤에 군사들이
숨죽이고 잽싸게 달려가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을 공격했다.
적들은 그 깃발 앞면에 쓴 글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각기 도망쳐 큰 길 따라 포항으
로 달아나니 형산(兄山)에서 노궁을 일제히 발사하였다. 운암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용
맹스러워 일당백에 이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따라서 왜적들 가운데 절반은 물에 떨
어졌고 남은 수십 급을 베었다. 운암은 안강에 버린 적의 무기를 거두어 관에 보냈다.
부윤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공은 승첩에 있어서 낮에 꾀하지 않고 매양 황혼에
있는 까닭은 무엇이오?”라고 하자, 운암은 “우리 군사는 오합지졸로써 저들의 훈련받
은 병사를 맞아 싸워야 한다. 이 때 가장 소중한 것은 저들이 익숙하지 못한 지형을
*『國譯 耘庵實紀』. pp.78-80.
** 전게서. pp.81-82
- 25 -
이용하는 것인데 대낮에 적들과 싸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부윤이 곧 잘했다고 칭
찬하였다.
학봉 김성일 선생이 유문(諭文)을 보내 본부(本府)에 이르렀다. 이 글에서 운암의 공
적을 높이 기리고, 운암을 행재소(行在所)에 보내라는 명이 있었다. 이에 본부 부윤은
“본 고을이 보장된 것은 운암의 힘이 아닌바 없고 의사가 봉기하였지만 이 사람이 아
니면 해산될 우려가 있다.”고 하여 방보(防報)했다.*
9. 아화곡(阿火谷) 적 소탕
1953년 5월에 아화곡에서 적을 쳐서 깨트리고 자인까지 추격하여 또 격파했다. 남
은 적들은 모두 밀양으로 도망갔다.
10. 영천 창암전투
1597년(丁酉) 9월에 영천 참암전투에 달려가서 전사하였다. 적들은 다시 바다를 덮
을 정도의 인원을 이끌고 쳐들어 와서 경상우도에서 승승장구하였다. 통제사 원균이
패하여 죽고, 각 고을의 수령들은 모두 왜구의 풍문만 듣고 도망하였다. 적들이 마침
내 영천 창암에서 본 고을을 재범할 우려가 있었다.
운암은 이 때 병 때문에 요양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모든 의사들이 힘을 합하
여 모두 창암에 모였다. 운암이 모집했던 용감한 의병들은 이미 수영에 부임했을 때
모두 해산하였다. 마침내 운암은 집안의 종 약간 명과 수하의 친병(親兵)을 데리고 달
려갔다. 여러 의사들은 모두 적(賊)은 병사가 많고 우리는 적어서 가벼이 싸우는 것은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져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운암은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주나라 3,000명의 군사가 주왕의 억만 병사를 굴
복시켰다. 따라서 군사는 많은 데 있지 않고 정예함을 귀하게 여기는데, 어찌 행동을
지체하여 물리침을 주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곧 홀로 출전하여 깃발을 세우고
장차 싸우려했다.
적들이 그 깃발을 보고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지난 해 이 깃발 아래에서 패전한
일이 많았는데 이제 다시 우리를 곤하게 하는가?”라며 사방에서 북을 두드리며 진격해
왔다. 마침내 운암은 말을 채찍질하고 칼을 휘두르며 좌충우돌하여 적진으로 뛰어 들
어가서 수백 명을 베었으나 적의 탄환을 맞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데리고 있던 종에게 말하기를 “병이 든 후에 검술이 전혀 마음대로 되지 않
아서 내가 죽게 되었구나. 충과 효를 다하지 못했으니 돌아가 선조를 뵐 면목이 없다.
네가 돌아가서 집안사람들에게 말하라. 선조의 무덤아래 나를 묻지 말아 달라고 하여
* 전게서. p.89-90
- 26 -
라.”하고 운명(殞命)하니 곧 9월 29일이었다. 운암의 나이 34세였다. (公遂策馬揮劒 左
衝右突 殺入賊中 斬數百餘人 爲賊砲所中 還陣謂僕夫 曰病後劒術 大不從心 我其死矣 不
忠不孝 無面目 歸拜祖先 汝歸語家人 愼勿埋我於先塋之下 遂死之乃九月二十九日也)
Ⅴ. 운암 최봉천장군의 관직
운암은 25세가 되던 해인 무자년(1588) 무과 별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2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문천회맹에 참가하여 여러 전투에서 입공하여
갑오년(1594) 정월 초일일에 선략장군(宣略將軍)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의 교지를
받았다. 그 후 26일 만인 정월 27일에 보공장군(保功將軍)**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
에 임명되었고, 4월 18일에도 군공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 장예원정(掌藝院正)에 임
명되어 한 해 세 번의 고속 승진의 교지를 받았다. 이는 각 전투에서 매번 대공을 세
웠기 때문이다.
2년 후인 병신년(1596) 8월 18일에 절충장군****행경상좌도수군우후(折衝將軍行慶尙左
道水軍虞侯)*****에 임명되었다. 이 때 운암의 나이 32세였으며 이 직위가 생시의 마지막
관직이었다.
운암의 순절 후 8년이 되던 해인 선조 38년 을사(1605) 4월 16일에 조정에서 왜적
을 토벌한 공신을 녹훈하면서 운암을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뽑고 철권(鐵券)에 등재했
으며* 이 해 4월 26일에는 부모에게 2품 관직이 증직되고 3년 뒤 정미년(1607)에 공
의 아들 계량(繼良)에게 벼슬이 내려졌다.**
다시 순조 21년 신사(1821) 4월 18일에 충절이 탁이(卓異)하여 가선대부병조참판
(嘉善大夫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이는 7세손 최주건(崔柱健)이 연로(輦路)*****에서 글을 올렸고, 예조와 이조에서 거듭
글을 올려 증직을 요청한 때문이며, 임금이 이러한 직위를 윤허한 것이다.*
우암이 받은 교지(敎旨)는 다음과 같다.
* 僉正: 절도사에 속한 진에서 수군을 거느려 다스리던 군직, 종3품 무관 벼슬.
** 保功將軍: 조선시대에 종3품 하(下)의 무관 품계.
*** 禦侮將軍: 조선시대 정3품 당하관 무관의 품계.
**** 折衝將軍: 조선시대 정3품 당상관 무관의 품계. 어모장군의 위.
***** 水軍虞侯: 조선시대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 있는 수군의 수영에 속한 정4품 외직 무관의 벼슬. 수군첨절제사의 다음
가는 직위.
* 상게서.p.121-122,
** 상게서.p.124. "乙巳四月二十六日行都承旨臣申欽敬奉 傳旨 宣武原從功臣一等乙良 各加一資 子孫承蔭 宥及後世 父母封爵 除外
二三等略”
*** 兵曹參判: 종2품.
**** 상게서. p.120. "敎旨 崔奉天 贈嘉善大夫兵曹參判者 辛巳四月十八日”
***** 輦路: 거동하는 길
* 상게서. p.91. “純祖大王二十一年 淸道光元年 辛巳 贈嘉善大夫兵曹參判 七世孫 柱健 籲於輦路 禮曹吏曹 覆啓請贈職 允之有是
贈”
- 27 -
1) 교지(敎旨)1 : 선략장군(宣略將軍)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
2) 교지(敎旨)2: 보공장군(保功將軍)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
- 28 -
3) 교지(敎旨)3: 절충장군행경상좌도수군우후(折衝將軍行慶尙左道水軍虞侯)
4) 교지(敎旨)4: 증가선대부병조참판(贈嘉善大夫兵曹參判)겸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 29 -
Ⅵ. 운암 최봉천장군의 행장(行狀)
운암 최봉천장군의 행장은 1789년 기유년(己酉年) 5월 상순에 전어모장군(前禦侮將
軍) 행세손익위사위솔(行世孫翊衛司衛率)을 역임한 여강(驪江) 이헌락(李憲落)이 찬(撰)
하였다. 『국역 운암실기』에 수록된 국역문은 다음과 같다.
공의 성은 최씨이고 휘는 봉천이며 신라 사량부에서 계출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휘 예(汭)는 태조 계유년(1393)에 문과 급제하고 벼슬은 사성(司成)에 올랐으며 청백리
로 이름이 높았으니 곧 공의 5세조이다. 아버지 휘 삼택(三宅)은 통사랑과 순릉참봉을
지냈고, 공의 공훈으로 한성부 우윤(右尹)에 증직(贈職)되었다. 어머니 계림김씨는 참봉
김현동의 딸이고, 정부인에 증직되었다.
가정 갑자년(1564)에 공은 부 남부 황오리 본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우뚝하고 지기가 정확하여 성인의 의도(義度)가 어였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합격하였으
나 벼슬은 하지 않았다.
임진년(1592) 4월에 왜구가 침범해오니 종묘와 사직이 옮겨졌고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 갔다. 이 때 공의 나이는 29세였다. 분연히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사람의 큰
인륜은 군신과 부자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폐하면 곧 금수와 다를 바 없다. 비록 내
집안이 가난하지만 본연의 성품은 하늘에서 부여받았다. 차마 어찌 군부(君父)가 당한
욕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고 하고, 재종자 휘 진립(震立)과 함께 마을 장정
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대의(大義)로 일깨우며 서로 약속하고 각각 방략(方略)을 일
러주었다. 경주울산 경계의 요충지에 군사를 매복시켜 두고 처음 한번 싸워서 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당시 수백 년간 온 나라에서 태평을 누려왔기 때문에 백성들은 전
쟁을 몰랐는데 갑자기 왜구의 침입을 받으니 사람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그렇지
만 공은 홀로 먼저 창의하여 임금이 당한 수치를 기필코 설욕하려하니 이에 도망가서
숨었던 사람들이 공의 소문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담력을 자랑하고 서로 권유하여 모
두 신하의 직분으로서 당연히 죽어야 하는 것과 왜구를 반드시 섬멸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언양·울산 두 고을과 동경 사방에 이르기까지 홀로
온전히 왜구로부터 유린되지 않았던 것은 실제 공의 공로에 의한 것이다. 나라에서 이
를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훈련원 첨정에 제수하니 바로 갑오년(1594) 정월이었다.
그 후 1년 이내의 짧은 기간에 부정(副正), 첨정(僉正)을 역임하고, 세 번이나 고신
(告身)하엿다. 군공(軍功)으로 품계가 오른 것이 한 번이고, 군공으로 직위를 받은 것이
두 번이다. 병신년(1596) 8월에 또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높이고, 특별히 경상좌도 수
군우후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1등 공신으로서 녹훈되고 부모에게 2품의 작위가 내려
졌는데, 이는 『동경지』, 『여지승람』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수영 우후로 있
을 때 적개의 의지로 온 힘을 다해 적들의 통로를 막으니 적들도 이를 듣고 곤궁하여
감히 좌도를 통해 북상하지 못했다.
- 30 -
정유년(1597)에 이르러 청정(淸正)이 다시 침범해 왔을 때, 공은 이미 벼슬을 그만
두고 집에 있었다. 이에 친히 집안의 종 약간 명과 평소 수하의 졸병을 거느리고 영
천 창암 전투에 달려갔다. 그 곳에서 활을 당기며 칼날이 부딪쳤을 때 전진만 있었고
후퇴는 없었다. 마침내 큰 담력을 지닌 8척의 거구가 전쟁터에서 장렬히 죽고 말았다.
아! 슬프고 위대하고나! 예로부터 지난 역사를 살펴보니 충신과 의사가 살신성인으
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공은 묘령(妙齡)의 장
부로써 여러 번 적들의 예봉을 꺾었다. 그리고 자기의 의리와 명분을 다하고 마침내
쌓인 시체더미의 전장에서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르렀다. 그의 연기(年紀)를 살
펴보면 저자에 들어가 분연히 군중을 불러모았는데 왕손가 (왕손가)와 거의 비슷하다.
또한 당시 병란 속에서 충정과 절렬(節烈)을 다한 선비 가운데 망우당 곽재우, 충의공
권응수, 송암 김면은 모두 영남에서 창의를 남보다 먼저 한 사람들이다. 공과 이들 3
명의 창의는 누가 먼저 했느냐는 알려지지 않고 앉고 있다. 그러나 요컨대 천지 사이
에서 순강지정하고 지극히 바른 기품을 받은 사람은 그 뜻을 말하지 않아도 부합되고
그 의견은 꾀하지 않아도 같이하여 동일한 소리와 기질로 서로 구하고 응하는 것인데,
거의(擧義)의 선후를 어찌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수운 손엽(孫曄)이 지은 임진
일기에 이르되 “최봉천은 홀로 한 방면의 왜적을 막았다.”고 하였다. 손엽과 공은 동
시대에 한 고을의 동지이고 서로 높이는 사이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백세가 지나도 믿
을만한 평가가 아니겠는가? 정무공은 곧 공의 종조 형제의 아들이고 증 참판 김호(金
虎)는 공과 같은 마을 사람이다. 이들과 동시에 의병을 일으켜 죽음을 같이 하였다면
한찬 전쟁 중에 방문을 닫고 계책을 세우며 함께 논의한 것은 적을 섬멸할 꾀일 것이
고, 말을 세우고 채찍을 멈추며 더불어 얘기를 나눈 것도 또한 적을 공략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이 마주 앉아서 비밀스럽게 나눈 계책을 듣고 아는
사람이 없으니 후세 사람도 또한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물며 정무공은 공의 동당(同
堂)의 지극한 친함이고, 참판공 김 호(金虎)는 공과 같은 마을의 친우이다. 그렇다면
본래 충의는 진실로 각각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고 그 가범(家範)과 향풍을 아름답게
하여 모두 천백 년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던 것은 그들에 주어진 책무는 당연히 돌아갈
바에 있었던 것이다. 이를 미뤄보아 공은 평소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자신을 엄하게 하고 남을 바로 다스리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반드시 보통 사람
보다 크게 뛰어남을 고증할 수 없는 것이 더욱 슬픈 일이다.
공의 아내 숙부인은 경주 김씨이고 사인(士人) 김숙정(金淑貞)의 딸이다. 3남 1녀를
낳으니, 장남 계량(繼良)은 음직으로 군자감 봉사(奉事)를 지냈고, 차남 계훈(繼勳)은
참봉을 역임했고, 삼남 계명(繼明)은 훈련원 봉사이다. 딸은 훈련원 첨정 김충립(金忠
立)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병자년(1636)에 순절했다. 공의 자손은 영체(零替)했으나 실
같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가승이 전하지 않고 세덕(世德)을 고증할 수 없으니 이럴 수
가 있는가?
기유년(1789) 행세손익위사위솔(行世孫翊衛司衛率)
여강(驪江) 이헌락(李憲洛)이 삼가 짓다.
- 31 -
Ⅶ. 운암 최봉천장군의 부조묘 및 성남서사
1. 운암 최봉천장군의 부조묘(不祧廟)
운암 최봉천장군의 부조묘는 운암이 조선 선조(宣祖) 21년(1588)무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의병을 일으켜 경주성과 울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영천 창암전투에서 장렬히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책봉되
었고, 순조 21년(1821)에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래서 문중에서 부조묘
(不祧廟)를 세웠다. 묘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집이다. 지붕에는 도광무신(道
光戊申)이라는 명문(銘文)이 겨진 막새기와가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4호로
지정되었다.
〔운암공부조묘〕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44호
- 32 -
- 33 -
2. 성남서사(聲南書舍)
성남서사는 1986년 병인년에 경주 사림(士林)의 의론으로 창건되었다. 운암 최봉천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향화(香火)를 받들어 오고 있다. 소재지는
경북 경주시 천북면 성지리 629-5번지이다.
대문채 탁충문(卓忠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동향의 성남서사, 오른쪽에 삼 칸의 한탁
헌(澣濯軒)이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고, 사당 상충사(尙忠祠)는 규모가 삼 칸이며, 한탁
헌은 서쪽 높은 곳에 동향으로 건립되어 있다.
성남서사 건물은 4칸 한옥 골기와집이며, 내부에는 우산(愚山) 최채량(崔埰亮)*이 쓴
경의당(景義堂), 덕수재(德修齋), 신경재(愼敬齋)의 편액이 선명하게 게시된 재당(齋堂)
이 있고, 기문(記文)과 경의당상량송(景義堂上樑頌)이 양벽에 게시되어 있다. 기문(記
文)은 문학박사 이가원(李家源)이 찬(撰)하였으며 경의당상량송은 계림 김형진(金亨鎭)
이 찬하였다. (1986年丙寅 慶州士林之議 創建聲南書社 奉安位牌 文學博士眞城李家源撰
記文).
1) 대문채(大門채)
* 崔埰亮: 정무공 최진립장군의 종손. 서예가 등.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거주.
- 34 -
2) 탁충문(卓忠門) 현판(懸板)
3) 성남서사(聲南書舍)
⦗聲南書社 全景⦘
- 35 -
4) 경의당(景義堂)
5) 덕수재(德修齋)
- 36 -
6) 신경재(愼敬齋)
7) 한탁헌(澣濯軒)
- 37 -
8) 상충사(尙忠祠)
〔尙忠祠〕耘庵公의 廟宇⦘
Ⅷ. 운암 최봉천장군의 묘소
운암 최봉천장군의 묘소는 1598년(戊戌) 2월에 부(府) 북쪽 40리 근곡(根谷) 곤향원
(坤向原)에 마련되었다. 오늘날의 소재명칭은 경주시 안강읍 근계리 산 7-1번지이다.
운암장군의 묘소가 선산에 마련되지 않고 이곳에 장사지내게 된 것은 유언에 따랐기
때문이다.
- 38 -
1. 묘소전경
⦗贈嘉善大夫兵曹參判折衝將軍行慶尙左道水軍虞侯月城崔公之墓⦘
2. 묘도의물(墓道儀物)
- 39 -
- 40 -
Ⅸ. 맺는 말 및 제언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조선이 겪었던 임진왜란은 조선 건국 후 200여
년 만에 발생한 민족의 일대 수난이었고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요동시킨 하나의
세계대전이었다.
선조 25년 4월 13일에 왜적의 배가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덮어 오는데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절영도에 나가서 사냥을 하다가 허둥지둥
성으로 돌아오자 왜병이 뒤따라 와서 육지에 올라 사면에 구름같이 모이니 삽시간에
성이 함락되었다.* 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임무를 지켜 목숨을
버리었다. 특히 부사 송상현은 동래읍성이 함락되자 갑옷 위에 홍단령(紅團領)을 입고
사모(紗帽)를 쓰고 북향재배 한 후에 굳건하게 의자에 앉아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나머
지 수신(帥臣) 진장(鎭將)들은 모두 소문만 듣고서 도주 하였으니, 관군은 총 붕괴의
상태에 이르렀다. 전란이 일어나자 민심은 극도로 이반(離反)되어 서울에서는 장례원과
형조(刑曹) 등의 관아(官衙)와 모든 궁궐을 불살라 버리었고, 지방에서는 곳곳에 난민
(亂民)이 일어나 창곡을 약탈하는 사태가 나타났다. 그러나 민중은 침략자인 적군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의 세가(世家), 대족(大族)들과 합세하여, 사족(士族)과 유
생(儒生)을 지도자로 삼아, 이른바 ‘의병(義兵)’이란 이름의 의용군(義勇軍)을 형성하고,
이들이 조국 방위의 선두에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운암은 “사람의 큰 인륜은 군신과 부자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폐
하면 곧 금수와 다를 바 없다. 비록 내 집안이 가난하지만 본연의 성품은 하늘에서 부
여 받았다. 차마 군부(君父)가 당한 욕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것인가?”** 하고, 형, 종
질, 재종질 등과 같이 분연(憤然)히 일어나서 왜군을 격파하는데 신명을 바치기로 결
심하였다. 여러 의병을 지휘하며 잉보 전투, 불국사에 남아 있는 잔적 소탕 및 울산과
영천 의병장의 구원요청을 흔쾌히 승낙하고 전투에 참전하여 크게 입공하였다. 명활산
의 잔적 소탕, 경주성 수복 전투에 참전 등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그 실적
으로 선략장군훈련원첨정, 보공장군훈련원부정, 어모장군장예원정, 절충장군경상좌도수
군우후 등으로 승진하여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97년 운암의 나이 34세 때 영천 창암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애석하게
도 전사를 하게 되었다. 나라에서 원종공신 1등에 녹선하여 철권에 등재되었으며 증병
조참판(贈兵曹參判)의 벼슬이 내려지고 부조지전(不祧之典)의 은전(恩典)을 입게 되었
다.
운암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심취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섭렵(涉獵)하였으나 사
나이로 태어나서 보람되게 사는 것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를 위하여 한 목숨 바치
* 류진(2001).『국역 징비록』. p.30, 33. “是日 倭船自對馬島 蔽海而來 望之不見其際 釜山僉使鄭撥 出獵絶影島 狼狽入城 倭兵
隨至登陸 四面雲集 不移時城陷 左水使朴泓 見賊勢大 不敢出兵 棄城逃..”
** 전게서. p.18. "人之大倫 君臣父子 於此廢一 卽禽犢也 吾雖家貧 兵彛之性 同賦於天 豈忍坐視君父之辱乎”
- 41 -
는 것이라 여기며 거기에 큰 뜻을 두고 서숙(書塾)을 나와 무예(武藝)를 연마하였던 것
이다. 그래서 임란 4년 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전란에는 일신의 안녕을 멀리하
고 5년 동안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워 나라를 지키고 향민(鄕民)의 목숨을 살렸던 것이
다. 이상과 같은 운암 최봉천장군의 충의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운암 최봉천장군은 경주최씨 사성공파 문한세가의 후예이다.
둘째, 운암 최봉천장군은 삶의 대의(大義)를 충과 효에 둔 철저한 실천행동가이다.
셋째, 운암 최봉천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다.
넷째, 운암 최봉천장군은 용감하고 지략이 탁월한 전술가이다.
다섯째, 운암 최봉천장군은 의로운 삶을 살아간 위민보국(爲民報國)한 충신이다.
세월이 흘러 운암 최봉천장군이 떠난 지 어언 417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잊지 못함
은 위민보국(爲民報國)한 충의(忠義)의 삶 때문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 물질적 풍요가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는 있으나, 오직 개인의 이기적 삶에 비
중을 둔 여러 가지 양태(樣態)들은 민주(民主)라는 숭고한 정의(正意)를 심히 위태롭게
하는 사태로 비춰지고 있어서 조국은 마치 장기질환으로 신음(呻吟)하는 듯하다.
북한 핵실험과 천암함 피격(被擊), 세월호의 침몰(沈沒), 끊임없는 공직자의 비리 등
이 경(敬)·성(誠)·직(直)을 바탕으로 하는 충의(忠義)의 실천궁행(實踐躬行)을 요구하고
있다.
외침을 물리치며 나라의 안일을 위해 전장에서 피 흘리며 떠난 선열(先烈)의 애국심
은 희미해져 가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혼미(昏迷)하기 그지없는 세태에
서 볼 때 국간관의 확고한 재정립(再定立)은 긴요한 사안(事案)이 아닐까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전란(戰亂)에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충신들의 실기(實記)를 한 줄만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바르게 뜻있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각(自覺)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더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목숨 바친 운암(耘庵) 최봉천(崔奉天) 충신(忠臣)의 짧은
생애는 그 정답(正答)을 보여주는 좋은 표본(標本)이라 할 것이다.
동산(東山)에서 비친 만유(萬有)의 서광(瑞光)이 경주최씨 강정문중(江亭門中)에 더욱
찬란하게 비치어 자손만대의 영광(榮光)으로 계승(繼承)되기를 간절히 기원(祈願)해 마
지 않는다.
제언한다면, 경주 출신으로써 내외 국란을 당하여 나라를 지키고 백성의 목숨을 구
한 충신열사는 무수히 많다.
신라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의 충신열사, 조선시대의 좌명공신, 적개공신, 선
무공신, 익사공신, 장사공신을 비롯한 병자호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독립운동, 6.25전
란 등에 참전하여 목숨 받쳐 공을 세운 선현들의 고귀한 희생(犧牲)과 선행(善行)이 재
조명(再照明)되어야 한다.
그래서 현세인들은 선현들의 충의정신의 바른 이해와 계승을 통해 나라발전을 위한
- 42 -
국민으로서의 도리와 올바른 생활과 참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신념을 굳건히 지니고
그 실천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선현의 충의생애를 재조명하고 추원 숭모하기 위하여 사당과 효자, 열녀 등의 정려
각(旌閭閣)을 한 곳에 모아 ‘현풍 곽씨문중의 12정려각’처럼 가칭 ‘경주충효열원(慶州
忠孝烈苑)’을 건립하여 충과 효와 열을 현창(顯彰)할 수 있도록 한다면, 경주가 충효열
의 정신을 함양하고 고취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학습의 장이 되어 애국애향의 국제적
도시로 한층 시격(市格)이 높아질 것으로 믿기에 ‘경주충효열원’의 건립을 제안해 본다.
* 자료제공 및 교정 : 운암 최봉천장군의 14대손 최병수
- 43 -
참고문헌
慶州崔氏大同譜重刊委員會(1997).『慶州崔氏大同司譜』. 대전 : 回想社
慶州崔氏司成公派譜中(1998).『慶州崔氏司成公派譜』. 서울 : 한국신문사
權應銖, 『白雲齋實紀』 권2,
류 진(2001). 국역『징비록』. 서울 : 사단법인 서애선생기념사업회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2012). 『임진의병사의 재조명』. 안동 : 주)광교이택스
趙慶男. 『亂中雜錄』 2
『宣祖實錄』.『 권30,
崔孝植.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崔海竘(2005).『國譯耘庵實紀』. 대전 : 대경출판사
柳永烈 외(1997). 韓國史大系. 권5. 서울 : 圖書出版 三珍社